〈 100화 〉(99화) 13. 계약
(제 99 화)
“흐흐흐~ 좋아, 아주 좋아~”
어딘가에서 들리는 남자 목소리에 유명은 언뜻 정신이 들었다. 그런데 의식은 조금씩 맑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 눈앞이 캄캄하고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크크크 드디어 깨어나셨군. 약효가 떨어질 때까지 절대 움직일 수 없으니까,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어.”
조금 가늘고 격앙되긴 했으나 틀림없는 남자 목소리다. 익숙할 리가 없는데 목소리나 내용까지 어디서 들어본 것만 같다.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주인님.”
이번엔 낯선 여자목소리다. 연습생들에게 들을 때마다 성욕이 치솟던 ‘주인님’이란 호칭이 이처럼 소름 끼치는 것일 줄 몰랐다. 그 소름이 수업이 끝나 학교주차장으로 가다 납치된 기억을 떠올리게 해줬다.
“좋아좋아~ 그럼 안타깝지만 이대로 작별을 고해야겠군, 흐흐흐~”
“좀 있으면 몸이 움직일 텐데 어떻게 할까요?”
“내가 나가면 약 한 대 더 놔.”
“예, 주인님.”
‘약’이라는 말에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가 떠오른 유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자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바로 기억났다.
“아… 할 말은 가고 가야지.”
“그럼 전….”
여자의 가벼운 발자국소리가 멀어지는 게 선명하게 들렸다. 눈이 안 보이니 다른 감각이 민감해지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약이기에 몸만 굳어있는 것일까. 그때남자의 기분 나쁜 숨소리가 가까이서 느껴졌다.
“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너무 심하게 넘은 거야, 그 깜둥이만 먹고 만족했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어. 내가 수지 그 년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르지? 잘하는 게 섹스밖에 없는 16살짜리가 알 리가 있나, 크크크~”
타이, 처음 만났을 때 그 막연하던 반감이 이렇게 현실이 될 줄이야. 유명은 말을 못하는 게 미치도록 답답한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오~ 벌써 움직여지나? 좆만 큰 줄 알았더니 회복력이 대단한데? 크크크큭 그래봤자 네 놈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아, 푸하하하하하~”
타이의 지적대로 몸에 힘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자 팔이 들린 채 매달려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눈꺼풀과 입술은 여전히반응이 없었다.
“저항 못하는 놈을 상대로 지껄이는 게 생각보다 재미없군. 마지막으로 하나만 말해주고 가지. 네 놈의 여자들은 내가잘 거두어 줄 테니까, 넌 쓰레기들이랑 새 인생 잘 살아.”
타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툭툭 치더니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그때 번쩍 눈을 뜬 유명이 더러운 창고 같은 철문을 열린 쪽으로 소리를 질렀다.
“타…타이 너 이 새끼…… 내 여자들 건드리면 죽어…어…!”
깜짝 놀라 움찔한 타이가 도망치듯 문밖으로 폴짝 뛰더니 징그러운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아이쿠 무서워라~ 무슨 수로 날 죽이게? 푸훗… 와하하하하하~~”
철컹
철문이 닫히자 타이의 웃음소리가 빠르게 사라졌다. 동그란 창문으로 빛이 들어와 실내가 어둡진 않았으나 습한 공기 때문에 무척 더러운 느낌이 들었다.
“어…?”
유명이 놀란 이유는 모든 감각이 빠르게 돌아오면서 습한공기 속에 섞여있던 비린내를 맡았기 때문이다. 지금 묶여있는 곳이 창고가 아니라 선실이란 의미였다.
서둘러 주위를 둘러봤으나 변변한 가구 하나 보이지 않았다. 4미터 정도 너비의 정방형 선실 한 가운데 매달려 있어 움직인다고 뭔가 될 거 같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묶인 팔을 보니 손목에 딱 맞춰진 두꺼운 강철수갑이 채워져있었고, 발목도 똑같은 강철족쇄로 두 발이 묶여있었다.
순간 절망감이 엄습했다.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에 비해 회복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 같긴 한데 그 것 뿐이다. 입고 있는 교복이 멀쩡한 것처럼 몸에 상처하나 없고 넘치는 정력과 비례하던 힘까지 거의 되돌아오고 있지만 역시 그 뿐이었다.
강철로 된 수갑과 족쇄를 풀고 벗어날 어떠한 지식과 경험이 없어 영화처럼 극적인 탈출은 그저 상상의 영역에 불과했다. 한숨을 내쉬려는데 손에 주사기 총을 들고 한 여자가 철문이 열고 들어왔다.
“저…저기요,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묶인 이유나 풀어달라는 말을 해봤자 먹히지 않을 거 같았다. 그 의도가 통했는지 조그만 여자는 퉁명스런 표정으로 대꾸했다.
“뭔데요?”
“어디로 가는 거죠?죽일 거였으면 그 약을 놓진 않았을 거잖아요?”
“……….”
평범하게 생긴 여자는 잠깐 망설이는 것 같더니 유명의 어깨에 주사기 총을 갖다 대고 무심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곤 등을 돌려 나가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타이완 섬….”
*****
“Zhège nánrén zhēn de hěn shuài”
“Zhēn de hěn bàng”
여자들의 낯선 목소리에 유명은 언뜻 정신이 들었다. 어느 나라 말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으나 한국어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Hēi Hēi Cáozá shàng chē Kuàisù”
다른 여자가 큰소리로 말하자 원래 여자들이 툴툴거리더니 가까이 다가와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매끈한 맨살의 감촉은 느껴졌으나 눈이 떠지지 않았고 냄새도 전혀 맡아지지 않았다.
정신이 빠르게 돌아오면서 여자들의 말이 중국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영어뿐이라 중국어라는 생각도 그냥 짐작일 뿐이고억양은 오히려 동남아 쪽 같았다.
여자들이 트럭 화물칸으로 추측되는 곳에 앉히고 손발에 채워진 강철수갑과 족쇄를 다른 곳에 묶는 느낌이 들자 유명은 다시 어딘가로 끌려간다는 걸 알아차렸다. 냄새는 아직 안 맡아지지만 파도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지금 있는 곳이 부둣가인 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서 시끄러운 중국어가 들리더니 다들 발걸음이 빨라졌고 요란한 소음이 계속되다 차가 출발하는지 바닥이 흔들렸다. 시동 거는 소리 없이 바로 출발했으니 전기화물차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예전 세상으로 되돌아왔거나 다른 세계가 아니라는 것일까, 유명은 제발 그 것만은 아니길 속으로 빌었다.
출발하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감각이 대부분 돌아왔다. 눈과 입은 아직 굳어있는 상태였으나 냄새는 맡아졌다. 가까이에 여자들이 있는지 조금 진한 살 냄새가 풍겼다. 역하진 않은데 자기여자들과 같은 성욕을 자극하는 향긋함과는 차이가 컸다.
여자들 살 냄새에 이어 흔들리는 차 주변의 맑은 공기가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람이 조금 습하기는 했으나 비교적 상쾌했다.
“Wǒmen kěyǐ bù mài zhège rén bìng yǒngyǒu wǒmen ma?”
“Wǒ yě zhèyàng xīwàng”
다시 여자들의 대화가 들렸다. 처음보다 누그러진 말투가 적대적인 느낌이 없었다. 덕분에 납치되어 끌려가는 상황이지만 여자들의생김새가 어떨지 궁금해졌다.
“Wǒ de yuànwàng shì ài yīgè xiàng zhèyàng de rén”
목소리에서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러더니 한 여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고,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뜨거운 콧김이 훅 느껴졌다.
“Nǐ bèi duìzhǎng zémà”
뒤쪽 여자가 뭐라고 하자 얼굴을 코앞까지 가져다 댄 여자가 잠깐 망설이더니 곧이어 살며시 입술을 맞췄다. 키스가 아니라 입맞춤이라 곧바로 떨어졌는데 수줍은 행동 때문에 진한 살 냄새가 나쁘지 않게 다가왔다.
입맞춤의 영향인지 입의 감촉과 눈꺼풀이 움직였다. 이어 몸에 힘이 쫙 들어가면서 억눌러져있던 것 같았던 감각이 모두 돌아왔다. 유명은 입맞춤한 상대를 위해 일부러 조금씩 정신이 드는 것처럼 연기했다.
“으…으으…….”
“A Kàn qǐlái wǒ de xiǎngfǎ yòu huíláile”
뒤에 있는 여자가 하는 말에 가까이 다가왔던 여자가 화들짝 되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자 유명은 슬며시 눈을 떴다.
“하아… 여…여기가 어디죠…?”
“따…따이완 섬이야….”
두 여자 아니 소녀 중 한 명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색과 아무렇게 자른 짧은 단발머리가 지저분한 것 말고는 둘 다 예전 세상에서 보던 10대 소녀들처럼 앳되고 귀여웠다.
서툴긴 하지만 소녀들이 한국어를 할줄 아는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으나 주변이 원시림이라는 사실에 유명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런 환경이라면 탈출은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셋이 타고 있는 차는 역시 화물차였다.
“몸은… 괜찮아요?”
조금 더 예쁘게 생긴 소녀가 상냥하게 물었다. 얼굴이 보여서 그런지 목소리가 더 다정하게 느껴졌다. 유명은 미소와 함께 최대한 부드럽게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물을 좀 마실 수 있을까요?”
“아… 여…여기요….”
소녀는 얼른 자신의 수통을 꺼내 뚜껑을 열더니 유명이 잘 마실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입에 대주었다. 갈증이 해소되자 정신이 더 맑아졌다. 그제야 두 소녀가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고맙습니다.”
“예에…….”
헐렁한 탱크톱 셔츠 속의 작은 맨 젖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뒤에 앉은 소녀는 핫팬츠고 물을 준 소녀는 무릎 위까지 오는 레깅스차림이었다. 무장을 하지 않았다면 예전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시아소녀들이다.
그런데 학교나 서울 시내를 오가면서 만나던 일반인 여자들에 비해 키가 더 작아보였다. 2차 성징이 이뤄지는 12살은 지난 것 같은데 이렇게 작다는 건 인종적 특징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타이완 섬에 대해 따로 검색한 적이 없어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어디가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유명의 목소리와 말투가 워낙 조심스럽고 다정해서 그런지 소녀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물을 줬던 소녀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이후로 더 이상 대화가 없었다. 유명을 향한 소녀들의 시선과 표정이 우호적으로 발전하는 만큼 화물차는숲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중형 화물차가 빠른 속도로 오갈 수 있는 도로가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울창한 원시림이 이어졌다.
“……?!”
나무들이 좀 작아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폐허가 된 도시가 나타난 것이다. 반 이상 무너져 내린 건물 사이로 나무들이 기이한 모양으로 자라나 있었다.
널찍한 아스팔트도로를 따라 한참을 가던 화물차는 검문소로 보이는 곳에 다다라서야 멈춰 섰다. 검문하러 온 소녀들 역시 유명과 함께 타고 있는 소녀들과 별 차이 없이 자그마한 덩치로 무거워 보이는 소총을 들고 있었다.
“Shì zhège rén ma?”
“Hǎo”
물을 준 소녀가 짤막하게 대답하자 검문하던 소녀 둘은 유명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야릇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Jīngguò !!”
소녀들의 외침과 함께 화물차는 다시 출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공원으로 짐작되는 넓은 대지 곳곳에 조잡하게 지어진 천막들이 빼곡하게 들어차있었다.
“Nánzǐ !”
“Yīgè nánrén láile !”
“Waaaa~~!!”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작은 광장에 화물차가 멈춰 서기 무섭게 천막에서 소녀들이 쏟아져 나와 소리를 질렀다. 유명의 손발이 묶여있지 않았다면 중학교를 방문한 연예인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내려요.”
물을 준 소녀가 차에 묶인 쇠사슬을 풀고 유명을 일으켜 세웠다. 함께 내리는 줄 알고 고맙다는 인사를 안 했는데 소녀는 안타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더니 다시 화물칸으로 올라가버렸다. 화물차는 두 소녀와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 가버렸다.
머리 두 개 가까이 작은 소녀들이 달라붙어서 몸 여기저기를 만져대는 바람에 유명은 꼼짝할 수 없었다. 강철수갑이 채워진 손목이 사타구니를 가리고 있었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낭패를 당할 뻔했다.
“Líkāi nàlǐ !!”
별 차이 안 나게 생긴 또 다른 소녀가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지르자몰려들었던 소녀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 소녀를 소총으로 중무장한 다른 소녀 둘이 호위하고 있었다.
“이름 뭐야?”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만 한국어 억양은 비교적 자연스럽고 목소리는 얼굴만큼 예뻤다. 키는 다른 소녀들처럼 작았으나 몸매는 훨씬 풍만해 성적매력이 괜찮은 편이었다.
“유명이라고 합니다.”
“유명? 이름이 뭐 그래?”
“……….”
딴에는 농담이라고 한 것 같은데 상대가 안 받아줘 기분이 상했는지 소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더니 휙 뒤돌아 가버렸다. 그러자 뒤따르던 호위소녀 중 한 명이 유명의 다리를 묶고 있던 족쇄를 풀었다.
“대장님 따라 가!”
납치당한 후 꽤 오랜 시간 동안 묶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걷는데 불편하지 않은 게 신기했다. 그리고 멀리 타이완 섬에 사는 소녀들이 어떻게 한국어를 다 할 줄 아는지 그것 또한 신기했다.
대장이라고 부르는 소녀의 천막은 다른 것에 비해 훨씬 크고 번듯했다. 내부 치장이나 장식들이 웬만한 고급주택을 방불케 하는 수준이었고 한쪽에 최고급 대형침대까지 있었다.
대장소녀가 침대에 기대어 눕자 한 소녀가 소총을 겨누고 다른 소녀가 손목에 채워진 강철수갑을 풀었다. 유명이 손목을 매만지고 가만히 있자 뒤에 있던 소녀가 총구로 등을 슬쩍 밀었다.
“옷 벗어.”
“네?”
“옷 벗으라구.”
“………….”
침대에 누워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대장소녀의 눈빛에 성욕이 가득한 걸 바로 알아봤다. 서울에서1,800km 넘게 떨어진 타이완 섬까지 끌려온 이유가 종마 역할이라니, 유명은 자신의 어처구니없는 처지보다 자기여자들이 무사한지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다음 100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