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98화) 13. 계약
(제 98 화)
“오~ 회장님, 주말 잘 보내셨나요? 아니다, 이젠 이런 질문이 오히려 실례인가요? 하하하~”
타이의 친근한 인사가 예전 같으면 넉살좋은 행동이라 여기고 웃어넘겼을텐데 요즘 들어 어딘가 불편하다. 그러나 인사를 받는 수지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주말 잘 보냈어요?”
“저야 제 여자들 덕분에 언제나 즐겁죠. 오늘 직접 보고드릴 게 있는데 언제 찾아뵐까요?”
늘 이런 식으로 자신과 독대를 노린다. 유명의 말대로 주말 동안 온 몸을 녹였던 그 환상적인 섹스를 떠올린 수지는 특유의 상큼한 미소로 대답했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개인 볼일 좀 보고 받도록 하죠, 괜찮겠죠?”
“물론이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유명이 크리스털 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하게 된 이후부터 달라진 것 같은데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 확신할 수 없다. 수지는 주말에 있었던 행복한 시간을 다시 떠올리고 자기 사무실로 향했다.
“회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유명과 다른 식구들을 알기 전까지 딸 다음으로 가까운 사이였던 개인비서의 표정이 평소와 다른 걸 수지는 바로 알아봤다.
“응, 말해. 심각한 일인가 봐?”
“예….”
“무슨 일인데?”
“타이이사와 관련된 일이에요.”
연쇄적으로 뭔가 일어나는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사업을 격구경기와 비교할 수 없으나 이런 본능적인 감은 불리한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주던 숨겨진 능력이었다. 수지가 개인비서에게 손을 들고 허공에다 말했다.
“사무실 보안 강화해.”
[예, 사무실의 보안이 최고등급으로 상향되었습니다.]
인공지능의 목소리가 개인비서와 똑같아 두 여자가 가볍게 웃었다. 복도 쪽 유리가 완전히 불투명하게 바뀌고 창문이 블라인드로 가려지더니 조명의 색감까지 살짝 바뀌었다. 수지는 개인비서를 데리고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타이이사가 오늘 직접 보고할 게 있다던데 그거랑관련된 거야?”
“예, 아마… 협회에 압력을 넣은 걸 가지고 없는 문제를 거론할 거예요.”
“없는 문제? 가짜 데이터란 말이야?”
“거기까지는 모르겠어요.”
“넌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데?”
“그게…….”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사이인데 대답을 망설이는 걸 보면 사생활이 얽혀있는 게 분명했다.다른 문제였으면 다그치지 않았겠으나 타이이사와 관련된 사안은 가벼이 대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팬티까지 바꿔 입는 사인데 숨길 게 뭐 있어? 남자가 얽힌 거야?”
“남자가 아니라… 여자문제라서 그래요….”
“요즘 여자랑 사겨?”
“전 회장님뿐이었잖아요, 그 버릇이 어디 가겠어요…?”
“그게 무슨 버릇이니?”
“히잉…….”
흑인혼혈인데다 2차 성징을 하지 않아 마치 어릴 적 딸을 보는 것 같다. 수지가 작고 예쁜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달랬다.
“후후 오랜만에 응석부리네? 그래… 사귀는 여자가 타이이사 쪽 사람이야?”
“제가 그렇게 눈치 없는 년으로 보이세요?”
“아냐? 그런데 어떻게 그런 정보를 얻었어?”
“걔가 마케팅부에있긴 한데 인턴이라 바쁠 일이 없거든요? 근데 요즘 들어 밥 한 끼 같이 먹을 시간이 없더라구요.”
이후 개인비서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어딘가 조각이 빠진 것 같았으나 꽤 우려가 될 만한 내용이었다. 이 조각을 맞춰보느라 조금 늦게 불렀는데 타이이사는 아침에 만났던 표정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와 넉살 좋게 말했다.
“많이 기다렸습니다, 회장님.”
“미안해, 비서랑 수다 떠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어. 보고 할 게 많아?”
사무실에 들어오면서 미리 부탁했는지 비서가 커피를 가지고 들어왔다. 별 다를 바 없는 상황인데 먼저 나눴던 대화 때문에 두 여자는 조금 긴장됐다. 그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는지 타이이사는 평소처럼 비서의 엉덩이를 툭툭 쳐주더니 커피에 관심을 돌렸다.
“매일 마시던 거라 그런지 여기 커피가 제 입맛에 딱 맞아요.”
섹스파트너였던 시절을 들먹이는 걸 보면 어떤 사안이든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있을 게 분명했다. 상대의 의도가 엿보이면 여유가 생긴다. 수지는 그 멋지고 긴 다리를 보란 듯이 꼬았다.
“필요하면 좀챙겨줄게, 근데 커피 별로 안 좋아하잖아?”
“어? 기억하고 계시네요?”
“기억력이 나빴으면 격구 밖에 모르던 년이 사업할 생각 어떻게 했겠어?”
이런 식의 대화로 수지를 이겨본 적이 없어 타이는 본론을 꺼낼 순간이라고 여겼다. 커피 잔을 내려놓고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유리선수 문제로 협회에 부탁한 게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문제? 협회 쪽은 타이이사 담당이 아닌데 어떻게 알았어?”
전문 영역이 따로 있으니 당연한 지적이지만 임원이 회장에게 직접 보고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에 담당을 따질 이유가 없다. 타이는 잠깐 머뭇거렸으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협회 쪽에 흘러나온 정보를 우연히 알게 된 거라, 사실이 아닐 수 있어서 제가 직접 말씀 드리는 겁니다. 좀더 알아볼까요?”
“아니, 무슨 내용인지 먼저 들어보지.”
“네, 유리선수가 우리 연고지출신이긴 합니다만 역지명권이 있는 현실에서 타구단과의접촉까지 막는건 지나친 월권이라는 항의가 빗발친다는 군요. 특히 레드 윙에선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할 거라고 합니다.”
“뭐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네?”
준비했던 반응이 아니라 타이는 순간 당황했다. 놀라거나 화내거나 정보의 사실여부를 따지거나 자신의 의도를 묻는 게 정상인데, 이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수지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구단들입장에선당연히 기분 나쁘겠지, 반대로 레드 윙이 그랬다면 우리도 항의했을 거 아냐?”
“그…그거야… 그렇겠죠?”
“그니까, 그게 왜 문제냐는 거야.”
역시 만만한 년이 아니라고 속으로 생각한 타이는 이대로 물러 설 수 없어 나중에 꺼내려고 했던 카드를 미리 내놓았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했던 문제는… 그… 유리선수의 오빠인 유명씨가….”
“유명이가 왜?”
연인의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표정과 말투가 달라지는 걸 보고 역시 여자들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타이는 최대한 우호적인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유명씨가… 레드 윙에서 제공한 접대를 받았다는 정보가….”
“접대? 무슨 접대…?”
“그… 레드 윙 커뮤니케이션즈 오로라대표와 호텔에서….”
“아 답답해, 그래서 둘이 호텔가서 섹스했다는 이야기야?”
“아… 네…네…….”
수지가 다그쳐서 묻는 걸 타이는 화가 나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착각이었다.
“둘이 가서 섹스만 한 것일 수 있잖아?”
“네?”
“유명이가 회의실에서 한 이야기 못 들었어?”
“어떤……?”
“타이이사, 혹시 오로라 직접 본 적 있어?”
“아뇨,아직….”
“걔 현역 때 실력은 나보다 못했는데 얼굴이랑 몸매는 막상막하였던 애야, 그런 여자를 보고 유명이가 가만있었겠어?”
이야기가 의도하지 않은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래선 본전은커녕 이쪽의 의도마저 들킬 우려가 있어 타이는 서둘러 수습을 시도했다.
“하긴 유명씨 정도 되는 남자라면 어느 여자든 반할 만 하죠…, 근데 상대가 오로라대표라는 게 문제 아닐까요? 더구나 상대가 어떤 의도로 접근했는지 알고 있었다면….”
“알고 섹스했는지, 섹스하고 알았는지 어떻게 알아?”
“네?”
“건강한 남녀가 성욕에 이끌리면 앞뒤 가리지 않고 섹스할 수 있는 거잖아? 우리도 그런 사이였던 거 잊었어?”
“……….”
타이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떻게든 둘의 관계를 흔들어 그 틈을 이용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식이면 어떤 카드를 꺼내봤자 무용지물이다. 이미 그로기상태인 타이에게 수지가 마지막 펀치를 날린다.
“참, 오로라가 나한테 일자리 부탁한다고 며칠 전에 연락 왔었어. 타이이사 말대로 접대를 제대로 했으면 잘리진 않았겠지?”
*****
“뭐?! 미행??”
저녁식사 후 목욕을 준비하던 유명은 린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거실엔 다른 식구들과 마야까지 모두 모여 홀로그램으로 대화하는 중이다. 다들 놀란 표정을 풀지 못하자 세아가 나서서 물었다.
“우리들까지 전부 다 미행했다는 거지?”
“응, 틀림없는 사실이야. 대신 내가 개인적으로 알아본 거라 증거능력은 없어.”
린의 대답에 다들 고민에 빠졌다. 그때 수지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린, 우리 회사직원들 중에 연루된 사람 없어?”
“응, 그쪽 회사나 직원들 이름은 안 나왔어.”
“인턴들까지 검색이 돼?”
“인턴? 음… 인턴도 계약직이니까 당연히 검색되겠지.”
다들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수지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턴 중에 우리 회사직원으로 검색 안 되는 애들 있을 거야. 특히 구단 쪽은 일 배우겠다고 무작정 찾아오는 애들이 꽤 많거든.”
“그래? 그럼 그쪽으로 알아볼게.”
이 대화를 끝으로 린의 홀로그램이 먼저 꺼졌다. 마야가 식구들을 보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명색이 경찰인데 곁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해, 휴가신청 해봤는데 훈련을 처음부터 다시 받아야한다고 안 된대….”
“우리 걱정하지 말고 훈련이나 잘 받아, 주말에 볼 거잖아?”
유명이 선뜻 대답하자 마야는 고개만 끄덕였다. 식구들이 손 키스를 해주자 마지못해 웃더니 홀로그램이 꺼졌다. 거실에 잠깐 침묵이 흐른 뒤 아이샤가 엄마를 보고 물었다.
“인턴 이야기는 뭐야? 엄마회사와 관련 있는 문제야?”
“아직 잘 모르겠어, 단편적인 정보만 있어서 린이 조사한 결과가 나와 봐야 확신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때 리아와 유리의 젖가슴을 양손으로 주무르고 있던 유명이 불쑥 내뱉었다.
“이거 타이 그 자식이 꾸민 일 아냐?”
“타이? 타이가 누군데?”
오빠가 젖꼭지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손을 탁 잡고 유리가 묻자 모두의 시선이 수지에게 쏠렸다.
“타이는 우리 구단 마케팅이사야.”
“타이 그 자식… 볼 때마다 재수 없었어!”
갑자기 아이샤가 화난 목소리로 말하자 모두 살짝 놀랐다. 유명이 여동생 대신 리아의 젖꼭지를 조몰락거리면서 물었다.
“아이샤도 타이를 알아?
“으…응….”
딸이 제대로 대답 못하는 게 마음이 아파 수지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내가 유명이 만나기 전에사귀던 남자야. 아니 그냥 파트너였어, 가끔 집으로 불렀는데 아이샤는 늘 싫어했거든….”
“그게 뭐 어때서 그래? 우리야 오빠 밖에 모르는 여자들이었으니까 다른 남자 안 만난 거지만 엄마들이나 아이샤언니 정도 되는 여자들을 남자들이 가만 놔둘 리가 없잖아?”
혹시오빠가 오해할까봐 유리가 얼른 끼어 들어 대신 변명했다. 그 착한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 모두 가볍게 웃었다. 유명이 귀여운 여동생 키스를 퍼부어준 뒤 씽긋 웃었다.
“누가 그걸 몰라? 그리고 난 둘이 어떤 사이였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근데 그 타이란 남자가 우릴 왜 미행하는데? 설마 수지언니를 못 잊어서 그러는 거야?”
메이드복장으로 루비와 마치 자매처럼 앉아있던 혜리가 묻는 말에 수지가 버럭 했다.
“설마라니? 혜리 너 그 말 무슨 뜻이야? 내가 남자들 마음도 못 뺏을 여자라는 거니?”
“아니라고 그럼 될 걸, 괜히 미안하니까 나한테 뭐라 그래….”
“이 계집애가…! 꺄아~”
혜리에게 달려들려는 수지를 유명이 달랑 당겨 품에 안아주자 딸의 머리를 빗겨주던 세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소유욕이 엄청난 남자들 가끔 있어. 잘못 걸리면 못 빠져나온다던데….”
“어? 나도 소유욕 강한데? 나 내 여자들 절대 안 놔줄 건데, 다들 어쩌지?”
유명이 팔다리를 총동원해 끌어당기자 여자들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의심과 의문, 어느것 하나 해소된 게 없지만 이렇게 다 함께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다음 99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