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96화) 13. 계약
(제 96 화)
“레드 윙에서 접근했었다면서?”
오로라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늦게 출근한 유명에게 수지가 따지듯이 물었다. 이미 상황을 다 알고 있으면서 묻는 게 뻔해 솔직하게 대답했다.
“응, 너무 가깝게 접근하기에 얼른 잡아서 아주 맛있게 먹어치웠지~”
“풋! 그 여자가 그렇게 맛있었어? 나보다 더?”
기대 이상의 유쾌한 대답에 웃음이 터진 수지는 주변에 직원들이 보고 있는 것에 아랑곳없이 착 달라붙더니 교태를 부렸다. 지금 있는 초고층 건물과 각 회사의 소유주이자 자기들 상사가 이런다고 뭐라 그럴 사람 없는지라 유명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잠깐 별미로 맛본 거지, 그래봤자 내 여자만 하겠어? 어디로 갈까? 자기 사무실?”
“응? 아… 아니 회의… 해야지? 다들 기다려.”
거침없는 대응에 수지가 오히려 당황했다. 씨익 웃어넘긴 유명은 다시 진하게 키스해준 뒤 덥석 손을 잡고 회의실로 향했다.
“이번 주 경연이 끝나면 본격적인 프로모션에 들어가게 됩니다. 연습생 수는 12명이 될 예정이므로 데뷔 멤버는 6명에서 8명 정도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다른 여자랑 섹스하고 왔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수지는 프레젠테이션에 집중하고 있는 유명에게 착 달라붙어 연신 응석을 부렸다. 중간보고 의미의 회의라 회장이 참석한 것까지는 좋은데 이렇게 분위기를 흐리면 직원들이 곤란해진다.
“잠깐만요, 이 여자 좀 어떻게 하고 올게요.”
“꺄아아~~”
보다 못한 유명이 번쩍 안아들고 일어서자 수지가 앙증맞은 비명을 질렀다. 하늘같은 회장을 귀여운 여자로 가볍게 만들어버리는 걸 보고 직원들은 혀를 내둘렀다.
“어? 벌써 들어와?”
어디 가서 섹스라도 하고 올 줄 알았는데 금방 회의장으로 들어오는 유명을 보고 루시가 놀라서 물었다.
“의자에다 테이프로 묶어놓고 왔어요. 회의 계속하죠.”
“큭…….”
직원들이 일제히 손으로 입을 막고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일이 기억난 루시는 차마 대놓고 웃지 못해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유명아~ 이제 안 그럴게 이거 풀어죠~”
“풉! 푸하하하하하~~!!”
커다란 젖가슴이 더 두드러지게 위아래로 테이프가 칭칭 감긴 수지가 의자를 질질 끌고 회의실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루시가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안 돼, 그냥 이대로 옆에 얌전히 있어!”
유명이 단호한 목소리로 의자를 옆으로 당기자 직원들이 웃음을 참느라 탁자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였다. 수지의 눈총에 기적적으로 웃음을 멈춘 루시가 얼른자세를 고쳐 잡고 앉았다.
“큭… 그럼 내부적으로 훅… 멤버로 적당한 후보들을 푸흡… 정하도록 하죠, 후우우… 큭….”
“루시이사, 차라리 그냥 웃고 말지?”
“푸하하하하하하!! 죄…죄송해요 회장니임… 아하하하하… 꺄하하하하하~~”
다른 직원들은 대충 웃음을 멈췄는데 루시는 의자에서 떨어져 바닥에 주저앉아버릴 정도로 큰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안 풀어줄 거야?”
다시 회의가 시작되어 연습생 후보들에 대한 평가가 이어지는 가운데 수지가 살짝 고개를 갖다 대고 속삭이자 유명이 엉큼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그러고 있는 게 더 야하니까 계속 있어.”
장난으로 시작되긴 했으나 명색이 회장인데 계속 묶여있으려니 여간 창피한 게 아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휘둘려 본 적이 없어 나름 자극이 되는 게 또 신기해 수지는 뾰로통한 표정만 짓고 가만히 있었다.
“이 후보들이 회사에서 다각도로 분석한 상위 10명입니다.”
현재 하트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순위와 조금 다르지만 1위는 보미, 2위는 리아, 3위는 사라, 4위 나비 순이었다. 나머지 6명도 유명이 눈여겨보고 있는 소녀들이었다.
“어떻게 제가 좋아하는 애들만 고르셨어요?”
“하하하하하~~”
유명의 농담에 다들 가볍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엎드려 있던 수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회의 끝났어?”
“아직 멀었어!”
“빨리 끝내고 올라가자, 구단회의에 너 데려간다고 했단 말야~”
수지가 더 커 보이는 젖가슴을 음란하게 흔들고 칭얼대자 루시가 얼른 끼어들더니 또 윽박지르려는 유명을 말렸다.
“매출 상황이나 다음 일정은 따로 보내줄 테니까 얼른 모시고 가.”
“아… 그럴까요?”
유명은 다른 직원들에게 사과의 의미로 고개를 숙인 뒤 수지를 달랑 안아들더니 성큼성큼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그러자 루시를 포함한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큰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참느라 혼났네….”
“푸흐흐흐, 우리 회장님 되게 귀엽다~”
“그러게 후후후~”
“유명이를 진짜 좋아하시나 보다.”
직원들이 한마디씩 하자 루시가 최고책임자다운 표정으로 돌아가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보다 사랑하신다니까, 우리도 이 사업을 무조건 성공시켜야 해. 자 다음 누구지?”
*****
“처음 뵙겠습니다, 유명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명 프로구단의 임원들이라 그런지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크리스털 엔터테인먼트보다 남성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하지만 수지의 소개로 고개를 숙이는 유명의 존재감을 넘어서는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회의 시작하죠.”
수지의 표정과 목소리는 조금 전 사무실에서 다리를 활짝 벌리고 교성을 지를 때와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눈빛은 물론이고 앉아있는 자세까지 최고경영자다운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이런 여자가 곁에서 손을 꼭 잡아주는 덕분에 더 크고 화려한 회의실과 더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남자들이 주는 부담감이 가볍게 날아갔다. 2차 성징을 하지 않아 더 귀여워 보이는 한 남자임원이 씨익 웃으면서 나섰다.
“회장님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던 유명씨를 드디어 만나게 됐군요. 전 와일드 캐츠의 마케팅이사인 타이라고 합니다.”
<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임원은 기초군사훈련소에서 만났던 시원처럼 명석해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목소리에서 어딘가 모를 거부감이 느껴졌다. 유명이 인사를 하려는데 수지가 손을 꼭 쥐더니 먼저 말했다.
“인사는 했으니 넘어갑시다. 이쪽도 바쁘니까 유리선수에 대한 논의부터 먼저 하죠.”
미소와 함께 선선히 물러서는 타이의 반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아주 찰나의 순간 수지를 노려보는 눈길을 유명은 놓치지 않았다.
“레드 윙이 자회사 대표까지 동원해 유명씨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을 회장님께서 말씀해주신 덕분에 일단 다른 구단에 경고를 해둔 상태입니다.”
“하지만 경고는 시간만 조금 늦출 뿐 레드 윙처럼 개별적인 접촉을 시도할 겁니다.”
“접촉하는 것까지야 우리가 막을 수 있나요. 엄밀하게 따지면 이번 경고도 월권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게 왜 월권인가요? 유리선수는 엄연히 우리 연고지 선수입니다. 회장님이 동서울중학교에 기부를 얼마나 많이 하시는지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겉보기엔 모두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데 회의는 노회한 임원들이 하는 딱 그런 분위기라 어색하게 느껴졌다. 유명은 크리스털 엔터테인먼트가 회사 분위기나 직원들의 성향 등 모든 면에서 자신과 잘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원들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지자 지금껏 입 다물고 있던 타이이사가 유명이 아닌 수지를 보고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로 물었다.
“회장님, 레드 윙에서 유명씨에게 뭐라고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으면 대응책을 세우기 좋을 것 같은데요?”
불필요한 요구 같은데 눈길이 마주친 수지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어떻게 대답할까 잠깐 고민한 유명이 대답했다.
“레드 윙에서는 저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주변 식구들에 대한 정보까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게 접근한 여자는 여기 회장님이나 제 여자친구들과 비슷한 이미지였죠.”
“레드 윙 커뮤니케이션즈 대표 오로라는 국가대표시절 제 백업 공격수였어요. 여기 유명씨의 학교 선배이기도 하구요.”
수지가 덧붙인 설명은 유명으로서는 처음 듣는 내용이다. 선배라서 그렇게 학교까지 찾아왔었던 건가 생각하려는데 타이이사가 다시 물었다.
“그 오로라대표가 구체적으로 뭐라고 했는지 아직 말씀 안 하셨는데요?”
남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타이밍이나 억양에서 거부감이 느껴졌다. 유명은 예전처럼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아니라 속으로 하나하나 따져 분석하면서 16살처럼 보이려고 일부러 수지에게 물었다.
“사실대로 다 말해?”
“말하고 싶은 것만 해,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섹스만 즐기는 대상으로 여겼으면 표정이나 대답에서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유명은 수지가 원하는 게 뭔지 바로 알아봤다.
“레드 윙에서는 유리를 데려갈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는지 미인계라고 하던가요? 그걸로 접근한 것 같은데… 다들 여기 회장님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눈이 좀 높아서요….”
“하하하하하~~”
가벼운 농담인데 임원들이 크게 웃었다. 대답에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집중하고 있었는지 타이이사는 반 박자 늦게 억지로 웃는 걸 유명은 놓치지 않았다.
“제가 아이돌이랑 어울리지 않았다면 넘어갔을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여동생 문제라서 어떤 구단이든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더구나 와일드 캐츠와 경쟁하는 레드 윙에게 유리를 내줄 이유가 없죠.”
“오오오~!”
임원들은 감탄과 함께 박수까지 쳤다. 너무 철딱서니 없어보이게 말했나 걱정했으나 수지가 지어주는 미소를 보니 제대로 대답한 모양이다. 이번엔 타이밍 맞춰 좋아하는 척 했던 타이이사가 다시 물었다.
“구체적인 계약조건을 제시하진 않던가요?”
“조금 전에 했던 제 대답을 듣더니 다른 조건을 내세우진 않았습니다.”
*****
“오늘 회의실에서 잘 하던데?”
퇴근하는 차 안에서 품속을 파고드는 수지는 평소의 다정한 연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유명이 셔츠 사이로 손을 쑥 집어넣어 젖가슴을 만지면서 웃었다.
“타이 그 자식 내 약점 잡으려고 그랬던 거지?”
“어머, 눈치 채고 있었나보네?”
“처음엔 그냥 재수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자기 노려보는 눈길이 의미심장하더라구.”
“……….”
수지는 가슴 한구석이 저려와 대꾸를 못했다. 자기여자들 표정을 다 기억하는 유명은 대도록 부드럽게 물었다.
“그 자식이랑 사귀던 사이였어?”
“사귀기는…….”
수지가 자신을 만나기 전까지 남자를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하고 있는 유명은 씁쓸한 미소 뒤에 담긴 의미가 뭔지 알것 같았다.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야?”
“으응…….”
“아이샤와 같은 예쁜 딸까지 나한테 안겨준 여자가 뭐가 그렇게 미안해? 가만… 미안한 게 아니라 내가 질투해주길 바라는 거 아냐?”
“후후후….”
씁쓸한 미소가 아니라 슬퍼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이번엔 수지의 마음이 엿보이지 않아 유명은 조금 당황했다.
“타이 그 자식하고 어떤 사인데 그래? 사귀는 거 아니었다면서? 설마 아이샤 친아빠야?”
“하하 아냐~ 걔 나이 그렇게 안 많아. 그냥… 자기를 좀 일찍 만났으면 타이 같은 남자랑 어울리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 내 자신이 너무…….”
이미알고 있는 사실인데다 함께 나눴던 고민이라 자책하는 수지가 측은해 보였다. 유명은 꼭 안아주면서 일부러 장난스레 말했다.
“지금 자기 곁에 있는 남자가 나라는 사실만 생각해, 이상한 기분 들려고 그러면 아까 사무실에서 나눴던 그런 섹스를 떠올려.”
“후후 그럴게… 못난 모습 보여서 미안해.”
“사랑하는 사이끼리는 미안하다는 말 하는 거 아니라잖아. 근데 그 재수 없는 새끼 잘라버리면 이럴 필요 없는 거 아냐?”
“큭… 푸흐흐 그럼 간단하긴 하겠네, 후후~”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마케팅이사라는 직함이 얼마나 대단한 영향력이 있기에 자를 수 없는 것일까. 임원이라 지분 문제일 수 있어 유명은 물어보는 게 망설여졌다.
“돈… 문제야?”
“응? 돈? 누구? 타이 걔?”
“으응… 회사지분 같은 거 갖고 있어서 못 자르는 거 아닐까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던 수지가 유명의 말에 피식 웃었다. 이어질 대답과 상관없이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온 걸 보고 마음이 놓였다.
“우리 회사들 전부 내 지분이 100%야. 타이를 안 자르고 데리고 있는 건 걔 밑에 있는 여자들 능력이 좋아서 그런 것뿐이야.”
“도대체 얼마나 능력 있는 여자를 데리고 있는데 그래?”
“다른 건 모르겠고, 타이 걔가 여자들 관리하는 능력이 탁월해. 너 없었으면 이번 크리스털에서 하는 사업을 걔가 주도했을 걸?”
자신의 약점을 잡으려고 넌지시 물어보던 그 재수 없는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도대체 머리 하나는 넘게 작은 녀석이 어떤 능력을 숨기고 있기에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일까, 유명은 이 세계 와서 처음으로 여자가 아닌 남자에 대해 궁금해졌다.
(다음 97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