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78화) 11. 체험
(제 78 화)
지구정거장 여객터미널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대부분의 시설들이 시커먼 그을음과 함께 파괴되어있었고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조명을 비롯한 전기는 들어오고 있었으나 정보대로 산소와 중력은 없었다.
산소발생기를 챙겨 전술벨트에 부착한 훈련병들은 유명을 따라 조심스럽게 수송선에서 내렸다. 일반여객용 터미널이라 마땅한 엄폐물이 보이지 않아 대합실로 빠르게 이동했다.
[지구정거장 지리에 대한 정보가 안 나오는데, 혹시 여기 와봤던 사람 있어요?]
유명의 물음에 한 여자훈련병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더니 머뭇거렸다.
[저기… 와보긴 했는데 지리는 기억 안 나….]
[여기 안내단말기들도 다 먹통이야….]
리아가 주변을 뛰어다니고 와서 하는 말에 모두들 실망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유명은 눈치 빠른 여자친구에게 미소를 지어준 뒤 친구 바구스가 연상되는 그 일반 남자훈련병에게 물었다.
[여기 왔었다면 휴대폰에 지도가 저장되어있지 않을까요?]
[아… 그래, 그렇겠네! 잘하면 헬멧이랑 연동도 될 거야, 잠깐만….]
여자훈련병의 휴대폰을 받아 든 남자훈련병은 뭔가 열심히 조작하기 시작했다. 다른 일반 여자훈련병 한 명이 곁이 다가가 필요한 조언을 해주자 속도가 더 빨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헬멧에 지도정보가 업데이트됐다는메시지가 나왔다.
[아, 떴다!]
훈련병들은 처음으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다들 수고해준 그 일반 남녀훈련병의 어깨를 두들겨 주더니 곧바로 유명을 바라봤다.
[최단코스가 나오네요, 뭐가 이렇게 멀어? 더럽게 넓네!]
유명의 농담에모두들 가볍게 웃었다. 덕분에 긴장이 좀 풀렸는데 몇몇 일반 여자훈련병들이 그 자리에 무릎을 감싸고 주저앉아버렸다. 그러자 리아와 비비안이 얼른 전술배낭과 연결된 식수버튼을 눌러 물을 마시게 했다.
[유명아 조금만 쉬었다 가자.]
소피아의제안에 훈련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모여 있는 위치가 대합실 한 복판이라 무방비상태로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유명이 주저앉은 여자훈련병 한 명을 대뜸 안아들더니 말했다.
[저기화장실로 가서 쉬죠.]
대답 들을 생각 없이 먼저 출발하자 다들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화장실이 워낙 넓어 25명이 들어가도 넉넉했다. 중력이 없어져 물이 둥둥 떠다닐 줄 알았는데 물방울만 조금 보일뿐 깨끗했다.
25명의훈련병 중 남자는 유명을 포함해 5명이고 나머지 20명은 모두 여자였다. 그 중 2차 성징한 남자훈련병은 유명뿐이었고 나머지 4명은 모두 일반훈련병이었다. 다들 쉬고있는 걸 확인한 유명은 그냥 넘어가려다말을 꺼냈다.
[혹시 학교나 다른 데서 지휘해본 경험 있으신 분계세요?]
왜 그런 걸 묻나 다들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남자친구의 의도를 알아차린 리아가 일부러 모두가 들리는 통신으로 말했다.
[그걸 왜 물어, 유명아?]
[그게… 난 직업체험으로 들어온 중학생이잖아. 학사장교 지원자도 있는데 내가 너무 나대는 거 같아서 말야. 적당한 분이 계시면 지휘를 맡아주셨으면 해서….]
일리가 있는 의견이라 모두 고개를 끄덕였는데 고개만 끄덕이고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잠깐 동안 보여준 유명의 지휘력을 넘어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어느새 정보담당이 된 그 남자훈련병이 나서서 말했다.
[이름이 유명 맞지?]
[네? 아… 네.]
[유명아, 내가 지도를 좀 살펴봤는데 여기 이쪽이 통합우주군지역이라고 일반인 출입이 제한된 구역이 있어. 선착장 가기 전에 여길 좀 살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아예 지휘관을 취급이다. 무기조차 없이 이동하는 게 마음에 걸렸던 유명은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이대로 가다가 적이랑 만나면 속수무책이잖아요?]
[맞아, 그래서 가보자는 거야.]
둘의 대화에 이견을 내놓는 훈련병은 없었다. 그러나 무작정 갈 수 없는 노릇이라 결단을 내려야했다. 유명은 머리 하나는 더 작은 그 남자훈련병에게 물었다.
[저보다 형이신가요?]
[어? 응, 학사장교 지원자야. 시원이라고 해.]
[형이라고 부를게요. 시원형이 여기 남아서 제가 부르면 나머지 훈련병이랑 따라오세요.]
[너 혼자 가려고?]
[아뇨, 제 여자들만 데리고 갈게요.]
죽으러 가는 길일 수 있는데 리아, 사라, 소피아, 비비안의 표정이 환해졌다. 선뜻 다가와 한 몸처럼 뭉치더니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는 걸 보고 유명역시 씨익 웃었다.
[하하, 그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냐? 알았어, 그렇게 할게.]
시원이 어깨를 툭툭 쳐주자 유명은 자기여자들을 보고 잠깐 생각하더니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리아는 후방감시, 소피아는 좌측, 비비안은 우측, 사라는 가운데서 지도 보면서 방향 알려줘, 알았지?]
[알았어!]
네 여자가 동시에 대답하자 시원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뒤 곧바로 화장실을 나서는 유명의 믿음직한 등을 보고 훈련병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다.
*****
자기여자들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통합우주군 전용구역으로 여러 시설들과 함께 한쪽에 무기고와 보급품창고가 있었다. 유명은 곧바로 시원에게 연락했고 잠시 후 훈련병이 모두 모였다.
[여기도 공격 받았네, 무기나 보급품이 성한 게 거의 없어….]
시원의말에 다들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는 관리책임자의 인증이 있어야만 접근이 가능한 통제구역이지만 공격을 받아 반파된 상태라 일부나마 입수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거 어떻게 쓰는 거죠?]
유명이 손에 들고 내민 것은 크기로 봐서 소총인 것 같은데 워낙 단순하게 생겨서 사용법이 필요해 보였다. 그때 시원이 헬멧을만지작대더니 말했다.
[역시 기본병기라 헬멧에 사용법이 내장되어 있네.]
[아… 그러네요.]
라고 명시된 통합우주군 표준자동소총은 ‘레일건(Railgun)’으로 사용을 위해서 전용배터리와 전용탄환이 필요했다. 비록 레일건이긴 하지만 상대는 광선총을 쓰는데 배터리에다 탄환까지 필요한 무기를 쓰는지 의아했다.
[흠… 이 조그만 탄환이 상대 에너지실드를 무력화시킨다고? 대단한데?]
시원이 200발 들이 탄창을살피면서 하는 말에 바로 의문이 풀렸다. 광선총을 못 만들어서가 아니라 상대의 약점에 맞는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SL-19A는 총 10자루가 남아있었고 배터리는 5개, 실탄 200개가 꽉 채워진 탄창은 20개뿐이었다.
[이건 뭐죠? 팔찌처럼 생겼네요?]
유명이 딱 1개만 남은 커다란 손목밴드를 들어보이자 곧바로 관련 정보가 헬멧에 표시되었다. 빠르게 내용을 살펴본 시원이 밴드를 착용하더니 팔을 앞으로 탁 치듯이 내밀었다.
슈우우웅
경쾌한 전자음과 함께 반원형의 에너지실드가 펼쳐졌다. 미래 풍 FPS게임에서 보던 것과 똑같아 유명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반투명 육각형 조각들이 이어 붙어진 형태로 사용자만 겨우 막을 수 있는 넓이였다.
[이 걸… 이렇게 하면….]
씨우우웅
시원이 밴드를 매만지자 실드의 넓이가 곧바로 3배 정도 커졌다. 뭉쳐진 4~5명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엔 놀란 유명이 물었다.
[이거 계속 켜 놓을 수 있는 건가요?]
[아냐, 1인용은 5분 사용하면 3분 충전해야하고 좀 전의 3인용은 3분 사용하면 5분 충전해야한대.]
시원의 대답에 유명은 입맛을 다셨다. 이 밴드가 2개 아니 1개만 더 있었더라면 위급상황에 훈련병 전원이 은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충전시간이 짧은 게 다행이었다.
[충전은 자동인가요?]
[응, 산소랑 중력은 안 되지만 전기는 지금 들어오니까 이거나 소총용 배터리도 사용 안 할 때 자동충전이야.]
유명은 헬멧을 통해 소총사용법을 계속 숙지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총 1정당 실탄이 400발뿐이라 게임처럼 난사했다간 모자를 것 같았다. 그때 소피아가 리아와 함께 권총 5정을 찾아서 가져왔다.
[이거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던 건가봐, 저쪽에서 찾았어.]
라고 부르는 통합우주군 표준자동권총은 SL-19A처럼 레일건으로 100발 들이 전용탄창이 필요한데 여분이 없었다. 그나마 상당수 사용한 후라 위급할 때 아니면 사용하기 힘든 상태였다.
[없는 거보다야 훨씬 낫잖아요?]
유명이 씨익 웃으면서 하는 말에 시원 역시 똑같이 웃었다. 둘이 무기를 점검하는 사이 비비안과 사라는 다른 훈련병들의 상태를 살피고 다녔다. 전술배낭에서 식수와 영양제를 공급받을 수 있어서 몸 상태는 다들이상이 없었다.
새벽에 갑자기 일어나 움직이는 바람에 볼일을 못 보고 나와서 다들 교대로 화장실을 가는 정도가유일한 문제였다. 대충 볼일을 다보고 준비가 갖춰지자 유명이 훈련병들에게 물었다.
[혹시 사격 경험이 있으신 분?]
[저요!]
바이애슬론 선수출신인 소피아만 손을 번쩍 들었다. 애초에 사격 경험자가 있는 게 이상한 일이다. 남자들 대부분이 군필자인 한국이었다고 하더라도 훈련소에서는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용법은 다들 숙지했으니까 소피아가 나와서 기본자세만 가르쳐줘.]
[알았어.]
전공능력을 발휘할 기회에 소피아는 신이 났다. 더구나 유명의 지시에 따라 다른 동료들을 가르친다는 상황 자체가 이상하게 뿌듯하고 기뻐서 더 흥분되었다.
국가대표급 선수가 가르쳐줘서 그런지 다들 빠르게 배웠다. FPS게임과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헬멧에 표시되는 조준점(Reticle)에 총의 탄착지점을 맞추고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지라 유명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배웠다.
[그럼 SL-19A는 선발조에 4자루 각 조에 1자루씩 후방조에 3자루 배치하고, SL-19P는 방장들이 보조무기로 사용하도록 할게요.]
[난 이거 언제 사용해?]
사라가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실드밴드를 내밀고 물었다. 유명은 다른 훈련병들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탐스런 엉덩이를 터질 듯이 주무르고 말했다.
[내 옆에 딱 붙어 있다가 명령에 맞춰서 사용하면 돼.]
[응 알았어!]
자신감과 애교 넘치는 두 남녀의 모습에 다들 무거운 긴장감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헬멧을 쓰고 있어 키스할 수 없으니 포옹으로 서로를 격려했다.
[자 다들 준비됐죠?]
유명의 외침에 훈련병들은 그 어느 때보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그럼 선발조 출발합니다! 제 지시에 따라 각 조별로 이동하세요.]
유명을 선두로 SL-19A로 무장한 리아, 소피아, 비비안이 뒤따랐고 그 가운데 실드밴드를 착용한 사라가 있었다.
화장실을 나와 대합실을 벗어날 때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최단코스인 상점구역이 외부공격에 완전히 파괴되어 이동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자 정보를 맡은 시원이 빠르게 다른 코스를 찾았다.
[1개 층을 내려가서 거주구역을 통해서 가자.]
[알았어, 다들 여기서 대기!]
명령이 떨어지자 훈련병들은 일체의 동요 없이 그 자리에서 사주경계(四周警戒)를 펼쳤고, 유명은 자기여자들을 데리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푸슈우우웅 슈우우웅 파박 콰쾅 파바바박
[꺄아아악!]
비명과 함께 에너지실드가 펴졌고 3방 정도의 광선이 튕겨 나갔다. 사라의 재빠른 대처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당할 뻔한 상황이었다.
[사랑해 사라! 사격개시!!]
슈수수수수수수수숭 슈수수수숭
유명을 비롯한 리아, 소피아, 비비안이 정확한 서서쏴자세로 방아쇠를 당기자 SL-19A의 네모반듯한 총열 옆으로 퍼런빛이 쭈욱 생기더니 반동 없이 각자 10발 정도가 순식간에 발사됐다.
[사격중지! 사격중지!!]
명령이 떨어지자 세 여자는 능숙한 대원들처럼 곧바로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뗐다. 탄착점은 마치 수류탄 몇 십 개를 던진 것처럼 초토화가 됐고 헬멧에 표시되던 붉은색 적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실드 끄고 다들 따라와.]
유명이 경계자세로 앞서 걸어가면서 명령을 내리자 여자들이 똑같은 자세로 살며시 따라왔다. 탄착지역에 도착하자 적은 흔적조차 없었고 그을음과 일부 파손된 시설들만 남아있었다.
[각 조 이동.]
후발 조에게 명령을 내린 후 유명은 자기여자들의 엉덩이를 차례로 쓰다듬어 주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불과 몇 초에 불과한 교전이었으나 자신의 생각대로 상황이 처리된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컸다.
(다음 79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