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63화) 9. 대결
(제 63 화)
체육대회의 공식적인 행사가 모두 끝난 직후 뒤풀이를 하던 학생들은 교내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왓!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러게… 너무 빨라서 제대로 못 봤어!”
“유명선배가 휘신선배의 다리를 찬 거 같은데요?”
“넌 그게 보였어?”
“아, 거리가 벌어졌다. 잠깐 앞으로 돌려봐.”
거의 전교생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모두같은 화면을 홀로그램으로 보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유명과 휘신의 시합장면이었다.
매년 반쪽짜리 행사였던 체육대회를 전교생들이 참여하도록 이끈 시합이니 이런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제한된 인원만 참관하고 촬영까지 불허된 비공개 시합을 어떻게 전교생들이 보고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그 사실을 당사자들은 알고 있을까.
뻐억!
유명의 로우 킥이 다시 휘신의 왼쪽 무릎 위에 꽂혔다. 그 때문에 라이트스트레이트에 이은 레프트훅은 허공을 갈랐다.
“후욱!”
짧은 호흡과 함께 유명은 재빠르게 뒤로 빠졌다. 덩치는 2~3체급 이상 차이나지만 키와 리치차이는 크지 않아 반발자국 정도만 움직이면 주먹공격이 닿지 않았다.
“이… 쥐새끼 같은 새끼!”
안쪽과 바깥쪽에 연달아 꽂힌 하단차기의 위력이 예상 밖으로 강해 휘신의 입에서 저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럼 넌 고양이새끼냐?”
툭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명이 발목을 가볍게 찼다. 별 거 아닌 공격이지만 상대가 내딛는 순간이면 중심을 흔드는 데 충분하다.
“어?!”
타이밍을 뺏긴 휘신이 살짝 휘청거리는 순간 유명이 사선으로 파고들면서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휘신의 주먹이 더 빨랐다.
부우우우웅
다시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주먹이 유명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뒤에서 애타는 눈길로 지켜보고 있는 아이샤의 특훈이 없었다면 이 카운터펀치에 턱이 돌아갔을 것이다.
퍽!
어느새 휘신의 옆구리 쪽으로 빠진 유명이 복부에 돌려차기를 차 넣었다. 재빠른 풋워크로 빠르게 넣은 공격이라 소리에 비해 위력은 크지 않았다.
“우와! 유명이 움직임 봤어?”
“휘신이 주먹 보고 피한 거야?”
“보이지도 않는 걸 어떻게 피해?”
홀로그램으로 시합을 보고 있는 학생들은 유명과 휘신의 놀라운 움직임에 혀를 내둘렀다.
“휘신! 왼쪽으로 돌아!”
세컨드에 외침에 휘신은 잠깐 뒤로 빠지셔 어깨를 털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위력이 작아도 타이밍 좋게 들어온 발차기를 맞고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제대로 들어갔죠?”
하나의 물음에 리아는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 저런 발차기로는 수십 방은 넣어야 효과가 있을 거야.”
“예? 저렇게 예리한 발차긴데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하나의 어깨를 다독이며 리아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그렇다는 거야. 1회전은 이 이상 접전이 없겠네.”
리아의 예상대로 이후 시합은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상대의 발을 느리게 만들려는 유명의 타이밍 위주의 하단공격을 휘신이 왼쪽으로 돌면서 반발자국 빠른 풋워크로 피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유명은 상대의 스트레이트를 견제하고 휘신은 상대의 로우 킥을 피하려는 의도가 양측 다 뚜렷했다.
“그만! 각자 코너로 돌아가~”
심판의 신호에 유명과 휘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은 뒤 등을 돌렸다. 사실상 탐색전이었던 1회전이 이렇게 끝났다.
“뭐야? 이게 다야?”
“그럼? 난투극을 기대했어?”
“이 정도도 꽤 볼만 하잖아?”
“볼만 한 걸 떠나서 유명선배가 대단한거야. 체급 차이를 봐 휘신선배가 일방적으로 유리한 시합을 하는 거라구.”
“맞아, 저 주먹에 스치기만 해도 게임오버라고 봐야지.”
교내 곳곳에서 시합장면을 보고 있는 학생들은 저마다 생각을 열렬히 주고받으며 2회전을 기다렸다.
“후우우욱… 푸후우우우…….”
코너로 돌아올 때만 하더라도 가슴을 들썩이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유명은 어느새 호흡이 안정되고 있었다. 놀라운 회복력에 새삼 감탄하며 리아가 씽긋 웃었다.
“어때, 할 만해?”
“응. 훈련효과가 확실하네.”
하나가 내미는 물로 입만 축인 유명은 두 여자에게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리아가 얼음물로 차갑게 만든 자신의 손을 도복사이에 넣어 가슴을 쓰다듬었다.
“저쪽에서 준비한 게 있다면이번 2회전에 써보려고 할 거야. 절대 뒤로 빠지지 말고 최대한 오른쪽으로 돌아야 해, 알았지?”
리아의 상냥한 조언에 하나가 격려를 덧붙였다.
“유명선배 잘 하고 있어요! 파이팅!!”
“그래, 고마워~”
심판의 신호에 유명은 하나가 입에 넣어주는 마우스피스를 물고 일어섰다. 마주선 휘신의 상태 역시 처음과 거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준비… 시작!”
1회전과 달리 양측 다 바로 달려들지 않고 옆으로 돌았다. 그런데 유명이 도는 방향에 맞춰 휘신이 오른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역시…….”
리아의 혼잣말은 휘신이 자세를 사우스포로 바꾼 것을 보고 한 것이다. 그때 눈이 마주친 유명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휘신의 오른발이 바닥을 쓸 듯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오른팔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후웁!”
짧은 호흡소리가 남은 자리에 원투펀치가 연속으로 들어왔다. 간발의 차이로 휘신의 등을 파고 든 유명은 상대의 목을 잡는 것과 동시에 니 킥을 찔러 넣었다.
따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릎에 닿은 감촉은 복부나 옆구리가 아니라 휘신의 손목이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손을 써서 급하게 막느라 벌어진 상황이다.
“그렇지!”
리아가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 질렀다. 목표했던 복부는 아니지만 강력한 공격인 니 킥을 제대로 성공시켰다는 건 의미가 컸다.
원거리에 해당하는 로우 킥과 근거리에 해당하는 니 킥, 2가지 공격옵션을 상대에게 각인시킨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만! 그만, 떨어져!”
니 킥을 차고 막느라 엉켜 붙은 둘을 떼어놓으려고 심판이 다가가려는데 갑자기 휘신이 유명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컥!!”
“이 새끼! 죽여 버리겠어!!”
얼마나 대단한 힘인지 휘신은 비슷한 키의 유명을 한 손으로 살짝 들더니 확 던져버렸다. UFC경기장이었다면 철망에 부딪쳤을 것이다.
“어, 뭐야?”
“이거 반칙 아냐?”
“반칙 맞아, 손으로 목을 잡는 건 그래플링이 가능한 정식시합에서도 반칙이야.”
시합을 지켜보던 학생들은 휘신의 감정적인 행동에 혀를 찼다. 휘신을 응원하던 학생들조차 얼굴이 굳어졌다.
심판이 손을 휘저으면서 휘신을 코너로 밀어내자 세컨드인 리아와 하나가 서둘러 경기장으로 올라와 던져진 유명을 살폈다.
“유명아!”
“선배! 괜찮아요?”
목을 매만지면서 일어나 앉는 유명의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대신 표정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새끼… 힘이 장난이 아닌데?”
리아는 덜컥 걱정이 됐다. 이런 식으로 체급차이를 실감해버리면 소극적으로 움직임이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반칙을 저질러 이쪽이 유리한 것 같지만 공식경기가 아니라서 판정이 없다. 결국 유명이 큰 타격을 받은 것이다.
“휘신이가 무식한 놈이라는 거 몰랐어? 쟤가 갑자기 왜 저러겠어?”
리아의 지적에 뭔가 생각난 유명은 호흡이 빠르게 안정되기 시작했다. 하나가 안도의 한숨을 쉴 정도로 빠른 변화였다.
“그래, 무릎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
“맞아, 쟤도 우리랑 똑같이 맞으면 고통을 느끼는 인간일 뿐이야. 그리고 유명이 너도 괴물 같은 남자니까, 당장 일어나!”
여자친구가 내미는 손을 잡고 유명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참관인석에서 열렬한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내 친구 잘한다!!”
“유명이 너무 멋져~~”
바구스와 그의 여자친구 은하가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마야와 린은 청소부 신분이라 참관인으로 못 들어왔으나 혜리와 세아 그리고 유리와 아이샤는 유명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키스 필요해?”
리아가 얼굴을 쓰다듬고 다정하게 묻자 평상심을 되찾은 유명이 엉큼한 미소를 씨익 지었다.
“당연하지.”
“이번엔 내가 아니라 딴 여자 키스 받아. 하나, 키스 실시!”
하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유명의 목에 팔을 두르고 키스를 퍼부었다. 다시 양쪽 참관인석에서 야유와 환호가 쏟아졌다.
“휘신, 명백한 반칙이므로 경고야!”
심판의 엄중한 외침에 휘신은 개의치 않고 콧방귀를 꼈다. 오히려 이번 일로 돌파구를 찾았는지 회심의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알았으니까, 어서 시작해!”
휘신의 버릇없는 말투에 뭐라고 한 마디 하려던 심판은 그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애써 무시하고 유명에게 다가왔다.
“괜찮니, 유명아?”
“네 괜찮아요, 바로 시작할 수 있어요.”
똑같이 건장하고 잘생긴 중학교 5학년생인데 어쩌면 이렇게 극명하게 다를까, 심판은 동료인 아이샤가 유명의 여자친구가 된 이유를 제대로 실감했다.
“자, 준비!”
다시 마주선 둘은 서로를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져있었다. 유명은 상대의 변칙공격을 대비하고 있었고 휘신은 상대를 어떻게 요리할 것인지 확신에 차 있었다.
“다시 시작한다!”
“유명이 괜찮을까? 부웅~ 날아갔잖아?”
“안 괜찮으면 일어섰겠어?”
“이 시합은 이미 유명선배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렇긴 하지만 휘신이 같은 놈은 확실하게 밟아줘야 해!”
남의 일이라 재미삼아 거의 반반으로 나뉘어져있던 응원비율이 반칙 한 번으로 유명 쪽으로 확 기울었다. 휘신과 그의 클럽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있는 학생을 제외한 거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시작!”
휘신이 가다렸다는 듯이 그 큰 덩치를 날렸다. 무식하게 뛰어드는 것 같았으나 속도가 엄청나서 맞받았다가는 경기장 밖으로 튕겨나갈 것이 분명했다.
“흐읍!!”
이번에도 간발의 차였다. 유명은 아예 대각선으로 몸을 날려 바닥을 굴렀다. 달려든 휘신이나 그걸 피한 유명이나 체격이 비해 비정상적으로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이 새끼가 어디이일~~!!”
휘신은 아예 반칙하기로 작정한 듯 대놓고 태클을 시도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유명은 격구체육관에서 여동생이 자신의 태클을 피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유리처럼 피하는 게 아니라 맞받았다는 것이다. 유명의 뒤차기가 휘신에게 그대로 꽂혔다.
빠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휘신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타이밍에 맞춰얼굴을 노렸는데 피했는지 아니면 허리가 덜 돌아갔는지 쇄골 쪽에 맞았다.
“멈춰! 중립코너로!!”
심판의 지시에 유명은 서둘러 중립코너에 가서 섰다. 휘신이 꿈틀거리면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심판이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으이익……!!”
휘신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발뒤꿈치에 닿은 느낌이나 소리로는 쇄골이 부러진 게 분명했다.
“저러고도 일어나다니…….”
하나의 혼잣말은 리아의 마음과 같았다. 덩치만 무시무시한 게 아니라 맷집과 근성까지 대단했다. 만약 손목까지 부상이라면 그걸 다 견뎌내고 일어나는 것이다.
“유명아 이제부터 진짜 조심해야 돼!”
리아의 외침에 유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휘신의 투기는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후욱… 일어났잖아?어서 시작해!”
땀을 비 오듯이 흘리는 휘신의 상태가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다. 심판은 말려야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휘신, 이제 그만하자. 부상이라면 바로 치료해야 해.”
“누가 부상이라는 거야? 난 괜찮아! 이 정도로 무너질 거면 시작하지도 않았어!!”
휘신은 유명을 바라보고 호기롭게 외쳤다. 종합격투기체육관이 떠라가라 외쳐댄 소리에 휘신 쪽 참관인들이 광적인 응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가장 열렬하게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치는 이는 역시 준이었다. 그에 질세라 유명 쪽 참관인들이 열렬히 응원을 보냈으나 최소한 참관인들의 기세는 휘신 쪽이 우세했다.
너무 과열되는 분위기라 심판은 시합을 중지시킬 마음으로 휘신에게 물러나 참관인들에게 외쳤다.
“진정하세요! 다들 진정하세요!! 이 시합은 공식경기가 아닙니다. 휘신학생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짐작되므로….”
그때 휘신이 앞으로 확 나오더니 유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시 소리를 질렀다.
“난 멀쩡하다 유명! 네가 진짜 남자라면 다시 덤벼라!! 나 휘신은 절대 물러서지 않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휘신 쪽 참관인들이 다시 광적인 성원을 보냈다. 애초에 20명 전부 같은 클럽회원에 추종자들이라 당연한 행동이다.
“저 새끼 감정싸움의 연장일뿐이라더니….”
유명은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상대가 저렇게 나오는 이유는 부상을 감추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이럴 때 함께 흥분하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유명아 계속할 생각이야? 이러다 크게 다칠 수 있어….”
심판은 아이샤와 같은 체육교사라서 학생들 간의 다툼을 중재할 의무가 있다. 아무리 약속된 시합이라지만 부상이 발생하면 그 책임은 오롯이 심판인 자신이 져야한다.
“지금 분위기로 제가 안 한다고 해보세요, 쟤나 저기 애들이 어떻게 나오겠어요? 부상 아니라는 걸 제가 우긴다고 받아들이겠어요?”
“……….”
유명의 말이 일리가 있어 심판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때 눈이 마주친 아이샤가 휴대폰을 들고 엄지를 세워주고 있었다. 교장에게 허락을 받았다는 의미다.
“좋아! 휘신, 시합을 계속할 수 있나?”
경기장 가운데로 돌아온 심판이 묻자 휘신은 일그러진 얼굴로 억지로 웃더니 큰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럼… 양쪽 다 준비 됐지?”
심판이 번갈아 바라보자 유명과 휘신은 자세를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
(다음 64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