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19화) 4. 여동생
(제 19 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수영장에 사람이 부쩍 늘었다. 특히 둘이 있는 곳 주위에 여자들이 많이 보였다. 그 이유를 둘 중 한 명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길쭉길쭉하고 출렁출렁한 여자들을 가까이서 마음껏 구경할 수 있게 해준 친구를 위해 바구스는 정성껏 설명을 이어갔다.
“21세를 기준으로, 성문화가 지금처럼 바뀌게 된 이유는 결국 성비불균형과 낮아진 출산율 때문이야.”
“그럼 남자가 여러여자들과 사귀는 거나 그걸 여자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도다 그 때문이야?”
유명의 반문에 바구스는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더니 살짝 짜증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인마. 너 같은 놈들이 좋은 여자들 다 처먹는 바람에 나 같은 놈들은 여자 구경도 못해, 새끼야!”
“어어?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성비가 3대7이라며? 여자가 훨씬 더 많잖아?”
유명은 말해놓고 바로 이해가갔다. 예전에 살던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았는데 여자가 더 많다고 남녀관계가 공평할 리가 있을까. 바구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놈의 성비가 3대7이고 2차 성징으로 외모차이가 확 나니까 그나마 기회가 있지, 안 그랬으면 여자들이 나 같은 놈들에게 눈길이나 줬겠어? 내 여동생이 너보고 정신 못 차리는 거 봤지?”
“……….”
친구의 신랄한 지적이 없었더라도 유명은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언제나 바구스와 같은 처지였기에 그 억울함과 분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2차 성징 한 너희들이 우리보다 임신이랑 출산율이 높은데다 정력까지 월등히 좋으니 이해는 해. 이해는 하는데… 기분은 나쁘다구!”
“누가 보면 내가 네 여자 뺏은 줄 알겠다. 화 풀어, 내가 사과할게. 소용이 있을까 모르겠지만….”
정작 유명은사과할 이유가 없는 입장이다. 이미 밝혀진 대로 기억을 잃기 전의 여성취향이 2차 성징을 안 한 여자들이었고 그마저 별 관심이 없었다. 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바구스는 괜히 화를 냈나싶어 금방 차분해졌다.
“미안…, 너한테 화 낸 거 아냐.”
“괜찮아, 인마. 욕도 하고 원망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 그는 게 친구잖아~”
이런 사이가 되길 바라고 꾸몄던 일이긴 한데 이렇게 빨리 가까워질 줄은 몰랐다. 바구스는 유명에 대해 죄책감을 넘어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건데, 유명이 너 진짜 주변 여자들 좀 정리해.”
“정리하라니? 헤어지란 말이야?”
“아니 정리가 왜 그렇게 해석이 돼? 그것도 21세기식 화법이냐? 너만 바라보는 여자들 좀 다 거둬들이라고, 그게 모두가 행복해지는 거니까!”
“……?!”
이번에야말로 진짜 궁금하던 이야기가 나왔다. 16살짜리 친구와 하는 대화라 본론까지 한참 걸렸다. 유명이 별대답 없는 걸 보고 바구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아까 하던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건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도시국가에서 출산과 육아에 관한 복지정책이 최우선이야.”
“거야 출산율이 낮으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그래. 그래서 유명이 네가 길을 가다 처음 보는여자랑 섹스했는데, 그 여자가 나중에 애를 낳으면 그 여자는 당연하고 너도 연금이 나와.”
“씨 뿌린 게 전분데 연금을 준다고?”
“그 씨가 뿌려져도 잘 안 되니까 그렇지. 너 우리 집이나 너희 집이 왜 그렇게 좋은지 안 궁금했어?”
궁금한 적이 없었다. 주택가뿐만 아니라 지나왔던 거리 곳곳이 워낙 잘 정비되어 있고 깨끗해서 미래세계에는 다들 잘 사는가보다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아…! 남자가 적으니까 우리처럼 아들을 낳으면 연금이 더 많이 나오는 건가?”
“그렇지! 그 정도 생각은 해내야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있지. 추가설명 들어간다. 모든 여자들이 다 그렇진 않지만 대다수 여자들의 인생 최대목표가 바로 아들은 낳는 거야.”
예전에 살던 세상에서도 선진국들의 출산율 저하는 큰 사회적 문제였다. 그러니 출산에 대한 보상차원의 연금은 꽤 효과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제도인 셈이다.
이유는 아직 모르지만 인공수정이 불가능하니 출산을 가능하게 한 대가로 연금을 주는 것 역시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주변의 여자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게 임신을 위한 정자제공이라는 말인가.
“그럼 주변 여자들을 정리하면 모두 행복해진다는 게 결국 종마 노릇하라는 거야?”
유명의 말에 바구스는 잠깐 고민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순 없는데, 보다 거시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어.”
“거시적?”
“응. 여자들이 아들을 낳는 게 목표인 건 개인적인 이유도 있지만 인류공영을 위한 사명의식에서 비롯된 거야.”
너무 거창한 이유라 유명은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성비불균형사회니까 다수인 여성이 소수인 남성을 귀하게 여기고 떠받드는 거라는 짐작은 결국 과대망상에 불과했음은 분명하다.
“남자가 여러 여자를 동시에 사귀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도 그런 의식에서 비롯된 거야?”
“그래. 우리야 아직 철딱서니 없는 어린 것들이니까 당연하고 가볍게 여겨도 되지만, 인류전체의 시각에서 보면 섹스가 가장 중요한 책임이자 의무인 거야.”
2차 성징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지적능력이 강화된다는 게 실감날 정도로 바구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호기심 차원의 단순한 의문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큰 의미가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렇구나…, 그래서 다들 그랬던 거구나.”
공직자들의 제복이나 학생들의 교복에서부터일반시민들의 평상복에 이르기까지 노출이 왜 그렇게 심한지 바로 이해가 되었다. 여자들의 관대함과 적극적이고 노골적인 행동 역시 같은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 유명은 마치 보이지 않았던 벽이나 단계를 넘어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기분이 그대로 드러난 얼굴을 바구스가지적했다.
“너 화장실 다녀와서 시원해졌을 때 표정 같다?”
“어, 그래? 그게 다 드러나?”
“응, 지금도 실실 웃고 있잖아?”
얼굴을 만져보니 진짜 광대가 승천 중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껏 방어기제로 본심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써왔던 유명으로선 놀랍고 의미 있는 변화다.
“박스 너 덕분에 기분이 너무 좋아졌어. 진짜 고맙다!”
“뭘 이런 걸로… 하하….”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정리해준 정도인데 이렇게 고마워할 줄이야, 바구스는 너무 쑥스러워귀까지 빨개졌다. 유명이 더 밝아진 표정으로 솔직하게 말했다.
“박스, 가슴 벅찬 이 기분 이거 괜찮은 거지?”
“마음대로 섹스할 수 있다니까 좋아 죽겠냐?”
바구스의 말대로 좋아 죽을 판이다. 섹스가 곧 인류공영에 이바지하는 길이라는데 싫어할 남자가 세상에 있을까. 심지어 미녀들이 주변에 널렸으니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고 싶을 지경이었다.
*****
실내수영장이라 선탠시설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마치 해변처럼 수영복을 벗어놓고 알몸으로 누워있거나 수다를 떨며 괜히 큰소리로 웃는 등 두드러진 행동을 하는 여자들이 주변에 여럿 보였다.
여자들의 의도가 뭔지 이제는 유명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냥 아무 여자에게 가서 말 몇 마디만으로 섹스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너무 흥분되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이런 친구의 상태를 짐작한 바구스가 넌지시 물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 있어?”
“어? 어… 다 마음에 드는데?”
“이 놈이 고삐가 풀리니까 정신을 못 차리네. 진정해, 인마.”
바구스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이대로 계속 흥분하다가는 사타구니에 달려있는 커다란 그 녀석이 수영복 밖으로 튀어나올 게 분명했다. 유명은 자제하려고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나 학교에서 어땠어?”
“어떤 게 궁금한데?”
“뭐든… 나 학교생활에 대해서는 아예 기억이 없어.”
유명의 대답에 뭐 부터 말해주는 게 좋을지 바구스는 감을 잡기 힘들었다.
“아예 기억이 없다면 알아야할 게 너무 많은데….”
“그래? 여자에 관심이없었으니 평범했겠지.”
“그런 셈이야. 운동이나 클럽활동에도 통 관심이 없었으니까.”
예전에 살던 세상의 처지와 비슷한 것에 유명은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운동도 좋아하고 친구가 어울리는 것 역시 좋아한다. 없어서 못한 것이지 안 한 것이 아니었다.
“클럽? 동아리 같은 거야?”
“동아리는 여자애들이랑 어울려서 하는 취미활동이고, 클럽은 뜻 맞는남학생들 간의 모임을 말하는 거야.”
“남자끼리 모여서 뭐하게? 여자애들이랑 노는 게 더 재미있을 거 같은데?”
유명의 반응이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바구스는 키득거리며 설명했다.
“크크큭, 클럽이 아니면 남학생들끼리만 만나기 쉽지 않거든. 남자들은 중학교 졸업하면 바로 입대하는 경우가 많아서 학창시절 친구가 더 각별해진다더라구.”
“입대? 아직도 모병제가 아니라 징집제야?”
명색이 미래라면 통일도 되었을 거고 그러면 병역제도 역시 바뀌었을 거라는 지레짐작인데, 예전에 살던 세상에서 육군현역으로 복무한 기억과 경험이 생생한 유명에게는 희망사항에 가까웠다.
“모병제야, 하지만 전쟁 중이니까 지원을 많이 하는 거지.”
“뭐어어??!!”
유명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주변에서 쉬고 있던 여자들이 깜짝 놀라 쳐다봤다. 당황한 바구스가 여자들을 향해 거듭 고개를 숙였다.
“아아, 이 정도 중요한 사실은 검색해서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 내 잘못이다. 대신 한 대만 맞자, 응?”
바구스가 조그만 주먹으로 자신의 어깨를 툭 치면서 과장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유명은 기억이 없는 걸 이용한 농담이라고 여겼다.
“장난치지 마, 전쟁 중인데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어?”
“평화로울 수밖에, 전쟁은 우주에서 하니까.”
“………….”
순간 멍해진 유명의 반응에 바구스는 씨익 웃으면서 친구의 어깨를 다독였다.
“좀 충격적이겠지만 그렇게 놀랄 것 없어. 전쟁이나 군대는 그리 급한 일이 아냐, 나중에 생각날 때 검색해서 알아봐.”
다른 누구도 아닌 바구스의 말이라 틀림없겠으나, 휴전 중인 나라의 국민으로 최전방에서 복무했던 유명에게 전쟁이나 군복무는 결코 가벼이 여겨질 사안이 아니다.
더구나 그 전쟁이 우주에서 벌어지고 있다니, 미래니까 그럴 수 있겠다싶지만 워낙 예상지 못한 사실이라 더 궁금하고 살짝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다.
“우주에서 전쟁 중이라니…, 솔직히 믿기지 않는데?”
“뭐가 안 믿긴다는 거야? 전쟁터가 우주라는 거? 아니면 전쟁 중인데 이렇게 한가롭게 여자들 구경할 수 있다는 거?”
바구스의 반문에 유명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뜬지 이제 겨우 4일차,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이상형의 여자를 둘이나 얻은 것마저 아직 실감이 안 나는데 전쟁 중이라는 걸 어떻게 선뜻 받아들인단 말인가.
“둘 다, 아니…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뭐가 뭔지 모르는 사실에 신경 써봐야 머리만 아프니까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이면 돼. 그리고 주변을 둘러봐봐.”
“……….”
친구의 말대로 유명이 주변을 둘러보자 눈이 마주친 여자들이 너나할 것 없이 도발적인 포즈로 미소를 던져댔다. 바구스가 엉큼한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흐흐, 잡아먹어달라고 대놓고 유혹하는 저 여자들이 전쟁에 대해 신경이나 쓰고 있을 거 같아?”
“음…….”
“학생인 우리의 본분이 공부와 섹스인 것처럼 전쟁은 군인들이 하는 거야.”
엉뚱한 게 끼어있는 것 같지만 바구스의 확신에 찬 말에 유명은 조금이나마 불안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마야, 리아와 같은 여자들을 두고 전쟁하러 우주에 가야한다는 생각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모병제라고 했지? 그럼 꼭 지원 안 해도 되는 거지?”
“그렇긴 한데….”
바구스가 말끝을 흐리자 유명은 가슴이 철렁했다. 혹여 납치당하기 전의 자신이 군대와 관련해 뭔가 저질러 놓은 일이 있으면 제대로 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왜? 설마… 졸업과 동시에 입대한다는 약속 같은 거라도 했어?”
“응?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시민이자남자로서 사명이라는 게 있거든.”
“………….”
바구스의 지적에 유명은 할 말을 잃었다. 16살짜리 친구 앞에서 39살이나 먹어 놓고 자기 욕심만 앞세운 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으로서 받은 혜택이라고 해봤자 미녀경찰들에게 발견 되어 친절하게 병원으로 옮겨진 뒤 몇 가지 검사와 진찰을 받은 것과 지금 있는 수영장을 무료로 이용하고 있는 게 전부다.
그리고 남자로서 받은 혜택은 그 미녀경찰 중 마야와 어릴 적 단짝친구 리아를 연인으로 맞이하게 된 것과 많은 여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인데, 이 정도 가지고 부채의식을 느낀다면 그게 더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앞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몸으로 군대에 지원하는 여부가 그 사람의 시민의식과 사명감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는 사실을 마냥 모른 척할 수 있을까. 이런 친구의 심정을 알리가 없는 바구스가 명랑하게 말했다.
“야야,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기억이 엉망인 너한테 누가 뭐라고 하겠어? 지원입대가 강요할 일도 아니잖아.”
“어… 그…그래…….”
평소 꿈꾸던 망상이 이루어질 거라는 희망에 젖어있던 유명의 기분은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져버렸다.
‘군대… 그놈의 망할 군대를 또 가야해?’
SF영화의 장엄하고 웅장한 함대전이 떠올랐으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창 전쟁 중인 군대의 생활이 어떨지 상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혔다.
“어? 유명아, 저기 쟤 좀 봐. 저거 저… 몸매가 와… 끝내준다! 유리나 리아 정도 되겠는데?”
남은 심각해 죽겠는데 철딱서니 없게 여자타령이라니, 역시 16살짜리 남자애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유명은 한숨부터 나왔다. 그런데 엄청난 몸매의 세 여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어? 진짜 유리 같은데?”
친구의말에 바구스가 깜짝 놀라더니 눈을 게슴츠레 떴다. 시력은 나쁘지 않은데 대상이 너무 멀어 쉽게 알아보기 힘들었다. 중단발의 머리를 올려묶은 여동생을 단번에 알아본 유명이 대단한 것이다.
“저렇게 멀리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게 말이 돼? 유명이 너 안드로이드지?”
“크크크, 근데 엄마랑 마야씨도 같이 왔네? 나 여기 있는 거 알고 온 건가?”
여동생이 병원에서 했던 말이 생각나 웃음이 터진 유명이 하는 말에서 뭔가 알아차렸는지 바구스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너 휴대폰 바꿨어?”
“어? 응…, 납치되면서 잃어버렸거든.”
대답을 하기 무섭게 바구스는 얼른 유명을 끌고 근처 장식물에 몸을 숨겼다.
“너 추적당하고 있다. 범인은 분명 혜리아줌마일 거야. 내가 당해봐서 아주 잘 알지.”
유명은 경찰인 마야를 떠올렸는데 바구스는 엉뚱한 쪽을 의심했다. 리아가 유리와 함께 자신을 훔쳐봤다는 사실이 생각났으나 엄마가 자신을 추적할 이유가 있을지 의문이 갔다.
“마야씨랑 내 계정이 연동되어서 찾은 거 아냐? 어젯밤에 리아 집에서 자고 바로 너 만난 거거든.”
“그래? 쳇, 혜리아줌마가 널 추적하고 있어야 재미있는데….”
생각해보니 상당히 엉큼하고 꽤 그럴싸한 망상이다. 거울을 보는 것 같았던 친구와 어느새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것인가 싶어 유명은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큭, 뭘 또 심각하게 아쉬워하고 그래?”
“그건 그렇고, 유리 쟤 끝내주지 않냐? 명문격구팀 주전공격수의 몸이란 저런 거지!”
유리만 뚫어져라 보면서 감탄하는 바구스와 달리 유명은 세 여자 모두에게 관심이 갔다.
‘진짜 끝내주네!!’
몸 구석구석을 맛본 엘프의 현신 마야는 말할 것 없고, 유리의 건강미 넘치는 몸매 역시 어제 아침에 술래잡기하면서 살펴본 터라 바구스만큼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혜리의 몸매는 엄마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대단했다.
평소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옷차림이라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흰색 마이크로비키니차림의 몸매는 단순히 풍만하다고 표현할 수 없는 굉장한 수준이었다.
“유명아… 일단 사과부터 할게.”
바구스의 뜬금없는 말에 유명은 혜리의몸매에 눈길을 고정하고서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사과라니?”
“나 사실은 유리한테도 고백한 적 있거든?”
뉘앙스를 보아하니 리아와 마찬가지로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모양이다. 이번에도 남의 일 같지가 않아 유명은 바구스의 어깨를 툭 쳐주며 씨익 웃었다.
“괜찮아, 고백했더니 유리가 뭐래?”
유명이 시원하게 받아주자 바구스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나름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증거다.
“뭐라고 하긴,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다고 단칼에 거절당했지.”
“그래…?”
유리가 따로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굴까, 고백한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여동생이 오빠를 남자로서 짝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유명이 늘 꿈꾸던 환상이다.
“이게 무슨 망상을 하기에 실실 쪼개? 친구의 순정이 짓밟힌 것에 같이 화를 내주지 못할망정 비웃어? 네가 친구냐, 이 나쁜 놈아!”
바구스는 진짜 화가 난 것처럼 친구의 어깨를 이마로 밀면서 괜한 억지를 부렸다. 이 상황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 유명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크크크, 그러게 한 우물만 파지 왜 유리까지 건드려?”
“리아가 좀 단단한 철벽이어야 내가 계속 들이대지? 내 여동생 줄 테니까 유리 넘겨!”
서로의 여동생과 사귀는 건 친구로서 꽤 괜찮은 관계지만 유리정도 되는 여동생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유명은 괜히 미안한 마음에 일부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 있을 거야? 같이 어울려서 놀자.”
“응? 아… 그…그게…….”
친구의 제안에 좋아하는 거 같더니 바구스는 이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지 유명은 짐작이 갔다.
“박스, 너 유리한테 고백만 한 거 아니지?”
“뭐? 아니…, 뭐… 별로…….”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 같은 기분이라 유명은 되도록 상냥하게 말했다.
“유리 보기 민망해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망신당할까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
이렇게 핵심을 찌르고 들어올 줄 몰랐던 바구스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웅크리고 고민하는 친구가 너무 안타까워 안아주고 싶었으나유명은 참았다.이럴 때 스스로 문제에 맞서야만 이겨낼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망갈 생각 하지 마, 그럼 너 다시는 안 볼 거니까.”
“유…유명아…….”
바구스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무섭고 두렵고 난처하고 당황하고 슬퍼하는 그런 표정, 유명은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친구의 심정이 그대로 다 들여다보였다.
“유리한테 뭘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오빠인 내가 친군데 뭐가 두려워? 학교 다니면서 여자랑 섹스 좀 못하면 어때? 돈 벌어서 더 예쁜 여자, 더 어린 여자 만나서 즐기면 되잖아? 세상에 여자가 더 많다며? 남학생들끼리만 클럽활동을 한다고? 그럼 너랑 나 둘이서 클럽 만들어서 놀면 되겠네?”
숨 쉴 틈 없이 토해낸 말 모두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바라는 것 없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진짜 친구에서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
바구스의 선하고 커다란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이 흔들리는 거 같더니 유명을 와락 끌어안았다.
악수 정도 하자면 등이나 토닥여 주려고했는데 예상 밖이다. 남자끼리의 포옹이 이정도로 큰 위안이 될 줄 유명은 미처 몰랐다.
“얼씨구? 공공장소에서 남자끼리 뭐하는 짓거리야? 남자는 동성연애하려면 정부에 신고해야 하는 거 몰라?”
유명과 바구스는 빛의 속도로 떨어졌다. 그들 뒤에는 은색 슈퍼하이레그 원피스수영복을 입은 유리가 짝다리를 집고서 경멸의 눈길로 내려 보고 있었다.
“우린 그… 친구들 간의 우정의 일환으로….”
변명하기 급급한 유명과 달리 바구스는 얼른 일어나 애써 쾌활하게 인사했다.
“유리야 안녕, 여긴 어쩐 일이야?”
“수영장에 수영하러 왔지, 오빠들처럼 연애질하러 왔겠어?”
대꾸할 말이 기억이 안 난 유명은 자신의 수호천사인 마야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어색하게 웃었다.
“자기도 왔네? 수영복 입은 거 끝내준다~”
검정색 비키니수영복 자체는 비교적 평범한 편에 속했으나 몸매가 워낙 풍만한데다 늘씬하고 탄력이 넘쳐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를 정도로 섹시했다. 마야는 어린 연인을 키스로 맞아주며 활짝 웃었다.
“후후, 고마워~ 여긴 친구야?”
“아, 안녕하세요. 유명이 절친 바구스입니다.”
친구의 진심어린 말을 듣고 느낀 바가 있는지 바구스의 표정과 행동은 평소처럼 밝고 명랑했다.
“유명아~ 아, 바구스도 있었네?”
혜리의 등장에 모든 어색함이 사라졌다. 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거대한 2개의 물방울이 터질 듯이 출렁이는 음란하기 짝이 없는 존재감 덕분이다.
흰색 마이크로비키니에 살짝 비치는 것 같은 젖꼭지와 젖꽃판은 절반 넘게 삐져나온 음모의 숲에 비하면 야한 축에 들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검정색비키니라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마야의 적금색 음모도 삐져나와 있었고, 유리의 수줍은 음모 역시 슈퍼하이레그 옆으로 살짝 보였다.
“유명아… 나 도저히 눈길을 거둘 수 없는데, 훔쳐보는 걸 용서해주지 않을래?”
바구스가 겨우 들릴 정도로 조그만 소리로 말하자 유명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그래… 닳는 것도 아닌데 뭐….”
둘은 주먹인사를 하면서 눈길만 고정하고 고개는 다른 쪽으로 슬며시 돌렸다.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노리고 온 여자들이 그 엉큼한 눈길을 모를 리 없다.
(다음 20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