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1화) 1.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제 1 화)
1.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으아아아아아아악!!!!”
숨이 끊어지는 줄 알았던 <최현우>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떴다. 꿈에서 죽으면 이상하게 다른 경험보다 선명하다. 그만큼 끔찍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허억허억, 꾸…꿈이었구나!”
헝클어졌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뭐가 꿈이고 뭐가 현실인지 구분이 잘 안 가서 기억이 들쑥날쑥했다.
‘아냐……,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해. 그 부드럽고 달콤한….’
최현우는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뭔가를 떠올리려 애썼다.
‘아냐…, 뭔가 기분이 더러웠던 거같은데….’
시각정보가 전혀 없는 기억을 떠올리는 게 이렇게 힘든 줄 처음 알았다. 그와 함께 눈이 보인다는 사실이 이렇게 반갑게 느껴지기 처음이다. 덕분에 늦게나마 주변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긴 어디지? 왜 길 바닥에…?’
둘러보니 평범한 뒷골목이다. 낯선 곳이긴 하지만 밝고 깨끗한데다, 다행이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가만히 앉아 정신을 추스르기 적당했다.
‘나 몽유병 없는데…, 그럼 진짜 강간…?’
최현우는 기분이 더 안 좋아졌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더러운 기억이라 뭐라도 확인해볼 심산으로 스마트폰을 찾았다.
“어?”
스마트폰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옷차림부터가 이상하다. 심지어 불룩하던 똥배가 없어졌다.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본능적으로 몸 여기저기를 매만지려는데, 그때 가까이서 기계음이 들렸다.
슈우우우우웅, 삐빅
‘드론?’
지름신에 못 이겨 사놓고 처박아둔 자신의 소형드론과 뭔가 다르다. 당연히 있어야 할 로터(Rotor)가 안 보이고, 소형인데 공중에서 전혀 흔들림이 없다.
[시민께서는 실종신고 상태에서 발견되셨습니다. 현재 경찰이 출동하여 모시러 오는 중이니, 그 자리에서 대기하여 주십시오.]
정체불명의 드론에서 귀엽고 발랄한 여자목소리가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실종신고 상태라는 시민이 자신을말하는 것인지 확인하려고 최현우는 주변들 둘러봤다. 역시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민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서 신체검색이 필요합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비록 드론이고 녹음된 목소리겠지만 이 황당한 상황에서 자신을 위해주는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 큰 위안이다. 경계심이 풀린 최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승인합니다.”
[당사자의 승인을 받아 신체검색을 실시합니다. 그대로 가만히 계십시오.]
안내가 끝나자 카메라처럼 생긴 둥근모양의 초소형드론 2개가 본체에서 분리되더니 최현우의 주변을 소리도 없이 휘감아 돌기 시작했다. 영화처럼 광선을 쏘거나 별다른 기계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신체검색이 완료되었습니다. 검색내용은 담당 경관과 후송될 병원으로 전송되었습니다. 5분 후에 경찰순찰차가 도착합니다. 필요하신게 있으신가요?]
“무…물을 좀….”
[예, 알겠습니다. 시민의 요구사항이 담당경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시민을 담당할 경관은 순경 마야입니다.]
할 일이 끝났는지, 드론은 뒤로 조금 물러나더니 다시 위로 스윽 올라가서 그대로 흔들림 없이 대기했다.
여전히 당황스럽고 혼란했으나, 경찰소속으로 보이는 드론의 등장이 평정심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지금 기술로 로터 없이 공중에 떠있을 수 있는 드론이 가능한가? 설사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 경찰이 저런 고성능 드론을 도입할 리가 없잖아?’
스마트폰만 있다면 드론의 사진을 찍어 관련정보를 검색해볼 수 있을 텐데, 최현우는 답답한 마음에 자신의 바지주머니를 더듬으며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후우…, 폰 없이 모르는 곳에 버려지면 미아나 다름없구나.’
지나치게 깨끗하고 반듯하게 정비된 골목을 지나 멀리 보이는 대로변으로 눈길을 돌리자, 처음 보는 미려한 디자인의 자동차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이거…, 설마 그런… 상황은 아니겠지?’
평소 여가시간을 주로 게임이나 만화, 장르소설 등과 함께 보내는 편이라 쉽게 떠오른 생각이기는 했으나 너무 황당한 상상이라 헛웃음이 났다.
자신을 데려갈 경찰차가 오면 모든 게 밝혀질 거란 생각에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고르던 최현우는 습관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안경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어? 뭐…뭐야? 안경 없는데 이렇게 잘 보여?’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지금껏 평생 안경을 써온 입장에서 눈이 잘 보인다는 사실은 그 무엇보다 놀랍고 신기하고 당황스럽다.
“와아…!”
맨 눈 위로 쏟아지는 맑고 푸른 하늘과 따뜻한 햇살이 주는 해방감과 시원함에 복잡한 생각들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5초 후에 경찰차가 도착합니다. 그 자리에 계시면 담당경관이 도와드릴 겁니다. 본 무인정찰기는 서울경찰청 소속입니다. 협조하여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시 들려온 귀여운 여자목소리에 최현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안내를 마친 드론이 위로 스윽 날아가 버리는 것과 동시에 골목 끝에 경찰차가 도착했다.
“……!!”
지은죄가 없는데도 긴장이 되는 건 역시 자신이 처한 상황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부족한 정보에서 비롯된 불안감이 긴장을 부추기고 있었다.
‘서울경찰청 소속이라는 무인정찰기, 한글이 써진 경찰차. 최소한 여기가 대한민국 서울인 건 틀림없군.’
SF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이 생긴 경찰차는 흰색과 검정색이 교차로 도색되어 있었고, 옆에 정확하게 <경찰>이란 한글과 라는 영문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휴…….”
비록 단편적이지만 친숙한 정보가 주는 안도감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차문이 열리고 두 경찰이 경찰차에서 내리자 최현우는 깜짝 놀랐다.
‘헉!’
숨이 턱 막힐엄청난 광경에 안경이 없어 잘못 봤나 싶어 눈까지 비볐다. 경찰차에서 내려 선 두 여자의 옷차림이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전신타이즈였던 것이다.
‘저…저 여자들 진짜 경찰이야? 서울경찰청이라고 그랬잖아? 우리나라 여경들이 저러고 다닌다고?!’
옆에 굵은 흰색 선이 들어간 검정색 전신타이즈는 같은 색의 경찰모와 각종 장비가 부착된 허리띠가 없었다면 결코 경찰복장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이고 선정적이었다.
복장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지만, 텀블러처럼 생긴 물통과 조그만 주머니 같은 걸 들고 서둘러 뛰어오는 두 여경의 엄청난몸매에 최현우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이 흘러 나왔다.
“우와……!!”
둘 모두 8등신의 훤칠한 키에 엄청난 볼륨의 몸매라 가벼운 움직임에도 가슴과 둔부가 사정없이 출렁거렸다. 최현우는 혹시나 오해를 살까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 상황 도대체 뭐지? 무슨 여경들 몸매가…, 이거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성추행법으로 몰리는 거 아냐?’
지나가는 여자 쳐다보는 것 마저 조심해야 되는 세상인지라두 여경 아니 경찰로 추정되는 두 여자를 감히 다시 쳐다볼 엄두가 안 났다.
그때 지금까지 겪은 이상한 기억들이 하나씩 순차적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꿈에서 깨어나라는 신호일까,아니면 이 모든 게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증거일까.
‘납치, 약, 마비, 강간, 포썸, 사정, 의식, 버림, 골목, 스마트폰, 똥배, 드론, 경찰, 미래,안경, 시력, 서울, 한글, 여경…….’
최현우의 머리는 떠오른 키워드들을 조합하며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돌아갔으나, 드론에서 들리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자 미처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담당경관인 마야순경입니다.고개를 들어보세요, 괜찮으세요?”
콧속으로 밀려드는 은은한 꽃향기에 머리가 상쾌해지는 기분을 느낀 최현우는 거부할 수 없는 뭔가에 이끌려 고개를 들었다.
‘헉!!’
코앞 정도는 아니지만 팔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마야>순경을 보자 최현우는 다시 숨이 막혔다.
옆으로 살짝 비껴서 쓴 경찰모 아래 몇 가닥 흘러내린 금발머리와 맑고 푸른색의 커다란 눈동자, 그리고 조막만한 얼굴에 자리 잡은 선명한 이목구비가 눈이 부시도록 예뻤기 때문이다.
“전 동료경관인 린순경입니다. 마실 물 필요하다고 하셨죠?”
은색의 원형 물통을 내미는 <린>순경의 목소리도 마야순경 못지않게 친절하고 다정했다. 최현우는 고개를 돌리다 다시 놀랐다.
‘세상에…….’
마야순경에 못지않은 미모의 동양계 린순경이 자신을 향해 걱정이 담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자 속으로 감탄을 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렇게 예쁜 여자들이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게다가 경찰이라니…, 몸매는 또 어떻…….’
자신의 노골적인 시선이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을 거란 걱정 따위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터질 듯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도 모자라 속이 살짝 비쳐 보이는 전신타이즈경찰복차림의 두 여경의 살인적인 자태에 코피를 쏟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다.
“체온이 조금 낮으시네요. 이거 덮어드릴게요.”
가지고 온 은색의 비닐조각 같은 걸 펴서 마치 안아주는 것처럼 감싸주는 마야순경에게서 다시 은은한 꽃향기가 풍겼다.
“아…, 고…고맙습니다.”
화장기 하나 없으면서 티클 하나 없이 매끈하고 뽀얀 마야순경의 예쁜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대로 굳어버린 최현우는 간단한 대답조차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옆에 있는 린순경도 대단한 미녀지만 마야순경은 진짜 반할 것 같다….’
반할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이미 반해버렸다. 북구나 슬라브계로 보이는 금발벽안에 혼혈처럼 동양의 단아함까지엿보여 친근하기까지 한 인상을 어떻게 거부한단 말인가.
“신분확인을 하려면 본인의 승인이 필요해요. 원하시면 여기 손가락을 대시고 승인한다고 말씀하세요.”
옆에 있던 린순경이 스마트폰과 유사한 투명단말기를 내밀었다. SF영화에서 보던 전형적인 기기의 등장에 최현우는 두 여경의 살인적인 매력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유리처럼 완전히 투명한 화면 가운데에 지문 아이콘이 있었고, 그 위에 ‘신분확인’이란 한글이 선명하게 표시되어있었다.
‘역시 미래인가?’
결론이 내려진 것이나 다름없긴 하나, 접고 마는 디스플레이가 상용화된 데다 완전자율운행이 눈앞이던 세상에 살고 있는 입장에서 아직 미래라고 단정하기에 섣부른 감이 있었다.
그러나 납치와강간은 아직 꿈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어 논외로 치더라도 눈앞에 있는 두 여경들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이보다 더 비현실적인 사실이 있을 수 있을까.
상황을 보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어처구니없는 복장을 한 두 여자가 진짜 경찰인지부터 의심해봐야겠으나, 천상의 미모와 살인적인 관능미에 이미 매혹된 상태라 이성을 유지하는 것마저 쉽지 않은 일이다.
“승인합니다.”
최현우는 선뜻 엄지를 찍으며 말했다. 의문과 상관없이 이 여경들의 친절을 거부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마야순경에게 푹 빠져버린 것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치긴 했으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게임이라면 NPC에 해당하는 경찰이 정보를 얻기 가장 손쉬운 존재는 아닌가.
그 원하는 정보를 마야순경이 자신의 단말기를 보면서 읽어주기 시작한다.
“이름은 유명, 나이는 16세, 거주지는 서울….”
“네? 제 이름이 뭐라구요?”
깜짝 놀라는 최현우의 반응에 두 여경이 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둘은 서로 쳐다보더니 마야순경이 자신의 단말기를 내밀었다.
“여기 실종신고 되었다고 인적사항이랑 사진까지 올라와 있어요.”
처음은 일부러 놀라는 척 한 거지만 이번엔 진짜 놀랐다. 마야순경의 단말기에 <유명>이라는 이름으로 오른 사진은 1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아이돌처럼 반듯하게 잘생긴 남자애였기 때문이다.
‘이건 또 무슨 전개야?’
두 미녀여경이 장난치는 게 아니라면 단말기에 있는 정보는 자신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저…저기 혹시 거울을 볼 수 있을까요?”
물끄러미 단말기를 바라보던 최현우의 뜬금없는 요청에 마야와 린순경은 서로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거울은 왜요? 뭐가 이상해요?”
곁에 찰싹 달라붙어서 걱정해주는 마야순경의 행동이 지나치게 친절하고 다정했으나 지금은 이런 것에 현혹될 상황이 아니다.
“여기 거울이요.”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린순경이 서둘러 자신의 단말기를 조작해 거울모드로 바꿔 내밀었다.
“……!!”
최현우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진짜 유명이라는 16살 남자애의 사진과 똑같았던 것이다.
‘이 무슨…….’
제아무리 냉철한 사람일지라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생전처음 보는 타인의 것이라면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유명씨, 왜 그러세요? 뭐가 잘못됐어요?”
마야순경이 다시 자신의 일처럼 살갑게 걱정해준다. 린순경 역시 두 무릎을 꿇고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혹시 기억이 안나거나 그러신 거 아녀요?”
두 미녀여경의 살인적인 향기에 정신을 차리기 쉽지 않았으나 최현우는 린순경의 말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 아까 드론이 내가 실종됐다고 했어. 그리고 분명 지문을 찍고 음성까지 확인한 결과가 이거라면….’
최현우는 빠르게 자신의 몸을 살폈다. 똥배가 사라진 몸이길쭉하고 매끈한 것을 보면 얼굴뿐만 아니라 몸까지 통째로 바뀐 것이 분명했다.
‘안경을 안 써도 잘 보이는 게 몸이 바뀌어서 그랬던 거구나!’
거울에 비친 얼굴을 여기저기 만져보고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봤다. 꿈에서도 가지기 힘든 수준의 잘생긴 얼굴이 자기 것이라니.
이제 선택의 순간이다. 유명이라는 16살 남자애 행세를 할 것인가, 본래의 신분을 말해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것인가.
“혹시 무인정찰기가 유명씨를 발견할 때 어떤 상태셨어요?”
진심어린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마야순경이 시의적절한 질문을 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최현우는 일단 사실대로 대답하기로 마음먹었다.
“음…, 그 전 상황은 좀 오락가락하는데요. 막 눈을 뜬 직후였어요.”
“정신을 잃었던것 때문에 그럴 수도 있으니 빨리 병원으로 가요. 저희가 모실게요.”
상태를 심각하게 여긴마야와 린순경은 대답을 듣지 않고 양쪽에서 부축해 일으켰다. 그때 최현우의 양 팔꿈치에 물컹한 뭔가가 꾸욱 닿았다.
‘헉!’
양쪽에서 한없이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고 포근한 감촉이 모든 의문과 걱정 그리고 고민을단번에날려버렸다.
*****
“흐음…….”
응급실 담당의는 의료기기의 화면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인도나 이란계 혼혈로 보이는 여의사는 커다란 눈과 진한 피부색 때문에 의사인 척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래인 건 둘째 치고, 여기가 진짜 한국이 맞긴 맞나?’
다인종국가인 미국 같은 곳이라면 모를까, 마야순경과 여의사와 같이 전형적인 외국인들이 한국어와 한글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으니 의문이 들 만하다.
담당의사는 침대 옆에 있는 의료기화면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조작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검사결과로는 전혀 이상이 없어요.”
걱정했던 것과 달리 바랐던 결과가 나온 것에 안도한 최현우는 여의사의 투명앞치마속의 흰색전신타이즈차림에 눈길을 두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만 했다.
흰색이라 그런지 마야와 린순경의 검은색 전신타이즈보다 더 속이 잘 비쳐서 노브라인 가슴은 젖꼭지가 언뜻 보였고, 사타구니는 손바닥만 한 흰색팬티 옆으로 삐져나온 거뭇한 음모까지 보였다.
‘경찰복도 어이가 없지만, 의사는 왜 이런 복장이야? 보는 나야 좋긴 한데…, 여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걸 입고 다니지?’
마야순경과 함께 응급실로 들어올 때 이곳이 공립병원이란 걸 분명 확인했다. 그렇다면 의사도 공무원일 테니 전신타이즈가 공무원들의 제복일지 모를 일이다.
제복이 전신타이즈인 것은 둘째 치고 왜 속이 비치는 것을 입는지 모를 일이다. 정작 경찰차를 타고 병원으로 오면서 보였던 차창 밖의 풍경은 여경이나 여의사의 옷차림만큼 놀랍지 않았다.
워낙 가까운 거리를 이동하느라 일반화할 수는 없겠으나, 거리가 지나치게 깨끗하고 잘 정비된 것이 눈에 뜨일 뿐 SF영화처럼 눈이 돌아갈 정도로 휘황찬란하거나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로 전광판과 같은 광고나 간판 등이 매우 절제되어 있는 것이나 아름드리 가로수가 거리에 품격을 더해주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기분은 어때요?”
담당의사의 목소리는 마야와 린순경처럼 부드럽고 다정했다. 상대가 여자라 더 그렇게 느껴질 수 있으나 의사의 이런 살가운 친절은 처음이다.
“좀 어리둥절해서 그렇지 나쁘지 않아요.”
“혹시 기억상실증 같은 건가요?”
마야순경이 자신의 일처럼 애가 타서 물어보는 모습에 최현우는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이라면 이런 경우 보호자가 올 때까지 형식적으로 대하거나 병원에 넘기는 것으로 임무가 끝날 텐데, 마야순경은 마치 연인처럼 곁을 지키고 있었다.
담당 여의사의 친절 정도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남자에게 판타지게임 속 여신이 현신한 것 같은 마야순경의 이런 행동은 너무 치명적인 유혹이다.
“그건 아닌 거 같아요. 유명씨 뇌의 상태는 몸의 다른 부위와 마찬가지로 아주 정상이에요. 정신분열이나 과대망상 증상도 전혀 없어요.”
담당의사가 의료기화면의 한 쪽을 가리키면서 설명하는 것을 보자, 최현우는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검색해서 알아보면 될 일이지만 일부러 의사에게 물었다.
“근데요…, 그 기계 하나로 그런 것까지 다 알아낼 수 있어요?”
마야순경은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고, 담당의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러더니 화면의 한 수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와 여기 수치가 그대로인 거 보이죠? 만약 실제기억과 다른 생각이나 의식이 나타나면 이 그래프가 변해야 해요.”
“그럼 유명씨가 진짜 몰라서 그걸 물어봤다는 말씀인가요?”
마야순경이 담당의에게 되묻는 것을 보고 질문내용과 관계없이 최현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거짓말을 했다면 바로 들통 났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휴…, 좆 될 뻔했네.’
이러면 모르면서 아는 척하거나 반대로 알면서 모른 척 하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다.
“저도 더 이상은 모르겠어요. 보호자가 오면 동의를 받아서 정신과전문의에게 진료를 받아보는 수밖에 없겠어요.”
담당의사는 자신으로서는 더 이상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의 모아진 풍성한 젖무덤에 최현우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쏠렸다.
“참, 유명씨 가족들 면회가 가능할까요?”
마야순경의 말에 최현우는 속으로 뜨끔했다. 그 가족은 몸의 주인을 찾는 것이지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만…,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응급실이라 면회시간이 지났지만 보호자가 있어야 하니까 제가 연락해놓을게요.”
지금 상황에서 만나기 가장 껄끄러운 상대가 바로 몸 주인의 가족이다.
“유명씨, 제가 가족에게연락할까요?”
다정하게 묻는 마야순경의 예쁜 얼굴이 너무 사랑스러워 최현우는 심장이 쿵 흔들렸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시간이다.
“아, 저기….”
최현우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을 꼭 쥐는 것을 보고 마야순경이 눈치껏 담당의를 불러 세웠다.
“선생님, 유명씨가 부탁할 게 있나봐요.”
“예? 뭐든 말씀하세요.”
어떻게 말해야 자연스러운 것일까, 자신의 심장박동수를 비롯한 각종 정보가 의료기화면에 고스란히 표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거짓말은 애초에 불가능하니 선택은 오직 진실뿐이다.
“저… 사실은 제 이름이 유명이라는 걸 오늘 마야순경님이 알려줘서 처음 알았어요. 심지어 제 얼굴도 사진이랑 거울보고 알았구요. 그래서…….”
최현우의 담담한 고백에 두 여자는 깜짝 놀라며 똑같이 손으로 벌어진 입을 가렸다. 담당의사는 당연히 의료기화면을 살폈고 좀 전에 가리켰던 수치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경우지…?”
난감해하는 담당의사의 반응에 마야순경은 그 크고 예쁜 눈에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러더니 꼭 쥐고 있던 최현우의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살며시 문지르며 애처롭게 속삭였다.
“유명씨…….”
경찰의 역할과 임무를 아득히 넘어서는 마야순경의 행동에 최현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런 미녀가 나한테 왜…?’
자신의 몸이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아직 완전히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각과 정신은 여전히 39살 모태솔로인 남자가 보일 반응은 별다를 것이 없다.
더구나 이런 그린라이트는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기에 초고도 근시에 배불뚝이 평범한 직장인이 제대로 대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유명씨가 뭘 원하시는지 알겠어요. 일단 최대한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으니까 가족들하고 면회는 내일로 미루도록 하죠. 그리고 몇 가지 살펴볼 게 있으니까, 마야순경님도 잠시만 더 계셔주세요.”
“예, 선생님!”
담당의사의 부탁에 마야순경은 뭐가 그렇게 기쁜지 발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쩌면 미소까지 이렇게밝고 환할까.
‘맞아, 게임에서도 보통 처음 만나는 여자가 히로인이잖아? 그럼 마야랑 잘하면……??’
(다음 2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