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더러운 종자새끼.. 일어 나... "
" 퍼억! "
구석에 쳐박혔다 꾸물거리며 일어나는 대머리의 멱살을 잡고, 증오가 서린
만기의 펀치가 작렬하자.. 다시 꼬꾸라지는 대머리의 머리위로 테이프가 우
루루 떨어져 내린다. 그런 광경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파마머리가
정신을 차린 듯 카운터아래의 비상벨을 재빨리 눌러갔다.
" 처얼버억! "
" 어푸푸!! "
만기가 파마머리가 가져 온 물을 끼얹자 대머리가 고개를 흔들며 깨어났다.
남은 한쪽 눈두덩마져 퍼렇게 멍이 든 대머리의 얼굴이 밥맛없게 일그러진
다. 거기다 바로 눈앞에 새파란 빛을 뿜는 칼날을 보자, 어지간한 대머리도
공포로 흰 자위가 번뜩인다. 생긴 몰골 탓에 일찍부터 이 바닥에 굴러 왔지
만, 이런 괴물은 처음이다. 그래도 한 주먹한다는 행동대원 셋이 제대로 주
먹한번 내지르지 못하고 뻗어버리다니...
" 셋을 셀동안 테잎을 가져와! 안 그러면 네 한쪽 남은 눈알마저 후벼 줄테
니까.. 난 성미가 좀 급해... 하나.. 두울... "
" 아..알겠습니다.. 드..드리겠습니다. 잠시만... 잠시만요 "
구겨진 몸을 억지로 추스리며 허겁지겁 안쪽 밀실로 향하는 대머리를 만기
도 뒤따랐다. 복도 구석 코너에 선 대머리가 벽을 한쪽으로 미니 소리도 없
이 컴컴한 밀실이 입을 벌렸다. 스위치를 켜보니 지하 아방궁처럼 널찍하고
장식품도 호화스럽다.
저 안쪽에 더블침대가 보이는데, 그 곳에서 조카인 유라가 몸쓸 짓을 당했
다는 생각이 들자, 허리를 숙이고 TV장식장 밑을 뒤지는 대머리를 그대로
찔러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이값을 하는지 애써 참아내는
만기... 떨리는 손으로 내미는 테잎을 받아 쥔 만기가 대머리를 앞장세우고
입구로 나오다가 흠칫놀란다. 어느새 들이닥쳤는지 10여명의 시커먼 양복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한 복판에 머리를 올백으로 깔끔하게 넘긴 갓 마흔 정
도의 점잖은 사내가 의자위에 앉아 있다.
앞장 서 가던 대머리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한편으로는 안도가 되면
서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보스의 추궁이 겁도 난다. 평소
에 보스가 강조한 조직의 룰을 어긴 부분이 켕기는 것이다. 가운데 앉은 사
내의 양복과 코트사이에 걸친 흰 머플러가 산뜻하고, 올려다 보는 잿빛 눈
동자가 무표정하다. 직감적으로 상당한 거물임이 느껴진다.
" 선생! 우리 일단 통성명이나 하는 게 어떻겠소? 우리 아이들이 실수를 했
다면 내 사과하리다. "
" ...... "
" 아시고 오신건지 모르겠지만, 난 이 종구라 하오.. 젊었을 적엔 '승냥이
'라 불리웠지요.. "
잠깐 망설였던 만기였지만, 이 상황을 그냥 얼버무리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자, 오래 묻어 두었던 자신의 정체를 노출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
에 도달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 난 서 만기라 하오.. 당신 말마따나 젊었을 적엔 남들이 '흑표'라 부릅디
다. "
" 억!! "
어떠한 사태에도 냉정을 잃지 않을 것 같던 승냥이파 보스 이 종구가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 정말.. 정말로 이십년전의 '흑표'... 종로의 그 유명한 '흑표' 선생이란
말씀입니까? "
" 글쎄.. 유명했던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종로의 '타이거' 형님밑에
있었던 건 사실이오만.... "
" 형니임! 인사가 늦었습니다.. 승냥이 이종구 처음 뵙습니다. 절 받으십시
오.. "
이 종구가 그 자리에서 바닥에 두 손을 집고 이마를 갖다대자 벽쪽에 도열
해 있던 양복들이 동시에 바닥에 코를 박는다. 눈이 휘둥그래진 대머리도
얼른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엎드린 대머리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다
. 이젠 죽은 몸인 것이다. 하늘 같은 대보스께서 저렇게 이마를 조아리는
거물의 가족에게 손을 댔으니...
" 어허! 왜 이러시오? 난 이미 그 세계에서 손을 뗀지 오래인 한낱 야인일
뿐이오.. 자.. 일어나시오... "
" 감사합니다.. 형님! 자.. 이리 앉으시지요.. 아니.. 참! 자리를 옮기십시
다. 이 곳은 너무 누추해서요... 야! 넙치! 이쪽은 네 구역이지? 가까운 곳
에 자리부터 펴! 귀한 어른이시다! "
미처 만기가 뭐라기도 전에 양복 몇이 바쁘게 뛰쳐나간다.
" 아니! 형님! 그게 정말이십니까... 이런... 이봐 족제비! "
" 넵! 형님! "
" 밖에 멍게 있지? 이리 끌고 와!! "
비디오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꽤 호화스런 룸살롱 VIP실 안이다. 허리를 잔
뜩 구부린 대머리가 들어오는데, 들어오면서부터 벌써 얼굴빛이 사색이다.
" 멍게! 네 이놈!! 이 분이 말씀하시는 게 전부 사실이냐?.. 양가집 여중학
생을 폭행하고 테이프까지 찍어두었다며? "
" 보스! 주.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
허리를 무릎까지 굽히는데 다리를 벌벌 떨고 있다.
" 이 노옴!! 내가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도.. 어떤 일이 있어도 양가집 부
녀자나 미성년자는 건드리지 마라 그랬거늘... "
" ....!!.... "
" 흑표 형님! 그래 테이프는 받으셨다구요? "
" 그래! 내가 갖구 있네.. "
" 그것말구 또 있을겝니다.... 멍게!! "
" 네..네! 보스! "
" 몇 개 더 복사해 뒀어? "
" 하..하나 더 있습니다.. "
" 지금 당장 갖구와! 10분이내다.. 꺼져!! "
숨을 헐떡이며 바치는 테잎을 정중히 만기에게 건넨 승냥이...
" 이젠 없을 겝니다.. 그리고 형님! 모든게 저의 불찰입니다.. 제가 사과드
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제 식구가 저지른 일이니 나머지는 제가 다
스리도록 허용해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
이 종구가 응접탁자에 양 팔을 집고 다시 허리를 숙였다.
" 으음! 알겠네.. 다른 잡음만 없도록 부탁하고 난 기다리는 분이 계셔서
이만 일어서야겠네.. "
" 잠깐만요.. 형님! 잠깐만 말미를 주십시오.. 형님 보시는 앞에서 마무리
할 것이 있습니다. "
일어서려던 만기가 할 수 없이 궁둥이를 다시 내렸다. 이종구가 뒤를 돌아
다보며 눈짓을 하자, 어느새 준비했는지 탁자 맨 끝에 흰천이 깔리고 작두
가 놓여진다. 대머리의 다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후들거린다.
" ...발목!! "
차가운 한마디가 떨어지자마자 양복 둘에게 겨드랑이를 잡힌 대머리가 끌려
나오는데.. 거의 실신한 표정이다.
" 가만... 내가 자네를 동생이라 불러도 되겠는가?.. "
" 네! 영광입니다! 형님!.. 그리고 이왕 동생이라 불러주셨으니.. 가끔씩은
들리셔서 제가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간청드리겠습니다.. "
" 알겠으이.. 그러나 난 어디까지나 야인일 뿐이네.. 그리고, 동생! 나도
부탁하나 함세.. 사실 그 아이는 나하고 핏줄이 섞인 아이네.. 생각같아서
는 죽여도 시원찮은 놈이지만, 혹 나중에라도 그 아이가 이런 체벌을 알게
된다면.. 그리 좋아할 것 같지는 않네.. 그렇다고 그냥 넘기기도 뭣하니 작
은 걸로 바꿔주면 안되겠나.. "
" 아! 그렇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됩니다.. 알겠습니다. 형님!..
멍게 네 이놈! 좋은 형님을 만난 덕분으로 알아라.. 족제비! 저 놈의 오른
손 검지를 잘라서 형님께 바쳐라.. "
만기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강표는 앞에 놓인 검은 테이프 두 개를 착
잡한 표정으로 내려다 본다.
" 이번엔 동생의 신세를 졌네... 자네.. 부탁하나만 더 함세... "
" 네.. 형님 말씀하십시오.. "
평생을 형에게서 구박만 받던 만기였던지라 이번 일은 비록 조카는 안됐지
만, 뒷수습을 위해 쫓아 다니는 발걸음은 무겁지만은 않았다. 처음으로 형
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다.
" 이제 우리 유라의 마음상처를 다스리는 일만 남았네... 해서... 이 번일
은 자네와 나, 지혜 셋이만 알고 무덤까지 가져가야하는 비밀로 해 주게...
제수씨까지도 말이네... "
" 아무렴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형님! "
" 유라야... 유라야?.. 언니야... 잠깐 일어나 봐... " 오
늘도 점심때 억지로 죽 반그릇만 넘긴채 까부라져 누워 있는 유라를 간신히
일으킨 지혜는 창가로 데려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꺼멓게 탄 눈으로 바라
보니 앞 정원에서 아빠가 뭔가 태우고 있다. "
모두 깨끗이 해결됐어.. 유라야... 지금 태우는 게 널 찍었다는 테이프란다
. "
바라보고 있던 유라의 눈에 또 눈물방울이 맺힌다.
" 이번 일은 나하고 아빠만 알고 아무도 몰라... 엄마나 준호도 모르고 있
어... 아빠가 직접 나서서 전부 해결하셨단다. 아빠가 고생많으셨어... 그
러니 이제 아빠를 봐서라도 과거를 잊고 빨리 정신을 차려주었으면 해...
예전의 밝고 명랑한 우리집 막내 유라로 말이야... "
돌아선 유라가 지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다시 울음을 터트린다.
" 언니! 하지만, 난 예전의 유라가 아니잖아... 어떻게 하면 좋아.. 흑..흑
..흑... "
" 괜찮아... 뭐가 달라졌니?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어... 넌 길가다 폭행을
당한거 하고 꼭 같은 거야.. 육체적 상처야 얼마 지나면 다 아물어.. 문제
는 니 마음이야... 유라 네가 스스로 네 자신을 학대하고 번민하면서 그 일
로부터 빠져나오지 않으려는 그게 더 큰 문제란다.. 언니가 하는 말, 이해
가 되니? 유라야? "
지혜는 억지로 고개를 꺼떡이는 유라를 꼬옥 안아주었다.
이틀후, 유라는 다시 몸을 추스려 학교로 나가서, 동급생들이 모두 얼마나
아팠냐고 걱정해 주는 말을 들으면서 비로소 제자리로 차츰 돌아 온 자신을
느꼈다. 아니, 한가지 변화가 있었다. 유라는 잘 몰랐지만, 유라의 나흘간
의 결석과 희수의 입원으로 무언가 감을 잡은 선영이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떠나버린 것이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어린 유라에게 그 엄청난 사건은 그렇
게 쉽게 잊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날밤도 유라는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자마자 다시 그 날의 악몽이 테이프를 재생하는 것처럼 되살아나 비
명을 지르며 일어나고 말았다.
" 저... 서유라누나가 누구에요? "
학교 정문을 얼마 앞두고 명희랑 걸어가는 유라의 앞에 왠 꼬마하나가 가로
막는다.
" 응! 난데... 왜 그러니? "
" 어떤 아저씨가 이거 주고 오래요.. 혼자 보래요.. "
흰 봉투를 하나 쥐어주고난 꼬마는 그대로 쏜살같이 달아나버렸다. 희수와
의 뜨거운 데이트가 있은지 이틀 뒤다. 무언가 별로 좋지않은 느낌이 들어
호기심을 보이는 명희를 떨치고 일부러 화장실까지 가서 펼쳐 본 유라는 그
만 종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온 몸이 와들와들 떨려 온다.
[창작] 첫경험 <석류가 터질때> 3부
[ 네 이름이 서유라맞지? 난 네가 그저께 밤, 네 남자친구와 00비디오방에
서 무슨 일을 했는지 다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아니,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장면을 몰래카메라로 찍어 테이프까지
만들어 두었다. 테이프를 찾아가지 않겠니? 그럼, 오늘 오후 6시, 그 비디
오방 바로 그 방으로 와서 찾아가라... 만약 오지 않는다던가, 이 쪽지받은
사실을 경찰이나 가족, 누구한테든지 이야기했다가는 바로 가지고 있는 테
이프를 수백장 복사해서 뿌려버릴테니까... 잘 판단해서 해라.. 흐흐...
참, 올 때는 교복입은채로 학교에서 바로 와야 한다... 그럼.. 기다리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