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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화 〉동거 혹은 사육 (1) (84/87)



〈 84화 〉동거 혹은 사육 (1)

현우는 용달 차에 올라타고 안전벨트를 맸다.

"출발해주세요."

"예약할 때 말한 거기로 가면 되죠?"

"네네."


덜컹이는 소리를 내며 굴러가기 시작하는 1톤 트럭.

짐을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가장 큰 우체국 박스로 다섯 박스가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버려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가 애매했던 탓이다.


'아! 롱패딩! 그것도 가져가야 해! 할머니가 예전에 사주신거라서...'

부피가 큰 겨울옷들은 헌옷 수거함에 넣어버리자는 현우의 제안에도 혜지는 기어이  몇 벌을 챙겼다.


할머니가 생전에 선물해준 후줄근한 검정색 롱패딩, 첫 월급으로 샀다는 울이 핀 니트 등등...

그녀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담긴 옷이었겠지만 현우의 눈에는 그저 조만간 처분해야할 쓰레기로 보일 뿐이다.

[나 : 나도 출발! 집 도착했어? 난 10분 내로 도착해!]


현우는 언짢은 기분을 추스르며 먼저 택시를 태워보낸 그녀에게 카톡을 보냈다.

용달은 2인승이었고, 그녀를 짐칸에 실을 수는 없었기에 현우가 용달 기사와 동승하기로 했다.

[혜지는내운명♡ : 웅웅!!!! 난 곧 내려!!! 기다리고 있을게용♡♡♡]

카톡을 보내자마자 바로 그녀에게서 답장이 온다.


그녀가 바꿔놓은 '혜지는내운명'이란 애칭이 거슬렸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 : 길에 있지말고 먼저 들어가있어♡ 비밀번호 알려줄테니까]

잠시 고민하다가 건물 입구 비밀번호와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현우.


그녀를 감동시킬 말도 잊지 않고 덧붙인다.

[나 : 여보도 이제 이 집 안주인인데 비밀번호 알고 있어야지ㅎㅎ]

너는 특별하다는, 너는 나의 동반자라는 말은 비록 허울 뿐인 말일지라도 그녀를 설레게 할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트로 도배된 이모티콘들이 연달아 화면을 가득 채웠다.


[혜지는내운명♡ : 고마워여 여보 ♡_♡ 외우고 바로 지울겜!!!]


그녀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것이 딱히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집에 들이는 강아지에게 문을 여는 재주가 생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으니까. 여차하면 언제든 비밀번호를 바꿀 수 있기도 했고.


[혜지는내운명♡ : 헐 택배와잇당!!! 짱 큰 박스 세개나 있어!!! 내가 집에 옮겨놓으까?]

잠시 답장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가 현관에 놓인 택배박스의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저께 시킨 조교 도구들이 드디어 도착한 모양이었다.

[나 : 응! 무거우면 무리는 하지말구ㅎㅎ 신발장까지만 옮겨줘! 박스에 먼지 많으니까 안까지는 옮기지마]


[혜지는내운명♡ : 넹넹]


현우는 그녀에게 택배 박스들을 옮겨줄 것을 부탁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의 바지춤이 조금 불룩한 것이 방금 집어넣은 휴대폰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후우..."


박스 안에 든 것이 채찍과 수갑임을 뻔히 알면서도 제손으로 이를 옮기는 여자라니.


어디 그뿐이랴. 거기에는 목줄과 꼬리 플러그를 비롯하여 유두 집게나 클리 흡착기 같은 매니악한 물품들이 가득했다.


"다음 교차로에서 유턴하시고 우측 골목으로 들어가주세요. 네비 경로보다 그게 더 빨라요."

"예예~"


현우는 기사에게 지름길을 알려주고는 눈을 감았다.


짜릿한 고양감과 흥분감이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의 전신을 감싸안았다.

오늘밤을 상상하는 그의 바지춤이  크게 부풀어올랐다.




*




"여기 6만원이요."

현우는 용달 기사에게 비용을 지불하고는 현관문을 닫았다.


 분도 안 되는 거리에 고작 2층까지 짐을 옮겨준 것 치고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집에서 자신을 반기는 강아지를 바라보자 그 생각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래, 이건 단순히 짐을 옮기는 비용만은 아니었으니까.

"자기 짐은 현관 밖에 놔뒀다가 나중에 천천히 풀자. 아예 복도에  보관해도 되고."

"아... 그럴까? 그럼 나 당장 쓸  모아놓은 박스들만 안으로 옮길게. 봄옷이랑 화장품 담은거."

혜지는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복도로 나가 박스를 들고왔다.


어차피 겨울옷이야 몇  간은 입을 일이 없었기에 천천히 정리해도   같았다.

"화장실 앞에  청소해놨으니까 거기  풀고 화장품이나 속옷은 안방에 둬."


"와, 방 하나가 다 내 짐 두는 창고야?"


혜지는 자신이 살았던 자취방만한 창고를 둘러보며 미소지었다.

지금부터 이런 넓은 집에서 산다니. 그것도 사랑하는 오빠와 같이.


왠지 근사한 신혼집에 입주하는 새댁이  것만 같은 기분이라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대충 정리하고 나와. 저녁은 시켜먹자."

"네에!"


현우는 방에서 박스를 풀어헤지는 그녀를 구경하다 거실로 나왔다.

그에게도 풀어헤칠 박스가 있었다.

그는 혜지가 손수 옮겨놓은 커다란 박스들로 걸음을 옮겼다.

찌익 -

본인외 개봉금지라 적힌 박스를 뜯으니 보이는 거무튀튀한 구속구들.

왠지 박스가 묵직하길래 구속구가 들어있으려나 싶었는데 예상이 들어맞았다.

검은색 광택을 발하는 단단한 플라스틱 재질에 금속고리가 달린 수갑과 족갑들은 후기에서 말한 것처럼 튼튼해보였다. 성인 여자의 힘으로는 절대로 풀어낼 수 없을 만큼.


현우는 사지를 구속하는 고리 달린 봉을 마지막으로 첫 박스의 확인을 끝내고는 다음 박스를 뜯었다.


찌이익 -


뜯을 때부터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나던 두 번째 박스에는 그녀를 쾌락으로 절여버릴 도구들이 담겨 있었다.

야동에서 자주 등장하는 핑크색 로터, 리모컨으로 조절하는 무선 바이브, 회전하는 돌기가 달린 딜도...


박스를 꽉 채운 기상천외한 성인용품의 종류는 수십 개에 달했다.


그리고 현우가 기다리던 물건들은 세 번째 박스에 있었다.

목줄. 동물귀 머리띠와 여러 색깔의 꼬리.

그녀를 후려갈길 채찍과 그녀의 항문을 제2의 성기로 만들어줄 각종 애널용품들.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물건들을 드디어 손에 넣었다.


"오빠! 나  치웠어!"


게다가 이 물건들을 사용해볼 훌륭한 장난감도 손에 넣었고.

정리를 끝낸 그녀가 밖으로 나와 신기하다는  바닥에 놓인 물건을 둘러봤다.

"그럼 나랑 이것들좀 같이 치우자. 비닐 포장된건 뜯어서 거실에 옮겨줘. 비닐은 빈 박스에 버리고."

"아, 헐... 살 때도 많다 싶었는데 짱 많아."


"그치? 다 자기꺼야. 내 강아지가 차고, 쓰고 할 것들."


"음... 이렇게?"

혜지는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강아지귀 머리띠를 쓰고 환하게 웃었다.

오빠가 여러 차례 말하던 목줄과 꼬리도 눈에 들어와 집어들었다.

"이건... 오빠가 해줘."


"지금?"

"아... 지금 하고 싶으면 지금 해도 되고, 아니면 나중에 해도 되고. 오빠 하고 싶은 대로."

"하... 자기  날 꼴리게 하네? 그렇게 목줄이 차보고 싶어?"

"오빠 이거 엄청 해보고 싶어 했잖아! 난 언제든 오빠 애완동물 해줄 수 있으니까... 지금 바로 채워도 돼."


혜지는 말을 마치고 수줍게 목줄을 건넸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현우의 보살핌을 받으며 그녀의 의존성향은 더 커져버렸다.


오늘 아침, 현우의 도움을 받아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혜지.

혼자라면 하기 어려웠을 말을 단호하게 매니저에게 보냈으며, 평소 쌓아왔던 불만도 현우의 응원 아래 모조리 토해냈다.

그맇기에 현우에게 커다란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그녀였다.

만일 오빠가 없었다면.

아침부터 훌쩍거리기만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출근했지 않았을까.


얼굴도 보기 싫은 매니저에게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고, 어떻게든 매니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눈치를 살폈을 것이 뻔했다.

그녀는 그런 상상을 이어갈수록 자신을 구원해준 현우에 대한 고마움이 샘솟았다.


"자기가 그렇게까지 말해주니까 꼴리기도 꼴리는데 정말 감동적이야. 사랑해."


헤실거리는 그녀를 슥 훑다가 그녀의 복종심을 칭찬하는 현우.

먼저 목줄을 채워달라 할 정도의 대단한 복종심이었지만 아직 만족하기에는 일렀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목줄을 거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눈앞에 두고도 재롱을 부릴  아는 강아지였으니까.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칭찬이었다.

"에이, 뭘.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  벗을까?"


"아니야. 말은 고마운데, 일단은 정리부터 하고 이따 저녁 먹고 해보자. 이렇게 갑작스럽게 시작하면 좀 산만할  같아서... 이따 제대로 각잡고 해볼래."

"아, 응! 오빠가 그러고 싶으면 그러자!"

혜지는 머쓱하게 웃으며 볼을 긁는 현우를 바라보다 다시 목줄을 내려놓았다.

오빠의 제대로가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지만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해줄 수 있었으니까. 해주고 싶었으니까.

인격장애가 촉발시킨 그녀의 의존성은 이젠 뭐라 형용키 어려운 감정으로 재조립되었다.


신뢰를 넘어선 신앙. 의존을 넘어선 복종. 그리고 단순한 사랑을 넘어선 운명적 사랑.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아끼지 않는 오빠였기에.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본 무조건적인 호의였기에.


그녀는 달콤한 목소리로 사랑한다 말해주는 남자친구를 위해 어떤 명령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럼 이것들부터 치우자. 난 포장 벗길 테니까 자기는 하나씩 거실 바닥에 진열해 봐.  눈에 딱 보이게."

"옙! 알겠습니다!"


혜지는 현우가 건네주는 물건들을 받아 거실을 오고갔다.

한 여자의 인생을 파괴시킬 물건들이 당사자의 손으로 옮겨진다.


포장 제거를 끝낸 현우가 운반을 거들자 세 박스 분량의 물건들이 금세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와... 보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네. 진짜 미쳤다."

"헤... 많긴 하다. 이걸로 우리 오빠 해보고 싶은거 하나씩 다 해보자!"

"당연히 그럴거야. 저녁은 뭐 먹을까. 어제가 자기 집에서 마지막 날이었으면 오늘은 내 집에서 첫 날이잖아. 또 파티해야지."


현우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서두를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이미 감금은 이루어졌고, 앞으로는 남는게 시간이었으니까.

절대로 도망치거나 배신한 염려가 없는, 사랑에 눈이 먼 강아지를 얻기 위한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아니, 사육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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