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4화 〉붕괴 1일차 (5) (74/87)



〈 74화 〉붕괴 1일차 (5)

1.

현우는 고개를 쳐박고 비통하게 흐느끼는 혜지를 내려다봤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외로움이 뭐길래.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의 인생을 먹어치웠다.

한평생 그녀를 따라다니던 결핍이, 그리고 그 결핍이 피워낸 정신병이 결국 그녀의 인생을 나락으로 이끌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아니  명의 지성체로서의 최소한의 이지도 남아있지 않는  했다.

세뇌의 단계를 끌어올리기에는 그야말로 최적의 상태가 아닐 수 없었다.

"후... 일단 머리 박고 반성하고 있어 봐. 잠시 나가서 뭣좀 챙겨올 테니까."

"흐윽... 네... 제발요... 흑... 제발..."

현우는 연신 제발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혜지를 뒤로 하고 화장실을 나섰다.

방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건을 챙기는 그의 만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자그마한 쟁반에 놓이는 박스테이프와 유성매직, 그리고 그밖의 여러 잡다한 것들.

그녀를 조교하는 데에 사용할 오늘의 조교도구다.

현우는 마지막으로 휴대폰까지 챙기고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여전히 고개를 쳐박고 훌쩍이고 있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그런 그를 반겼다.

쟁반을 세면대 선반 위에 내려놓고는 휴대폰의 녹음 기능을 켜는 현우. 오늘의 모든 대화는 따로 쓸 곳이 있었기에 녹음해둘 속셈이었다. 이따 그녀의 눈을 가린 뒤에는 영상도 촬영할 속셈이었고.

그녀를 일으키기 전에 휴대폰의 무음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하고는 그녀가  수 없는 구석진 곳으로 치웠다.

"고개 들어."

"흐읏... 흡..."

흘러내린 눈물과 침으로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으나 현우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담담히 그녀가 해야할 일을 지시할 뿐이다.

"네 앞에 종이랑  보이지? 넌 말로만 해서는 도저히 기억을  하는 것 같아서 가져왔어. 네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지금 얼마나 미안한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거기에 적어. 네가 얼마나 성의를 보이는지 보고 나도 어떻게 할지 정할 테니까."

혜지는 눈앞에 놓인 A4용지를 바라보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잘못을 용서 받을 수 있는 기회다. 그토록 바라던 기회가 찾아왔으니 젖먹던 힘까지 다해야 했다.

"학교 다닐 때 반성문 같은거 적어본 적 있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으니까 잘 생각해서 적어. 알아들었어?"

"흑, 네. 알아들었어요."

"그럼 뒤로 돌아. 엎드려서 화장실  보면서 써. 시작!"

혜지는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눈 앞을 가득 메우는 하얀 벽과 그보다 더 하얀 종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화장실 속에서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텅 빈 종이를 깨알 같은 글자들이 메꾸어나간다.

한 글자,  글자 반추해가며 혼신의 힘을 다해 적어내는 단심가는 주인을 향한 애끓는 충절을 담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못나고 모자란 사람인지, 또 그런 자신에게 오빠의 사랑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러니 제발 용서해달라는 구구절절한 애원 뒤에는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잘못에 대한 참회와 앞으로의 다짐이 뒤따랐다.

부족한 글재주 탓에 중구난방으로 튀어나가는 산만한 글이었지만 그녀의 진심만큼은 절절히 녹아있었다.

"주인님... 다, 흑... 다 적었어요."

"자신 있어? 방금 적은게 네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확신이 들어? 그런  같으면 나한테 주고, 아니면 다시 적고. 종이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현우는 그녀가 적어낸 글을 볼 생각도 않고 질문부터 던졌다.

우유부단하고 줏대 없는 여자가 불안해질 수 밖에 없는 질문을.

보나마나 이것이 과연 최선인가 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겠지. 의심은 곧 불안을 키울 것이고 불안은 곧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될 터.

말을 듣자마자 모든 행동이 멎은 채 꼼짝도 못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종이가 필요할 듯 싶었다.

단  번밖에 제출 기회가 없는 답안지였으니, 최선의 정답을 적어냈다는 확신이 없으면 결코 제출하지 못 할 것임이 분명했다.

"... 죄송해요. 다시... 적을게요."

"그럼 방금 네가 적은건 대충 적었다는 소리야?"

"아니에요! 잘 적었는데... 아니, 잘 적으려고 했는데..."

"적는다고 적었는데 다시 보니 더 잘 할  있다는거지?"

"네!"

혜지는 바로 그거라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나 힘차게 끄덕이는지 흔들리는 고개를 따라 현우를 향해있는 골반도 위아래로 출렁였다.

"그럼 다시 종이 받아 가. 내가 말했지? 네가 쓴거 보고나서 결정한다고. 최선을 다해. 진심이 느껴지도록."

현우는 그녀에게 새 종이를 하나 던져주고는 이전의 종이를 그녀의 눈앞에서 찢어버렸다.

찌이익 - 찌이익 -

"이건 못 본걸로 할 테니까, 심기일전해서 적어봐. 시간제한도 없잖아?"

"... 네, 주인님."

새로 받은 종이에 다시 고개를 쳐박는 혜지. 잠시 끊겼던 사각거리는 펜소리가 이어졌다.

스스로의 최선을 의심하고 또 의심할 그녀가 몇 장의 종이를 갈아치울 것인지가 궁금했지만.

어찌 되든 상관은 없었다. 아직 종이는 질리도록 남아있었으니까.

2.

벌써  번이나 종이를 새로 받은 것인지. 빈 종이를 다시 채워나가는 그녀는 손목의 뻐근함을 느꼈다.

그래도 갈수록 글을 적어내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것 같아 발전해나가는 스스로가 뿌듯했다.

혜지는  문장을 적어낼 때마다 곱씹고 또 곱씹으며 필사적으로 다음의 문장을 떠올렸다.

종이를 더 받기도, 오빠를 더 기다리게 하는 것도 미안한 노릇이었으니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심혈을 기울인다.

온 힘을 다해 떠올린 문장을 손으로 적으며, 또 입으로 되뇌며,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해나가는 혜지.

그녀가 적어 내려가는 모든 문장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수십 번, 수백 번 메아리쳤다.

어느새 자기비하와 예속의 맹세들이 빼곡히 들어찬 흰 종이.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여야했기에, 어떻게 하면 오빠가 더 기뻐할지만을 생각할 뿐 자신이 적어내는 내용이 얼마나 상식에 어긋나는지는 고려치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지금 적어낸 글에 비하면 처음의 글은 몹시도 부족했었으니까.

안도감에 미소지으며 스스로를 깔아뭉개는 경악스러운 말들을 다시금 읽어보는 혜지.

적으면서도 수차례 읽어본 내용이었지만 최종 검토를 한다는 심정으로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죄송합니다'라는 짧은 말로 시작하는 글귀는 그녀의 눈을 사로잡는 것을 넘어 점차 그녀의 영혼까지 속박하는 주문이 되었다.

조금도 무겁지 아니한, 아니, 털끝만큼의 무게도 지니지 않는 활자들이 어느새 천근만근의 산이 되어 그녀의 인격을 압사시키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혜지는 마지막 마침표까지 꼼꼼히 읽고는 현우에게 종이를 건넸다.

"이번엔 진짜 최선인 것 같아? 실망 안 시킬 자신있어?"

"... 네!"

잠시 망설이다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그녀. 어떻게 하면 오빠가 더 좋아할지를 고민하며 오직 오빠의 취향대로만 써낸 글이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그래, 그럼 가져가서 네 목소리로 직접 읽어봐. 들어볼 테니까."

"아... 네! 다시 벽... 볼까요?"

"아니, 내 발밑까지 와서 머리 내 쪽으로 향하고 엎드려."

현우는 변기뚜껑을 덮고 그 위에 앉은 채로 그녀를 불렀다.

종이를 손에 쥔 그녀가 엎드리자 오른발을 그녀의 뒤통수에 척하고 올려놓는다.

"내가 네 머리 밟으면 방금 읽었던 문장 또박또박 다시 말하는거야. 발음 이상하다거나 우물쭈물 한다 싶으면 밟을 테니까."

"네, 주인님!"

매끄러운 음질로 녹음하기 위한 지시도 끝냈으니 이젠 감상의 시간이다.

"그럼 시작해. 목소리 크게 내고."

혜지는 큼큼하며 목을 가다듬다가 자신의 자랑스러운 답안지를 소리내 읽었다.

"죄송합니다. 개만도 못 한 년이 멍청하게 굴어서 주인님을 화나게 했습니다. 절대로 고의가 아니었고, 너무너무 멍청해서 그랬습니다. 저는 주인님 정액을 받아먹는 것 말고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쓰레기 같은 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실수를 할 때마다 마음껏 때리면서 혼내주세요. 뺨도, 젖탱이도, 보지도 다 주인님꺼고, 주인님이 때려주시면 감사히 맞겠습니다."

혜지는 첫 문단을 읽은 다음 침을 꿀꺽 삼켰다.

공들여 적은 내용이었는데 막상 오빠 앞에서 읽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수백  관중의 앞에서 미리 적어둔 연설문을 읽는다 해도 이보다 떨리지는 않으리라.

그깟 관중이야 수백 명이 아니라 수천 명, 수만 명이 있어도 자신의 인생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오빠는 달랐다. 자신의 연설을 들어주는 유일한 관중이었지만 그 관중이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지금 읽고 있는 한 장의 종이가 앞으로의 운명을 결정 지을거란 사실에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괜찮은데? 내가 좋아할 법한 말들 잘 떠올렸네. 기대 이상인데? 떨지말고 계속 해 봐, 좋으니까."

그리고 현우라고 해서 그녀의 동요를 모를까.

긴장이 어리기 시작하는 목소리를 들어주다 때맞춰 그녀를 격려했다.

사람이란 원래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는 이에게 감동하는 법이니까.

자신을 알아봐주는 주군을 위해 목숨까지 내다바친 장수들이 역사에 수두룩하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은 그녀를 칭찬해 줄 타이밍이다. 그녀가 고심 끝에 적어낸 내용을 추켜세워주며 그녀가 자부심을 느끼도록 말이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완성해낸 내용이었고, 자신이 있어서 비로소 꺼내든 것일테니,  했노라 웃어주며 박수 쳐주면 그 내용들을 내면화 시키기는 더없이 쉬웠다.

혜지는 자신의 노력이 인정받는 것 같은 뿌듯함에 감격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오줌을 잘 핥아먹지도 못 했고 개처럼 짖는 것도 맞다가 까먹어서 죄송합니다. 주인님한테 혼나면서도 또 잘못을 한건 주인님을 기분 나쁘게 하려고 그런게 아니라 다 제 머리가 나빠서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용서해주세요. 주인님이 없으면 이미 자살했을거라고 말했는데 진짜입니다. 저는 주인님이 없으면  수 없습니다. 저는 평생 주인님꺼고 주인님을 정말정말 사랑합니다."

잘못을 토로하는 반성문에서 조차 은근슬쩍 사랑고백을 끼워넣는 혜지.

현우가 보기에는 이또한 고의가 아닌  같았다.

그냥 순진하고 단순한  여자의 사고가 사랑 하나로만 굴러가는 조잡한 방식이라 그런 것이겠지.

왜, 그런 성격 있지 않은가. 사랑, 사랑 노래를 부르면서 환상에 취해 사는 얼빠진 성격.

그딴 유치한 정신머리로 살아가니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것 일텐데 아직도 환상에 젖어있었다.

결국 모든건 그녀의 자업자득이다.

"후... 좋아, 계속 해."

얼마나 못난 존재인지,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대충 말했으니 남은 것은 앞으로의 다짐밖에 없었다.

현우는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그녀의 다짐이 과연 어느 만큼의 크기일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주인님이 시키시는건 뭐든  하겠습니다. 좆물통도 되고 변기통도 되겠습니다. 주인님이 기르는 애완동물도 되겠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한  만에 못 하면 마음껏 혼내시고 다시 시켜주세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끝이야?"

"... 네."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는 알맹이가 없네. 구체적으로 뭘 할 건진 없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뭉뚱그린거 같은데?"

"아... 원래는 다 적었었는데, 그, 읽기 불편하실까봐, 너무 길어져서... 일부러 압축했거든요... 처음에는 다 적었는데... 진짜인데..."

"됐고, 괜찮으니까 지금 말로 해봐. 네가 생각한 뭐든지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뭘 해줄 수 있는지 예로 들어서."

혜지는 후회를 삼키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오빠가 말한 알맹이와 구체성이 필요했다.

"보지랑 후장으로 오줌  받아줄  있고... 아, 오늘 마지막 피임약 먹었으니까 내일부터 보지로 정액도  받을 수 있어요. 또, 도그플? 그것도 커뮤니티에서 봤는데... 저도 오늘 주문했던 목줄 차고 주인님 암캐할게요. 짖으라면 짖고 빨라면 빨게요!"

어째 들어보니 방금 한 말을 풀어서 길게 늘어놓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현우는 팔짱을 끼며 발 끝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질싸말고는 거의  해본거 아니야? 색다른게 있어야지. 네가 생각하는 된다, 안 된다의 기준이 뭔지 똑바로 말하라고. 난 어정쩡하게 간보는거 싫어해."

"아... 기준... 음..."

혜지는 굳어있는 머리를 굴리려 용을 썼다. 지금 이 정도만 해도 평생 글이라고는 적어본  없던 그녀에겐 큰 업적이었지만 오빠는 더 구체적인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기준이라... 무엇이든 해줄 수 있다고 막연히 생각만 했었지 뚜렷한 기준은 없었다.

고민을 이어가던 혜지의 귓가에 현우의 재촉이 들렸다.

"뭘 고민해. 나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라며. 나 없이는 못 산다며. 네가 적은 말 다 구라야? 진심 아니었어?"

"구라 아니에요! 진짜... 진짜에요. 정말이에요."

혜지는 다급히 현우의 질책을 부정했다.

오빠가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오빠가 없다는 상상만 해도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오빠를 사랑한다.

"그럼 간단한거 아니야? 죽을 것 같은 일 말고는 다 해줄 수 있는 거잖아. 설령 네가 죽을 각오를 했다 쳐도 내가 너보고 죽을 짓을 시킬 사람도 아니고. 설마 나 못 믿어서 그래?"

"아... 믿어요."

"믿는데 왜 망설여?"

현우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손만 꼼지락거리는 혜지를 구경했다.

지독한 딜레마다. 믿는다고 하면 죽을 짓 빼고는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말이 되어버리고, 그렇다고 믿지 않는다고 하면 방금의 반성문이 모두 거짓이 되어버리니까.

쉽지 않은 선택인 모양인지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하는 혜지.

그래도 양자택일의 억지 속에서 어떻게든 대답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무적이었다.

이런 상태의 그녀라면 조금만 푸쉬를 넣어주면 원하는 대로 이끌  있었다.

"하... 내가 돈 몇 푼으로 생색내는  같아서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내가 언제 쭈뼛거리는거 봤냐? 난 무조건 콜이었어. 목걸이도 네가 제일 비싼게 마음에 든다 해서 그거 하라고 했지, 너 먹이는 밥도 무조건 제일 좋은 걸로 시켰지, 심지어 집주인한테 내  이백 주면서 잠시라도 망설인 적 있냐? 야. 나라고 돈이  아깝겠어? 아니야. 나도 아까워. 근데 너니깐  아까운거야.  위한 돈이었으니까. 근데 넌? 넌 왜 자꾸 재고 따져?"

현우는 내줘봤자 티도 나지 않는 부스러기를 내어주는 것과 그녀의 인생 전부를 내어주는 것을 동일선상에 올리며 그녀를 압박했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있는 사람이라면 방금의 말에서 논리적 오류를 지적했겠지만 복종심에 길들여져버린 그녀에게는 합리화에 불을 지필 연료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어주는 쪽을 택하면서도 이건 스스로의 결정이며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게 해줄 합리화 말이다.

"죄송해요... 망설여서 죄송해요. 주인님 믿어요. 다 믿어요."

"진짜 믿어? 진짜 믿으면 어떻게 해야 해? 아까 반성문 읽던거에 붙여서 또박또박 말해봐. 뭐든지 다 해주겠다는 네 기준이 뭔지, 다시 종이 들고."

혜지는 바닥에 놓인 종이를 다시 펼쳤다.

오빠를 믿는다. 그래, 오빠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 누구를 믿겠는가. 내 편이 되어줄 세상 유일한 사람이 오빠 뿐인데.

그러니... 이게 맞다. 지금 말하려는 내용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번 만에 못 하면 마음껏 혼내시고 다시 시켜주세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러니까... 죽을 것 같은 일 빼고는... 다 시켜주세요. 죽을  같은 일만 아니면... 흑, 뭐든  하겠습니다."

혜지는 마음의 결심을 다지며 눈을 감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있던 사람이 과연 부귀영화를 원했을까.

아니다. 일단은 생존의 위협이 도사리는 수용소에서 해방되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리고 그건 혜지도 마찬가지.

지금의 그녀에게는 이별보다 더 큰 생존의 위협은 존재하지 않았다.

평생 오빠와 함께하는 부귀영화도 당장은 바라지 않았다.

일단은 그것이 과욕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뿐.

언제 파국으로 치닫을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벗어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

오빠가 오늘밤의 끝을 고하는 대신 다시 허리띠를 움켜쥐고 자신을 채찍질 해주는 것.

혜지는 끊임없이 합리화를 되뇌이며 이젠 부디 죗값을 치를 수 있게 되길, 그리하여 오빠의 화를 풀어줄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빌었다.

현우는 그녀가 눈을 감는 것을 보며 오랫동안 앉아있던 변기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내팽개친 허리띠를 다시 들어올리는 현우.

그녀가 간절히 바라던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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