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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화 〉붕괴의 서막 (3) (67/87)



〈 67화 〉붕괴의 서막 (3)

누구에게도 대접 받아보지 못한 그녀는 결국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현우에게 다시 영혼을 내맡겼다.


"사랑해. 아씨,   맨날 사랑해 같은 말만 하고, 오빠에게 선물해주는건 없고. 오빠가 내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오빠를 어느 만큼이나 사랑하는지  수 있게."

"에이, 어제도 나한테는 선물이었는걸. 나 많이 사랑해?"

"응, 당연하지!"

"그럼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나 떠나지 않을거지?"


"응!"

"진짜지? 자기는  안 버릴거지? 나 이해해줄 수 있지?"

"오빠... 어제 일 미안해서 자꾸 묻는거지?"


혜지는 거듭 질문을 던져오는 현우에게 대답하다 목소리를 낮추었다. 가엾은 자신의 남자가 또 다시 불안해하고 있었다.

"티 많이 났어? 자기 어제... 나 때문에 많이 울었으니까. 갑자기 나 싫다고 하면 어떡해."


"으이구. 바보야. 아침에도 괜찮다고 했는데  또 그런 말을 해."

"자기  보내고 생각해보니까  미안해지더라고. 하루만에 하기에는 조금 과한 일이었나 싶기도 하고."


"에이, 그 뭐야. 쇠뿔도 단김에? 단숨에? 빼라던가 하는 말도 있잖아. 아픈거야 조금 지나면 나을텐데, 뭐. 오빠가 어제 기념할만한 특별한 날이라고 했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정말이야. 나도 어제 오빠한테 그... 주고 싶었어."


혜지는 씁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현우를 위로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계에 달하는 고통에 기절의 문턱까지 넘나들던 그녀였지만, 현우가 불어 넣은 신념 체계를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라 착각하며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현우가 강요해서가 아닌 자신이 원해서,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한 것이라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C코스 샐러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느라 적막이 흐르던 테이블에 웨이터가 고풍스러운 접시를 내려놓았다.


"와, 여기는 접시도 예쁘다. 샐러드 드레싱도 직접 만드나본데? 뭔가 맛이 신기해."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애쓰는 혜지.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에 현우도 마음을 내려놓았다.


목걸이도 사줬겠다, 비싼 밥도 먹이겠다, 슬쩍 어제의 일을 떠봐도 괜찮을 것 같아 일부러 불안해하는 척하며 말을 꺼냈는데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꽃밭이었다.

심지어 어제의 행동을 주체적인 행동이라 믿기까지하니  이상의 테스트는 필요없어 보였다.

"맛있어?"


"응! 오빠도 어서 먹어봐."

"그럴게. 천천히 먹어. 혹시 목걸이에 튈라."

"아, 맞다! 목걸이! 이게 얼마나 비싼건데 튀면 안 되지."


혜지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다 입고 있던 맨투맨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이따 밥 먹고 다시 꺼낼게. 오빠도 알다시피 내가 좀 칠칠맞잖아. 사자마자 뭐 묻으면 속상할  같아서 그래. "


"마음대로 해. 자기가 그렇게 아끼는거 보면 엄마도 좋아하겠네."


"응?"

"그거 엄마가 남기고 가신 돈으로 사준거니까. 자기 시어머니 말이야. 음, 어떻게 보면 며느리한테 주는 선물인건가?"


"아..."

하긴. 물려받은 건물에서 나오는 월세는 생활비로 쓴댔으니 방금의 지출은 오빠가 말하던 유산에서 나온 것일 터. 시어머니의 선물이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아보였다.

그것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주는 선물이라니.


샐러드를 입가로 옮겨가는 그녀의 손이 뚝하고 멎었다.


"왜 놀라? 목걸이 하나 산다고 큰일 날 만큼 적은 유산은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현우는 그녀가 얼어붙은 이유를 잘 알았지만 일부러 능청을 떨었다.


"아니, 오빠. 그게 아니라."

"응?"

"오빠 나랑... 어... 결혼할거야?"


"아, 음... 말하고보니까 그런 의미로 들릴 수도 있겠다 싶네. 자기만큼 나 이해해주는 사람은  만나기 어려울거란 생각이 많이 들긴하지. 그렇다고 아직 프러포즈하거나 그런건 아닌데... 이렇게 멋없이 프로포즈할 생각도 없고..."

잠시 말을 끊고 뜸을 들이는 현우.


어쩐지 연애를 빌미로 그녀를 꼬셔낼 때의 시즌2를 보는 기분이다. 결혼을 빌미로 그녀를 옭아맨다는 계획에도 슬슬 시동을 걸었다.

"이제 우리 사귄지 4일째잖아. 아직은 연인으로서 서로를 점점 알아가는 단계가 아닐까? 결혼은 평생이 달린 문제고, 아무리  이해해준다고 해도 평생 그럴  있을지는 또 모르니까. 일단은 서로를  알아가보자."

현우는 결혼을 할지말지에 대한 권리가 당연히 자신에게 있다는 듯 결정권자의 위치에 서서 말했다.


사귀어 줄지 말지를 심사하는 사람도 자신이었는데 결혼이라고 해서 다를 것 없었다.


오히려 그녀와 자신 사이의 압도적인 경제적 격차를 고려한다면 예전보다 더하면  했지, 덜 하지는 않았다.

그녀도 이를 아는 모양인지 별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왔다.

"맞아, 우리 이제 4일째지. 음... 아직 결혼 이야기 하긴 많이 이르긴 하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결혼은 생각할 것도 많고, 혼인 신고 한 번 하면 되돌리기도 어렵고 어..."


그녀는 내심 그러자는 대답을 기대한 모양인지 어정쩡한 아쉬움이 감도는 낯빛으로 길게 주절거렸다.


제 분수도 모르고 김칫국을 들이키는 모습이 괘씸하지만 비싼 밥을 쳐먹이며 오점을 남길 수는 없는 노릇.

현우는 그녀의 중얼거림을 잘라내고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누군가 그러던데, 너랑 하고 싶으면 너를 좋아하는 거고, 너랑만 하고 싶으면 너를 사랑하는거래."

남자의 사랑을 남자의 성욕과 연결지어 말하곤 했던 우스갯소리들.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녀의 수준에는  맞는 말이었으니까.


예전부터 남자의 성욕은 본능적이고 당연한 것이라 교육시켜놓았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난, 너랑만  하고 싶어. 날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줄 수 있는, 내 운명의 짝이라 믿으니까."

현우는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빤히 바라만 보고 있는 그녀에게 좀더 쉬운 말로 풀어서 다시 말해주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널... 내가 많이 사랑한다는 말이야. 딴 여자말고 너랑만 계속 하고 싶을 만큼. 아직 결혼을 이야기하기엔 조금 일러도  사랑하는 마음은 진짜라고."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여자다. 여기까지 말하고나서야 그녀도 말귀를 알아듣는 눈치였다.

결국 따지고보면  존나 따먹겠다는 말일 뿐인데, 말 끝에 사랑을 덧붙이니 나름 로맨틱하게 들렸다.


혜지는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촉촉해진 눈망울로 입을 열었다.

"나도... 나도 오빠 많이 사랑해. 오빠 없으면 못 살 만큼. 아! 오빠 어머니한테도 감사 인사 드려야겠다. 목걸이도 오빠 말대로 어머니가 사주신거니까..."


사랑을 고백하다 옷 속에 감추어놨던 목걸이를 꺼내드는 혜지.

마치 십자가를 양손에 움켜쥐고 기도를 올리는 신부님처럼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린다.

"음... 어머니, 목걸이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대신 어머니 아드님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줄게요. 제가... 오빠 절대 쓸쓸해 하는 일 없도록 평생 옆에 있을게요. 절대 오빠 안 떠날게요. 그러니깐 하늘나라에서도 걱정마시고 편히 쉬세요."


어찌 보면 현우에게 하는  같이도 들리는 사랑의 맹세다.

현우는 그녀의 되도 안한 헛짓거리를 구경하다 마지 못해 칭찬했다.


"역시 자기는... 마음이 예뻐. 엄마도... 다 지켜보고 계실거야. 자기 이제 어떡해. 나 버리고 도망가면 우리 엄마가 자기  속에 나오겠다."


 여자의 명복을 빌어주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속으로는 역겨움이 치솟았지만 애써 눌러참았다. 어쨌거나 지금의 모든 상황은 먼저 저 세상에 가준 그 여자 덕분이었으니까.

"저어어얼대 그런 일 없을건데 그럼  오빠 어머니 꿈에서도 못 만나는건가? 그래도... 우리 결혼하게 되면  번쯤은 꿈에 나와주시겠지?"


"그럴지도 모르지."

현우는 입 안을 감도는 텁텁함을 상큼한 샐러드로 씻어넘기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말대로 드레싱된 소스의 맛이  괜찮았다.

"흐음..."


그나저나, 이걸로 된건가?

그는 아삭거리는 샐러드의 식감을 음미하며 오후에 보았던 심리조작의 기법들을 떠올렸다.


생애 처음 누려보는 사치 후에 그녀가 몰두해야할 임무를 은근히 암시해주었다.


어제의 격렬한 행위가 신경 쓰여 넌지시만 알려주었는데 지금 하는 꼴을 보아하니 강하게 말하더라도 역효과가 일어날 것 같진 않았다.

"자기야. 자기 아직 내가 말한거에 대답 안해줬다?"


"어? 뭐?"


"앞으로도 나 이해해 줄 수 있냐고."

"에이, 그거야 너무 당연해서 말 안 한거지. 이렇게나 말했는데도 그 말이 꼭 듣고 싶은거야?"


"응, 들려줘."

현우는 샐러드를 오물거리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며 단호하게 요구했다.


입 안의 샐러드를 꿀꺽하고 삼킨 그녀는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약속의 말을 읊는다.

"내가, 앞으로도, 오빠를 이해해줄게. 오빠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여자가 될게. 어제도 아픈거 잘 참았잖아. 알지? 그러니까 걱정말고 믿어줘."

"응, 믿을게.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나도 이제 걱정 다 풀렸어."


현우는 그녀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녀의 권리였어야 할 걱정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차지해놓고서는 정작 걱정해야 할 당사자에게는 조금도 걱정할 틈새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걱정하는 상대를 달래주는 번거로운 역할만 떠넘겨버렸다.

"좋네. 진짜... 좋네. 자기한테 선물도 했고, 밥도 맛있고."

그녀에게 임무를 부여하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나니 오늘의 숙제가 끝난 기분이었다.

현우가 그녀에게 부여해준 임무는.

앞으로 가해질 모든 능욕들을 사랑이라 믿고 이해하는 것.

이해가 곧 그녀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미덕인 것처럼 여러 번 강조하였으니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어떻게든 이해하여야하는 처지에 놓였다.


물론 그녀에게 심리 조작을 가하는건 이제 막 시작이었으니 아직은  강도가 미약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현우에게 부족한건 오직 시간 뿐이다.


너를 믿는다며,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특별한 너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영웅 대접을 아끼지 않았으니, 특별한 존재이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이 그녀를 몰고 가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현우는 갓 나온 스테이크를 입 안에 넣고  풍미를 음미했다.


어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조교하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도 돈이 아깝지 않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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