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붕괴의 서막 (2)
1.
향긋한 커피는 점심 식사 후 졸음을 몰아내는 데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한다.
후르륵 -
현우는 특유의 쌉싸름한 맛을 음미하며 보고 있던 책장을 넘겼다. 따스한 커피 한 모금이 몸에 들어가자 머릿속의 안개가 어느 정도 걷히는 기분이다.
사락 -
부드러운 커피 향에 곁들여지는 종이책이 넘어가는 소리. 거기에 현우가 짓고 있는 온화한 미소마저 더해지니 보는 이의 마음마저 푸근하게 하는 아늑함이 만들어졌다 .
그러나 그의 두 눈이 읽어 내려가는 책의 서문은 조금도 아늑하지 못했다.
「심리 조작이란 타인의 심리를 지배하거나 착취하는 기술이다. 이 책은 심리 조작에 사용되는 기법을 소개하여 현대 사회에 만연한 심리 조작의 실체를 밝히고, 어떻게 하면 주체적인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를 소개한다.」
후르륵 -
커피 잔을 입 안에 기울이며 본격적으로 책의 본문을 정독하는 현우.
혜지가 다시 방문할 것을 대비해 집을 정리하다 발견한 책 한 권이 마치 운명처럼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마 입대 전, 심리학 교양 수업을 들을 때 쓰던 교재였던가. 당시 교수자의 강의력은 별로였지만 교재를 선정하는 안목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연히 다시 읽어본 책은, 혜지의 심리에 대해 평소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오아시스나 마찬가지였다.
「심리 조작이 되기 가장 쉬운 유형은 의존성 성격장애다. 이 유형은 무방비 상태로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인생까지도 타인에게 맡겨버리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생면부지의 사람에게도 경계심을 풀고 인생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이러한 행위에는 도움을 바라는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상대는 순식간에 주도권을 쥐게 된다.」
방금 읽은 구절만 해도 그랬다.
그야말로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 아닌가.
생전 처음 만난 자신에게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그로 인해 집을 뛰쳐나온 이야기를 털어놓던 그녀였으니, 의존성 성격장애를 설명하는 구절에 딱 들어맞았다.
어쩌면 그녀의 비정상적인 복종심 역시 책에서 말하는 의존성 인격장애에 기인하는 것일지도.
글을 읽어 내려가는 현우의 눈에는 점차 확신이 깃들었다.
「의존성 인격장애는 주변 사람을 배려하느라 스스로를 돌보지 못한다.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며 전전긍긍하고 의견이 대립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상대방의 말을 긍정하며 살아간다. 강하게 요구당하면 내키지 않는 성관계를 맺게 되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몇 번을 다시 읽어봐도 혜지의 성격을 글로 옮긴 것만 같은 서술이다. 그리고 현우의 확신을 더해주는 구절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의존성 인격장애를 만드는 대표적인 환경으로 가정폭력이 있다.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상대의 비위를 맞추며 행동하는 습관을 어린 시절부터 지니게 된다. 부모의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어린아이는 부모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억제하고 타인의 기분을 살피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 결과 스스로의 판단을 따르기보다 부모의 안색을 살피고 결정을 내리며, 주체적인 의사를 기르지 못하고 주어진 지시대로만 행동한다.」
그는 의존성 인격장애의 원인을 설명하는 부분을 읽으며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거의 혜지를 관찰하고 쓴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모든 서술이 그녀의 인생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도무지 정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녀의 반응들에 얼마나 경이로움을 느꼈던가. 정신병의 증상 중 하나겠거니 하면서도 그녀의 심리에 작용하는 기제들이 내심 궁금했었다.
그런 까닭에, 현우는 혜지의 성격이 왜 그렇게 된 것인지를 설명하는 합당하고 논리적인 말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저자는 의존성 성격장애가 왜 심리 조작을 당하기 쉬운 유형인지를 설명한 후에 심리 조작의 원리와 기법들까지 친절히 설명해주고 있으니, 그러한 친절함에 박수까지 나왔다.
가만히 책장만 넘기던 현우의 손에 예전의 조교노트와 볼펜이 들렸다.
의존성 인격장애임이 분명한 혜지를 어떻게 쥐고 흔들지를 예까지 첨부하여 알려주는데, 차려진 밥상을 거절하는건 어리석은 짓이다.
「강한 의존성 인격장애를 지닌 사람은 마약 중독자가 마약 없이 살 수 없다며 약물에 매달리 듯, 자신이 의존하기 시작한 사람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여간해선 그 사람을 떠나가려 하지 않는다. 상대를 떠나가는 일은 마음속의 지주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책에는 사랑에 대한 그녀의 기이한 집착을 설명해 줄 내용도 있었다. 토할 때까지 목구멍을 쑤셔박다 오줌을 마시게 했음에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여자다. 후장을 따이며 엉엉 울고불더니 자고 일어나선 되레 처음을 바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하는 여자다. 모든 것들은 그녀의 인격장애에서 비롯된 현상임이 틀림 없었다.
책의 내용을 필사하는 현우의 손이 점점 바빠졌다.
지금껏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고 가며 정신을 소모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면, 이젠 그에 더해 심리 조작이라 명명하는 여러 기법들도 그의 무기가 되어줄 터.
현우는 심리 조작의 원리를 설명하는 글을 꼼꼼히 정리하며 숙지해나갔다.
「온갖 착취를 당하면서도 그것을 착취라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쁨이라 인식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믿음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심리를 조작하는 사람들은 대개 의존성 인격장애를 지닌 사람의 믿음을 이용하여 착취를 일삼고 이익을 얻는다. 예컨대...」
그후루도 꼬박 서너 시간을 독서에만 열중하는 현우.
쉴새없이 볼펜을 놀려나가는 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진다.
그는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참아왔던 숨을 토해냈다.
"휴우..."
역시, 사람은 배워야 된다. 아는게 곧 힘이라는 옛 성인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양가감정으로 격발시키는 공황 발작이 혜지를 농락할 단발적인 수단이었다면, 오늘 알게 된 지식들은 그녀를 길들여나갈 장기적인 로드맵이었다.
현우는 그녀의 영혼을 세탁해버릴 로드맵을 떠올리며 기지개를 켰다.
이 로드맵의 완성단계에서 자신이 얻게 될 꼭두각시 인형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그 인형의 가치는 어느 만큼일까.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살아움직이는 인형이라니. 특히나 사랑과 운명을 믿는 순진함과 무조건적인 복종심을 부추기면 어떠한 성적 망상이든 모두 현실로 이룰 수 있었다.
새하얀 몸에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천박한 문신을 새겨넣더라도.
연약한 유두를 꿰뚫고 평생 빼낼 수 없는 피어싱을 달아주더라도.
그래도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안겨오는 인형이라면.
그 값어치를 쉬이 계산할 수가 없다.
그러고보면 외형도 예쁘장하고 조임도 쓸만한게 디자인과 기능에도 하자가 없지 않은가.
현우는 흥분으로 부풀어오른 사타구니를 문지르며 그녀와의 미래를 떠올려봤다.
한 여자의 전부, 말그대로 영혼과 인생까지도 모조리 소유하는 유일무이한 절대자.
그런 절대자가 되는 일이 그저 헛된 꿈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꿈의 시작은 오늘 밤의 데이트부터였다.
2.
"고객님, 몇 개월 할부로 해드릴까요?"
"일시불로 해주세요."
현우는 보험금을 수령하며 만든 신용카드를 점원에게 건네고는 혜지를 돌아봤다.
계산하는 사람은 자신이었건만 어째 그녀가 더 안절부절 못하는 느낌이다.
"오빠... 나 아까 그거도 괜찮은데... 이건 너무 비싼거 아니야?"
"아니야, 이게 제일 예쁘긴 하다며. 그럼 제일 예쁜걸로 사줘야지. 어제 그랬잖아. 가격 신경 쓰지말고 마음에 드는걸로 고르라고."
지잉 -
그녀를 달래는 사이 결제가 끝난 모양인지 카드사용 승인을 알리는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Web발신]
삼성카드 3*0*승인
김*우
3,122,000원 신용
현대백화점
그녀가 자꾸만 중저가 쥬얼리샵만 기웃거리길래 손목을 붙들고 들어온 해외명품 샵.
그녀도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누구나 알만한 브랜드였다.
현우가 그녀에게 건네고 싶은 것은 단순히 비싼 목걸이가 아니었다.
누구든 알아보는 명품을 생애 처음으로 가져본다는 상징성, 그리고 너라면 그런 명품도 아깝지 않다는 사랑의 증명을 전해주고 싶었다.
"저, 고객님. 계산 완료 되었습니다. 계산하신 물품은 쇼핑백에 넣어드릴까요?"
"아뇨. 바로 차고 갈게요. 영수증은 버려주세요."
백화점 1층을 몇 바퀴나 빙빙 돌며 고른 목걸이였으니, 교환이나 환불을 할 일은 없을 터.
그녀도 가격을 제외하고는 이견이 없는 모양인지 수줍게 미소지으며 머리를 걷어올렸다.
티 한 점 없는 새하얀 목덜미에 매이는 옐로우 골드의 목걸이가 퍽 잘 어울렸다.
"오빠, 어때? 예뻐...?"
"응, 당연히 예쁘지. 내 눈에도 이게 제일 예쁘긴 했어. 잘 어울리네."
현우는 발그레해진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며 미소지었다. 만날 때까지만 해도 또 매니저가 어쩌니하며 울상을 짓던 여자가 지금은 새색시마냥 고운 미소만을 짓는다.
"고마워. 진짜진짜 잘 쓸게."
"고마워 해주니 내가 더 고맙네. 이제 그럼 밥먹으러 갈까?"
"응!"
목걸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더욱 찰싹 달라붙는 그녀를 데리고 현우가 향한 곳은 백화점에 입점한 고급 레스토랑.
목걸이에 이은 비싼 밥 한 끼는 그녀를 위해 준비한 오늘의 각본이었다.
낮에 읽은 설명 중에서도, 심리학자 아리엘 메라리(Ariel Merari)의 설명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이성적인 인간이 테러리스트로 탈바꿈하는 과정 중 하나는 테러를 실행하기 전 이루어지는 융숭한 대접이라던가.
평생 받아본 적 없을 풍족함과 더불어 한껏 영웅으로 떠받들어 주다보면, 어느새 자살 테러는 기정사실이 되고 발을 뺄래야 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고 들었다. 받은걸 도로 토해낼 능력은 없으니, 좋든 싫든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해내야 하는 상황이 바로 심리 조작의 첫 걸음이라는 설명도.
오늘 현우가 베푸는 모든 것들은 그러한 융숭한 대접과 일맥상통했다.
"오빠... 여기 무슨 밥이... 거의 0 하나씩이 더 붙어있는데? 저녁은 진짜 내가 사주고 싶었단 말이야. 나 잔액이 될런지 모르겠다."
"내가 살 테니까 잔액 들여다보지말고 그냥 맛있게 먹어."
"아니야, 나도 보탤게. 목걸이도 선물 받았는데, 안 그러면 내가 미안해서 안 될 것 같아. A코스로 시키고 나눠서 낼까?"
현우는 조심스레 물어오는 그녀를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주문을 기다리는 웨이터는 시종일관 정중한 자세로 서 있다가 현우의 손짓에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여기 C코스 2인분으로 주시고, 음료는 오늘의 와인으로 준비해주세요."
혜지는 정장을 차려입은 웨이터의 기세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닫고 있다가 웨이터가 떠나가자 중얼거렸다.
"오빠, C면 제일 비싼거 아니야? A로 하자니까. 나 그만큼 돈 없을 건데..."
"이왕 왔는데 제일 맛있는거 먹고 가야지. 자기가 맛있게 먹어주면 난 그걸로 됐어. 나눠내기는 무슨. 내가 다 낸다니까."
지금의 식사 또한 혜지가 겪은,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고통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다.
목걸이와 더불어 그녀를 자신이 안배한 임무에 몰두하게 할, 그리하여 훌륭한 성노예로 다시 태어나게 할 하사품이다.
그렇기에 현우는 조금도 아깝지가 않았다.
"내 여자한테 쓰는 돈은 하나도 안 아까우니까. 자기만큼 날 이해해줄 수 있는 여자가 어딨다고. 어제 나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 기념으로 내가 밥도 사주고 싶은데... 그러게 해줄거지?"
"아... 그럼... 맛있게 잘 먹을게. 정말 고마워."
혜지는 잠시간 망설이더니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태어나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고가의 선물과 지금껏 만난 사람들에게서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특별한 대우.
오랫동안 외로움과 불안에 시달렸던 그녀였기에 지금의 오묘한 감정은 무섭도록 그녀의 마음을 두들겼다.
그래, 오늘 하루 자신을 대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냉담하고 무뚝뚝했던가. 그에 비해 오빠는 얼마나 다른가.
오빠는 다소 거친 방식이 되었든 혹은 부드러운 방식이 되었든 간에, 어쨌거나 아낌없이 애정을 표현해준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사랑해주는 사람은 인생에 두 번 다시 없을 거라 생각될 정도다.
누구에게도 대접 받아보지 못한 그녀는 결국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현우에게 다시 영혼을 내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