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붕괴의 서막 (1)
1.
몹시도 피곤한 아침이다.
현우는 시끄럽게 울어대는 휴대폰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며 인상을 찌푸렸다.
새벽 내내 끙끙 앓는 혜지를 달래고 달래다 늦은 잠을 청한 탓에 채 가시지 않은 피로가 눈꺼풀을 내리누른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혜지의 휴대폰 알람을 끄는 현우.
근무시간을 오전부터 저녁까지로 변경한 그녀 때문에 요 며칠 계속 아침의 단잠을 방해받았다.
오늘은 유독 잠이 고팠기에 짜증이 솟구쳤지만 애써 눌러참으며 그녀를 흔들어깨었다.
"자기야, 9시야. 나갈 준비해야지."
하지만 알람을 설정한 당사자는 도무지 깨어날 생각을 않는다. 아니, 몸을 일으킬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창백한 얼굴로 아무런 반응도 없는 그녀. 혹시나 싶어 코 밑에 손을 가져다대었지만 다행히 숨은 내쉬고 있었다.
"출근 안 할거야? 못 일어나겠어?"
"으으... 오빠."
한 번 더 흔들어 깨우니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해온다.
과연 지금 깨운다고 해서 무사히 출근이나 할 수 있을까.
잠에 들기 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어떻게든 되겠거니하며 무시했었다. 아직 젊고 싱싱한 몸뚱이가 기적 같은 회복력을 보여줄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꼴을 보아하니 그녀의 몸이 받아들이기에는 어젯밤이 꽤 고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어떻게 할거야? 못 갈 것 같으면 매니저한테 연락이라도 하고."
"아..."
혜지는 잠결에도 매니저를 떠올리며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안그래도 미운 털이 박힌 마당에 무단 지각까지 한다면 어떤 쓴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남에게 폐를 끼치길 극도로 꺼려하는 순한 성격과 더 이상 밉보일 건수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책임감.
그녀는 피곤에 푹 젖은 몸을 쥐어짜내며 정신을 차리려 부단히 애썼다.
"가야 해... 안 가면 안돼."
"그래? 그럼, 음... 내가 화장실 욕조에 물 받아놓을 테니까 이따 다시 깨우러 올 때까지 좀더 누워있을래?"
"아... 몇 시야?"
"이제 딱 8시 30분. 따뜻한 물에 몸좀 담궜다가 택시타고 가면 될 것 같아."
혜지는 곰곰히 시간을 헤아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비가 아깝긴 했어도 그러는게 나아보였다.
그나저나 꽤나 호사스러운 아침이다. 난생 처음 누워보는 수백 만원짜리 매트리스에서 눈을 뜨는 것도 그랬고, 눈을 뜨자마자 즐기는 목욕도 그랬다.
자신의 자취방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 새삼 오빠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가 실감이 났다.
그렇게 기분 좋은 푹신함에 몸을 묻고 좀더 뒤척이고 있을 무렵, 오빠가 다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녀를 위한 목욕물 준비가 끝난 모양. 오빠가 문을 열기 전에 천근같은 몸을 일으켜세운다.
"아악!"
그러나 엉덩이를 타고 올라오는 뾰족한 고통에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왜 그래?"
"흐읏... 엉덩이...아파서. 조금 찢어졌나 봐."
"아... 미안해. 못 걷겠어?"
"아냐아냐. 천천히 걸으면 걸을 수 있어. 방금은 놀라서 그래. 괜찮아."
혜지는 걱정해오는 현우를 달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지었다.
오빠의 말대로 첫경험은 당연히 아픈 것이고, 예전의 첫경험 때도 지금만큼이나 아팠으니까.
게다가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건 어젯밤 사랑이 남긴 흔적 아닌가. 자신이 오빠에게 처음을 바쳤다는, 그리고 오빠의 인생에서 첫 애널섹스의 상대가 되었다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잠들기 직전까지 오빠가 들려주던 말들이 스쳐지나갔다.
혜지 네가 처음이라 서툰만큼, 자신도 뒷구멍에 박는건 처음이라 서툴렀다는. 야동이나 망가를 보면 아무렇지 않은듯 넣길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이토록 아파할 줄은 몰랐다는.
오빠는 자신이 성급했노라 거듭 사과하며 분위기에 취해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팔베개를 해주며 쓰다듬어주기도 했으니, 그런 사람에게 자고 일어나자마자 야박하게 굴 수는 없었다.
"내가 진짜 미안해. 내 손 잡고 걸어. 난 자기 목욕하는 동안 간단히 아침 만들고 있을 테니까 아침먹고 약도 먹자."
"약?"
"아, 응. 예전에 다쳤을 때 항생제 받아놓고 놔둔게 있어서. 염증약도 같이 있으니까 그것도 먹으면 될 것 같아."
현우는 문득 구석에 쳐박아두었던 약이 떠올랐다. 성형수술을 하고 처방받았던 각종 항생제들. 그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만 남겨두길 잘 했다. 이왕이면 어제도 먹이고 재웠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뒤늦은 아쉬움을 삼키며 그녀를 화장실로 이끌었다.
온수 마사지 기능이 있는 월풀스파 욕조에는 미리 입욕제도 넣어놓았다.
"어제 샤워하고 잤으니까 씻지말고 바로 물에 들어가 봐. 온도는 맞지?"
"아, 응. 오빠 근데 욕조에 뚫린 구멍은 뭐야?"
현우는 대답대신 욕조의 월풀기능과 LED 조명을 켠다. 그녀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 했을 사치로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녹여줄 생각이었다.
지이잉 - 우우우웅 - 우우우웅 -
"헐. 대박. 이거 뭐야? 욕조에서 물이 막 나오네. 와, 빛도 나온다."
"온수 마사지. 30분 타이머 맞춰놓을 테니까 끝나면 나와. 물 온도도 계속 따뜻하게 유지될거야."
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런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물론 속으로는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를 바라보며 키득거리고 있었지만.
같은 문명사회를 살아갈지라도, 돈이 있냐 없냐에 따라서 서로가 살아가는 세상이 이렇게나 다르다.
그리고 더 세련되고 더 고급스러운 것은 언제나 경외와 선망의 대상이 되기 마련. 그녀의 빈곤함에 감사하며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써보고 좋으면 이따 밤에도 또 하든지. 자긴 이제 언제든 놀러와도 괜찮으니까. 내 여자잖아."
쪽 -
말을 끝내고는 욕조에 몸을 담근 그녀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도 남겼다. 금방 발그스레 해진 입술을 보니 그래도 젊긴 젊구나 싶었다.
"... 오빠."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텐데 잘 따라줘서. 어제도 말했지만... 나도 내 여자의 처음을 하나쯤 가지고 싶어서 잠깐 눈이 돌아갔나봐."
"아냐아냐. 나도... 오빠한테 줄 수 있어서 좋았어. 사랑해."
혜지는 고개를 저으며 한 번 더 현우를 위로했다.
그녀가 잠든 동안 그녀의 뇌는 스스로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지독했던 고통은 어떻게든 망각하고, 그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되뇌었던 합리화의 말들은 생생히 되살렸다.
그러한 까닭에 혜지는 지금 약간의 안도감마저 느끼는 중이었다. 얼떨결에 잃어버린 순결이지만,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바칠 또 하나의 순결이 남아있어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그렇게 말해줘서 기뻐. 내가 아무리 거칠게 말하고 행동해도... 자기만큼 날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을거야. 이따 밤에 백화점 가기로 한 것도 안 잊었지? 끝날 때 또 데릴러 갈게."
"오빠..."
지금의 따뜻한 물만큼이나 그녀의 몸을 따스히 적셔오는 말과 눈빛. 어제의 만행을 가리려는 간교한 수작은 사랑으로 탈바꿈하여 그녀의 영혼을 속였다.
그건 아직도 쓰라려오는 아래의 고통을 뒤덮어버리고 그녀를 미소 짓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서로를 바라보는 현우의 얼굴에도, 그리고 혜지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2.
혜지는 다리에 추를 매단 듯 느릿느릿 걸으며 매장을 나섰다.
반드시 든든히 점심을 챙겨먹고 약을 먹겠다고 오빠와 약속을 했었기에 평상시와 달리 편의점이 아닌 죽집으로 향한다.
오빠가 아침에 만들어 준 바나나 쉐이크와 달걀 후라이로 아직 배가 불렀지만 그래도 약속을 했으니까.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곁에는 오늘도 아무도 없었다.
소심한 성격 탓에 먼저 다가서지 못 하기도 했고, 이미 일하고 있는 선배 3명이 모두 친해보여 무리에 끼어들길 망설이는 사이 외딴섬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이 친해지는 데에도 타이밍이 있는 법인데, 그녀는 그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어영부영하다 이 주가 흘렀으니 이제와 친하게 지낸다는 것도 이상했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묘하게 신경을 긁어대는 매니저와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나쁜 사람들 따위, 오빠의 말대로 먼저 꺼지라고 하면 될 뿐이니까. 자신에게는, 오빠가 있으니까.
찰칵 -
[오늘 점심! 소고기야채죽이얌ㅎㅎㅎ 오빠가 준 약도 꼭꼭 먹을게♡♡♡]
카톡 -
[현우는내운명♡ : 슬슬 밥먹을 때 된 것 같아서 여보 연락 기다리고 있었어! 이따 계산도 꼭 내가 준 돈으로 하고! 내가 사주는 점심이니깐!]
[웅웅!!!! 그럴게용♡ 잘먹을게ㅎㅎ 고마워!!!!!!!!]
택시를 타고 가라고 오빠가 건네준 오만 원은 택시비를 내고 나서도 한참이나 남았다.
심지어 처음에는 십만 원을 주길래 너무 많다며 한 장을 돌려주기까지 했었다.
이전에도 입고 있는 옷이며 차고 있는 시계에서 부티가 나긴 했지만, 어제 이후로 오빠의 씀씀이가 확 커졌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렇지 않게 오만 원을 떡하고 주는 것부터 밤에 사러 가기로 한 목걸이까지.
이제 건물주라는 것도 밝혔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일까.
물론 모든 것이 그녀의 종속을 부추길 현우의 계략이었지만 이를 알 턱이 없는 혜지는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녀가 알 수 없는 사실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를 도마에 올리고 입방아를 찧어대는 그녀의 동료들.
혜지가 자리를 비운 매장에는 그녀를 두고 열띤 토론이 한창이었다.
"신입 걔 어제랑 옷 똑같은거 맞죠?"
"그런 것 같던데? 어제 남친이 데리러 왔다고 하던데 외박했나?"
"매니저 언니가 그러던데 아침에 택시타고 왔다고 하더라고요. 원래는 걸어다녔으니깐 어젠 남친 집에서 잤나보죠."
그녀들은 어제와 똑같은 혜지의 옷차림을 가십거리 삼아 이러쿵저러쿵 하다가 자연스레 그녀의 남자친구 이야기로 넘어갔다.
"지영언니, 근데 걔 남친이 그렇게 존잘이라면서요?"
"...아, 응. 보고 완전 깜짝 놀랐다니까. 존나 핵존잘."
"와... 궁금하다... 근데 그런 남자가 왜 걔랑 사귄대요?"
지영은 자신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녀의 옆에 있던 다른 동료가 입을 열었다.
어제도 혜지를 두고 여우라 까내려갔던 동료였다.
"내가 그랬잖아. 그렇게 생긴 애들이 원래 남자 존나 잘 꼬신다니까. 매니저 언니 말만 들어도 딱 알겠던데."
"인정. 근데 알고보면 그 남자도 남친 아닌거 아니에요?"
지영은 흘러가는 대화의 흐름을 지켜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애는 초장에 기를 잡아야한다며 매니저가 주도한 흐름이 어느새 대세가 되어버렸다.
무료하던 일상에 활력제라도 찾은 듯, 모두가 건방진 신입을 교육한다는 명분으로 따돌림에 동참해버렸으니 말이다.
"남친은... 맞을걸? 나한테 남친이라면서 인사하긴 하던데..."
그러니 지금의 흐름을 거슬렀다간 자신에 대한 뒷말마저 나올 수 있었다.
지영은 어제 초콜릿을 수줍게 건네던 혜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사태를 방관하는 쪽을 택했다.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양심이라면 양심이었다.
원체 처음부터 말수가 없던 아이라 그 속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나쁜 애 같아보이진 않았으니까.
"에이. 모르죠. 알고 보면 섹파 같은거 일수도."
"헐, 섹파. 근데 진짜 그런거 아니야? 그런 존잘남이면 더 예쁜 여자를 만나지, 혜지 걘 피부는 좋긴 해도 존예는 아니잖아."
이야기는 어느새 성적인 주제로까지 넘어갔다. 소곤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오늘 혜지가 걷는게 이상했다느니, 어제 얼마나 한거냐느니 하는 말들이 오고 가길래 지영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혜지의 잘못도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애를 두고 아무래도 정도가 과하다 싶어 그녀를 변호해주고 싶었다.
"그거 아침에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니까 생리통이래."
"아... 근데 생리통 왔다고 그렇게 티나게 걷는 사람이 어딨어요. 헐, 그럼 어제 생리 터졌는데도 남친이랑 한건가?"
"뭐야, 존나 웃겨. 개더러워, 진짜. 좀있다 밥 먹을건데 그런 이야기는 하지마."
꺄르르거리며 다시 입을 종알거리는 그녀들. 지영의 작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일 어린 막내의 철딱서니 없는 말로 혜지의 고통 또한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무슨 생리를 자기 혼자만 하는 줄 아나. 아프다고 건들이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티 내려고 더 지랄하는 것 같던데?"
심지어 도움이 오히려 불쏘시개만 지피는 꼴이 되어 뒷담화의 강도가 올라갔기에 지영도 결국 입을 다문다.
화창한 5월의 첫 날.
구름 한 점 없는 날씨가 야속하게도 혜지의 앞날에 끼인 먹구름은 점점 짙어만 갔다.
그녀를 향한 현우의 악의와 세상의 악의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그녀를 둘러싼 세계가 조금씩 붕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