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일상이 되어가는 비일상 (8)
현우는 아울렛을 나서며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새벽 1시를 넘어 2시를 향해 가고 있는 시간. 무언가를 더 하기엔 시간이 애매하다.
근처의 칵테일바 혹은 포차를 가려면 못 갈 것도 없었으나 딱히 내키지 않는다.
한 발을 뽑아낸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지금은 만사가 귀찮았다. 그저 집에 돌아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몸을 뉘이고 싶은 마음 뿐이다.
"오빠 집 이 근처랬나?"
"응. 여기서 걸어서 5분? 10분? 멀진 않아."
"음... 저기... 나... 오빠 집에 가봐도 돼?"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현우에게 질문하는 혜지. 그녀가 꺼낸 말은 현우도 미처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애초에 그녀를 집에 데려다간다는 선택지는 현우의 머릿속에 없었다.
이 여자를 혼자 택시에 태워 보내야하나 아니면 같이 택시를 타고 그녀의 집에 가야하나를 고민하던 찰나에 그녀가 제시한 새로운 선택지는 나쁘지 않아보였다.
"내 집에 와보고 싶어? 지금 좀 더럽긴할텐데."
"응! 나 한 번도 안 가봤잖아. 오늘... 가보면 안돼? 더러워도 괜찮은데... 내가 오빠집 다 치워줄게!"
"으음.... 어쩌지."
현우는 고민하는 척을 하며 머릿속 주판을 두들겨본다.
그간 이 여자를 한 번도 집에 데려가지 않은 이유는 분명했다.
언제 내다버릴지 모르는 여자였으니까. 그런 여자에게 집주소를 알려주었다간 자칫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가령 집앞까지 찾아와 제발 다시 만나달라며 떼를 쓴다던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한다던가. 상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그녀의 정신이 이미 비가역적으로 뒤틀려버렸다는 사실을 현우도 잘 알고 있다. 공들여 조각해낸 작품이니 만큼 제법 애착을 느끼고 있기도 했고.
그래, 이 정도라면... 집에 들이기에 손색이 없는 장난감이다. 지금껏 가지고 논 날보다 앞으로 가지고 놀 날이 더 많았기에 특히 그러했다.
"오케이, 그렇게 하자. 세면도구나 화장품은 내꺼 같이 써도 되지? 편의점에서 칫솔이랑... 음, 생리대랑, 면팬티 하나만 사갈까?"
"응! 완전 좋아!"
혜지는 오늘 하루를 통틀어 가장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가득하다.
처음으로 가보는 오빠의 집. 한참을 망설였지만 용기를 내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빠는 사귀기 전부터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가족도 그렇고, 사는 곳도 그렇고.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라면 좀처럼 털어놓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 사귀고 나서야 듣게 된 가슴 아픈 가족사와 물려받은 집에 대한 이야기.
혜지는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오빠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마음을 꽁꽁 싸매고 누구에게도 열어보이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는 트라우마를 털어놓는다. 한 번도 알려주지 않았던 그의 집에 기꺼이 초대한다.
무언가 오빠의 영역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친구로서 또 한 번 인정받은 기분이다.
"혹시 내가 좀 망설이다가 말했다고 서운해하는건 아니지? 집에 다른 사람 들이는건 혜지 네가 처음이라서 그랬어."
"아냐! 서운하기는! 오히려 고맙기만 한걸."
"풉, 고마울건 또 뭐야. 자긴 내 여자친구잖아. 그럼 충분히 올 수 있지."
현우는 그녀의 찰랑이는 금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방금의 말은 빈 말은 아니었다.
팔에 매달린 이 암캐는 주인의 집에 발을 디딜 자격이 충분했다.
이제 길거리 똥개 티는 거의 다 벗겨냈으니 웬만큼 험하게 다뤄도 주인에게 이를 드러내는 일은 없을 터. 이 정도면 방 안에 들여놓고 본격적으로 길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었다.
"그래도... 오빠 이런거 좀 껄끄러워했잖아. 뭐라 그러지? 프라이버시? 그런거..."
"그건 사귀기 전이고, 이젠 아니야. 내가 고백할 때 그랬지? 자기가 내 마음을 이만큼이나 열게 해줬다고. 가족 이야기도 솔직히 다 털어놨는데 집 쯤이야, 뭐."
헤지는 현우가 피식 웃으며 건네는 말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는 뿌듯함을 느꼈다.
자신이 오빠의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 혼자만의 짝사랑이 아니라 오빠도 그만큼 날 사랑해준다는 느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일은 기적과도 같은 짜릿함을 안겨주었다.
"오빠, 사랑해."
그렇기에 지금의 짜릿함을 입에 담아내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사랑한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해. 난 진짜... 오빠없인 못 살아. 오빠는 나만 믿어. 내가, 오빠 평~생 사랑해줄거야."
"말로만 들어도 감동인데?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현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아마 정액이나 오줌은 침에 다 씻겨나갔을 테지만... 그래도 여전히 찜찜했기에 차마 혀는 집어넣지 못했다.
"응! 나는... 오빠꺼야. 죽을 때까지 오빠꺼할래."
"이왕이면 그 말 내 스타일로도 해줄래? 그럼 더 기분 좋을 것 같은데. 오빠꺼말고 더 야한 말들로."
"아, 맞다."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미소 짓는 혜지. 야밤의 길거리에는 행인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오빠 소유의 암캐년이고, 변기년이고... 또 언제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공짜 창녀고..."
거침없이 터져나오는 자기비하와 예속의 말들. 거의 하루만에 꺼내는 말치고 매끄럽기만 하다.
그녀가 잠시간 쓰고 있던 여자친구의 껍데기를 벗어던지는 데에는 현우의 부탁 한 번이면 충분했다.
"아! 자지 케이스! 정혜지는... 주인님의 자지를 담는 자지 케이스에요."
게다가 오늘 새로 배운 말이 떠오른 모양인지 아차하는 표정으로 외치고는 칭찬을 해달라는 듯 눈을 반짝인다. 어느새 오빠라는 말을 주인님이란 말이 대신했다.
"자지 케이스? 커뮤니티에서 본거야?"
"응, 진짜 거기 사람들 대단하다니까. 이런 말을 어떻게 떠올리는건지 몰라."
자신이 뱉어낸 망측한 말에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천박함에 감탄을 표하는 혜지. 현우는 성욕이 다시 치솟는 것을 느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럼 자기는 완전 걸어다니는 구멍 같은거네? 내가 데리고 다니면서 원할 때면 언제든 정액 빼내면 되는. 내 자지 케이스라며."
"아... 그... 렇지? 응, 맞아. 나는... 걸어다니는 구멍이야."
있으나마나 한 이성은 그녀의 추락을 멈춰세울 수 없었다.
잠시 멈칫하다가도 현우의 부드러운 미소와 따뜻한 말투에 이내 생글생글 웃는다.
오빠가 저렇게나 행복하게 웃으니까. 방금의 말들은 오빠를 기쁘게 해줄 말일 뿐이니까.
혜지는 걸어다니는 구멍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더 밝게 웃었다. 새로 배운 말이니 만큼 기억해둘 필요가 있었다.
"좋다. 내 여자친구 최고야. 이제 완전히 적응했나본데?"
"헤헤... 나 쩔지? 잘하지? 내가 뭐랬어! 나 하면 하는 사람이라니깐! 다 해줄 수 있다고 그랬잖아."
"응, 개쩔어. 그럼 자기야, 나 하나만 더. 자기가 걸어다니는 구멍이라고 했잖아."
"응응!"
"그러면... 자기 입구멍도, 그, 보지구멍도, 똥구멍도... 다 내 자지 쑤시라고 있는거지?"
"아..."
현우의 적나라한 말에 잠시 대답을 잊은듯 말이 없어지는 혜지. 모종의 껄끄러움을 털어내고자 오빠의 얼굴을 힐끗 바라본다.
열망이 일렁이는 눈. 흥분으로 거칠어진 숨소리. 그리고 자신을 믿는다는 듯,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차분하게 미소짓고 있는 입꼬리.
혜지는 그 미소에 미소로 답했다.
"맞아. 내 구멍은 다... 오빠 자지 쑤시라고 있는거야. 오빠 자지에 그, 봉사? 하려고 있는거야."
현우는 그녀가 말을 꺼내자마자 그녀를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 오늘 저녁의 데이트는 역시나 놀라운 가성비를 발휘했다.
정상적인 여자라면 상상도 못할 말이다. 비정상에 가까워진 혜지라 할지라도 조금은 껄끄러워할 말이었다. 이게 사랑이 맞는건가 의심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의 데이트는 그녀의 의심이 뿌리 내릴 작은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무의식을 스쳐지나가던 흔들림은 채 의식에 닿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그녀를 품에 안고 조금씩 뒤틀려 올라가는 입가에 힘을 준다. 잠시라도 방심했다간 눈앞에서 펼쳐지는 희극에 큰 웃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최곤데? 나 방금 싸고도 또 선거 보이지? 몸은 솔직하다잖아. 얘도 자기보고 사랑한대."
"그래? 그럼 나도 사랑한다고 전해줘."
혜지는 아이같이 꺄르륵거리며 현우의 불룩한 바지 앞섶을 쓰다듬었다. 오빠를 만족시켰다는 사실에 뭔가 큰 일을 해낸 기분이다. 순간 가슴을 쿵하고 때리던 왠지 모를 꺼림칙함도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 오빠 편의점이다. 팬티랑 생리대는 내가 쓸거니깐 내가 살게!"
혜지는 환하게 웃으며 걸어가다가 편의점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소리쳤다. 이것마저 오빠가 내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됐어, 그거 얼마한다고. 마무리까지 깔끔해야 내가 편할 것 같으니까 그냥 이걸로 계산하고 나와. 게다가 자긴 처음 우리 집에 오는 손님이잖아? 그럼 내가 당연히 대접 해줘야지."
"아..."
그녀는 현우가 손에 쥐어주는 신용카드를 들고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지 더 해주지 못해 안달인 착한 내 사람.
그 마음이 몹시도 따뜻하고 고마워 거절하고 싶지가 않았다.
"응, 그러면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볼에 쪽하고 입을 맞추더니 편의점에 들어서는 혜지. 현우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참아왔던 웃음을 큭큭거렸다.
도무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을 사랑이라 착각하는게. 그리고 그것에 저토록이나 진지하다는게.
한없이 어리고 어리석어 보일 뿐이다.
무자비하게 부숴대도 사랑만 들먹이면 방긋거리니 이 얼마나 편리하고 대단한 여자인가.
이 정도면 손색이 없을 장난감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 둘도 없을 장난감이다.
"후우..."
그녀가 계산대 앞에 서는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이 마주치자 찡긋 윙크를 해대길래 손을 흔들어준다.
어쩐지 저 여자가 좋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좋아하듯, 그녀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보여주는 생생한 반응들이, 선명한 감정의 스펙트럼이 자꾸만 흥미를 자극한다.
고양이가 쥐를 좋아하는건 고양이에겐 행복이지만 쥐에겐 고통이라지.
그럼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는건 그녀에게 행복일까 고통일까.
현우는 생각을 이어가다가 편의점 문을 열고나온 혜지와 다시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좋았다. 어찌 됐건 자신은 고양이고, 이 여자는 그 고양이 앞의 쥐일 뿐이니, 둘 사이가 포식자와 피식자 관계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길을 따라 걷다보니 익숙한 벽돌 주택이 보였다. 시간이 시간이니 만큼 과일가게의 불은 꺼져있었다.
"여기야, 내 집."
"진짜 가깝네! 거의 역세권인데?"
혜지는 건물을 둘러보다 작게 감탄했다. 오래된 연립주택처럼 보였지만 위치가 이 정도면 외관은 중요치 않았다.
"여기 2층에 살아? 창문이 음... 하나, 둘, 셋... 집 세 개인건가? 오빠 집은 저기서 어디야?"
"혜지야."
"응?"
"엄마가 물려줬다는 집이, 사실대로 말하자면 건물이거든."
불쑥 튀어나온 건물이라는 말. 뜻밖의 말에 미처 반응을 못하고 있을 사이 현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건물이 그냥 내꺼야. 1층은 세주고, 2층은 싹 다 내 집. 층 하나 통째로 내가 써."
"… 농담 아니고? 진짜? 이게 오빠 건물이야?"
"에이, 이런걸로 농담을 왜 해. 내꺼 맞아. 여기, 내 집이야."
현우는 말을 마치더니 커다란 유리문 앞에 다가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띠띠띠띠띠띠 - 띠리릭 -
여섯 자리의 숫자를 입력하니 철컥하고 열리는 건물의 입구. 손으로 밀치니 스르륵하고 열린다.
"어서 와. 좀 놀랐지? 언젠가 말해주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네."
"좀이 아니지! 난 계속 원룸 건물들 있는 데로 가길래 오피스텔이나 빌라인가보다 했는데, 건물이라니. 오빠 진짜... 금수저였네. 뭐야, 세상 불공평해. 잘 생기고, 키 크고, 건물까지 있고!"
"그리고 예쁘고 착한 여자친구도 있고. 그런 남자를 가진 너도 남들이 보면 불공평하다고 할걸?"
혜지는 두근거림으로 뺨이 붉어졌다. 괜스레 자신이 속물같아 보일까봐 걱정스러웠지만, 치미는 흥분 탓에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나 정말... 정말 상상도 못 했어. 내 평생 운 오빠 만나는데 다 썼나보다. 와, 건물주... 나 자취방 집주인 말고 건물주 처음 봐."
"건물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크기인데, 뭘. 그냥 주택이지. 그만 놀라고 어서 2층으로 올라가자. 밖은 낡았어도 안에는 리모델링 싹 해서 나쁘지 않을거야."
그녀는 침을 꿀꺽삼키며 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갔다. 오빠의 말대로 이 층에 존재하는 가구는 한 세대 뿐이었다. 문이라 할만한게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띠띠띠띠 - 띠리릭 -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도어락이 열렸다. 두꺼운 철문 너머로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집안 풍경이 혜지의 눈을 사로잡았다.
바닥에 설치된 간접조명을 받아 현관의 대리석 바닥이 반짝인다. 현관만 해도 사람 두 명은 누워 잘 수 있는 크기다.
게다가 정면에 보이는 아름답게 조각된 유리문. 철문 안에 또 문이 있었다. 오빠가 옆으로 슥 미니 부드럽게 밀려나는 유리문은 조그마한 소음도 내지 않는다.
"거기 서서 뭐해? 들어와."
현우는 얼떨떨하게 서있는 혜지에게 손짓하며 그녀를 불렀다.
아마 이런 인테리어를 처음 본 모양인지, 현관에 깔린 대리석 바닥을 보고 놀라더니 슬라이딩 중문을 보고 또 놀라는 눈치다.
그걸 보고 있자니 이 여자를 집에 데리고 온 또다른 메리트가 떠올랐다.
사랑의 시작이 이성적 끌림 혹은 성욕이라면, 이를 유지시키거나 심화시켜주는 것은 현실적 조건들.
때로는 사랑의 시작이 그러한 조건인 경우도 있었으나 그 시작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조건은 한 번 솟아난 사랑이 마르지 않도록 해주는 원천이 되어준다.
특히나 돈이라는 것은 더욱더. 월수입 천 만원이 넘어가는 가정은 이혼율이 0%에 육박한다고도 하지 않던가.
그녀의 말마따나 잘 생기고 키 큰 남자에게 남 부럽지 않은 경제력까지 더해진다면 그녀의 사랑은, 그리고 그녀의 집착은 어느 만큼이나 솟아날까.
연신 실내를 두리번거리며 한 발씩 들여놓는 혜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모른다.
"진짜 대박이다... 완전 넓어. 집에서 숨바꼭질 해도 되겠다!"
"혼자 살기 좀 넓긴 하지? 마침 적적했는데 잘 된 것 같기도 하고. 이젠 종종 놀러와."
"종종이 아니라 매일 올거야! 오빠 이런 데서 살면서 어떻게 내 집에서 놀았어! 완전 서민체험하는 기분이었겠다."
부잣집 도련님을 만난 가난한 집안의 여자는 아침 드라마의 단골 소재지만 현실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스토리다.
그러한 스토리의 주인공이 된 혜지는 지금의 상황이 꿈만 같았다.
자신의 남자친구가, 서울 한복판, 그것도 지하철에서 5분 거리의 건물을 가진 건물주라니.
그녀의 목소리에 들뜸이 선명하다. 현우를 바라보는 두 눈은 몽롱한 사랑에 취해있었다.
현우는 그녀의 뻔한 반응을 즐기며 멋쩍게 웃었다. 순진한 여자라 그런지 속마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내비쳐 온다.
"서민체험이라니, 굳이 그 정도는 아니고. 나도 어쩌다보니 물려받은 집이니까."
하긴, 드러내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백이면 백 저런 반응을 보여오겠지. 외적으로 완벽하다 믿는 남자친구가 알고보니 건물까지 가지고 있다면 여자들이 보여올 반응이야 뻔했다.
연애로도 완벽하지만 결혼이라면 더 완벽한 상대. 이제 자신은 말로만이 아니라 정말 평생을 함께 하고픈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을 이어가던 현우의 뇌리에 불현듯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자신이 언제든 결혼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그녀도 느꼈을테니 새로이 써먹을 미끼가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
연애를 들먹이며 걸레로 만들었다면 결혼을 들먹이며 가축으로 만든다. 평생을 함께할 사람에게 이 정도도 못 해주냐는 말은 얼마나 허울 좋은 명분이란 말인가.
여전히 집안을 둘러보며 감탄하는 그녀에게 한껏 조소를 날렸다.
불쌍한 신데렐라가 왕자의 궁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신데렐라에게는 아름다운 드레스도, 반짝이는 유리구두도 없었다. 왕자의 배필이 될 운명도 그녀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를 기다리는 운명은 단 하나. 왕자라 믿는 악당의 비참한 성노예가 되는 것.
휘황찬란한 궁전이 그녀를 가둘 우리가 되는 날이 눈에 보일듯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