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일상이 되어가는 비일상 (5)
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이 부실 정도로 환히 웃어주었다.
이것이 그녀의 운명이라면. 기꺼이 그 운명에 순응해줄 생각이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
그녀가 입에 올린 운명이라는 말. 그리고 현우가 입에 올린 운명이라는 말. 두 말의 외연은 같다 할지라도 담고 있는 의미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현우에게 그런 의미 차이는 중요치 않았다. 어쨌든 간 그녀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감동하는 눈치였으니까.
"오빠... 완전 힐링 백퍼센트야... 식당도 예쁘고, 음식도 맛있고, 오빠가 나 사랑한다고 해주고... 나 정말 행복한 여자다, 그치?"
"그러엄. 게다가 그 오빠가 밥도 사주고, 응? 기분 좋아졌다니 다행이네."
현우는 그녀의 접시에 담긴 케이크 한 조각을 집어먹으며 대답했다.
뷔페식 레스토랑의 디저트가 으레 그렇듯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싼 맛.
괜히 입만 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포크를 내려놓고 다음 접시를 가지러 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혜지도 접시를 가리키는 현우의 손가락을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인지 현우의 옆자리로 다가와 귓가에 작게 속삭인다.
"나... 갑자기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 오빠.”
"뭐?"
"오빠도... 그, 뒤로 하는거에 관심 있어?"
혜지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현우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추며 작게 대답했다.
"...뒷치기?"
"아니아니, 그거 말고... 그, 똥꼬에... 넣는거."
그녀가 속삭이는 말을 듣자 현우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영문을 모를 일이었지만... 그녀가 먼저 이런 이야기를 꺼내온다면 대환영이다.
"애널섹스 말하는거지?"
마침 옆자리 테이블의 사람들도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현우는 그녀의 제안에 반색하며 나지막히 물었다.
"아, 응응. 그거."
혜지는 먼저 말을 꺼내놓고도 부끄러운 모양인지 볼을 붉혔다.
레스토랑에서 꺼내기엔 민망한 주제라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충동적으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넌 어떤데? 해보고 싶어?”
“음...”
그녀가 어디서 애널섹스를 접했는지는 잠깐만 생각해봐도 뻔했다. 아마 커뮤니티에서 찾아봤겠지.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횡재가 그저 흡족할 뿐이었다.
“난 너만 좋으면 해보고 싶어. 네 생각은 어때?"
왜냐하면 이건 그녀의 뒷구멍을 날로 먹을 찬스였으니까. 아니, 그간의 설계 덕분인걸 감안하면 그렇게 날로 먹는 것도 아니다.
“뭔가 비위생적인 것 같기도 하고... 위험한건 아니지?”
“당연하지. 내가 설마 위험한걸 시키겠어? 천천히 시도하면 하나도 안 위험해.”
"안그래도 커뮤니티에 그거 하는 사람들 많더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웃는 혜지. 현우는 그녀가 바쳐오는 기회를 재빨리 잡아챘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난 아까도 말했듯이 너만 오케이하면 해보고 싶어. 남들 다 하는건데 우리라고 못 할게 뭐야."
"음... 그래, 그럼..."
혜지는 말 끝을 흐리며 배시시 웃었다. 생략된 뒷말이 승낙의 말이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아낸 기분에 현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밥을 먹다가 뒷구멍의 순결을 바치겠노라 약속하는 여자라니.
커뮤니티를 알려준 보람이 톡톡했다.
그녀가 커뮤니티에서 또 무엇을 보았을까.
현우는 차오르는 호기심을 해결하기 전에 우선 칭찬의 말부터 꺼냈다.
"고마워. 나도 그런거에 관심이 있긴 했는데 먼저 말하기가 어려워서 말 못하고 있었어. 역시, 우리 자기가 최고야. 커뮤니티 둘러보겠다는 약속도 지켜주고, 이런 선물도 생각해오고."
혜지의 매끄러운 뺨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일탈을 대단한 일인 양 추켜세워준다. 고맙다와 최고다라는 말을 번갈아가며 잔뜩 감동한 티를 내어준다.
이 모든건 그녀의 학습을 촉진할 좋은 자양분이 되어줄 터였다.
그렇게 적당히 칭찬했다 싶을 때쯤 슬그머니 본론을 꺼냈다.
"자기야, 커뮤니티에서 또 뭐 봤어?"
현우는 그녀가 오늘 하루 일궈낸 성취를 이 자리에서 감상해보고 싶었다. 다행히 옆자리의 사람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어제 한 거...”
“뭐?”
“그... 오줌. 골든 샤워.”
아, 그것도 봤구나. 하긴, 그런 자극적인 플레이일수록 추천수가 높긴 할 테니까.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에도 없는 사과의 말을 건넨다.
“사실 나도 그거 커뮤니티에서 봤었거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따라했나봐. 어제 많이 놀랐지?”
"아냐아냐. 괜찮대두! 더 대단한 사람들도 많던걸 뭐."
혜지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보였다. 오히려 더 극단적인 플레이를 들먹이며 감탄을 늘어놓기까지 한다.
그녀가 구경한 플레이는 생각 이상으로 하드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셔주는 음뇨라든지, 질내방뇨라든지.
현우는 스캇은 그다지 흥미가 없지만 질내방뇨는 제법 관심이 갔다. 그야말로 변기년에게 어울리는 플레이가 아닌가.
언젠가 그녀에게 시켜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기억 속으로 갈무리한다. 이왕이면 후장방뇨까지 시켜보는 것도 좋을 지도.
"또? 또 뭐봤어? 그게 끝이야?"
"음... 점심 시간에 잠깐 본거라. 여러 개 보긴 했는데 기억나는건 그 두 개 정도? 두 개는... 좀 적나...?"
"아냐아냐. 뭐라고 하는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두 개도 충분히 대단하지. 우리 자기 역시 착해~ 날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가 느껴져."
"헤헤... 나 잘했어? 칭찬 받을만 해?"
"응, 완전! 칭찬도장 백 개 꽝꽝이야. 너무 예뻐."
현우는 그녀의 뺨에 쪽 소리가 나게끔 입을 맞췄다.
마치 강아지를 길들이는 기분이다. 눈물을 쏙 빼놓을 만큼 채찍질을 해대도 이렇게 다시 꼬리를 쳐온다면 어찌 예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주인의 애정을 간절히 바라는 암캐에겐 그에 걸맞은 포상을 내려야하는 법. 가벼운 볼키스로 포상을 대신하고 다음 접시를 담으러 발길을 옮겼다.
정말이지, 훌륭한 데이트다.
3.
식사가 끝난 직후, 둘은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아울렛의 영화관에서 로맨스코미디 한 편을 예매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오십 분 가량.
무작정 기다리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기에 적당히 시간도 때울 겸 아울렛의 1층에서 옷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오빠 이 맨투맨은 어때?"
"커플티로? 넌 피부가 하얀 편이니까 칙칙한 색보다는 밝은 톤이 어울리지 않을까?"
"아, 그런가."
옷을 고르는 혜지의 만면에 미소가 가득하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보고 싶은 영화를 기다리며, 커플티 쇼핑이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도 현우를 힐끔거리는 다른 여자들의 시선.
처음에는 쏟아지는 이목이 괜스레 민망해 손부채질을 해댔지만 지금은 그 시선도 즐겁기만 하다.
다른 여자들이 끊임없이 눈길을 주는 멋진 남자. 그런 남자가 자신의 남자친구라니. 혜지는 현우의 어깨에 껌딱지마냥 달라붙어 자신이 그의 여자친구라는 사실을 과시했다.
허영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혜지였지만 현우는 21년 인생 동안 처음으로 가져보는 자랑거리였기에 신이 난 탓이다.
사람들이 선망하는 아름다운 커플이 되었다는 두근거림. 남들의 부러움을 산다는 낯선 감각.
옷을 고르는 그녀의 눈동자가 난생 처음 장난감을 거머쥔 아이처럼 반짝인다.
"아이보리 색이 더 낫네. 훨씬 더 잘 어울리는데?"
"음 그런가? 아이보리가 제일 나아?"
"뭘 입어도 예쁘긴 한데, 그레이보단 아이보리가 더 잘 받는건 확실해."
혜지는 현우의 입발린 칭찬에 활짝 웃으며 아이보리 맨투맨을 집어들었다.
"그럼 나 먼저 입고 나와볼게. 오빠도 사이즈 달라고 한 다음에 같이 입어보자."
"그래, 그러자."
이윽고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혜지. 거울에 몸을 비추어보고 있으니 탈의실에서 걸어나오는 현우가 보였다.
"어때? 나도 아이보리 괜찮아?"
"헐, 대박. 오빠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사이즈도 괜찮고. 이걸로 살까?"
"그러자. 택 떼달라고 해. 내가 둘다 계산해서 올게. 입고 가자."
현우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계산대로 향했다. 기껏 해봐야 오 만원 남짓한 옷. 그리 부담되는 가격도 아니다.
"아냐아냐, 내가 살게. 밥이랑 영화도 오빠가 샀는데 이건 당연히 내가 사야지."
혜지는 그런 현우의 소매를 잡아채며 자신이 계산하겠다고 소리쳤다.
그건 현우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었기에 조잘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틀어막았다.
마치 음소거라도 한 듯 그녀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느닷없는 키스에 놀란 모양인지 혜지는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현우는 수 초간 맞대고 있던 입술을 떼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자기야, 내가 뭐라 그랬어. 돈은 내가 다 낼 테니까, 자긴 오늘 시간만 내라니깐. 오늘은 내가 다 해주고 싶어서 그래. 그렇게 하게 해줄거지?"
"아, 미안해서... 내가... 내가 너무 받기만 하니깐..."
"뭐가 미안해,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건데. 자기 어제 고생 많이 했으니까, 나도 그게 미안하고 고마워서 그래. 그러니깐 그냥 받기만 해줘."
잠시 고민하던 혜지는 현우의 소매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녀의 낮은 자존감은 고작 몇 만원에 홀라당 넘어가버리고 만다. 현우가 줄곧 베풀어주는 따스한 애정에 눈물까지 글썽거린다.
누군가에게 외면을 받는 것은 가슴 시린 일이지만 반대로 사랑을 받는 일은 이만큼이나 가슴이 따뜻해지는 일이다.
그 온기에 흠뻑 젖으며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마워, 오빠. 나도, 더 잘할게. 월급타면... 다음엔 내가 다 사줄거야."
“말만 들어도 고맙네. 그럼 이건 내가 산다?”
“응!”
혜지는 계산대로 향하는 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은 오빠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선 무엇이든 다 사주고 싶지만 모아둔 돈은 없다. 그런 그녀의 뇌리에 오빠의 취향이 스쳐지나갔다.
오빠의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일이 곧 오빠를 기쁘게 하는 일. 그러니 오빠를 기쁘게 해주려면 칭찬 받을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오빠가 언제 칭찬을 해주었던가 떠올려보면 그 일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커뮤니티를 둘러본다. 그리하여 오빠의 취향을 더 잘 이해해주고 맞추어줄 수 있는 여자친구가 된다.
그렇게 그녀의 내면에 또 한 번 끔찍한 다짐이 싹트고 있을 무렵. 현우는 계산을 마치고 돌아와 혜지를 다시 품에 안았다.
“잘 어울리네. 커플티 입고 있으니까 이젠 누가 봐도 커플 같겠다.”
“그러게. 고마워, 오빠. 정말정말 잘 입을게.”
커플. 운명만큼이나 혜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말. 이번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착하고 잘 생긴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 그 사실을 곱씹을수록 행복하기만 하다. 엑스트라로 겉돌던 세상에서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아 웃음이 터져나왔다.
현우도 이를 눈치 채고 더 살갑게 굴었다. 연인 흉내라면 이미 익숙해졌기에 제대로 장단을 맞춰줄 속셈이었다.
어찌보면 이건 일종의 스폰 관계가 아닐까. 그녀가 바라는 연인을 흉내내주고 그녀의 인생 전부를 대가로 받아간다. 어떻게 보더라도 절대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끌어안고 손깍지를 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재차 입을 맞춘다.
점점 더 짙어지는 혜지의 미소와 덩달아 밝아지는 목소리. 엘리베이터 문에는 커플티를 맞춰 입은 둘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쳤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그림으로 옮긴다면 이와 같지 않을까. 혜지는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랑에 빠지는 기분을 느끼며 현우의 품을 파고 들었다.
정말이지, 완벽한 첫 데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