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일상이 되어가는 비일상 (4)
1.
4월의 마지막 날 월요일. 몸을 감싸는 저녁 공기가 몹시도 포근하다.
그러나 매장 문을 나서는 혜지의 마음은 날씨만큼 포근하지 못했다.
여느 때라면 경쾌한 발걸음으로 현우를 만나러 갔을 테지만 오늘따라 유달리 발걸음이 무겁다.
오전 내내 매달렸던 매장 정리가 힘에 부친 탓도 있었지만 단순히 그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혜지는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단순히 기분 탓이겠거니 했지만 그녀도 이젠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제 이후로 사람들의 태도가 이상하리만치 쌀쌀맞아졌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러한 온도차를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특히 퇴근인사를 남기는 그녀에게 매니저가 꺼낸 의미심장한 말.
내일부턴 굳이 인사를 남기지 말고 편하게 퇴근하라던가.
‘우리 이제 그렇게 딱딱한 사이는 아니잖아요? 알겠죠?’
우물쭈물하는 혜지에게 매니저는 딱딱한 사이가 아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웃는 낯으로 말을 꺼낸 탓에 언뜻 듣기에는 편의를 봐주는 말로도 들렸지만.
따지고 볼수록 영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오늘 하루 매니저가 자신에게 얼마나 딱딱하게 굴었던가. 그래놓고 이제 와 딱딱한 사이가 아니라니...
그 말이 마치 앞으로는 인사도 하지 말고 조용히 꺼지라는 말로 들렸다면 혼자만의 착각인걸까.
매니저의 말을 들으며 말 속에 뼈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지만 이를 따지고 들 용기는 없었다. 그저 은근한 비아냥거림에 마음 아파하며 시름시름 속앓이만 할 뿐이었다.
“에휴...”
지금의 복잡한 심정이 깊은 한숨에 묻어나온다. 애써 생각을 털어내 보려고 해봐도 근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생각해보면 비단 매니저 뿐만이 아니었다. 지영 언니도 그랬다.
점심을 먹고 들어와 조심스레 드림 카카오 몇 알을 건넸지만 이미 양치를 했다는 말과 함께 거절당했다.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내민 손이었건만 한순간에 무색해져버렸다.
정말 양치를 해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온종일 자신을 피하려는 듯한 태도만큼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아아아...”
지하철을 기다리는 그녀의 한숨소리가 더 커졌다.
어째 점점 더 외톨이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첫 직장에서는 여러모로 사회생활이 서툰 그녀를 대신해 전남자친구가 일종의 징검다리가 되어주었지만 지금은 그래줄 사람도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때만 예외였을 뿐 무리를 겉도는 일이 오히려 더 흔한 일이긴 했다.
할머니와 둘이서 사는 열악한 가정환경에 항상 풀이 죽어 있는 소심한 성격은 그녀의 의도와 상관없이 항상 혜지를 혼자로 만들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언제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사람들의 외면과 무관심이 또 그녀를 찾아왔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떨떠름한 얼굴로 거절당하는 일은 어른이 된 지금도 마음이 쓰리다. 외면받는게 익숙하다고 해서 그 슬픔마저 무뎌지는건 아니니까.
헤지는 지하철에 올라타며 왈칵 눈물이 차오를뻔 했지만 곧 만나기로 한 현우를 떠올리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현우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옛날에는 할머니 품에 안겨 찡얼거렸겠지만 지금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가 오빠밖에 없었다.
현우를 보고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는 발걸음도 빨라졌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서울대입구역 3번 출구 앞.
자신이 먼저 도착한 모양인지 주변을 둘러봐도 오빠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쯤이냐고 전화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먼발치에서 걸어오는 한 남자가 헤지의 눈에 들어왔다.
훤칠히 쭉 뻗은 기럭지와 몸에 걸친 가죽 점퍼를 멋지게 소화해내는 남자. 누가 봐도 오빠였다.
첫 데이트라 그런걸까. 옷이며 머리며 잔뜩 힘을 준게 멀리서도 느껴졌다. 그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려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으니 현우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성큼성큼 걸어와 혜지를 품에 안는 현우. 몸에서는 묵직한 우디 향의 향수냄새가 풍겼다.
“보고 싶었어, 혜지야. 조금 늦어서 미안해.”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 오빠. 내 남친 오늘 완전 멋지다!"
혜지는 현우에게 안긴 채로 그의 입술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그래, 지금은 오빠가 있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학창 시절, 낡고 헤져버린 교복과 교통비도 빠듯한 살림살이는 평범한 우정마저 사치로 만들어버렸지만.
지금의 사랑은 아니다.
한 뼘도 되지 않을 거리에서 서로의 숨결이 맞닿는다.
혜지는 자신의 손에 쥔 사랑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우중충하던 그녀의 마음 속에도 봄이 찾아온다. 그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2.
현우는 혜지와 손을 잡고 걸으며 피식 웃었다.
어젯밤만 해도 오줌을 받아마시며 질질 짜던 여자였지만 이렇게 밖에서 보니 또 새롭다. 어제와 지금의 갭차이가 묘하게 성욕을 들끓게 한달까.
매섭게 혼내다가도 조금만 잘해주면 헤실거리는게 어린아이를 보는 기분이기도 하다.
첫 데이트라고 해서 한껏 차려입었지만 그 외에 특별히 준비한 건 없었다.
그저 같이 밥을 먹어주고, 적당히 쇼핑이나 할 생각.
신림역의 포도몰이 데이트를 하기엔 더 좋았지만 굳이 그녀를 서울대입구역으로 부른건 움직이기 귀찮아서였다.
현우의 집은 서울대입구역과 봉천종합시장 사이의 청룡동에 위치해 있었기에, 집 앞의 라붐 아울렛에서 첫 데이트를 때우는게 신림역까지 나가는 것보다 훨씬 편했다.
그리고 어디서 무얼 하느냐와 상관없이 길거리를 같이 거니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는 여자였으니까.
지금도 그녀는 자신의 옆구리를 꿰찬 채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오빠~ 내 오빠~ 향수 냄새 너무 좋다."
"우리 자기 오늘도 많이 힘들었나보네. 왜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실까?"
현우는 칭얼대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상적인 남자친구 연기라면 조금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제의 플레이가 가혹했던 만큼 오늘은 쉬어가는 턴이어야 했으니까.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쉬어간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마음을 더 크게 부수기 전의 워밍업, 혹은 몸풀기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하나.
현우에게는 지금의 연기 또한 그녀를 망가뜨리는 과정 중 하나에 불과했다.
"나 오늘 진짜 힘들었어. 혹시 땀냄새는 안 나지? 박스를 몇 개나 나른건지 모르겠다."
혜지는 찡얼거리며 말하다가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잊고 있었던 직장에서의 불화가 다시 생각난 탓이었다.
"그거말고도 힘든 일이 또 있었는데... 이따 저녁 먹으면서 다 이야기해줄게. 오빠도 한 번 들어봐봐."
현우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오늘의 저녁은 라붐아울렛에 위치한 애슐리. 제법 높은 층에 입점해 있는 탓에 창 밖으로 보이는 뷰도 볼만 했다.
월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웨이팅은 없었다.
"평일 디너 2인 맞으시죠? 식사시간은 지금부터 2시간입니다. 더 필요한거 있으신가요?"
"아뇨. 감사합니다."
자리를 안내해준 알바생에게 가볍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바로 샐러드바로 향한다.
애슐리퀸즈가 아니라 애슐리W여서 그런지 음식의 가짓수가 적었다. 현우는 그다지 먹을 만한 음식이 보이지 않았지만 혜지는 무엇이 그리도 신나는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와... 오빠 여기 피자도 있다!"
그러다 구석에 위치한 화덕피자 코너가 신기했는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다.
이런 곳이 처음인걸까, 아니면 그냥 이 지점이 처음인걸까.
가끔 보면 아이처럼 순진한 구석이 있는 여자다. 지금처럼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신나한다.
가난과 가정폭력에도 꿋꿋이 지켜낸 순수함. 현우는 그 순수함이 퍽 마음에 들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길을 거니는 기분이 특별하듯, 그 무엇도 더럽히지 못한 순수함을 짓밟는 것은 자못 특별한 법이다.
"그러게. 자기가 좋아하는 피자도 있네. 내가 피자랑 파스타 담아갈 테니까 자긴 다른 먹고 싶은 것들 담아와."
현우는 그녀가 좋아할 법한 음식들을 대충 접시에 담아 자리로 돌아왔다. 잠깐 기다리고 있으니 접시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오는 혜지가 보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그녀의 접시 위에는 케이크와 푸딩, 과일 등이 가득하다.
"자기야, 그거 먹고 밥이 되겠어? 디저트는 밥부터 먹고 이따 먹지."
"에이. 당연히 이것도 먹고, 밥도 또 먹을거야. 이런 데 오면 본전 뽑아야지!"
의욕에 가득 찬 목소리로 해맑게 외치는 혜지. 현우는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이런 천진난만한 모습들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본전은 안 뽑아도 돼. 내가 살테니까 돈 생각하지 말고 먹어. 많이 먹으면 오히려 질린다?"
"진짜? 어제 피자도 오빠가 샀잖아. 오늘 저녁은 내가 사려고 했는데..."
"누가 사는지가 중요한가. 돈 있는 사람이 사는거지. 너 월말이라 돈도 없다며. 그냥 감사합니다하고 먹기나 하셔."
"헤헤헤... 넵!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혜지는 현우의 접시에 담긴 피자부터 먹더니 연신 맛있다고 중얼거렸다. 그후로도 그녀의 조잘거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조그마한 입에서 쏟아내는 직장 이야기. 궁시렁거리며 내뱉는 매니저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들.
현우는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들어주기가 꽤나 성가셨지만 그녀를 처음 만난 날처럼 맞장구 쳐준다.
"싹수가 노란 년이네. 막내 들어왔다고 기선제압 하고 그러는건가?"
"몰라. 내가 잘못했으면 그냥 말로 해주지. 은근히 사람 꼽주는거 완전 기분나빠."
"그러게. 이상한 사람이긴 하다."
"맞지? 아, 그리고 어제 만난 지영 언니 기억나? 나랑 같이 퇴근하던. 아니 글쎄, 그 언니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혜지의 푸념. 잠자코 듣고 있자니 현우도 점차 흥미가 동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직장에서 꽤나 미운털이 박힌 듯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군대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신병 하나가 전입오면 신병의 일거수일투족이 전 부대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곤 했었다.
그 과정에서 작은 잘못도 크게 부풀려져 개념 없는 신병이 왔다더라 하는 소문이 부대에 파다하게 퍼졌었고, 소문의 주인공인 신병에게는 이유 없는 갈굼과 꼬투리 잡기가 뒤따르기 일쑤였다.
지금 혜지가 처한 상황이 그와 유사해보였다. 그녀가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만 불과 하룻밤 사이에 조직적인 따돌림이 시작될 정도라면 매장 분위기가 군대만큼 폐쇄적인 모양.
현우가 보기에는 매니저라는 사람이 모든 일의 주범으로 보였다.
질 나쁜 한 사람이 흐름을 주도하면 공공의 적이 만들어지는건 한순간이라는 것을 군생활로 깨달았다. 그것이 매니저처럼 어느 정도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기에.
얼굴 모를 매니저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를 전한다.
세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만 그야말로 훌륭한 어시스트가 아닌가. 직장에서조차 고립된다면 그녀가 기댈 구석은 자신 하나밖에 남지 않을 테니 말이다.
현우는 속마음과는 반대로 일단 그녀의 투정에 적당히 동조해주었다.
"그 사람도 좀 너무하긴 하네. 초콜릿 정도는 그냥 받아주지."
"맞지? 거기서 매몰차게 딱 거절하고 그 다음부턴 말도 안 걸어주더라고. 그래서 조금 슬펐어."
그때의 상황이 떠오른 모양인지 혜지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다.
현우는 모처럼 접하는 그녀의 우울이 반가웠다.
애초에 외로움을 달래주며 시작된 관계.
그녀가 뿜어내는 우울은 신뢰와 의존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재빨리 입을 놀렸다.
"그런 못된 사람은 그냥 꺼지라고 해. 걔 없어도 내가 있잖아? 난 무조건 자기 편인거 알지?"
"맞아... 난 오빠가 있으니까! 오빠만 있으면 돼. 다 필요없어."
몇 마디 꺼내지도 않았는데 바로 맹목적인 의존을 보여오는 그녀. 현우는 마음이 흡족해져 그녀에게 재차 되물었다.
"정말? 그만큼 나 사랑해? 진짜 나 하나만 있으면 돼?"
"당연하지. 진짜진짜 정말 많이 사랑해. 오빠 아니었으면 나 오늘 혼자서 펑펑 울고 있었을지도 몰라. 오빠가 있어서... 진짜 다행인거 같아. 오빠랑 나는 진짜 운명이라니까."
어제의 만행을 벌써 망각한걸까, 혹은 그녀의 무의식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걸까. 그토록 모진 고초를 겪고도 여전히 사랑을 입에 담는 혜지가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운명. 눈앞의 여자가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입에 올려대던 구질구질한 말.
현우가 보기에는 그녀의 운명이라는게 기구하기 짝이 없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그녀를 고립시키는 상황 속에서 그녀가 의지할 사람이 자신 뿐이라니.
그야말로 늑대 앞에 던져진 새끼 양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혼자서만 그 사정을 모르고 운명을 나불대는 꼴이 우스워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터져나온다.
이정도면 그녀의 운명이 자신의 성노예가 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린 운명이지. 맞아, 자기는... 내 운명이야. 나도 사랑해."
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이 부실 정도로 환히 웃어주었다.
이것이 그녀의 운명이라면. 기꺼이 그 운명에 순응해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