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일상이 되어가는 비일상 (3)
1.
혜지는 텅 빈 화장품 박스를 내려놓고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세일로 동난 제품들이 재입고된 탓에 아침부터 줄곧 물건을 진열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맡은 곳은 매장 2층의 헤어케어 코너와 바디케어 코너 전부. 다른 사람들은 모두 1층 정리를 맡은지라 2층에는 혜지 뿐이다.
혼자서 하기에는 많은 양이지만 딱히 불만은 없었다.
1층에는 메이크업 브랜드와 스킨케어 브랜드들이 모여 있는 만큼 일손이 더 필요할 테고, 그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옆에 쌓인 무수히 많은 빈 박스들. 출근 이후 잠시도 쉬지 않고 일했더니 정리가 거의 마무리 단계다. 가지런히 놓여진 화장품들을 보고 있자니 땀 흘려 일한 보람이 느껴진다.
“하아...”
혜지는 숙였던 몸을 일으키며 한숨을 돌렸다.
아무리 자그마한 물건이라도 이를 수백 번 들었다 놓았다 하는 일은 제법 힘을 요하기 마련. 일에 몰두할 때는 몰랐지만 불현듯 허기가 밀려온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이미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있었다.
혜지는 박스들을 정리하고 서둘러 아래로 내려갔다.
지영 언니와 매니저 언니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가 자신이 내려오자 말을 멈춘다. 1층 정리가 예상보다 빨리 끝난 모양이었다.
“아... 저기, 매니저님. 시키신 일은 거의 다 했는데요, 제가 아직 밥을 못 먹어서요. 잠시 편의점좀 다녀와도 될까요? 금방 갔다 올게요.”
혜지는 매니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남아 있는 점심시간은 30분 남짓이지만 편의점에서 때우고 오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어머, 혜지씨. 여태 계속 하고 있었던 거에요? 밥 시간되면 뭐좀 먹고 와서 하지~ 어련히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별 말 안 하고 있었는데. 얼른 먹고 와요.”
혜지의 말에 미처 몰랐다는 표정으로 대답하는 매니저. 그러나 그 말투가 미묘하다.
흡사 나무라는 듯하면서도 걱정하는 듯한 느낌이다. 어쩐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아 보였다.
혜지는 어제 휴대폰을 사용하다 걸린 일이 덜컥 떠올랐다. 2주 간 일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얌체 같아 보였던 걸까.
순간 어떤 반응을 보여야할지 몰라 혼란스러웠지만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네. 감사합니다.”
아마... 아침부터 바빴기에 조금 피곤하신 걸테지. 괜한 착각으로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몸을 돌리기 전 옆에 서있는 지영 언니에게도 가볍게 인사한다.
“언니, 어젠 잘 들어가셨어요?”
“아, 응. 배고프겠다, 얼른 밥먹고 와.”
하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뭔가 어정쩡하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인사에 답하지만 왠지 거리를 두는 듯한 태도.
매장문을 나서는 혜지의 마음이 괜스레 찜찜해졌다.
그러고보니 평소라면 식사 시간이라고 알려주는 사람이 한 명 쯤은 있었을 텐데, 오늘은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생각을 이어갈수록 그녀의 얼굴이 점점 울상이 되지만 애써 긍정적으로 이해해본다.
아마 입고되는 물품들을 정리하느라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겠거니 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래, 그보다 일단은 지금의 배고픔을 채우는게 우선이니까. 혜지는 울적함을 털어내고 편의점 문을 열었다.
2.
그녀가 고른 오늘의 점심메뉴는 삼각김밥과 딸기우유. 원체 양이 적은 탓에 이정도면 허기를 채우기에 충분하기도 했고, 아까부터 아랫배를 콕콕 쑤시는 생리통 때문에 막상 입맛이 없었다.
혜지는 식사거리를 손에 들고 제일 구석자리로 향했다.
원래라면 유튜브를 보거나 노래를 들으며 먹었겠지만, 오늘부턴 새로운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오빠가 신신당부한, 그리고 자신이 굳게 다짐한 커뮤니티 구경. 오빠의 여자친구로서 그에 걸맞은 ‘성의’를 보일 생각이다.
그녀는 구부정한 자세로 앉은 채 휴대폰을 끌어당겼다. 작은 인기척이라도 들리면 바로 몸으로 가려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커뮤니티에 로그인한다.
그런 그녀를 반기는 '프밍'이라는 귀여운 닉네임과 그 옆에 떠있는 커플마크. 특별한 의미가 담긴 닉네임과 연인임을 증명하는 표식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혜지는 배시시 미소 짓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편의점에는 자신말곤 아무도 없다. 그래도 혹여나 남들이 볼까 조마조마하며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슬그머니 능욕/욕플 게시판을 누르고는 추천수로 정렬하니 친숙한 제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장 위에 있는,
[스압주의) 내가 아다깨준 20살 노예년 각종 사진 모음] 부터
가장 아래에 있는,
[20대중반 합법로리 와이프년 개보지보고 가세요^^] 까지.
하나같이 능욕/욕플 게시판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천박한 제목들.
웬만큼 제정신이 박힌 여자라면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지금의 혜지에게는 그저 탐구와 배움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삶에 서사가 있다면.
현우로 말미암아 그 서사가 완전히 뒤틀려버렸기에. 단순히 이야기의 방향이 바뀐 것을 뛰어넘어 이전의 이야기와 불연속적으로 단절되어버렸기에.
혜지는 삼각김밥을 깨작거리며 원래라면 그 존재조차 몰랐을 사이트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처음엔 가장 아래의 합법로리 와이프님부터.
제목을 누르니 자지를 물고 빠는 사진과 입으로 정액을 받는 사진, 엎드린 채 활짝 보지를 벌린 사진이 보였다.
어린아이 같은 양갈래 머리와 납작한 가슴, 그와 어울리는 자그마한 체구가 특이하다.
아마 이런걸 두고 로리라 하는 모양인데... 언뜻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다.
혜지는 첨부된 사진을 슥슥 훑어보다가 자신이 올린 사진이 훨씬 더 자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입꼬리가 올라갔다.
취향을 빙자하여 교묘히 꿰어낸 현우 탓에 진즉에 어긋나버린 성관념이다. 그녀의 성도덕은 남들과 자신을 견주며 우쭐해할 만큼 무뎌져버렸다.
벌거벗은 나체 사진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아래로 내리니 댓글들이 보인다.
[뒷보지도 쫄깃해보이는게 번갈아가면서 다 따먹고싶네ㅋ 후장도 개통했나요???? 핑두핑보니까 후장까지 핑크겠네여ㅋㅋ]
ㄴ[개통중입니다^^ 조만간 인증 올릴게요~~~~]
[나도이런 똥까시해주는 와잎만나고 싶네요ㅎㅎ 센스굿~~~~ 화끈하고 좋습니다~~ 제 와잎은 죽어도싫다네요ㅜ.ㅜ]
댓글에 달린 말들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어질어질해진다. 적나라한 표현에 수치심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가 듣도보도 못한 생소한 말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뒷보지? 후장? 똥까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에 화면을 위로 다시 올려보는 혜지.
무심코 볼 때는 불알을 빠는 줄로 알았던 사진들이지만 다시 보니 그게 아니다.
여자의 혀가 닿은 곳은 그보다 조금 더 아래의 항문. 속된 말로 똥구멍이라 불리는 곳.
사까시, 목까시라는 말은 오빠에게 들어 그녀도 알고 있던 터라, 똥까시란 말이 혀로 항문을 핥는 행위라는걸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혜지는 낯선 지식에 침을 꿀꺽 삼키고는 본격적인 탐험을 시작했다. 정상과 비정상을 거르는 판별력을 상실한 뇌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일에 순식간에 빠져든다.
휴대폰에 비치는 살색의 사진들. 그리고 범람하는 기상천외한 성욕의 향연.
실상을 따져보면 하나하나가 경악스러운 이상성욕이지만...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헤지는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보면 볼수록 자극적이고, 그만큼 중독적이다.
그들의 관능적인 자태에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이토록 고혹적인데, 남자들이 보기에는 오죽할까.
그녀는 작게 감탄하며 왜곡된 성지식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현우를 사랑하기에, 그리고 그런 현우를 위한 일이기에 거리낄게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그간 얼마나 성(性)에 무지하였는지를 깨달으며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제 딴에는 충분히 노력한다 했었는데 모르는게 많아도 너무 많았다. 우물 안 개구리인 자신과는 격이 다른 여자들이 발에 채인다.
[인생 첫 후싸받았어용♡]
[첨에는 넘넘 아파서 고생 마니 햇는데ㅎㅎㅎ 드디어 후장섹스 성공해써욤!!!! 뒷보지 섹시한가요? ㅎㅎㅎ ]
짤막한 본문 내용과 함께 첨부되어있는 여러 장의 사진들.
놀랍게도 남자가 토해낸 정액이 흘러내리는 구멍은 여자의 보지가 아니라 그보다 뒤쪽의... 항문이다. 처음 보는 광경에 혜지의 두 눈이 휘둥그레해진다.
방금까진 뒷보지가 질 내부의 깊숙한 곳, 즉 자궁에 닿는 질의 뒷부분을 말하는건가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것이 똥구멍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장, 뒷보지, 뒷구멍, 애널 등등... 용어는 천차만별이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행위는 동일했다. 바로 대변을 배설하는 기관에 남성기를 받아들이는 일.
야동에서나 존재하는 비일상적인 행위인줄 알았는데 이곳에선 극히나 일상적이다. 대관절 똥이 나오는 구멍에 자지를 넣는다니, 보면 볼수록 난해하다.
그녀는 금단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이어폰을 꺼냈다. 한 쪽 귀에만 착용한 채로 사진과 함께 올라온 동영상을 재생해본다.
귓가에 들리는 경박한 신음소리와 쾌락에 젖은 여자의 달뜬 음성. 영상 속 여자는 항문을 오고가는 자지를 따라 연신 뾰족한 교성을 질러댄다.
저곳에 넣으면... 도대체 어떤 기분인걸까. 저만큼이나 기분이 좋은 것일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상상에 그녀의 얼굴이 상기된다. 귀염상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개졌다.
그러나 당황과 민망함도 잠시.
얼마나 상식에 반하는지를 불문하고 일단은 기억하고 본다. 오빠의 취향이라면 쓸모가 있을 테고, 아니라면 버리면 그만.
살펴볼 글들이 아직 산더미이기에 쓸데없는 고민은 잠시 접어둔다.
혜지는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을 비비 꼬았다. 깊은 생각에 잠기거나 몰입할 때 나오는 일종의 습관이다.
김밥 한 입을 베어 물 때마다 다른 게시물을 누른다. 그렇게 한 입당 하나의 게시물을 정독한다.
[육변기의 올바른 사용방법]
[육변기년은 모름지기 이렇게 써야죠ㅋㅋ 보시고 추천 부탁드립니닫 행님들!!!!!!]
육변기라 불리는 여자. 그녀는 화장실에 꿇어 앉아 오줌을 받아 마시고 있었다.
그걸 봐도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모종의 동질감까지 느껴진다. 이제 어지간한 플레이는 개의치 않는 그녀였다.
댓글을 보고 새로운 깨달음도 얻었다.
그건 바로... 여자에게 오줌을 싸는 행위도, 일종의 취향이라는 것.
역시 오빠가 이상한게 아니다. 많고 많은 취향들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그것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댓글을 쓴 사람들은 이를 골든 샤워(Golden Shower)라 부르며 환호하고 있었다.
혜지는 내친 김에 '골든'과 '오줌'을 키워드로 검색해본다. 수십, 수백 개의 게시물들이 검색되었지만 이번에도 추천수로 정렬하기는 마찬가지.
[(혐오주의) 방뇨플 음뇨플]
가장 위에 떠오른 게시물부터 제목이 심상치 않다.
혜지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 글을 눌렀다. 혐오주의라는 말을 보고 각오는 했지만... 은연 중에 떠올렸던 수위를 넘어서는 사진들이 수두룩 했다.
오줌을 입에 머금는걸 넘어 처음부터 끝까지 마셔준다. 한껏 벌린 보지에 질내방뇨 당하며 이를 자랑한다.
글을 읽어내려가는 혜지의 얼굴이 착잡해졌다.
어째, 자신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 자신도... 명색이 오줌을 받아준 여자친구였는데, 여기서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꼴이다.
이런걸 자신이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 뭔가 도를 넘어서는 듯한 꺼림칙함.
하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혜지의 마음 속에 일순간 자책이 들어선다.
아차하는 생각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어제 그렇게 다짐해놓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또 마음이 약해지다니.
뇌속에 아로새겨진 현우의 세뇌가 흔들리는 그녀를 사로잡는다. 혜지는 강박증 환자처럼 방금의 불안을 내리눌렀다.
자신은, 절대 흔들려서는 안된다. 누군가에게는 토가 쏠릴 만큼 역겨운 짓거리겠지만 자신에게는 아니다. 세상 사람이 다 뭐라 해도 자신은 오빠의 취향을 이해해줄 수 있다.
힘들 것 같다고? 못 할 것 같다고? 천만에.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소중한 사랑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은 이 여자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다.
이 여자가 했다면,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생각. 오빠와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그건 당연하다는 생각.
혜지는 가차 없이 방금의 감정을 잘라냈다. 빼꼼 고개를 내밀던 위화감이 순식간에 먼지처럼 흩어졌다.
[카톡!]
그러다 이어폰을 울리는 알림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휴대폰을 바라보는 혜지의 얼굴이 돌연 환해진다.
[현우는내운명♡ : 점심은 먹었어? 배 아픈건 괜찮고ㅜㅜ? 생리통에는 다크 초콜릿이 좋대! 바로 앞에 편의점 있으니까 시간될 때 나가서 바꿔먹어♡ 이따 또 데리러갈게 여보♡]
애정이 듬뿍 담긴 카톡과 그 밑에 보이는 드림카카오 기프티콘. 마침 혜지가 방문한 편의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프티콘이다.
생리통으로 고생하는 여자친구를 챙겨주는건 너무나도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그만큼 안정적인 효과를 발휘하기 마련.
불안과 긴장으로 굳어 있던 혜지의 얼굴에 진한 웃음이 피어오른다. 당장이라도 오빠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오빠는, 나를 사랑한다.
현우의 기만과 눈속임에 성실히 놀아난 그녀는 또다시 헛된 사랑을 들이켰다.
오늘은 오빠에게 칭찬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오른다. 조금 남아있던 껄끄러움도 단숨에 털어낸다.
혜지의 입에 걸린 산뜻한 미소가 눈부시게 밝아졌다. 커뮤니티를 둘러보는 손가락도 덩달아 경쾌해진다.
10평도 안 될 법한 편의점에서.
몹쓸 사랑이 그녀를 파멸로 이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지금의 눈덩이가 어디까지 불어날지는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