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고립의 전조
1.
혜지가 일하는 대형 화장품 매장은 오늘따라 유독 북새통을 이루었다.
주말이기도 했지만 며칠 전부터 시작한 세일행사의 마지막 날이라 뒤늦게 매장을 방문하는 손님들이 몰린 탓이다.
계산을 기다리는 행렬이 길게 늘어서서 좀처럼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가득 찬 인파를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오는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혜지는 매장을 오고가는 손님들의 등 뒤로 공허한 인사를 외쳤다. 열에 한 둘 정도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었지만 대부분 들은 체도 않고 발길을 재촉할 뿐이다.
눈여겨 보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것이 매장 앞에 놓인 입간판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이 나왔다.
머릿속에는 아까부터 퇴근 생각이 간절했다. 얼른 오빠의 품 속에 안겨 오늘도 힘들었노라고 칭얼거리고 싶었다.
혜지는 현우생각이 나자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슬쩍 꺼내들었다. 원래 근무 중 휴대폰 사용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가끔 예외도 있는 법이니까.
“하아...”
조금 기대를 품었지만 아직도 답장이 없었다. 깊게 내쉬는 한숨과 함께 그녀의 고운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카톡을 보낸 지 벌써 네 시간도 훌쩍 넘었건만 아직 메시지를 읽지도 않았다는게 신경 쓰인다.
아래로 내린 손에 휴대폰을 거머쥐고, 눈을 힐긋거리며 통화 버튼을 찾아 눌렀다. 그러나 쫑긋 세운 귀에는 야속한 신호음만 들려왔다.
'그래, 피곤할 법도 하지. 매일같이 늦잠을 자던 사람이 아침 일찍 일어난 걸로도 모자라 배웅까지 해줬으니.'
혜지는 포니테일로 단정히 묶은 머리를 어깨 너머로 배배꼬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행복했던 아침을 곱씹으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렇게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시 일에 집중하려던 찰나.
우우웅 -
짧은 진동음이 귓가를 울렸다. 그녀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휴대폰을 빼내들었다.
아까부터 자신을 눈여겨보던 매니저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혀를 내차는게 보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현우는내운명♡ : 미안해ㅜㅜ 무음으로 해놓고 깜빡했네... 전화 온줄도 몰랐다ㅜㅜ 쭉 자다가 이제 일어났어... 많이 화났어?]
혜지의 찌푸린 얼굴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토록 기다리던 현우의 카톡이었다.
예상대로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여태 잠들어 있었나보다.
화났냐고 물어오는 끝말에서 그의 부드러운 말투가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아 오히려 마음이 포근해졌다. 연락을 기다리며 몇 시간동안 속앓이를 했지만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어제부터 사귀게 된 소중한 남자친구. 점심을 간단히 때우고나서 휴대폰에 저장된 그의 이름을 ‘현우는내운명♡’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현우를 두고 운명 외에는 달리 어울리는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지닌 가여운 사람이었고, 또 자신만큼 그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혜지는 조심스레 매니저의 눈치를 살피며 바삐 손가락을 움직인다. 평소 조금의 딴 짓도 하지 않고 성실히 일했으니 잠깐의 사정은 이해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혜지 : 흐ㅓ엉어ㅓ허어어 바보야ㅠㅠㅠㅠㅠ 걱정했자나ㅠㅠㅠ 자기 죽은줄 알아쪄ㅜㅜ 다행이야!!!!! 푹잤어????? 개운해?]
그러나 그녀는 답장에 너무 정신이 너무 팔린 나머지 매니저가 인상을 굳히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혜지씨, 오늘 무슨 일 있어요?”
화들짝 놀라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드는 혜지. 매니저 언니가 싸늘한 얼굴을 한 채 눈앞에 서있었다.
얼핏 들으면 안부를 물어오는 말같지만 그 속에 담긴 의도가 꾸중이라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 제가 기다리던 연락이 있어서요. 지금 막 마무리 됐어요. 죄송합니다.”
“아까부터 자꾸 폰만 쳐다보고 있던데, 그러면 안 되는 건 알죠? 교육 안 받았어요?”
“죄송합니다.”
자꾸 안 봤는데... 계속 참다가 딱 한 번 꺼냈는데... 혜지는 속말을 삼키며 매니저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교육 안 받았냐구요.”
“... 받았습니다.”
매니저는 한동안 그녀를 쏘아붙이더니 앞으로는 조심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보아하니 더이상 폰을 꺼내서는 안 될 분위기였지만 혜지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조금 있으면 퇴근이기도 했고, 오빠에게서 연락도 왔으니까.
혜지는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뿌듯함에 이전과 비교도 안될 만큼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혜지의 하얀 얼굴이 매장의 밝은 조명 아래서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반짝인다.
막 입구를 나서던 이들도 명랑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가 그녀의 해사한 얼굴을 힐긋거린다.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게 해주는 해맑은 웃음.
그건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아니 그런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 여자가 피어내는 아름다운 웃음꽃이었다.
2.
“고생하셨습니다~ 먼저 들어가볼게요.”
혜지는 매장을 돌아다니며 다른 알바생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남겼다. 얼마 전 이직을 한 까닭에 그녀가 여기서 막내였다.
오후부터 마감시간까지였던 알바를 그만두고 지금의 알바로 갈아탄 이후, 그녀는 저녁 있는 삶을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얻어낸 시간 대부분을 현우와 뒹구는 데에만 썼지만.
“혜지씨, 집이 어디야? 버스 타고 가?”
“아, 저는 그냥 걸어가요. 그, 지영... 씨는요?”
“풉. 지영씨라 부르기 어색하면 그냥 언니라고 불러.”
혜지는 매장문을 나서다 우연히 마주친 동료와 나란히 길을 걷게 되었다. 근무시간이 겹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퇴근을 같이 하는건 처음이었다.
자신보다 4살이 많아 ‘~씨’라는 말이 차마 입에 붙지 않았는데 그걸 알아챈 모양인지 먼저 편하게 대해준다.
“네, 그럼 앞으로는 언니라고 부를게요.”
혜지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곤 휴대폰을 곁눈질 했다. 씻으러 들어간다던 사람이 한참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다시 잠들어버린걸지도 몰랐다.
“혜지야, 저 남자 좀 존잘인거 같은데.”
뚱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치고 있는데 지영 언니가 어깨를 툭 치며 속삭였다.
“네?”
“길 건너편에 흰 반팔 티 입은 남자. 까만 슬랙스에. 누군지 딱 보이지?”
혜지는 고개를 들어 건너편을 응시했다. 거기에는, 오늘 아침 이 횡단보도를 같이 건넜던 남자가 혜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어온다.
“잘생김 인정? 와... 저렇게 대충 입었는데도 잘 생긴거 보면 역시 패완얼인가봐.”
혜지는 더이상 옆에서 떠들어대는 호들갑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뜨고 바라봐도 현우가 맞았다.
자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침에 이어 또 한 번 깜짝 이벤트를 준비한 모양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깜짝 이벤트도 아니었다. 아침에 데려다주며 밤에도 데리러 올까라고 묻던 말.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을 뿐이다.
신호가 바뀐다. 어서 달려와 품에 안기라는 듯 현우가 손짓한다. 얼굴에는 장난스런 미소가 가득했다.
혜지는 옆에 있던 언니의 존재는 까맣게 잊은 채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점점 얼굴이 가까이 보일수록 온몸을 타고 흐르는 기쁨을 담아 크게 소리쳤다.
“오빠아아아!”
그리고는 현우의 품에 와락 안겨 얼굴을 비볐다. 내 사람. 내 남자. 고작 몇 시간을 떨어져있었지만 몇 년을 못 본 것처럼 반가웠다.
멍하게 서있다가 뒤늦게 뒤따라온 지영은 그저 아리송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친남매라고 하기에는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고...
설마 사귀는 사이인가? 이런 남자랑, 얘랑?
혜지도 예쁘장한 편이긴 했지만 조금 급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만큼 눈앞의 남자는 얼굴 뿐만 아니라 체격까지 보는 이를 흐뭇하게 했으니까.
"안녕하세요, 혜지 남자친구 김현우입니다."
심지어 목소리도 좋았다. 선한 눈매를 반달로 접으며 정중히 내미는 손. 지영은 흠칫 놀라다가 그 손을 붙잡았다.
"아... 네."
잠시간 닿아있던 손이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지영은 멍하니 현우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었다.
길 건너에서부터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새삼 잘 생긴 얼굴이다. 조그마한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눈코입이 흠잡을 곳이 없었다.
"아, 저는 그럼, 먼저 가볼게요. 두 분이서 좋은 데이트 하시구요."
지영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붉게 달아오른 뺨을 들킬 것 같아 민망했다.
"아, 언니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또 뵐게요!"
지영은 혜지에게도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하고 서둘러 등을 돌렸다. 그러다 몇 걸음 못 가고 다시 뒤를 힐끗 돌아본다.
남자가 아까부터 등 뒤로 왼손을 숨기고 있길래 조금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 손에는 예쁘게 포장된 장미꽃 한 송이가 들려있었다.
아마 여자친구를 위한 선물이겠지. 퇴근길을 기다렸다 건네는 꽃이라니. 그것도 저런 얼굴로.
지영은 오히려 자신이 설레는 것을 느끼며 폰을 꺼내들었다. 이런 핫한 소식을 혼자만 알고 있기 아쉬웠다. 알바생들 너댓명이 모인 단톡방에 방금 일어난 일을 전했다.
[대박ㅠㅠㅠㅠㅠ!!! 신입 남친 개존잘임!!!]
[신입ㄴㄱ? 혜지 걔?]
[ㅇㅇㅇㅇ 남친이 꽃 사들고 매장 앞까지 데리러옴ㅋㅋㅋㅋㅋㅋㅋ 방금 같이 퇴근하다 만남!!]
남자가 얼마나 잘 생겼는지, 자신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떠들어대던 단톡방의 대화는 놀랍게도 혜지의 뒷담화로 이어졌다.
혜지가 퇴근하자마자 매니저가 떠들어댄 말들이 이미 매장 안에 파다하게 퍼진 탓이었다.
[근데 매니저님이 걔쫌 그렇다??? 던데ㅠㅠ 어떤 얘냐고 물으시더라구....]
[ㅇㅇ 일하면서 계속 폰만본대ㅁㅊ ㅋㅋ 이제 2주넘었나?? 벌써개빠졌음ㅋ]
[ㅋㅋㅋ 그거보구 뭐라하니까 존나 싸가지없게굴었다며 이야기듣고 존나어이털림ㅎ...]
'그럴 얘로는 안 보였는데...'
지영은 예상치 못한 대화 흐름에 잠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ㅇㅇㅇㅇ 감사합니다 소리치는거 매장 안까지 다 들리더라ㅠㅠ 갑자기 왜그러나했음ㅠㅠㅠ]
[혼나고나서 ㅈㄴ 보란듯이 쪼갯다며ㅋㅋㅋㅋㅋ 그거 듣고 ㄹㅇ개빙썅인줄ㅋㅋㅋㅋㅋ]
조금씩 쏟아지던 비아냥거림이 걷잡을 수 없이 불이 붙었다. 가만히 지켜만 보던 지영도 어느새 슬쩍 가세했다.
[와 걔 그런얜줄 하나도몰랐네ㅠㅠㅠ 어쩐지ㅋㅋㅋ 같이 걷다가 남친보고는 난 신경도 안쓰구 혼자 튀어나가더라ㅋㅋㅋ 쫌뻘쭘하긴햇음...]
지영은 방금의 채팅을 보내고 한번 더 뒤를 돌아봤다. 이제 제법 거리가 멀어져 흐릿했지만 혜지의 손에 들린 장미꽃이 보였다. 길쭉하게 쭉 뻗은 남자의 뒷모습도.
[근데 남친 진짜 존잘이긴함ㅠㅠ 남자가 아깝네.....]
[원래 그런얘들이 남자 ㅈㄴ잘꼬셔ㅋㅋㅋㅋㅋㅋ 남자들은 여우짓해도 하나도 모름]
그렇게 혜지의 이미지는 '말없고 조용한 얘'에서 한순간에 '빙썅 여우년'이 되어갔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가볍게 놀리며 키득대는 일은 그들에게 좋은 여흥거리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