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걸레에서 노예로 (3)
현우는 자신의 품에 안겨 얼굴을 부비는 혜지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아직도 감정이 북받치는지 훌쩍거리고 있었다.
"날 이해하는 여자가 되겠다는 말... 엄청 감동적인데? 진짜지?"
"흐윽... 응! 나 정말 그럴거야."
혜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현우는 혜지에게 당장이라도 명령을 내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가까스로 눌러참았다.
착한 일을 했으니, 메뉴얼대로 먹이를 던져주는게 우선이었다.
"넌 나랑 사귀면 어떤걸 해보고 싶었어? 나도 내 여친 기쁘게 해주고 싶은데."
현우의 입에서 나온 여친이란 말이 그녀의 귓가에 번개처럼 내리쳤다.
혜지는 벅차오르는 감동에 온몸이 찌릿했다.
"난... 난, 오빠가 자기야라고 불러주면 좋겠어. 여보야라든지."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네."
현우는 혜지의 얼굴을 감싸안으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곤 그녀의 붉어진 눈동자를 응시하며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울지마, 자기야."
헤지는 꺄악하고 작은 비명을 질렀다.
"어떡해 오빠... 나 너무 좋아. 또 불러줘! 계속, 더더!"
현우는 좋아 죽는 혜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별 것 아닌거에 크게 감동하는 아이같은 여자다. 그깟 말 몇 마디가 뭐라고.
현우는 혜지를 끌어당겨 꼬옥 끌어안으면서 그녀의 온기를 느꼈다.
"여보, 우리 잠시만 아무 말도 말고, 그냥 이렇게 끌어안고만 있자. 지금 이 순간을 음미하고 싶어서 그래."
혜지는 가만히 현우의 목덜미를 감싸안는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몇 번이나 안겼던 몸이지만, 이젠 자신의 남자친구라 생각하니 그 품이 새삼 따뜻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내 소중한 남자친구. 혜지는 전해져오는 편안함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현우는 그런 혜지를 내버려둔채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지금의 침묵은 음미따위를 위한게 아니었다.
아무 생각없이 툭 던진 말을 혜지가 곧장 수락하는 바람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앞으로 이 여자를 어떻게 조교할 것인지 대략적인 밑그림을 그려야했다.
그의 머릿속이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혜지가 걸레처럼 굴도록 만드는 것에 한 달이 걸렸다.
물론 마음먹고 몰아붙였으면 일주일로도 가능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랬다면 지금같은 상황은 절대로 불가능했겠지.
신뢰관계는 커녕, 얼마 지나지 않아 엉엉 울면서 욕을 해댔을테다.
그렇기에 한 달의 공은 아깝지 않았다.
무엇보다 혜지를 걸레로 만드는 첫 퀘스트를 거의 퍼펙트하게 클리어했단 사실이 흡족했다.
혜지는 허울 뿐인 사랑에 눈이 멀어 큰 강요나 억압 없이도 스스로 싸구려 창녀짓을 해댔다.
그리고 현우는 이번에도 그런 자발성을 원했다.
혜지를 인간 이하의 성노예로 만드는 두 번째 퀘스트도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원칙을 세워야했다.
지금까지 현우가 써먹은건 크게 세가지.
보상체계를 서서히 망가뜨렸고, 관계에 대한 집착을 이용해 불안을 유발했으며, 부채의식을 부추겨 압박했다.
그중에서 불안 유발은 이제 버려야 할 패였다.
연인으로의 관계 발전을 기대하게 하며 그녀를 마음대로 다뤘다.
마치 정규직 전환을 약속하며 인턴을 착취하는 블랙기업처럼 말이다.
그녀가 한 달의 인내 끝에 얻어낸 자리이니 그걸 뺏으려 들면 역효과만 날 것이다.
기껏 쌓아올린 신뢰를 하루아침에 박살낼 위험도 있었고.
현우는 고민 끝에 손에 쥐고 있던 패를 과감히 내던졌다. 그리고 새로운 패를 뽑아들었다.
"자기야, 내가 생각을 좀 정리해봤는데... 나 말할 게 있어."
"헐 뭐야~ 나한테 뭐 시킬지 야한 생각 하고 있었던거야?"
"그런거 아니야. 조금 무거운 이야기야. 내 인생에 대한."
혜지는 장난스레 말하다가 현우의 진지한 목소리가 들리자 웃음기를 지웠다.
오빠의 인생 이야기라니.
현우는 지금껏 자기 이야기를 깊게 털어놓는 일 없이 항상 얼버무리기만 했었다. 물론 그녀는 혹여나 현우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궁금함을 눌러참고 더 캐묻지 않았었고.
"오빠는... 그런 이야기 꺼내는거 싫어하지 않았어?"
"여보는 이제 내 여자친구잖아. 여자친구한테 이런 이야기 안하면 누구한테 해."
혜지는 그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간 숨겨왔던 이야기를 여자친구니까 털어놓겠다는 말.
오빠와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네가 내 가족에 대해 물었을 때, 그냥 별로 안 친해서 연락 안한다고 했었지?"
현우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입을 움직였다. 차마 눈을 뜨고는 말을 못하겠다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혜지는 그런 현우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가 나올 예감이었다.
"사실 나도 너처럼 부모님이 안 계셔. 엄마는 사고로 돌아가셨고, 아빠랑은 연락 안해."
혜지는 현우가 담담히 꺼낸 놀라운 사실에 깜짝 놀라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래서 내가 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끌렸는지도 몰라. 네가 예전에 그랬잖아. 내가 왜 널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아마 처음엔 동병상련이었나봐."
"오빠... 나 전혀 몰랐어. 그냥 가족이랑 별로 연락을 안하는 사람인가보다 했었어."
"내가 일부러 숨겼으니까. 아직 아무한테도 꺼낸 적 없던 이야기거든. 근데 자기라면 이제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
현우의 가정사는 어느 정도 진실이었다.
현우가 어렸을 적, 두 분은 아버지의 외도로 이혼하셨다.
다행히 그의 어머니는 제법 손재주 있는 미용사였기에 생계에 어려움은 없었지만 현우의 삶은 메말라있었다.
그 여자는 전남편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현우를 탐탁치 않아했으니까.
최소한의 물질적인 책임은 졌지만 그게 끝이었다.
의식주만 해결해주는 어머니는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종의 정서적 학대를 일삼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우의 성격이 추악하게 삐뚤린것도 그때문일지 몰랐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죽고나서 큰 선물을 남겼다.
그가 군대에 있을 때 일어난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수 억에 달하는 보험금과 합의금, 그리고 평생 일궈온 재산이 유일한 법적 상속자인 현우에게 넘어왔다.
그때 현우는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다. 단지 직계친족의 사망은 위로휴가를 두둑히 준다는게 반가웠을 뿐이다.
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부대간부들과 부대원들의 부조금도 쏠쏠했고.
현우는 자신의 가정사를 적당히 각색하여 혜지에게 들려주었다. 근황에 이르러서는 조금 더 살을 붙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외도와 이혼, 어머니의 사고사로 자살까지 생각했다고 우울하게 읊조렸다.
공허함과 외로움을 참지 못해 어플 만남으로 방황했노라 털어놓았다.
물론 그 부분은 죄다 구라였지만.
"오빠... 우리 진짜 운명인가보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난 오빠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다 이해해. 진짜야."
그녀의 볼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빠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같은 처지였던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현우는 그제야 감았던 눈을 뜨며 혜지를 바라봤다.
혜지는 경험한 만큼 공감할 수 있는 법이라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힘들었던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힘들었을것이라 지레짐작하고 마음 아파하는게 그녀의 여린 마음을 잘 보여주었다.
현우는 그저 구구절절히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안다며 울어주는게 고마울 뿐이었다.
이대로 그녀의 경험이 그녀의 상상을 부풀리도록 내버려두면 알아서 비극 한 편을 써내려갈 기세다.
현우의 찡그린 미간과 달리 그의 속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방금한 말이 생각 이상으로 잘 먹히는 눈치였다. 그럴만도 했다. 몹시 감수성이 풍부한 여자였으니까.
현우는 자신이 떠올린 레퍼토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럴수록 비련의 남주인공이라는 배역에 점점 몰입했다.
이 여자를 꾀어낼 온갖 말들이 머릿속에 샘솟았다. 간사한 세 치 혀가 교활하게 미끌어졌다.
"어플로 사람을 만나도 다 부질 없더라. 날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사랑해줄 것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더라고. 나도 널 운명의 상대라 생각한다는 말, 빈말이 아니야. 진심이었어."
헤지는 괴로워하는 현우를 끌어당겨 자신의 젖가슴에 품었다.
오빠는 지금 위로가 필요해보였다. 애써 눈물을 참고 있는듯 보여 맘편히 울라고 다독여줬다.
"어떤 여자를 만나든, 이 여자도 나를 떠날까봐 두려워서 내가 먼저 피했어. 근데 너라면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자긴 내 마음이 어떤지 잘 알거니깐."
"맞아. 난 오빠맘 다 알아. 내가 어떻게 오빠를 떠나. 그런 일 절대 없을테니까 걱정마."
"내가 이렇게 맘을 털어놓은건 여보가 처음이야. 여보가 내 명령이라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며. 날 이만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도 한 번 용기 내보고 싶어."
현우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이어질 말을 골랐다. 조금의 쉴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감수성을 두들겨댈 작정이었다.
"이번엔 떠나는게 두렵다느니 하면서 시작도 하지 않고 포기하기보다, 널 믿어보고 싶어졌어. 그만큼 네가 내 마음을 연거야."
현우는 혜지의 눈에서 눈물을 쥐어짜낼 그럴싸한 말을 쉴새없이 뱉었다.
나오는대로 지껄이는 것치곤 말이 제법 매끄러워 속으로 킥킥거렸다.
여보니, 자기니 하는 말도 슬슬 입에 붙었다.
"자기가 아빠때문에 큰소리 지르는거랑 폭력적인걸 싫어한다고 했지? 나도 그런 트라우마 같은게 있어. 난 사람을 잃는게 무서워. 그동안 날 버리는 사람밖에 없었거든. 아빠도, 엄마도."
현우는 살짝 고개를 들어 혜지가 보라는 듯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이미 그녀의 눈시울은 잔뜩 붉어져있었다.
"그래서 아까 그런 말을 한거야. 어쩌면 내 트라우마가 성욕이랑 합쳐진걸지도 모르겠다. 난 내 여자친구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어. 그 사람이 날 위해 어떤 부끄러운 명령도 따르는걸 보면서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내 더러운 욕망을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주는걸 보면서 이 사람은 날 떠나지 않겠구나하고 안도하고 싶어."
현우는 가빠져오는 숨을 참으며 한 호흡에 말을 모두 뱉어냈다.
단순히 변태성욕이라면 이 여자도 언젠가 질려하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트라우마를 끼워넣었다. 나도 너와 같은 가정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어필하며 공감대를 쌓기 위해 노력했다.
"바보야. 그럼 그렇다고 다 말하지. 난 오빠가 그냥 좀 변태인줄만 알았단 말이야."
"그럼 왜 그 변태놈의 명령을 다 들어주겠다고 한거야?"
"말했잖아. 그건 그냥 오빠 취향이니까. 양념치킨을 좋아하는거랑 같은거라며. 취향이 쫌 뜬금없긴 해도 오빠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까 내가 그정도는 맞춰줄 자신 있었어."
혜지는 조곤조곤 할 말을 늘어놓다 침을 꿀꺽 삼켰다.
사귀기로 한지 한 시간도 안됐지만 지금 꼭 해주고픈 말이 있었다.
실제로는 만난 지 한 달이 넘었으니 딱히 이상할 것 같진 않았다.
"... 왜냐면 내가 오빠 정말정말 사랑하거든. 내가 진짜 사랑한다고 이 빙구야. 그러니까 불안해하지마. 오빠 변태 아니야. 이제 변태라는 말 압수야. 그 말 금지!"
혜지는 첫 사랑고백을 수줍게 끝내고 현우를 꼭 끌어안았다.
"오빠가 나 처음 만났을 때 무슨 말 했는지 기억나? 술집에서 나 울린 말 있잖아."
"뭐라 그랬더라?"
"사람은 누구나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며. 오빠가 지금 그런 순간이야. 이번엔 내가 오빠한테 위로가 되어줄게."
현우는 혜지의 부드러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꽉 다문 어금니 사이로 웃음소리가 새어나갈까봐 조심스러웠다.
그런 오글거리는 말을 여태 기억하고 있다는게 신기했다.
현우의 새로운 패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제 혜지를 붙잡아둘 원동력은 불안함이 아니라 공감에서 우러나오는 동정심, 그리고 그로 인한 책임감이었다.
현우에게 동정심을 느꼈으니 그의 요구를 거절하려면 혜지의 성격상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또 동병상련의 가련한 처지라는 믿음은 둘의 만남이 운명적 만남이라는 그녀의 생각을 멋대로 부채질 할 것이고.
이건 현우가 어느 정도 노린 바였다.
이 여자는 운명적인 사랑에 묘하게 집착하곤 했으니까. 그녀가 자신이 짜놓은 각본을 운명이라 믿고 이성을 내던지길 원했다.
책임감도 마찬가지였다. 현우는 그녀에게만 트라우마를 털어놓는다고 강조하면서 혜지가 모종의 책임감을 느끼길 원했다.
지켜본 바에 의하면 혜지는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하기보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실제로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고.
하지만 책임감은 그런 그녀를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마약이었다.
그리고 현우는 그 마약을 그녀의 보상체계를 가동시킬 새로운 연료로 써먹을 심산이다.
그녀가 명령에 복종할 때마다 상처투성이인 나에게 네가 얼마나 필요한지, 그렇기에 네가 내 명령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속삭인다.
그렇게 혜지를 '오빠의 상처를 보듬어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 나마저 오빠를 외면하면 이 사람은 망가지고 말거야'라는 자기암시에 빠뜨리고 길들일 속셈이었다.
혹시라도 명령이 거부당하면, 버림받은 강아지의 표정으로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여볼 계획도 떠올랐다.
상처받은 속내를 애써 숨기는 척 연기하면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몹시 궁금했다.
현우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의 설계가 완벽해보였다.
이건 자신의 온갖 변태같은 요구를 정당화할 수단이 되기도 하고, 그녀가 인권과 존엄을 스스로 내팽개칠 합당한 동기가 되어주기도 할 것이다.
오빠의 트라우마니까 어쩔 수 없어 하면서 말이다.
현우는 자신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혜지의 정신세뇌가 한층 더 견고해졌음을 직감했다.
즉석에서 애드립을 친것치곤 두 번째 퀘스트의 스타트가 매우 순조로웠다.
시작부터 이 정도 포석을 깔고 시작하면 그 끝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