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뱀의 혀 (1)
혜지는 현우의 밝은 미소를 보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다행이다, 오빠가 다시 웃어주어서...
마음이 놓이니 그제서야 손 안 가득한 정액이 눈에 들어왔다.
"어... 완전 많이 나왔다 오빠..."
"응, 그만큼 좋았나봐. 고마워."
"아니아니, 내가 고맙지. 오빠가 훨씬 고생했는데... 나 잘 못해서 힘들었지?"
현우는 혜지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그렇다고 대답할 뻔 했지만 다행히 잘 눌러참았다.
"아냐. 오히려 서툰게 뭔가 더 흥분되던데. 나도 충분히 좋았어."
"피... 오빠가 너무 잘하는거지, 내가 못하는거 아니다?"
혜지는 아무래도 현우의 말이 못 미더운지 입을 삐죽였다. 그러다 문득 현우의 현란한 기술이 생각났다.
"근데 이 오빠는... 어떻게 그렇게 잘하실까~ 나 그런거 태어나서 처음이었어."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장난스레 말하는게 현우의 능숙함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긴,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 없는 강력한 쾌락이었으니까.
혜지는 아까의 오르가즘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 내가 너보다 3살 어른이잖아. 너도 3년만 더 살아봐. 나 못지 않을걸?"
"맞아... 오빠 오늘 완전 어른 같긴 했지. 그것도 개야한 어른."
현우의 말에 혜지는 동갑이었던 전남친이 다시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이런게 연인간의 섹스다. 그 남자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른스러운 남자다.
현우에 대한 호감이 더 커져만 갔다. 정말이지, 마음껏 기대고 싶은 사람이었다.
"손에 그건 어떻게 할거야?"
"응? 아... 나 씻고올게. 잠시만."
현우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화장실로 향하는 혜지를 바라봤다.
역시, 정액을 먹는다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어보였다.
그녀에겐 상식밖의 일이겠지. 물론 조만간 상식이 될 예정이지만.
쏴아아아 하고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귀에 들렸다.
혜지는 흘러내리는 수돗물에 두 손 가득히 묻은 정액을 흘려보냈다.
물이 닿으니 더 찐득하고 미끌해지는 것이 신경쓰였다.
그러고보니 입가에 튄 정액은 자신도 모르게 삼켜버렸나보다. 뭐, 조금 튄 정도였으니 크게 불쾌하진 않았다.
혜지는 화장실에서 나오며 방 안에 가득 찬 야릇한 냄새를 맡았다.
이건 아마 자신이 뿜어대던 애액의 냄새겠지.
한바탕 격정적인 열기가 휩쓸고 간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방안의 침대 시트가 여기저기 얼룩져있었다.
혜지는 그 위에 멍하게 누워있는 현우를 바라봤다.
자신의 침대에, 오늘 처음 본 남자가 누워있었다. 그것도 방금까지 자신과 몸을 맞댔던 착하고 잘생긴 남자가.
다시금 현실을 곱씹어보니 행복감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볼수록 갖고 싶은 남자였다. 쩍 벌어진 역삼각형의 가슴이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은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방금까지 안겨 있던 남자의 품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리고 남자가 흘려대던 듣기 좋은 신음소리도.
자신과 다른 단단한 등과 묵직한 신음은 그녀에게 수컷에게 안기는 암컷의 기분이 무엇인지 느끼게 할만큼 대단했었다.
“오빠 뭐해~ 지쳤어? 나 다시 왔는데!”
“어어. 그래.”
혜지는 조금 성의가 없는 대답에 흠칫했지만, 여전히 따뜻한 현우의 눈빛에 다시 마음이 풀어졌다.
“에이, 그게 뭐야. 우리 오빠 많이 지쳤구나. 그... 현타? 현타 온거야?”
현우는 혜지의 치근거림에 어이가 없었다. 고작 한 발 싸고 현타라니.
현타가 올만큼 격렬한 섹스를 한 것도 아니었다.
방금의 섹스는 오직 여자를 만족시켜주기 위한 봉사에 가까웠던 만큼, 가학적인 성향을 지닌 현우에게는 성에 차지 않았다.
"현타는 또 어떻게 안대~ 그것도 전남친이 알려줬어?"
혜지는 현우의 말에 아차싶었다.
그녀에게 전남친은 그저 지우고픈 기억이었는데, 오빠가 괜한 오해를 할까봐 걱정됐다.
"아... 응. 근데 나 전남친이랑 지금은 완전히 끝난거 알지? 나도 모르게 전남친 이야기 계속 나오네."
"아, 괜찮아. 난 그런거 신경 안써. 전남친이니 전여친이니... 사귀다 헤어지는게 뭐 대수라고."
가볍게 웃는 현우의 얼굴에는 그의 말처럼 조금의 불쾌감도 보이지 않았다.
혜지는 현우의 옆에 누워 그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 오늘 만나서 다행이다 그치? ...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정말 다행이야."
현우는 진심을 듬뿍 담은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 다행이었다.
덕분에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넣었으니까.
보아하니 이 여자는 껍데기 뿐인 사랑에 취한듯 했다.
한 번 박아줬더니 여자친구라도 된 것처럼 안겨온다.
그렇다면, 그 생각에 적절히 불을 질러줘야지.
현우는 여자를 향해 돌아누워 그녀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그리고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혜지는 잠깐 놀라는 것 같더니, 현우의 품에 코를 비비며 칭얼거린다.
현우는 지금의 사랑놀음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지금의 모든건 그녀에게 충분히 이자를 쳐 되돌려 받을 예정이었다.
다만, 이 여자의 골수까지 남김없이 빼먹기 위해 조금 더 탐색이 필요할 뿐이었다.
마침 타이밍도 좋았다. 잔뜩 만족시켜줬더니 안겨오는 여자.
이런 여자에게는 무엇을 묻든 순순히 답한다는 사실을 현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사냥감의 목덜미에 독니를 박아넣기 전에, 약점부터 파악할 속셈이었다.
"혜지야, 그 남자친구 말이야."
"응. 왜? ... 신경쓰여?"
"아니아니, 그런게 아니라. 왜 헤어졌는지 좀더 자세히 들려줄 수 있어?"
"... 그건 왜?"
"내가 보기엔 혜지 네가 참 착한 사람인거 같거든. 그럼 그 남자가 잘못해서 헤어진거일텐데..."
현우는 여기까지 말하고 말을 끊었다. 중요한 말은 원래 뜸을 들여야 효과가 큰 법이었으니까.
"어떤 잘못했는지 알아야, 나는 안 그러지."
"... 오빠 뭐야? 지금 고백한거야?"
혜지는 잔뜩 놀라 오히려 작아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방금의 말은 고백이라 착각할 법한 말이었다.
"그런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우리 오늘 처음 만났잖아."
"응... 그렇지."
"네가 착하고 좋은 사람같이 느껴져. 그래서 일단 널 더 알아가고 싶어. 그 마음은 진짜야."
혜지는 말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손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혜지 네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여자인지... 그렇게 조금씩 알아가다 마음에 들면..."
"... 마음에 들면?"
"그럼 우리 정말 사귀어보자."
"... 맞아, 급할건 없으니까. 오빠도 정말 좋은 사람 같아."
현우는 말을 마치고 혜지의 입에 진한 키스를 남겼다. 웃기는 소리다.
사귀기도 전에 섹스하고, 정액을 손으로 받는 여자를 부르는 말은 하나다. 좆걸레년.
현우의 방금 말은 혜지를 옭아맬 올가미였다. 널 알아가고 싶다는 호감 표현 속에는, 치밀하게 계산된 꿍꿍이가 숨어있었다.
자신이 그녀의 이상형에 가깝게 굴수록, 그 덕분에 그녀의 호감이 커질수록, 혜지는 안달이 나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 오빠의 여자친구가 되고 싶다, 이 오빠가 자신의 남자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관계에 집착하겠지.
그렇게 한 가지에 몰두하고 집착할수록, 그녀의 시야는 좁아지고 이성은 흐려질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뱀같은 혀를 놀려간다면 그녀의 생각을 뜻대로 조종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넌지시 '나는 이런 여자가 좋다'는 말을 가볍게 던지면, 사랑하는 오빠의 인정을 받기 위해, 그리하여 그의 여자친구가 되기 위해 기꺼이 몸을 내던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현우의 고백 아닌 고백은 일종의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고분고분히 내가 바라는 여자처럼 군다면 너와의 관계를 고려해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언제든 관계를 끝내버리겠다는 합격유보 판정.
그야말로 절대적인 갑의 위치에서 정중하게 휘두르는 갑질이었다.
여자친구로서 고려는 해보겠지만 확정은 아니라는, 채용전환형 인턴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현우가 이런 인턴을 거느린건 혜지가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숱하게 겪어봤다.
'좋은 사람 같아. 근데 아직은 일러. 좀더 마음에 들면, 그러면 우리 사귀자.'
현우의 이 말에 놀아난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사귀는게 도대체 그녀들에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그걸 보상으로 내걸고 달콤한 말을 지껄이면 입싸도 얼싸도 질싸도, 그걸 뛰어넘는 어떠한 능욕도 허락해주고 말았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약빨이 잘 먹히겠지. 아무런 기댈 곳이 없는 외로운 사람이었으니까.
무엇이든 해줄듯 굴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주지 않더라도 껍데기 뿐인 따뜻함에 감동해서 엉엉 울 바보같은 년이었다.
"여튼 그래서 왜 헤어진거야?"
"아... 근데 좀 이야기하기 그런데..."
"혜지야, 난, 음... 솔직함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우리가 어떻게 보면, 남들이 보기에 좀 그럴 수 있는 인연으로 만났잖아?"
"...응."
"그런만큼, 아니 그러니깐 우리에겐 솔직한게 더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어떤 말인지 알지?"
솔직함. 말이 좋아 솔직함이지 그건 강요나 억압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진실을 토해내라는 다그침. 너의 밑바닥까지 긁어서 보여달라는 재촉.
물론 이 솔직함은 현우에게도 무기가 되어줄 터였다. 솔직함과 뻔뻔함은 한 끗 차이였으니까.
솔직함의 탈을 쓰고 온갖 더러운 요구를 뻔뻔히 내민다면 어리숙한 이 여자는 우물쭈물하다가 들어주고 말겠지.
'용기를 내서 솔직히 말한건데 네가 이런 식이면 오히려 내가 상처받는다'라고 다그치면 오히려 사과를 해올지도 몰랐다.
현우는 앞으로 어떤 말로 이 여자를 꿰어낼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혜지의 이별 이야기에 귀기울였다.
이걸 물어본건, 이 여자가 어떻게 헤어진건지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아서였다.
의지할 곳 없는 소심하고 여린 여자.
웬만큼 막 대하더라도 먼저 등을 돌릴 일이 좀처럼 없을텐데, 전남친이라는 머저리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해댔길래 이런 먹잇감을 놓쳐버린걸까.
그러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 그러다 섹스 안해준다고, 술 취했을 때 욕하는거야. 소리도 지르고. 그걸 보고 아빠 떠오르더라고. 얘랑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바로 헤어지자 했지."
병신 같은 놈은 아마도 이 여자의 트라우마를 격발시킨 모양이었다.
자신이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었지만, 비슷한 처지의 비슷한 노답인생끼리 만났을테니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혜지의 첫 연애는 뻔하고 뻔한 이야기였다.
집을 뛰쳐나와 알바를 하다 만난 동료. 봄 분위기에 취해 시작하게 된 연애, 그러다 그에게 바치고만 첫경험.
내키진 않았지만 끈질기게 졸라대는 남자친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혜지는 말하다보니 성이 났는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자세히 털어놓았다.
"안그래도 그전부터 마음에 안들긴 했었어. 막 입에 싸고 싶다는 둥, 목구멍 깊숙이 넣어보고 싶다는 둥..."
"그래서 해줬어?"
"...아니, 아... 사실... 응. 해줬어. 해주면 좋다니깐. 근데 얘가 지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맨날 이상한 생각만 하니깐 팍 해주기 싫어졌어. 그래서 섹스 안하겠다고 싸운거였고."
이야기를 듣다보니 혜지의 성격이 갈등회피형에 가깝다는 확신이 들었다.
남자친구가 졸라댄다고 처녀에 이어 입싸에 목까시까지 바치다니, 이 얼마나 얼빠진 년이란 말인가.
그리고 얼마나 기특한 년이란 말인가.
일단 남자에게 봉사하는 기본 마인드는 되어있었다.
자신의 손에서 적당히 정신개조만 거치면, 언제든 사용하기 편리한 육변기로 만들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어보였다.
전남친이 서툴어서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조금만 닳은 놈 손에 들어갔으면 홀라당 벗겨먹히고 뼈도 안 남을 뻔 했다.
이런 여자가 사이비 종교에 빠지고, 양아치에게 몸이든 돈이든 다 바치고 하는거겠지.
지금껏 몸뚱이를 건사한게 놀라울 정도였다.
자신이 아니라도, 조금만 영악한 놈이라면 누구든 먼저 꿀꺽했을 여자였다.
어차피 그렇게 될 운명이라면 자신이 조금 앞당겨준다고 해서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그랬구나. 쓰레기 맞네."
현우의 말에 혜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 쓰레기따위.
오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남자였다.
"근데 혜지야, 그 남자가 이상한 것도 맞는데... 너도 조금 어리긴 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
혜지는 방금까지 자신을 편들어주던 오빠가 마치 자신을 탓하는 듯 하자 불안감이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도 조금 떨려 나왔다.
"네가 잘못했다는게 아니야. 그냥, 연애에 서툴다는 느낌이 들어서 한 말이었어. 첫 연애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
현우는 뱀의 혀를 천천히 낼름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