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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화 〉N번째 어플만남 (3) (3/87)



〈 3화 〉N번째 어플만남 (3)

혜지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한참을 훌쩍였다. 그러면서도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흑... 오빠, 내가, 흑, 미안하고, 갑자기... 울어서."

 모습을 보면서도 현우의 얼굴에는 조금의 안타까움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그저 울려면 울고 말려면 말 것이지, 끅끅대며 말을 이어나가는 모습이 바보같을 뿐이었다.


"흐읏, 그리고, ... 고마워. 흑, 흐어엉."

고맙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아까의 감동이 다시금 터져나온 모양인지 조금 더 크게 어깨를 떨어대는 혜지. 현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내심 흡족했다.


지금 이렇게 슬픔을 쏟아낸 빈 자리에는, 자신에 대한 고마움이 싹트겠지. 슬픈 만큼 고마움이 커질 것이고, 고마운 만큼 신뢰는 단단해질 것이다.


그에 비해 자신이 이 여자에게 해준게 뭐가 있던가. 그저 웃어주고, 끄덕여주고, 다독여주고, 말  마디 툭 던져준게 다였다.

객관적으로 따져보아도 이렇게나 고마워  일은 아닐진데... 역시 얼굴때문일 것이다.


현우의 입가에 조소가 어린다. 결국, 이 년도 얼빠진 년일 뿐이었다.


처음 볼 때 부터 헤벌레거리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더니 지금은 울음까지 터뜨리고야 만다.


자신이 잘 생기지 않았다면 연락조차 안 했을 년 주제에. 새삼 떠올려보니 가증스러웠다.


그녀가 가증스럽게 느껴지는 만큼 연기에 진심을 더한다. 그것이 진심이든 아니든 간에 이 여자가 간절히 원했을 따스한 위로를 내어준다.

"괜찮아? 더 토닥여줄까?"

혜지는 잘게 떨리던 어깨가 진정될수록 치밀어오르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토록 참았건만 펑펑 울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고개를 들면 몰골이 얼마나 추해져있을지 모를 일이다.

"오빠... 이제 쫌 괜찮아졌는데, 내가 원래 이렇게 막 우는건 아니고... 오늘  취했었나봐. 그래서 그래."

"이제 보니 주사가 우는거였어? 허이구, 그래. 지금은 쫌 깼고?"


혜지는 등을 비스듬하게 돌리며 몸을 일으켜세웠다.


"응, 완전 멀쩡해. 오빠  잠시 화장실좀 다녀올게. 지금 얼굴 엉망일거 같아. 어떡해."

혜지는 현우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화장실로 달려간다.


그러다 홱 뒤돌더니 조심스레 돌아와 놓고 간 핸드백을 챙긴다.  손으로 얼굴은 여전히 가린 채였다.


현우는 수줍게 종종 걸음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제서야 마음껏 비웃음을 날렸다. 하여간, 얼빠진 년 같으니라고.

그런 현우의 속마음을 꿈에도 모르는 혜지는 화장실에 들어와 눈물부터 닦아냈다. 화장도 번졌지만 눈이 조금 부은 것도 같은게, 여러모로 엉망이었다.

거울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부린 추태가 실감이 났다. 방금까지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죄인처럼 현우에게 우울을 늘어놓았다.

혜지는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간만에 느껴보는 따뜻함은 너무나 간단하게 마음의 벽을 허물어버렸다. 얼굴을 바라보며 한  넘게 비워낸 술도 큰몫을 했을테고.


그래, 이건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었을 뿐이다. 그만큼... 착한 사람 같아 보였으니까.

혜지는 서둘러 화장을 고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현우는 아까와 변함없이 잔잔한 미소를 띄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자리에 천천히 앉는 혜지. 지금의 어색함을 돌릴 말이 필요했다. 마침 바닥을 드러낸 소주병이 보였다.

“아... 우리  다 마셨네. 어떡하지, 오빠? 여기서  시킬까? 아니면 다른 데로 2차 갈까?”

혜지는 조심스레 현우의 의향을 물었다. 오늘의 기분이라면 조금  무리하고 싶은 욕심이 났다.

“괜찮아? 아까 취한것 같다며. 힘들면 그만 일어나도 돼고.”


“아냐, 오빠. 나 울고났더니 완전 괜찮아졌어. 아직 좀더 마실 수 있음!”

혜지는 가슴 앞으로 양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며 힘차게 말했다.

현우는 방금까지 질질 짜던 년이 퉁퉁 부은 눈으로 헤실거리는게 제법  만한 광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집 여기서 가깝다고 했지? 근처까지 데려다줄게.”

현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외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과는 달리 이 여자가 오늘 어디까지 발칙해질 수 있는지 지켜볼 요량이었다.


“헐. 우리 일찍 만나서 아직 9시도 안 됐는데? 오빠는 아쉽지도 않아?”

“아쉬우면 다음에 또 만나면 되지. 난 너랑  번 더 보고 싶은데? 지금 더 마시면 필름 끊겨서 오늘 말한 것도 기억 못하는거 아니야? 그러면 더 아쉽잖아.”

 번 더라는 말이 혜지의 귓가에 맴돈다. 역시,  남자는 자신에게 호감이 있어보였다.

하얀 피부를 좋아하나? 아니면 메시지로 칭찬하던 금발 때문일까?


이유야 어찌 됐든, 남자의 말은 그럴싸 해보였다. 꽤 취했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 나도 오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니까. 아니 근데, 말을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할 수 있지? 알겠어, 그럼 우리  만나면 되니까 오늘은 여기서 끝!”


“잘 생각했어. 젊다고  마시면 속만 버린다? 이건 내가 살테니까 내일 해장이나 잘해.”


“아냐, 오빠. 오늘 이야기 들어준 것도 고마운데 당연히 내가 사야지.”

혜지는 현우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더니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현우가 외투를 추스르는 동안 주문표를 손에 들더니 후다닥 계산대로 향했다.

천천히 뒤따라 나온 현우는 혜지의 손에 들린 주문표를 부드럽게 뺏어들었다.

“오늘 이건 너 힘내라고 내가 사주는거야. 정 그러면 다음에 네가 사면 되니까. 괜찮지?”

현우의 말에 혜지는 입술을 삐죽이다 활짝 미소를 지었다.


역시, 정말정말 착한 사람이었다. 그 마음 씀씀이도 그랬지만 부드럽게 건네는 말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따뜻했다.


한 번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대신 나랑 꼭 다시 만나기다? 내일 돼서 연락 씹고 그러면 안돼?”


“당연하지. 오늘 술값이 얼만데. 걱정 붙들어 매셔.”

현우는 계산을 마치고 웃어보였다. 혜지의 성향이라면 그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닮았다던 전남자친구. 강압적인 말투를 이기지 못해 헤어졌다던가.

그 반작용인지 방금의 부드러운 말투에 꿈뻑 죽는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의도적으로 말을 고른 보람이 있었다.

“집은 여기서 가깝지? 근처까지만 데려다줄게.”


“진짜? 그래도 나 그 정도는 아닌데.”

“내가 걱정돼서 그래. 3월인데 아직 날이 많이 차더라.”

술집을 나와 밤거리를 걸어가는 둘. 혜지는 현우와 같이 길을 거닐며 두근거림을 참을 수 없었다.

길을 걷는 와중에도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는 현우의 모습이 마치 연인처럼 느껴진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따스한 배려에 아까와는 달리 조금의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걸음을 옮길수록 혜지의 온몸에 술기운이 퍼져갔다. 10분이 조금 넘는 짧은 거리였지만, 알코올이 판단력을 흐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금의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기가 두렵다. 좁디좁은 원룸을 가득 매울 외로움을 직면할 자신이 없다. 오늘은, 도무지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남자라면 괜찮을지도,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헤픈 여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는 걱정이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방이 가까워질수록 치솟는 두려움이 조금씩 걱정을 밀어냈다. 결국 혜지는 외로움에 굴복하고 말았다.

“오빠……. 집에서 맥주라도 한 잔 더 하면 안 돼? 이상한 생각 하는건 절대절대 아니고… 그냥, 오늘 우울한 이야기를 많이 했더니 혼자 있으면 더 울적해질거 같아서 그래.”


혜지는 원룸 앞에서 옷자람을 꼼지락거렸다. 차마 현우를 바라보지 못하고 바닥에 고정된 두 눈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그래, 그럼 그러자. 맥주는 집에 있어? 오는 길에 보니까 편의점 있던데 거기서 사올까?”

“아, 집에 있어. 안주로는 과자 괜찮지? 집에 감자칩이랑, 홈런볼이랑 있는데. 부족하면 내가 치킨이라도 시켜주고."


혜지는 현우의 대답에 신이  고개를 들고 조잘거린다. 지금의 설렘을 계속 이어갈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방 안이 깨끗했던가를 떠올리다가, 현우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처음에는 가볍게 손목의 옷깃을 잡을까도 싶었지만  몸에 퍼진 취기에 자신도 모르게 대범해졌다.

오빠가 흠칫하고 놀라는게 느껴진다. 혜지는 자신의 두 뺨도 붉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은듯 한 발 앞서 걸으며 현우를 이끌었다.


걷는 내내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만일 뒤를 돌아보았다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으니까.

어느새 익숙한 원룸 건물의 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결국 이 남자를 집까지 끌여들였다.


어플로 남자를 만난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것이 제대로 된 일탈로 이어진  이번이 처음.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로맨스 소설 속 여주인공이라도 된  같은 묘한 감정이  몸을 채운다.

역시 남이 하면 원나잇이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인가 싶은 생각에 설핏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서니 훅 - 풍기는 쿰쿰한 냄새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좁은 신발장 앞에 배달음식을 먹고 나온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었다.


그녀의 엉망진창인 인생처럼 정돈되지 않은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아, 나 원래 진짜 잘 치우고 사는데 요즘 컨디션이 안 좋았어서…….”


혜지는 말끝을 흐리며 다급한 손길로 쓰레기를 한 곳으로 밀었다. 허리를 숙이니 쑥 내밀어지는 엉덩이가 바지 위로 우아한 곡선을 만들어낸다.

앉아있을 땐 몰랐지만 쭉 뻗은 다리와  골반이 제법 현우의 피를 끓게 한다. 엉덩이가 큰 여자는, 그에 비례해서 구멍의 조임도 쓸 만한 편이라는걸 현우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여자는 지금, 자신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려나.


자취방으로 초대한 남자를 방 입구에 세워두고, 따먹어달라는듯 엉덩이를 흔들어대고 있다는걸 알고 있을까.


그걸 알면서도 일부러 이러는걸까. 현우는 혜지의 의도가 무엇일지를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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