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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화 〉N번째 어플만남 (2) (2/87)



〈 2화 〉N번째 어플만남 (2)

그러나 혜지의 생각과는 반대로, 현우는 눈앞의 여자의 이름이 혜지라거나, 혜징징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어차피 하룻밤 사용하고 버릴 걸레따위, 이름이 뭐든 상관 없었으니까.


그저 언제 2차를 가자고 할까라는 생각으로 ‘그래?’ 혹은 ‘정말?’ 따위의 맞장구를 치며 옅은 미소만 지었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2차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를 온몸으로 피력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경계를 풀지 않은 것일까?


하긴, 세상이 흉흉하다보니 아무 남자나 자취방으로 데려가기엔 꺼려지겠지. 그럴수록 현우는 더 잔잔히 웃으며,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현우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여자는, 경계를 하는 모습이라기보다, 오히려 지나치게 살갑게 굴고 있다는 말이 어울렸다.


지금도 그랬다.


“오빠, 나 사실 얼마 전에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너무너무 힘들었단 말이야. 그래서 어플로 사람쫌 만나봤는데 다 이상하더라구. 오빠는 안 그런거 같아서 좋다.”

“… 아, 그래? 남자친구랑은 왜 헤어진거야?”

“완전 개새끼였거든. 내가 말했나? 나 아빠 때문에 졸업하자마자 집나왔다고. 막 술만 마시면 소리 지르고 다 때려부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니었어.”

현우는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 처음 만난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나불대는 것인지 그 까닭을 조금도 알 수 없었다.

“… 얘도 처음에는 착하고 좋은 사람인줄만 알았는데 점점 아빠 닮아가는거야. 그래서 헤어져버렸지.”


“그럼 잘 헤어진거네. 위로해줄게 아니라 축하할 일인데? 똥차가면 벤츠 온다잖아.”

“뭐야, 그럼... 오빠가  벤츠인가?”

혜지는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은근슬쩍 현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저 담담히 미소만 지을 뿐이라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혜지는 이 남자도 호감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전남친이 ‘남자는 마음에 없는 여자에게 돈과 시간을 쓰지 않는다’고 누누이 말했었으니까.

저정도 수준의 남자라면 단순히 여자가 고픈건 아닐테니 혼자만의 착각은 아닌 듯 했다. 얼마 전 머리를 염색한 이후로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부쩍 올라간 혜지였다.

“그럼 지금은 아빠랑은 연락 안 해? 다른 가족이랑은?”


“음……. 엄마는 어릴 때 돌아가셨고 할머니가  키웠거든. 할머니도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새끼가 글쎄 장례식장에서도 술먹고 깽판치는거야. 레알 개미친놈인줄 알았어. 그때 완전히 연 끊었지. 아빠 얼굴 다시 보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아……. 미안해. 내가 괜한 이야기 했네.”


“아냐. 오빠가 너무 이야기  들어줘서 내가 꺼낸 말인데 뭐. 말하고나니까  시원하고 좋네. 고마워.


미안한 낯빛으로 말하는 현우는 아까까지와 달리 제법 흥미가 당겼다. 가족과 연을 끊고 혼자서 자취하는 젊은 여자.

당장이라도 납치를 당한다면, 실종 신고를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겠지.

그렇다고 납치를  생각은 아니었지만, 도대체 이 여자는 자신의 무얼 믿고 이런 이야기를 조잘대는 것일까?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왜 이렇게 의존해오는걸까?


분명 처음에는 가벼운 호의였다. 단지 한 번 따먹기 위해 필요한 정도에 불과한. 그것이 부족했나 싶어 좀더 따뜻하게 대해줬더니 지금은 미주알고주알 사정을 털어놓는다.


현우는 이 여자가 과연 어디까지 떠들어댈지 궁금해졌다.

여지껏 어플로 수십 명의 여자를 만나봤지만, 이건 현우가 처음 겪어보는 특이한 유형이었다.


가족과의 단절에 얼마 전 헤어진 남자친구까지. 그야말로 의지할 구석이 없는 완벽한 격리 상태.

현우는 여자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는 척 하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본다. 이 여자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늘어 놓을 만큼 외로움이 턱까지 차올랐음이 분명해보였다.


여자가 늘어놓은 자기연민 가득한 말이 아니더라도, 아까부터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이 그걸 증명한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가진거라곤 젊고 싱싱한 몸뚱이와 남들보다 풍족한 외로움 뿐인 여자. 거기에 '잘 생긴' 자신이 내밀어준 따뜻해보이는 손길은...

이 여자를 얼마만큼 흔들어놓았을까. 그리고  여자는 지금도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술에 반쯤 취해 발그레해진 뺨으로, 아까부터 은근슬쩍 자신의 마음을 떠보는게 그 속마음은 안 봐도 뻔했다.

현우는 치미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꽤 재미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저 한 번 따먹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해야할 년이 어설프게 연애감정을 넘보고 있는 꼴이라니.


그 모습이 어찌나 애처로운지. 그리고 어찌나 먹음직스러운지.

현우는 결심했다. 오늘은, 이 여자가 기대하는 다정한 남자의 모습을 한껏 연기해봐야겠다고. 자신이 장난삼아 베푸는 호의에 그녀가 어디까지 놀아나줄지가 무척이나 기대됐다.


자신의 껍데기뿐인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습을 상상하니 묘한 고양감이 샘솟는다.


현우는 오랜만에 흥미를 자극하는 여자가 생겼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기에 신중히,  차분히 다루어야 했다.


 여자가 자신이 품고 있는 악의를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게.


현우는 겉으로는 위로와 공감을 건네면서 마음 속 악의를 섬세히 조립해나간다. 덩달아 목소리에도 한껏 따스함이 어린다.


"많이 힘들었지? 오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털어놔도 돼."

"… 오빠 진짜 신기한 사람인거 알지?"

"내가? ...왜?"

"아니... 보통 어플에서 만나면 어, 안... 이러지 않나?"

혜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플로 만나면, 보통 원나잇이 목적이지 않냐고 묻고 싶었지만 마땅히 고칠 말을 찾지 못해 끝을 얼버무렸다.


"그건 네가 만났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인거고. 여기도 이상한 사람 있고, 괜찮은 사람 있고 그런거지."


"그...렇지?"

"내가 만약 혜지 너를 색안경 끼고 바라보면 어떨 것 같아? 어플로 만난 여자이니까, 이상한 여자겠지 하면서 말이야."

현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리니, 혜지도 뜨끔했다.

"아... 그렇네. 미안해. 요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이상하길래, 그냥 다 그런줄 알았어. 하긴, 나도 어플하면서  혼자만 깨끗할 줄 알았구나."


혜지는 현우의 말에 납득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이 남자가 혹시 그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기대한다.

현우는 그런 혜지를 흘깃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여, 안 이상한 사람처럼 보여?"

혜지는 안그래도 마음속으로 점점 호감을 키워가던 참이었다.

현우가 테이블 앞으로 몸을 기대오며 장난스레 묻자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흠칫 놀랐다.


"오빠는... 완전  이상한... 사람이지? 아까부터 오빠 참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내 이야기를 이렇게 잘 들어줄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

"그래? 다행이네. 그럼 안 이상한 사람 만난 기념으로 짠!"

혜지는 술잔을 들어올려 부딪히며 문득 걱정이 들었다.

이 오빠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우울한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는 이상한 여자로 생각하는건 아닐까.

"저... 근데 오빠."


"응?"

"… 오빠는 나 어떤 사람처럼 보여?"

"너? 안 이상한 사람."


현우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답했다.

"아니, 진짜 솔직히 말해도 되니까.  막 오늘 처음 만났는데 집나온 이야기하고, 남자친구랑 헤어진 이야기하고... 또..."

현우는 안절부절 못하는 혜지의 말을 끊었다.

"혜지야.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있는 법이래."

혜지는 이 오빠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거지라는 표정으로 멍청히 현우를 쳐다봤다.

현우는 그런 혜지와 눈을 맞추며 하던 말을 마저 이어간다.

"그냥 네가 오늘 그런 날이었고, 그런 날에 날 만난거지, 네가 이상한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 안해."


혜지는 담담히 위로를 건네는 현우의 말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런 따스함이 얼마만이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찾아 헤맸었는지.

말의 내용만큼이나  말을 건네는 현우의 눈빛도, 목소리도, 온통 따스했다.

혜지는 붉어지는 눈가를 문지르며 과장되게 웃었다. 괜한 눈물로 지금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오빠, 말 진짜 예쁘게 하는거 알지? 완전 선수같아 뭐야. 나 방금 심쿵할  했잖아."

"일부러  말이 아니라, 진심이야. 그러니 울고 싶으면, 억지로  참아도 돼."

그 말에 결국 혜지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이 오빠는 방금의 말이, 자신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알고나 있는걸까.

요즘따라 세상이 자신에게 등을 돌린 기분이었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쓰레기 같던 전남자친구는 그렇다 쳐도, 도통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형편에 숨이 막혔다.

내 또래는 대학을 다니는데, 자신은 이렇게 알바만 계속 해도 될까. 나도, 대학에 갔더라면. 나도,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나도, 나도…….

21살이 혼자서 버텨내기엔, 버겁기만  현실이었다. 나아가기보다 연명하는 것에 그치는 삶.

이렇게 청춘마저 다 흘러가버리면, 뭐 하나 제대로 태운 것 없이 재만 남을 것 같아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흐... 흐흑... 오.. 오빠. 나 잠깐만... 조금만 놔두면, 그럼 금방 괜찮아져."

현우는 조용히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앉았다. 그리고는 조금의 사심도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등을 토닥여준다.

테이블에 고개를 묻고 있는 그녀는 보지 못했지만, 현우의 입가에는 비틀린 미소가 걸려있었다.

정말이지 재미있는 여자가 아닌가. 술에 꽤 취했다는 사실은 아까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무렇게나 툭 던진 말에 이렇게 질질 짜다니.


아까부터 왠지 이런 말을 듣고 싶어하는 눈치였긴 했다.


흔해빠진 공감과 위로. '너의 책임이 아니야, 굳이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같은.

물론 현우는 방금의 말에 조금의 진심도 담지 않았다. 밑바닥 인생의 구질구질한 고민따위, 자신이 알게 뭐람.

단지  말을 꺼내면 여자가 좋아할 듯 해서 주워들은 말을 아무렇게나 던졌을 뿐이다.

그러나 생각 이상으로 격한 반응에 군침이 돈다. 외로움에 허우적대는  여자에게 자신은 일종의 동아줄인 셈이었다.


힘껏 붙잡으라고 응원하다가, 그것이 실은 썩은 동아줄인걸 알려주면 이 여자는 어떤 표정을 지어보일까.


온힘을 다해 매달리는 몸뚱이를 마음대로 굴려대도 과연 지금처럼  붙잡으려 들까.


이 여자는, 그야말로 정신이 병들어있다. 그렇기에, 약해져있다.


그리고 약한 것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강자의 먹이가 될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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