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9화 (330/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삼백 스물 두 번째 과외 - 너의 목소리가 들려 3

  +

  "아, 먼지가 되어, 리메이크나 해볼까."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하기 전 노트북을 켜서 카 오디오와 연결했다. 그래, 먼지가 되어, 를 들으면서 편곡할 멜로디를 구상해보자. 

  카 오디오에서는 故 김광석의 <먼지가 되어>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흥겨운 통기타의 선율은 자그만 투아렉의 공간에 밀어차고 있었다. 언제 들어도 좋은 명곡 중 명곡이었다. 지은이가 누군가와 느긋하게 여유를 한 잔 하고 있는 곳은 사람 많은 이태원이었다. 갑자기 유브이가 떠올랐다. 역시 랜드마크를 살린 노래의 위엄은 대단하군. 그래, 먼지가 되어를 레트로 팝 느낌을 살려서 편곡해볼까. 잠시 구상을 해보았다. 결과는 좋지는 않음, 이 나왔다. <너는 나의 봄이다> 같은 영화의 분위기에서 뜬금없는 레트로풍이라니. 영화의 무거운 분위기를 살려서, 첼로의 중후한 선율을 이용해 편곡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파주로 이사가고 느끼는 것이지만, 역시 교통이 훨씬 편했다. 특히 통행량이 서울 내부에서 움직일 때보다 적어서 좋았다. 거기다가 이태원은 강남이 아니라, 강북에 있는 지역이니까. 그래도 교통이 혼잡한 중구를 지나가긴 해서 좀 짜증나긴 했다. 

  하지만 시간은 깜깜한 밤. 시청 근처보다는 이태원 근처가 교통이 더 혼잡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달까. 그래도 이 정도에 화난 모습을 여자한테 보이는 잉여는 아니니까 감정을 최대한 추스려야겠다고 느꼈다. 

  정말로, 혼또니 지은이가 현재 있는 위치는 전국 어디를 가도 열에 하나 이상은 흔하게 발견한다는 카페베네였다. 차 유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연예인이랍시고, 구석 자리를 선점한게 분명했으니까.

  카페 길가에 차를 주차했다. 그리고 아직도 <먼지가 되어>의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노트북을 끄고 가져온 야상을 터틀넥 긴 팔 티셔츠 위에 걸쳐입고 목도리와 선글라스를 끼고 카페를 향해 걸어갔다. 이렇게 치장한 이유는 무엇이냐고? 나도 연예인이니까. 이래뵈도 저들과는 다르게 시작이 영화배우니까. 영화배우로서의 가오를 지켜줄 필요성이 있었다. 신변잡기적인 개소리이긴 했지만.  

  "어서 오세요."

  "카라멜 마끼야또로 주세요. 그리고 저것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거 울리면 다시 이 쪽으로 와서 받아가세요. 8900원입니다."

  "여기요."

  매 번 느끼는 거지만, 별 것도 아니면서 커피가 더럽게 비쌌다. 카드 대신 만원짜리 한 장을 내밀어 계산했다. 종업원은 이내 잔돈 1100원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100원짜리 동전 한 개는 불우이웃이나 아프리카 빈민촌에 사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과감히 집어넣었고, 1000원은 다시 제대로 펴서 지갑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지은의 건너편에 대수롭지 않게 앉았다. 

  "안녕."

  "응, 오빠, 안녕."

  지은이는 시크하게 굴긴 했지만, 표정에서는 뭔가 불안감이 비쳐보였다. 지은이가 보이는 그 불안한 포커페이스가 무슨 뜻인지는 아직 잘 몰랐다. 그것보다 지은을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자꾸 헛기침 소리가 새어나왔다.

  "…흠!…흐흠!"

  "…응?"

  나는 기침이 나오는 것을 참는 듯한 귀여운 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한 소녀가 있었다. 이 소녀가 바로 지은이가 말한 그 소녀인듯 싶었다. 근데, 어디서 많이 봤는데, 헐.

  "…헐, 미스에이 수지?"

  "…크흥흥…헤헷…"

  수지는 기침을 멈추자마자 정체모를 웃음소리를 흘려댔다. 철없는 그 웃음소리에 잠시나마 당황했다. 하지만 수지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굳은 표정으로 일관했다.

  '…얘, 왜 이래?'

  '몰라…. 그냥 이렇게 된 것 같아.'

  당사자를 앞에 두고 눈빛으로 그녀의 앞에서 담소를 까대고 있었다. 수지는 은밀한 시선의 교환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테이블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하염없이 퍼먹고 있었다. 차가운 것을 먹으면 얼굴이 창백해지기 마련인데, 어째서인지 얼굴이 점점 빨개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얼굴에서 나오는 열로 이 많은 아이스크림을 다 녹일 기세였다. 대체 왜 이래. 오늘은 페로몬 억제 주사도 제 시간에 제대로 놓고 와서 여자한테 별 영향 없는데. 

  "근데, 두 명이서는 벅차보이는 이 많은 양의 아이스크림은 뭐야?"

  "오빠 올까봐 세 명 분 시켰어, 잘 했지?"

  "…켁, 케켁!"

  지은의 말에 대꾸하려고 고개를 끄덕거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내 옆에서 수지가 아이스크림을 바보같이 퍼먹다가 사레가 걸려버렸다.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차며, 수지의 어깨를 잡고 등을 쳤다. 그 순간,

  "…히이. 스킨십이다…."

  수지가 얼굴이 빨개진 채로 넋이 나가버렸다.

  "야, 배수지!"

  "수지씨, 왜 그래요?!"

  +

  수지는 기절한 줄 알았더니, 자고 있었다. 자면서 내는 숨소리가 음악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수면모드였다. 나는 입고 왔던 야상을 수지의 등 위로 덮어주고 지은이 3인분으로 시켰다고 주장하는 아이스크림과 아까 주문한 커피를 같이 곁들이면서 입의 허전함을 달래고 있었다. 달고 찬 것을 먹다가, 달고 뜨거운 것을 마시는 느낌은 참 요상했다. 

 그러고보니, 지은이가 5월 달 즈음에 앨범을 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래 몇 곡 줘볼까.

  "지은아."

  "응?"

  지은이는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떠먹다 말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 그걸 막아야 할 정도로 할 말이 있냐고 물어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몇 곡 줄까?"

  "…푸훕!"

  내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그녀의 입에서 폭발한 아이스크림 폭탄의 파편은 내 얼굴과 털 스웨터, 그리고 자고 있는 수지의 정수리에 튀었다. 아니, 내가 노래를 준다는 게 이렇게 지은이가 당황스러워 할 정도로 기쁜 일이었던가. 왠지 모르게 뿌듯해지네. 

  

  "민수형 말 듣기론, 너 앨범 아직 다 녹음도 못 했다며. 수록곡하고 타이틀감이 아직 안 나와서. 타이틀 정도는 아니더라도, 수록곡 몇 곡 정도는 기부해줄 수 있는데."

  "…아냐, 됐…됐…됐어."

  "뭐야, 김 빠지게. 받기 싫음 말고."

  지은은 내 앞에서 말까지 더듬으며 내가 던지는 말 하나하나에 열심히 당황해하고 있었다. 오늘 처음 실제로 보는 수지나, 회사에 가면 드물게 보는 지은이나 오늘따라 반응들이 왜 이렇게 똑같으실까.

  "나, 화장실 갔다올래…"

  "그래, 갔다와."

  지은이도 마찬가지로 얼굴이 빨개지더니 곧장 화장실로 직행했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내가 너무 착한 나머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죄책감이 먼저 들었다. 3인분의 양이랍시고 시킨 이 아이스크림은 녹을 줄도, 사라질 줄도 몰랐다. 먹어도 먹어도 끝이 안 보인다. 전래동화에 나오는 요술 그릇 비스무리하게 생긴 것도 아니고. 뭔 놈의 아이스크림이 미역처럼 시간이 지날 수록 불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지 모르겠다.

  "…으어, 베스킨라빈스가 이렇게 양심이 있었나…아니지, 얘네들이 비싼 거 사먹은 거지. 지역경제에 이바지하는 것 같은데 외국기업 수익창출에 이바지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아이스크림을 배터지게 먹다보니 나 또한 정신줄을 놓아버린 듯 싶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아이스크림을 대책없이 먹다보니 이가 시렸다. 수지는 몸을 꿈틀거렸다. 내내 기절인지 잠인지 뭐튼 둘 중 하나에 의해 쓰러져있다가 동틀녘 목을 내미는 거북이처럼 부스스하게 떨었다.  

  "…이잇?"

  "잘 잤나보네요."

  "…이잉?"

  내가 텔레비전에서 보는 수지라는 연예인은 음악방송 무대에선 노래도 잘 부르고, 드라마에서는 연기도 새침하고 재치있게 잘하고, 예능에서는 허당이긴 하지만 귀여운데, 현실은 추임새 전문가라니. 환상이 다 깨졌다. 마치 수지의 집유리를 수지가 스스로 망치로 깨먹은 기분이었다. 

  "…이건 뭐지."

  "제 야상인데요."

  "…흐앗!"

  수지는 이상한 외마디 비명을 날리더니 내 야상을 나에게 마구 던졌다. 겨우 잡아서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딱딱한 지퍼 잡이가 내 새하얀 치아와 부딪힐 뻔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오버할 필요까지는 있나.

  "수지씨?"

  "…네, 네?"

  "그만 겁 먹어요."

  "…거, 겁 먹은게 아니라."

  수지는 말을 하다 말고 무릎을 접은 채 고개를 팍 숙였다.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으로 봐선 울먹거리는 건가. 나는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다가 들썩거리는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 손 위로 자기 손을 잡더니 내 손을 치워버리는 수지였다. 그리고 수지는 계속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그 손 치워주세요, 오빠 임자 있잖아요…흐흑…"

  "태연이하고 이게 무슨 상관…"

  "잘 해주지 마, 마요…지은 언니가 맨날 오빠 친절하고 자상한 모습 자랑한단 말이에요…안 그래도 오빠 팬인데 오빠가 계속 이런 모습 보여주면…나, 오빠한테 확 넘어가버릴지도 모르니까…제발, 선 그어줘요…"

  "…아, 알았어."

  

  진심 어린 열 아홉 살 소녀의 말에 나는 수지를 위로하려던 손을 내 다리 밑으로 내렸다. 수지는 고개를 천천히 들더니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다시 퍼먹으려고 하고 있었다. 때마침 지은이도 화장실에서 나온건지 물기어린 손을 털면서 나오고 있었다. 

  "수지야."

  "…네?"

  "오빠가 저녁도 못 먹고 여기 와서 배가 좀 출출하다."

  "…제가 뭐 사드려야하나요."

  "풉, 아니. 지은아, 너 때문에 여기 왔으니까 네가 꽃등심 좀 쏴라."

  "뭐? 이씨, 그 놈의 꽃등심!"

  지은이는 자신의 지갑을 열어 남은 돈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곧 얼굴에 만면의 미소를 띄우며 내게 말을 건넸다.

  "오빠."

  "어?"

  "오빠가 사주면 안될까아? 나, 이것 밖에 없는 거지인뎁…웅?"

  "개소리 치워. 그 카드, 체크카드인거 다 알고 있어."

  "…쳇."

  지은의 애교 작전은 보기좋게 실패했다. 웬만한 애교는 이제 내성이 생겨서, 애교를 이용한 작전은 별 쓸모가 없다는 것을 자기도 알고 있으면서 저런 구식적인 방법을 계속 써먹다니. 지은이는 자신의 외투를 의자에서 집어 올리더니 '그래, 가자. 이 나쁜 XX야.' 라는 욕과 함께 뾰루퉁해져서는 성큼성큼 선봉장이 된 채로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수지는 나와 지은이의 모습이 웃긴지 웃음을 참지를 못했다.

  "재밌어?"

  "원래 언니랑 이렇게 놀아요?"

  "어, 예전부터 지금까지 쭈욱 저러고 놀아."

  "나도 오빠랑 그렇게 놀고 싶다…"

  "…뭐야. 아까는 선 그어달라며. 저건 선 넘어야되는건데?"

  "…에엣! 그건 아…안 돼요!"

  

  수지는 자신의 팔을 X자로 겹치며 제 가슴을 가렸다. 고작 열 아홉살 밖에 안 된 주제에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뭐, 생각해보니 열 일곱살에 그런 짓을 한 정수정과 최진리, 두 음탕한 꼬맹이보다는 나은 멘탈인 듯 싶었다. 

  "뭔 상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안 이루어진다."

  "…오빠에 관한 상상 안 했는데요!"

  "누가 물어봤나."

  "…히잉."

  왜 이렇게 수지에겐 빈틈 있는 구석이 많은지 모르겠다. 아, 귀여워 죽겠잖아. 그러니까 더 지켜줘야겠다. 나로부터 말이다.

  나는 수지와 친해질 겸, 수지랑 계속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은이와는 몸의 대화(?)나 마음의 대화나 장난스러운 대화 같은 걸 2년째 많이많이 나눠봤으니 고깃집을 알려주는 네비게이션이 되라고 하고.

  "수지는 만약에 네 물건 훔친 범인을 잡았으면 어떻게 할 거야?"

  "제 물건 훔친 범인이요? 팔꿈치로 등짝 누르고, 무릎으로 니킥 날려서 가슴팍 때리고, 경찰에 신고해야죠!"

  "…에, 엣취!"

  뜬금없는 지은이의 기침에 나와 수지는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작은 물음표를 띄우며 지은이를 쳐다보았다. 지은이는 뒤통수로 시선을 느낄 수 있는지 갑자기 앞뒤로 팔을 뻗으며 박수를 치더니 걸음을 재촉했다.

  "아…날씨 한 번 기막히게 춥네. 수지야, 오빠야 얼른 고깃집 가자. 이러다 나 감기 걸리겠어!"

  

  

  오버하고 있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