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삼백 열 여덟 번째 과외 - 너는 나의 봄이다 完, 너의 목소리가 들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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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등쌀을 매섭게 휘갈겼던 차가운 스크래치는 동편에서 불어오는 봄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3월의 대한민국은 온동네가 개나리와 벚꽃으로 만개해있었다. 올해는 유난히 벚꽃이 일찍 개화되었다. 우리의 연기도 어느새 S#136 공원 길, 이라고 써져있는 부분의 대사를 연기하고 있었다. 이제는 너무 봐서 너덜너덜해진 대본집의 마지막 장이었다.
"민석씨."
"네, 말해요."
"민석씨는 신기해요."
"뭐가요."
"당신하면 왜 나는…그때 벚꽃 구경 가서 서 있던 모습이랑…비 오는 날 키스할 때랑…음…"
"비주얼 쇼크일 때만 기억하나보네요."
"…농담 말아요…그러고 보니, 민석씨 이미지는 참 봄 같아요."
태연이는 탁해 보이는 렌즈를 착용한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봄꽃이 피어난 길을 거닐다가 태연이의 시선에 걸음을 멈추었다. 도저히 맞춰지지 않을 두 시선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왜요?"
"차가운 겨울바람에 얼어버린 새싹의 시린 상처를 녹이는 따뜻한 바람같아서요. 민석씨는 나의 봄인 것 같아요."
"…뭐에요, 오글거리게. 그런 멘트는 나만 칠 수 있는데."
"장난 아니거든요?"
대본집에 써져있던 대로 태연의 손을 놓고 먼저 앞서나가다가, 어설프게 뒤쫓아오는 태연이를 보며 피식, 웃고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저 멀리 끝이 보이는 봄꽃이 핀 길을 걸었다. 몇 십초를 더 걸었을까, 카메라와 거리가 꽤 떨어져있을 즈음에 나지막하게 큰 소리가 귓가에 퍼졌다.
"컷!"
그 소리와 함께 세 달간 있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마주보고 있는 태연이의 얼굴에도 봄꽃이 화려하게 피었다. 그리고는 신나하는 표정으로 두 박자 스텝을 밟으며 카메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나는 그 모습을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며 바라보았다.
첫 만남, 어색하고 긴장되서 어쩔 줄 몰랐던 대본 리딩 시간. 첫 촬영, 전주 시외 버스 터미널에서 펼쳤던 연기. 첫 대면, 촬영 중 오랜만에 주어진 짧은 휴식 시간에 만나뵈었던 태연이의 부모님. 첫 방문, 응원차 바쁠텐데도 불구하고 깜짝 선물까지 준비하며 촬영장에 놀러왔던 소녀시대 다섯 명. 그것들이 만들어낸 추억들이 봄바람과 함께 두둥실 흘러갔다.
- 너는 나의 봄이다 完
- 너의 목소리가 들려 0
"아쉬워서 어떡해요?"
"민식아, 그러지 마라. 네 얼굴에 드디어 끝났구나! 라고 이마에 써져있거든?"
"하핫, 어떻게 아셨지."
진짜로 속마음을 감독님에게 들켜버렸다. 어울리지 않는 감독님의 도끼눈 세례를 받으며 열심히 당황을 하고 있던 찰나, 스태프들의 울타리를 넘어온 신혜가 케이크를 들고 중앙으로 끼어들어왔다.
"웬 케이크?"
"촬영 종료 기념 제 펜클럽에서 선물해주신거에요. 자, 불어요. 이게 진짜 마지막이니까."
태연이는 신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케이크의 불을 입바람으로 껐다. 신혜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촛불을 끈 태연이를 살짝 장난스럽게 노려보았다가 금세 눈웃음을 지었다.
"언니, 내가 말 끝나기도 전에 끄면 어떡해."
"미안, 얼른 숙소 가서 쉬고 싶어서 그래. 나도 어떡하지? 신혜랑 헤어져서 아쉬운데."
둘이서 아주 행쇼를 하고 있네. 나는 신혜와 태연이의 뒷목을 잡고 사이좋게 나란히 케이크를 향해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게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성차별적인 행동이라서 여성부에서 제지가 들어올까봐 참기로 했다. 그래도, 멋진 마무리 하겠다는 의도로 내가 의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슈퍼주니어의 시원형한테 배운 매너 박수를 쳤다. 그러자, 스태프와 연기자들이 '저 놈 보소' 라는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보냈다.
"감독님, 우리 쫑파티 언제 해요?"
"아, 맞다. 쫑파티. 까짓거, 주말에 하지, 뭐. 다들 주말엔 스케쥴 없잖아?"
"없긴 하죠. 특히 저는…"
"그럼 내가 없는 일거리 있게 만들어줄까?"
이 불안한 사운드는 무엇이란 말인가. 2년동안 눈칫밥을 야무지게 먹으면서 느낀 것인데, 이 말투에는 필시 어떠한 음흉스러운 의도가 담겨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잘 극복해야 할듯한 상황이 곧 닥쳐올 듯 싶었다.
"뭔데요? 일단 솔깃한 표정은 지어볼게요."
"이 자식, 말뽐새 봐라. 여튼 내가 너 아이유 노래 몇 곡 작곡해준거 알고 있거든? 그 노래들 좋더라."
"…설마, 제가 예상한 그 일거리는 아니죠."
"하하…그럴리가? 다른 건 아니고, 우리가 메인 타이틀 음악이 필요한데, 애초에 영화 찍기 전부터 너로 점찍어 놨었거든."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론 멘탈 붕괴를 열심히 했다. 영화 음악이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데. 대중들에게 선보이는 대중 음악은 내가 원하는 스타일대로 취향에 맞춰, 말 그대로 필에 의존해 만드는 음악이지만, OST 같은 경우에는 달랐다. 그 제작물의 분위기에 맞춰서 의존이 아닌 의도로 만들어야 하는 노래였다. 거기다가 대충 흘러지나가는 간단한 경음악이 아닌 가사가 담기고 뜻이 있는 메인 타이틀곡이라니. 부담이 배가 되었다.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감독님의 화려한 언침으로 은근슬쩍 빠져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먼저 점찍어놨었다니. 아무리 겸손하게 거절한다고 해도,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뺄 수가 없었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하는 수 밖에.
"…콜."
"나이스, 가수는 어떻게?"
"차차 생각해볼게요. 그래도 바로 옆에 가수가 있는데 얘로 하는게 낫겠죠? 영화도 나왔으니까. 충분히 화제성도 있고."
"난 영화랑 연관 안 지어도 그 자체가 핫이슈거든?"
"자랑이다."
비아냥거렸지만, 태연이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김태연, 이 이름이 얼마나 대한민국을 들썩거리는 이름이던가. 평소엔 있지도 않은 나의 또 다른 팬덤인 안티팬클럽이 태연이와의 스캔들을 인정하면서 두 달 동안 얼마나 많이 생성되었던가. 요즘에는 섹션에 출연한 촬영분의 캡쳐본을 어떻게든 이상하게 찍어서 굴욕샷, 이랍시고 올리고 있는데 나의 소중한 팬 분들이 직접 그 안티 팬클럽에 쳐들어가서 신명나게 그들을 털고 있었다. 아, 우리 팬클럽은 다른 팬덤과 차별성을 두고 있다면 하나같이 화술을 전문적으로 배웠는지 말빨이 좋았다. 직찍러, 직캠러 부럽지 않았다. 언제쯤 팬미팅 한 번 열어야 할 듯 싶다.
"민식아."
"네."
"너 공식 트위터 있지."
"네, 있긴 해요."
"너나봄 홍보하는 거 잊지 마라."
"아, 제가 신인이라서 팔로워가 별로 없네요, 하하…그래도 홍보 해야죠."
나는 뒷머리를 긁으며 머쓱한 표정으로 감독님에게 말했다. 스태프들의 울타리를 파헤치고 소녀시대 매니저형이 비집고 들어왔다. 무슨 용건이 있나 싶다.
"태연이하고 민식이 먼저 데리고 가겠습니다. 회사에 갈 일 좀 생겨서요."
"네, 그러세요."
"감독님, 다음 작품에도 저 섭외 좀 해주세요! 카메오라도!"
"알겠어, 잘 가라."
법원 앞 봄길을 빠져나오며 감독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보냈다. 법원과 회사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금세 회사로 도착할 수 있었다. 세 달 전에는 나와 태연이를 끌고 영화 촬영,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서 세 달동안 다른 일정 딱히 없이 <너는 나의 봄이다>만 냅다 촬영했다만, 이번에는 어떤 딜을 우리에게 제안할 건지 노심초사한 마음과 함께 궁금증이 들었다.
"이번에도?"
"응, 이수만 회장님 콜."
"가자, 태연아."
"응."
아무리 소울메이트라고 해도 공적으로는 내가 다니는 직장의 최고상관이었기 때문에 옷에서부터 매너를 지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비록 촬영용으로 협찬받은 옷이긴 했지만 꽤나 깔끔해서 우리는 딱히 다른 옷으로 바꿔입지 않고 이대로 올라가기로 했다. 늘 그랬든 전처럼 편안한 마음과 긴장되는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회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수만옹이 이번에는 우리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손님 맞이용 테이블 앞 소파에 앉아있었다. 저번에는 태연이와 마주보며 앉았다면 오늘은 수만옹이 직접 나란히 앉으라고 한 방향으로만 팔을 뻗었다.
"어서 와. 오늘은 음악적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하는데."
"네."
음악적 방향이라, 아마도 회사에서 원하는 방향을 이야기 하고 싶은건가. SM의 취향은 잘 알고 있어서, 원한다면 그렇게 곡을 쓸 의향이 있긴 했다. 내 앨범을 제외하고.
"아,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태티서 노래 잘 준비되고 있나."
"네, 태연이한테 제일 먼저 들려주고 의사 물어보았었구요. 저번에 티파니하고 서현이 촬영장 방문차 왔을 때 들려주고 마찬가지로 의사 물었구요. 셋 다, 삼중긍정을 외쳤습니다."
"그것 참 다행이군. 내가 방금 <너는 나의 봄이다> 감독한테 연락을 받았는데…"
"아, ost요."
"먼저 들었나보지?"
"네. 한다고 했구요, 오늘 집 가서 악상 좀 떠올려야죠."
수만옹은 만족하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더 할 말이 있는듯 입술을 머뭇거렸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어, 있어."
역시 돌려말하기를 하지 않고 돌직구를 날리는 수만옹이었다. 턱을 괴고 뭔가 심각한 고민을 하는듯한 표정을 짓는 그였다. 그가 심각해지면서 얼굴을 구길수록 그의 목적의 대상이 되는 나와 태연이는 불안감이 늘 뿐이었다.
"강요하는 건 아니고, 민식이한테 제안하는거야."
"네."
"회사의 식구가 된지도 반년이 다 되었고, 그리고 네가 이 회사에서 무조건 배우 쪽으로 미는 방향도 아닐 뿐더러…"
"콘서트에 참여해달라, 이 말씀이시군요."
"역시 눈치 하나는 타고났구만."
눈치 보다는 대충 찍어 맞추기에 타고난 듯 싶었다. 그 운으로 중앙대까지 가는 행운을 얻었으니까. 아니지, 그것도 눈치일 수도 있었다. 여하튼 콘서트라, 많은 가수들이 꿈으로 그려하는 무대들 중 하나이긴 했다. 콘서트에 참여하게 된다면 수만옹이 제안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것은 뭐니뭐니해도 단체 콘서트겠지.
"SM TOWN 콘서트인가요."
"맞아, 맞아. 오프닝하고 중간에 두 무대만 네가 해주면 어떨까, 해서."
"네, 할게요."
수만옹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딱히 고민하지 않고 바로 결정해서 더욱 좋아하는 듯 싶었다.
"자네의 화끈한 그 성격이 난 계속 맘에 든단 말이지. 여튼, 자세한 프로그램에 대해선 콘서트 프로그램 짜는 애들이랑 논의하고, 듀엣이나 그 이상으로 준비하고 싶으면 직접 우리 회사 가수들에게 말을 해."
"알겠습니다. 일단 화제성을 이용해서 태연이랑 한 프로그램 짜구요. 나머지는 차차 정해볼게요. 몇 월부터 시작되는 콘서트죠?"
"아마도 한국에서 새로 하는 콘서트부터 시작하게 될거야. 8월 쯤?"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내 할 말은 여기서 끝났어. 그럼 볼 일들 봐."
"네, 알겠습니다."
수만옹에게 인사를 마치고, 나와 태연이는 다시 엘레베이터를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각자의 숙소로 갈 시간이 되자 태연이는 내게 아쉬운 손짓을 하롱하롱 보냈다. 나는 문자나 통화해, 라고 말해주면서 태연이보다 먼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아쉬움은 미련을 남기지 말아야했다. 오랜만에 집에 도착하면 우선 씻고 자고난 뒤에, 제일 감성적인 시간인 새벽 두 세시 쯤에 일어나 만들어야 할 OST에 대해 생각 좀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 생각을 할 동안, 어느새 내 차는 서울을 빠져나와 파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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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암, 잘잤다. 이제 작업실로 가볼까."
작업실은 지하에 있었다. 아무래도 지하에 있어야 주민들에게 민폐를 덜 끼치고 편하게 음악 작업을 할 수 있을 듯 싶어서였다. 그래봤자 밖에서 겉보기엔 자그만한 마당 딸린 단층 주택이었지만. 있는 돈 다 털어서 작업실을 만든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어?"
오랜만에 내려간 작업실은 이상하게 불이 켜져있었다. 약간 소름이 끼쳤다. 분명히 전주로 내려갔을 때 작업실의 불은 끄고 나왔는데 말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녹음실 전용 컴퓨터의 본체도 노란 램프빛을 밝히며 켜져있었다. 누군가 왔다 간 흔적이 분명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모니터의 전원을 켰다. 화면보호기능이 풀리고 누군가의 클릭 흔적이 담긴 화면이 보였다. 작업한 음악들로 야무지게 채워진 가운데에 쏙쏙 스펀지 구멍처럼 빠지는 파일들이 있었다. 그것들의 파일명을 대충 추측해보니, '5.mp3' 그리고 '16.mp3'였다. 망할, 내가 나중에 앨범 내면 타이틀 곡으로 찜해두었던 후보 중 두 곡이었다.
갑자기 고생하면서 만든 음악이 스틸당하니, 여태껏 느낄 수 없었던 깊은 빡침이 속에서부터 끓어올랐다. 방금 새롭게 마음먹은 건, 반드시 내 작업곡을 훔쳐간 범인을 잡아서 내 분노를 마음껏 표출해야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영화 ost 생각은 내일로 미루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