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6화 (327/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삼백 열 일곱 번째 과외 - 너는 나의 봄이다 7

  

  "이 바보야."

  "…어?"

  

  벙쪄있는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배시시 웃는 수연이. 진지하게 헤어지라는 말을 무작정 던져놓고 저렇게 웃어서 넘기려는 건 반칙이 아닌가 싶다.

  "…헤어지란 말 진짜인 줄 알았어?"

  "……?"

  "쯧쯧, 어떻게 배우란 놈이 자기가 연기해야 할 씬 대본도 제대로 못 외워. 이래가지고 연기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수연이는 손가락으로 날 삿대질하며 놀릴 수 있을 만큼 실컷 나무랐다. 설마, 하면서 대본을 들춰보니 진짜 수연이가 말한 그대로 대본이 적혀 있었다. 대본상으로는 신혜가 연기해야 할 대사들이었다. 나는 급하게 받아쳐야 할 대사들을 외우기 시작했다. 

  근데 당황스러운 건, 어? 어? 어? 했던 어이없던 반응들이 그 대사였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외울 대사가 딱히 없었다. 그냥 표정 연기만 열심히 하면 미션 석세스였다니. 하지만 표정 연기가 제일 빡치는 연기 중 하나인 것은 나도 알고, 수연이도 알고, 감독님도 알고, 작가님도 알 것이었다. 물론 마주보면서 연기하는 태연이나 신혜도 그렇고.

  "…죄송합니다."

  "알면 나 커피 사줘."

  "카페 문 닫았을텐데?"

  "끌리진 않지만, 민식이가 사주는 거면 괜찮아. 저거."

  수연이의 허여멀건한 손가락의 끝이 당당히 가리키는 곳은 자동판매기 유리케이스 안에서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서있는 커피병 음료였다. 차라리 편의점을 가는 것이 좋은 생각이긴 하겠지만 주위에 편의점이 없었다. 어쨌든 무려 밥차나 부르신 수연님의 소박한 부탁이니 들어주려고 지갑을 바지주머니 한 켠에서 꺼내 열어보았다. 기대에 어린 수연이의 초롱초롱한 눈빛과는 달리 내 지갑의 낯빛은 불투명했다. 시발, 이게 뭐야. 돈이 어디 갔는가. 누가 나의 싱아…아니, 돈을 다 빼돌렸을까.

  "웨얼 이스 마이 머니?"

  "Ah, they drain your money. I see this scene."

  시발. 수연이가 별 망설임 없이 they라고 지칭할 년들은 하나였다. 소녀시대. Girl's Generation. 小女時代, SNSD, 쇼죠다이. 개 망할. 태연이는 촬영하러 갔으니 아닐테고. 수연이는 여기 있으니 더더욱 아닐테고. 아마도 내가 인터뷰 하느라 지갑을 누군가에게 무의식적으로 맡겼는데, 아, 황미영. 근데 미영이는 그런 짓을 할 작자는 아니었다. 주현이도 더더욱 그러했고. 남은 범인을 좁히자면 이순규, 김효연. 이 두 상꼬마네치가! 

  근데 목격자인 정수연 이 여자는 어떻게 해야 되나.

  "커피 살 돈 없어."

  "…히잉, 왜애?"

  "네가 목격한 they가 빼돌렸으니까."

  "아냐, I see this scene!"

  수연이는 답답한 표정으로 제 가슴을 탕탕 치며 그 장면을 목격했다고 영어로 지껄이고 있었다. 지 발음 자랑하나. 내 발음이 약간 후진 것도 있지만, 그래도 웬만한 표현은 다 영어로 할 수 있다고! 흥! 이라는 순간, 수연이가 한숨을 지으며 자신의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적거렸다. 그리고 이내 수연이의 고운 손에 쥐어진 그녀의 예쁜 제이에스티나 협찬 지갑. 왕관 그림이 참 예뻤다.

  "니가 사주려고?"

  "No, i see this scene."

  "…뭐. 네가 봐서, 뭐."

  "이, 둔팅아. 내가 그 장면을 목격했다고! 누구 돈 빼돌리는지 아는데, 내가 가만히 있겠어?"

  속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수연이를 통해 도를 깨우친 듯 싶었다. 수연이의 손에 쥐어진 내 돈을 다시 가져가려고 했으나, 이 고양이 같은 여자가 얍삽한 손놀림으로 내 공격을 피하기 시작했다. 나를 도발하려는 속셈이렸다. 하지만 내게는 안 통했다. 라고 자신있게 다짐을 했지만.

  "내놔."

  "메롱, 히힛."

  보기좋게 Fail. 결국 수연이의 손목을 잡고 있는 힘껏 군대에서 잡초를 뽑듯이 돈을 잡아딩기니 수연이의 연약한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는 내 소중한 돈들이었다. 대충 핸드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내 촬영분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내 촬영이 오늘 촬영의 마지막 분량이라고 했으니까 족히 새벽은 되야 할 터. 수연이를 데리고 간이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몇 일 전, 잠시 서울로 올라갈 시간이 날 때 올라가서 가져온 내 투아렉이었다. 역시 내 자가용을 끌고 다니니, 밴보다 훨씬 더 편했다. 투아렉에 수연이를 태우고 전주 시내로 내려왔다. 다행히도 카페의 불은 아직 켜져있었다. 먼저 내리려고 하는 수연이에게 선글라스를 건네주었다. 그래도 알아보겠지만. 

  "…어서오세요, 어?"

  "카라멜 마끼야또 세 개랑 아이스 카푸치노 한 개 그리고…"

  주문한 경험이 많은듯, 수연이는 카페에서 주문을 할 때 만큼은 영어를 말하는 것보다도 더 유창해보였다. 아무래도 콜롬비아나 에티오피아로 유학을 갔다온 게 아닐까라는 추측이 들었다. 개소리가 분명하겠지만. 그래도 일말의 희망이 있지 않은가. 카페 아르바이트생은 자신에게 폭풍주문을 하는 여자의 정체를 질문하기도 전에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수억 개의 별같은 주문에 멘탈 붕괴 상태였다. 수연이의 주문은 내가 카페 알바를 했을 때 더럽게 어려운 주문을 했었던 그 여자와 싱크가 비슷하리 만큼 말하고 있었다. 

  수연이는 주문을 마치고 나서 여유있는 표정으로 카운터 앞 테이블에 다리를 조숙하게 오므리고 앉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더니 셀프카메라를 찍어댔다. 스마일~ 스마일~ 스마일~ 삼 콤보. 세 사진 속의 수연이의 표정은 컷마다 달랐다. 그래봤자 입모양만 달라질 뿐 별 차이는 없었다. 나는 갑자기 하품이 나오려고 하자,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하는데 또 다시 스마일, 하는 소리와 함께 촬영음이 들렸다. 수연이가 갑자기 웃는 것을 봐선, 수연이의 핸드폰 카메라는 셀프 카메라 모드가 아닌 노말한 촬영 모드인가 싶었다. 

  수연이와 장난을 치며 커피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내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수연아, 잠깐만."

  전화번호로 봐서는 감독님이었다. 나는 무슨 급한 일이 생겼나 싶어, 수연이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카페 문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찬 바람이 온 몸을 에워쌓았다. 

  "네, 감독님."

  [민식이, 너 어디야.]

  "저요. 제시카씨랑 카페 왔는데요. 소녀시대 애들 커피 좀 사야된다고 해서요."

  [얼른 와서, 태연이 병원 데리고 가. 촬영 도중에 잠시 쓰러졌다가 방금 일어났다.]

  "네!? 그걸 왜 지금 말하세요! 곧 갈게요. 태연이 체온 내려가지 않게 따뜻하게 담요 같은 거 덮어주시구요!"

  나는 전화를 끊고 카페 안으로 들어가 수연이를 끌고 나왔다. 커피를 다 만든 아르바이트생이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저기 다 만들었는데…"

  "아까 계산한 돈은 그냥 드릴테니까, 커피는 직원분들끼리 나눠서 드세요.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왜, 무슨 일 있어?"

  "태연이 많이 아프대. 아까도 쓰러졌다니까 지금 병원 데리고 가려고."

  "뭐, 진짜? 그럼 빨리 가야지! 얼른 가자!"

  보통 여자 같았으면 질투 했을텐데도 불구하고, 소녀시대 애들은 참 우정이 끈끈했다. 수연이도 질투하는 모습은 아예 내색하지도 보여주지도 않고, 오로지 태연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심지어는 나보다 더 앞서서 투아렉의 문고리를 하염없이 당겨댔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스마트키로 차의 잠금장치를 풀고 바로 시동을 걸었다. 검은 밤의 세상에 희멀건한 전미등이 선명하게 켜졌다. 엔진 소리도 조그맣게 울려퍼졌다. 그때, 하늘에서 눈꽃이 떨어졌다.

  +

  "…이 바보야!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지."

  "안 아팠는데 어떻게 아프다고 말해, 이 바보야…콜록콜록…"

  

  이것은 나와 태연이가 투닥거리는 소리가 아니였다. 뒷좌석에서 수연이와 태연이가 서로를 걱정하면서 투닥거리는 정겨운 모습이었다. 수연이는 태연이가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의도로 덮여진 담요를 다시 정갈하게 덮어주면서 태연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자기 체온을 태연이에게 전달해서 떨어트리지 않겠다는 심산인데. 원래 저 정도 증상이면 열이 나서 태연이 쪽이 더 뜨겁지 않나 싶다.

  그리고 수연이 마저 태연이에게 병이 옮기면 수연이까지 뒤치닥거리 해야한다는 사실에 눈 앞이 캄캄했지만, 지금 우리 숙소에 머물고 있는 소녀시대 멤버들을 생각하니 금세 극복이 되었다. 

  이왕 병 걸리는 거, 소녀시대 다 걸렸으면 좋겠다는 못된 상상을 했다.

  차를 타고 몇 분정도 기어를 밟았을까, 전주의 한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태연이를 내리게 하려고 안전벨트를 풀고 뒷좌석을 쳐다봤는데 태연이가 또 눈을 감고 있었다. 처음엔 태연이가 기절한 줄 알고 심장이 덜컹, 했지만 수연이가 손으로 토닥토닥하는 것을 보니, 태연이는 기절한 것이 아니라 기절 모드로 잠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내내 봤을 때, 밤낮없이 촬영하느라 피곤한 몸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깨우지 않고 내비뒀다. 그리고 뒷좌석 문을 열고 태연이를 등에 가볍게 업었다. 

  

  "문 닫아, 수연아."

  "응."

  "…쿨쿨."

  태연이를 안정적으로 업기 위해서 한 번 팔을 튕겨 더 편안한 자세로 태연이를 업은 채 응급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눈이 내려서 미끄러운 길을 급하게 뛰었다간 오히려 2차적으로 다치기만 할 뿐이었다. 차분한 발걸음으로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 지난 번 내가 쓰러졌을 때 실려갔던 상황과는 완벽히 대조적이었다. 열로 흰 모찌떡같던 태연이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응급실 벽에 달린 큰 거울을 통해 볼 수 있었다. 늘 그렇듯이 응급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응급실 인턴이 우리를 향해 급하게 뛰어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까 일하다가 한 번 기절했거든요. 지금은 자고 있는데, 혹시 몰라서 급하게 응급실 와봤어요."

  "이 쪽으로 오세요."

  인턴은 태연이를 업은 나를 응급실 간이 침대 쪽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인턴이 안내한 침대 위로 태연이를 눕혔다. 태연이를 눕히자마자 인턴이 눈을 감고 있는 태연이의 동공에 불을 비춰 확인했다. 이내 간호사들이 다가와서 맥박과 체온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한 순간 폭풍까지는 아니어도 잔잔한 바람 그 이상이 지나간듯 했다. 얼마쯤 기다렸을까, 응급센터 과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이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보호자 되시죠."

  "네."

  "환자분께서는 과로로 인한 감기몸살인듯 싶습니다. 하루 정도는 피로를 회복하기 위해서 편안히 쉬시는 게 좋습니다."

  "네."

  "임시 병동으로 옮겨드리겠습니다. 하루만 입원하시면 됩니다. 언론에는 비밀로 붙여드리겠습니다."

  "네, 그래주세요."

  이동 침대가 태연이의 옆으로 다가왔다. 인턴들은 태연이가 누워있는 침구를 잡고서 태연이를 이동 침대 위에 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이동 침대를 끌며 응급센터 내부에 있는 임시 병실 안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또 한 번 다른 침대로 옮겨졌다. 몇 분 뒤, 침대 밑 간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간호사가 오더니 태연이 팔뚝에 정맥주사를 놓고 튜브를 연결했다. 곧, 링겔이 랜턴걸이(링겔액이나 액체로 된 약팩을 거는 이동걸이)에 걸렸다. 링겔액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며 태연이의 혈관 안으로 스며들었다. 수연이는 어느새 내 옆으로 오더니 피곤하다고 어깨에 기대며 잠이 들었다. 나도 피곤해 죽겠는데. 포만감이 잠으로 바뀌어가는 괴로운 순간이었다. 

  볼을 건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는 수연이었다. 아무래도 깊이 잠든 듯 싶었다. 설마, 이렇게 해도 될런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불편하게 자는 것보단 나을 듯 싶었다. 수연이의 힐을 벗기고 입고 있던 겉옷을 벗겨서 옷걸이게 걸어놓았다. 그리고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는 수연이를 들쳐안고 태연이가 누워서 그런지 약간 넓직한 공간에 수연이까지 같이 놓아두었다. 어차피 수연이는 촬영이 있다고 해도 모레나 그 뒤에 있어서 내일 하는 일은 사실상 별로 없었다. 내가 힘들어할까봐, 말만 그렇게 한 것이었다. 어쨌든 태연이와 수연이가 병실 침대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려져있던 슬라이드 난간을 위로 올려서 고정시켰다. 그리고 나도 간이 침대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시간이 되면 가려고 했지만, 내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마지막 촬영 곧 시작한다. 얼른 와라.]

  "…네."

  하품을 하며 간이침대에서 일어났다. 눈도 못 붙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의 마지막 촬영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중요한 장면이기도 했고. 원무처에서 병원비 결제를 마치고 추운 새벽을 맞이했다. 아직도 눈은 잔잔하게 전주의 검은 하늘을 하얗게 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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