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3화 (324/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삼백 열 네 번째 과외 - 너는 나의 봄이다 4

  "누추하지만 들어와요."

  "누추하긴요, 소녀시대 숙소보다 더 넓어보이는데…"

  부모님들을 마주하는 것도 벌써 세 번째다. 내 부모님까지 합하면 도합 넷. 효민이, 수연이, 태연이까지. 태연이의 가족으로는 태연이의 오빠를 만난 것이 전부였다. 태연이의 집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한 것은 태연이의 부모님에게 편의점에서 사온 선물세트와 함께 드리는 인사였다. 정장이 옷가방 안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에 없었더라면 츄리닝 패션으로 태연이의 부모님을 뵈야하는 낭패를 겪어야 했었으니까. 

  태연이 부모님과의 간단한 인사 뒤에 제일 먼저 걸어간 곳은 뭐라 해도, 태연이의 방이었다. 

  "태연이, 네 방에 족보도 있네?"

  "그거 내 방에 책장 있다고 아빠가 가져와서 꽂아놓은거야."

  "설마, 겠지만 한 번 보고 싶다."

  "왜?"

  "너랑 나랑 같은 김씨잖아. 혹시 지역이 같기라도 하면 돋잖아."

  내가 경주 김씨인데, 설마 태연이가 경주 김씨겠어. 라는 생각을 가진 채 태연이의 침대에 앉아 족보를 확인했다. 족보의 맨 앞에 써져있는 한자 중 뒤 2글자는 金氏(김씨)였다. 순간 맘 졸였다. 성은 애초에 같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혹시나 하면서 앞에 써져있는 한자까지 읽어보았다. 이래뵈도 중학교 때 한자능력시험 2급까지 떼본 경험이 있는 나였다. 1급은 진짜 못해먹겠다. 여튼 읽어보니. 慶(경)…州(주)…金(김)…氏(씨)….

  "헐."

  "왜? 너도 경주 김씨야."

  대답 대신 행동으로. 태연이의 질문에 벙쪄있는 얼굴인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태연이도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을…짓기는 커녕 이름대로 태연하게 굴었다.

  "왜 그렇게 놀라?"

  "동성동본이잖아. 그럼 결혼 못하지."

  "…뭔 소리야, 동성동본 금혼법 깨진지가 15년이 넘었는데."

  태연이는 혀를 끌끌차고 내 얼굴에 삿대질을 하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뭔가 아이러니한데. 라고 생각하면서 대가리를 굴려 기억의 저 편 너머에 있는 뉴스 기사를 찾아보았다. 그래, 이제서야 생각이 났다. 동성동본 부부들의 위헌법률신청으로 몇 년 뒤에 동성동혼 금혼법이 위헌이라고 판결이 나서 법이 바뀌었지, 참. 그래도 태연이와 내가 같은 동본이라는게 신기하긴 했다.

  "구경 끝."

  "기다려."

  "응?"

  태연이는 자기 방의 책상 밑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그 물건의 정체를 본 순간 1990년대 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보석링이라고 있지 않은가. 플라스틱 반지 위에 큐빅처럼 사탕이 박혀서 사탕 먹으면 반지 되는 장난감 같은 불량식품. 태연이는 보라색 플라스틱 반지를 내 약지에 끼우고, 방실방실 웃으면서 다른 플라스틱 반지를 자신의 약지에 끼웠다.

  "청혼이야?"

  "히히, 노 코멘트."

  태연이는 내 손을 잡은 채로 방 밖으로 나왔다. 솔직히 방 나오면서 어머님이 음식 좀 해주셨을 것이라 기대했었다. 방 안에서 30분 가량을 있었으니까. 하지만 태연이의 어머니는 태연이에게 신사임당 한 장을 주시면서,

  "먹고 싶은 거 사와."

  태연이의 어머니는 인자한 외모와는 다르게 성격은 시크하셨다. 태연이는 이런 경험이 많이 있었다는 듯, 어머니가 내민 오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받아들고는 곧바로 현관으로 걸어갔다. 나는 태연이의 손에 끌린 채 현관으로 같이 얼떨결에 가게 되었다. 근데 쌩얼인 상태로 겉에 아무것도 안 두르는 태연이였다.

  "안 가려?"

  "선글라스? 모자? 에이, 필요없어. 어차피 공개연애잖아. 까짓거 더 훈훈하게 네 넓직한 트렌치코트 안에 숨으면 되지, 뭐."

  "…풋."

  "자, 레츠 고!"

  태연이는 진짜로 내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안으로 파고 들어가 자신의 어깨를 내 옷으로 덮었다. 

  "근데 마트 어디 쯤에 있어?"

  "응? 마트를 왜 가. 시장이 있는데."

  태연이의 말대로, 태연이의 집 근처에는 시장이 있었다. 그것도 사람이 아주 바글바글한 시장 말이다. 이게 전주에 있는 시장의 규모라니. 그래도, 어느 시장이든 크기는 비슷해보였다. 주위의 사람이 우리를, 아니 태연이를 알아보고는 있지만 대충 분위기가 어떤지 알기에 싸인해달라거나, 혹시 소녀시대 태연…? 등의 말은 없었다.

  태연이의 손을 잡고 풍남문 주변 도로를 걸으며 전주남부시장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태연이는 오랜만에 와보는 곳이라서 신나는지 기분이 들떠보였다. 나도 그녀의 기분에 맞춰서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요즘 재래시장들은 하나같이 위에 지붕을 씌워서 어느 시장이든 비슷해보였다. 하지만 지붕 안에 감춰진 내용물들은 개성이 뚜렷했기에 시장 찾아가는 맛이 은근히 재밌었다.

  태연이는 시장 안을 조금 더 걸어서 정육점을 가는가 싶더니 오른쪽으로 꺾어서 어물전을 찾았다. 

  "오징어 두 손하고 고등어 세 손 주세요."

  "잠시만요."

  낡았지만 날이 예리한 칼날에 머리가 댕강 잘려나가는 고등어를 쌩라이브로 보고 있었다. 어물전 사이를 파고드는 칼날보다 더 예리한 찬바람에 나는 몸을 떨었다. 그러자 태연이가 패딩 주머니 속에서 손난로를 꺼내더니 내 트렌치코트 주머니 속으로 넣어줬다. 그리고 내 손을 잡더니 그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따뜻한 태연이의 손. 

  "공개연애 시작하더니, 맨날 손만 잡네?"

  "내가 제일 바랬던 게 이거인거 몰랐어?"

  "그럼 손만 잡고 잘까?"

  "이건 무슨 농담이래."

  

  그 와중에 우리 앞으로 검은 봉지가 뻘쭘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태연이와 나는 급히 그 검은 봉지 안 오징어와 고등어에게 사과를 하며 돈을 건네주었다. 잔돈을 받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배춧잎 3장 그리고 이이 선생 한 분과 이황 선생 두 분. 우리는 지금 시장을 나가는 길에 이황 선생님을 어떻게 쓸지 영악한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원조전주어묵이라는 간판을 단 가게가 눈에 띄였다. 

  "원조 치곤 건물이 지은지 얼마 안 된 것 같네."

  "이 집, 나 고등학생 때도 있었어."

  "…그래? 중학생 때는?"

  "음…없었던 것 같은데?"

  그 소리에 우리 둘은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주전부리로 어묵을 먹을 생각을 하면서 꼬치어묵 하나를 집어서 태연이를 건네주었다. 태연이는 그 어묵에 간장을 펴발랐고, 이윽고 꺼낸 꼬치어묵에도 간장을 펴발라주었다. 한 입을 베어먹자, 어묵 특유의 맛과 함께 간장의 달짝지근한 맛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맛을 다시 곱씹어보기 위해 먹은게 어느새 네 개쯤 되었다. 태연이는 내가 다섯 번째 꼬치어묵을 먹기도 전에 가게 주인에게 돈을 내고 얼른 내 손을 잡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아, 왜. 맛있었는데."

  "우리 엄마 밥은 안 먹을건가 보지?"

  "…아, 미안."

  어묵이 너무 맛있어서 태연이의 어머니의 음식의 존재를 하마터면 잊을 뻔 했다. 그리고 태연이의 부모님에게 점수가 엄청나게 깎일 뻔 하기도 했고. 이를 다시 각인시켜준 태연이가 고마웠다. 시장으로 들어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뺑뺑 돌면서 보았던 풍남문도 다시 한 번 보며 태연이의 부모님이 사시는 집으로 회귀했다. 

  "가시나야, 왜 이렇게 시간 걸렸어?"

  "에이. 좀 봐줘. 시장 가는 겸 데이트도 했는데. 어묵도 먹고."

  "잘생긴 민식이 보고 봐주는 줄 알아."

  "엄마도 참, 남자친구의 안을 봐야지. 겉만 보면 어떡해?"

  "남자친구의 안은 네가 보증하잖니."

  "히히, 그건 맞아."

  태연이가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동안, 난 태연이의 아버지를 찾으러 다녔다. 하지만 그리 급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찾을 필요는 없었다. 거실에 계셨었으니까. 

  "아버님, 뭐하세요."

  "안경 알 빼."

  "…왜요? 어, 근데 안경테 멋지네요."

  "멋지긴 멋지지. 태연이 남자친구한테 전주 온 기념으로 줄 선물이니까.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안경 좋아한다며? 지적으로 보이긴 하지. 자, 써볼래?"

  "…감…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아버님의 선물에 난 그 안경을 받아서 바로 얼굴에 씌었다. 검은 안경테의 틀 사이로 기뻐하는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잘 어울리네."

  "네, 감사합니다.'

  "태연이와도."

  "…진짜 감사합니다."

  +

  "전주 촬영 끝나면 또 올게요."

  태연이 부모님의 배웅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다. 지금은 오후 5시, 해가 뉘엿뉘엿 지기 전이었다.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우리 둘은 촬영장에 마련되어있는 분장실 대용으로 쓰는 천막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두 연예인의 두 스타일리스트가 왜 이제 왔냐, 라고 우리를 나무랐다. 촬영 준비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왔는데, 그게 뭐가 잘못된거지. 

  한창 메이크업을 받으며 다음 씬 대본을 외우고 있는 와중에 갑작스레 스태프들이 여러가지 것들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뭐지, 하다가 점점 늘어나서 분장실 한쪽을 채우는 양에 깜짝 놀라기 시작했다. 태연이도 마찬가지로 놀란 얼굴이고. 

  "그게 뭐에요?"

  "태연씨 팬클럽에서 서포트 온거래요." 

  "그거 다…?"

  "네." 

  입이 떡 벌어졌다. 분장실 텐트 한 구석을 채운 저 엄청난 물량의 선물들이 다 태연 팬덤에서 준비한 서포트라고? 내 팬클럽은 아직 소녀들이 생일 선물해준 것보다 훨씬 더 적게 선물해주는데. 사실상 아직까지도 이렇다할 서포트가 없었다. 태연이는 저것까지 치면 벌써 세 번째 서포트다. 

  "이러다 태연이, 너 코 너무 높아지겠는데." 

  "괜찮아, 코 높아지면 서구형 미인되서 좋은데."

  태연이는 으스대며 나에게 장난을 쳤다. 선물공세에 감탄하고 난 뒤, 다시 스크립트에 집중하며 대사를 외울 동안에 매니저 형이 미니 난로를 들고 와서 우리의 자리 밑에 놓아두었다. 빨간 열등이 열을 내며 따뜻한 기운을 찬 바람에 얼어버린 것만 같은 다리에 보냈다. 다리가 얼음에 녹는 느낌이었다.

  "이게 뭐에요?"

  "태연이 팬덤 선물. 네 팬덤은 언제쯤 서포트 한다냐. 나도 선물 받아보고싶다."

  "우리는 팬 있는 것이 신기한 케이스 아닌가?"

  "하긴 그래, 스캔들 인정하고 나서 우리의 연예인께서는 팬덤 적자가 나셨지."

  "팬덤 적자가 뭔데요?"

  "얘가 지은거야. 진짜 팬 마이너스 안티 팬 해서 마이너스 숫자 나오면 그건 팬덤 적자라고. 얼마 전에 공식 팬클럽 5000명 찍고 안티는 20000명 찍었거든."

  "…푸훕!"

  "웃지마라, 태연아. 이 오빠는 이 난항을 어떻게 헤쳐나가야할지 문제란다."

  내 매니저의 간곡한 부탁에도 태연이의 웃음은 멈출 줄 몰랐다. 그래, 데뷔할 때부터 팬덤 흑자를 기록한 소녀시대의 리더 태연이에겐 팬덤 적자라는 말이 생각도 못한 현상이었기에 웃을만도 하겠지. 어서 나의 매력을 방출할 수 있는 치명적인 영상미의 <너는 나의 봄이다>가 촬영을 마치고 개봉해야할텐데. 아깝기만 할 뿐이다. 그 때, 태연이와 내 핸드폰으로 동시에 전화가 왔다. 먼저 받은 건 나였다.

  "여보세요?"

  [봐봐, 이순규! 내가 이겼어! 어, 여보세요?]

  수연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들리는 이 하이톤의 환호성은 아마도 순규와 내기를 했는데 이겨서 외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도 내기 종목은 '태연이와 나 중 누가 먼저 전화를 받을까' 이었겠지. 멀리서 순규의 아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고 옆으로 돌아봤을 때는 태연이가 표정을 찡그리며 핸드폰과 귀의 거리를 두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왜?"

  [아, 우리 촬영장 거의 다 왔거든!]

 "어딘데?"

  소리를 들어보니, 수연이와 순규 외에도 주현이와 미영이와 효연이도 있는듯 보였다. 유리는 <패션왕>이라는 드라마로 미국으로 뜨신 상태고, 윤아는 <사랑비>라는 드라마로 한창 촬영중이고, 수영이는 <제3병원>이라는 사전제작드라마를 찍고 있었으니까. 근데 수연이도 <난폭한 로맨스> 찍고 있지 않았나. 아, 촬영 끝났다고 했지.

  [왜애? 수연이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영?]

  "그냥 시간도 남았고 해서 마중 나가게."

  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텐트 바깥으로 길쭉길쭉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리고 남자 스태프들의 열렬한 환호성도 들려오고 있었다. 태연이는 메이크업을 받으면서 한소리를 했다.

  "쟤네들은 맨날 촬영장에 와서 전화한다니까. 일부러 놀래켜주려고 하는 것 같은데, 5년 동안 저러는 건 좀 뻔하다."

  "동감."

  오랜만에 태연이의 말에 동감을 해줬다. 

하지만 그 탄식도 잠시 텐트의 문이 걷히며 환상적인 비쥬얼들이 하나 둘 씩 들어오고 있었다.

  "안녀어어어어엉!!"

  수연이는 그 동안 보컬 연습도 많이 했나보다. 수연이의 목청에서 나오는 소리는 우리의 고막의 순결을 뺏어버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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