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2화 (323/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삼백 열 세 번째 과외 - 너는 나의 봄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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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촬영하면서 감기 몸살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인공 강우기는 8톤 트럭 위에 놓여진 채 전깃줄보다 더 높이 올라갔다. 이제 우리는 이 길을 뛰어가야 했다. 촬영은 벌써 3주째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매일 2~3시간밖에 자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긴 했다. 태연이와 내가 뛰어야 할 거리는 약 50m 가량, NG를 내면 낼 수록 죽어나가는 건 우리 쪽이었다. 태연이와 나는 눈빛을 교환했다. 한 컷에 끝내자, 라고. 

  "씬 넘버 58, 테이크 1."

  조연출이 슬레이트를 치고 갔다. 꿀 같았던 씬 넘버 57, 카페에서의 촬영은 끝났고 이제부터 감독의 입에서 컷, 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주구장창 인공강우를 맞아가며 촬영을 해야했다. 감기는 덤. 컨셉은 우산이 한 개 뿐이라 어쩔 수 없이 딱 붙어서 길을 걸어야했던 씬이었다. 태연이는 나랑 있을 때, 딱 달라붙어서 팔짱을 낀 채로 걷기를 좋아하는데. 너는 나의 봄이다, 라는 영화는 태연이와 내 로맨스의 일부분 같았다. 인공강우기에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두 명이 들어가는 데에 비해 작디 작은 우산인지라, 서로의 어깨가 빗물에 조금씩 젖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왼쪽 어깨만 빗물이 갉아먹고 있지만. 감독의 조그만 신호와 함께 연기를 시작했다.

  "…좀 붙어요."

  

  저기 멀리서 하얀 비닐 우비를 입은 김응수 선배님이 보였다. 극 중에서는 나의 살인 사실을 알고 있는 경찰이었다. 아니, 지금 상황은 살인자가 나라는 것을 알고 있기 보다는 사진을 들고 살인자를 찾고 있다는 게 더 표현이 잘 된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동공이 커진 채로, 눈동자를 떨며 태연과 소리 없는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김응수 선배님을 보았다. 그의 걸음에, 나와 태연의 대화도 멈췄다.

  "왜요? 우산 때문에?" 

  "…아니요." 

  태연이는 걱정이 어린 표정으로 나의 젖은 어깨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좀 더 왼쪽으로 밀었다. 태연의 어깨가 빗물에 차츰 젖어가고 있었다. 나는 걱정하는 태연이에게 근심을 주지 않으려고 억지로 웃어보였다. 태연은 그 웃음이 진심인 줄 알았는지 따라서 웃었다. 그 때였다. 다른 경찰이 나의 젖은 어깨를 비 묻은 손으로 잡았다. 음산한 손길에 심장이 요동쳤다.

  "…무슨 일이시죠."

  "요즘 전주에서 흉흉한 말들이 많아서요. 혹시 몰라서 그러는데,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말 없이 경찰의 말에 대꾸하면서 경찰이 들고 있는 사진을 쳐다보았다. 내 사진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려서 긴장하는 연기를 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우산을 버리고 뛰는 연기를 해야했다. 때마침, 스크립트에 써져있던 대로 경찰이 전화를 받는 연기를 했다. 태연이와 나는 그 순간 속으로 한숨을 쉬고 엄청난 긴장의 늪에 갇혔다. 그리고 떨어지는 비 사이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예견했듯, 우리도 뛰었으니 경찰도 뛰었다. 경찰 역할을 맡은 단역 배우는 입에 호루라기를 물고 열심히 불며 우리를 추격하고 있었다. 같이 달릴 때는, 호흡이 중요했다. 태연이는 잘 뛰고 있었다. 그리고 태연이는 대사를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뭐하는 거에요!"

  

  태연이의 대사에 대꾸하지 않고 열심히 뛰었다. 태연이는 숨이 찬듯 표정을 찡그리며 연기를 했다. 여전히 호루라기 소리는 우리의 귀를 파고들었다. 지나가던 길에 야옹! 하고 고양이가 발에 채였다. 고양이한테는 미안하게 느껴졌다. 

  "지금 뭐하는 거냐구요, 빨리 말 못해요?"

  

  태연이는 소리를 지르며 하염없이 내 손아귀에 갸녀린 손목이 잡힌 채 억지로 뛰고 있었다. 나는 워낙 뛰었던 사례가 많았던 터라 별로 숨이 차지 않았지만, 태연이는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드디어 비 사이를 헤치고 목적지인 막다른 골목의 열린 대문으로 들어갔다.

  "컷!"

  태연이의 밀렸던 숨이 한꺼번에 내뱉어졌다. 엄청난 양이었다. 나는 태연이의 등을 토닥여주며 잘 뛰었다, 라고 말했다. 제일 고생할 것 같았던 빗 속을 헤치고 달리는 씬은 또 찍기 싫은 우리의 의지로 한 테이크에 끝낼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태연이는 숨을 고르고난뒤, 기쁜듯 내게 안겼다. 나도 내게 안긴 태연이를 와락 안았다. 지나가던 스태프가 한 소리 했다.

  "에이, 우리 마누라 보고 싶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포옹을 풀지 않은 우리였다.

  + 

  대기 시간에 잠시 쉬면서 태연이는 립밤을 새로 바르기 시작했다. 태연이는 내 앞에 세 개의 립밤을 보여줬다. 색깔이 다른 것을 보고, 립밤을 포장한 용지에 그려진 과일이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 이 여자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딱 봐도 알겠다는 것이었다.

  "연두색, 연두색 립밤."

  "오케이, 사과맛 당첨."

  태연이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입술을 손가락 한 마디만큼 쭉 내밀고 거울을 보면서 립밤을 발랐다. 태연이의 입술이 조명에 번들거렸다. 미영이보다 더 번들거리는 것 같았다. 

  "나, 이번 씬 NG 엄청 낼 거야. 여태껏 키스 못한 천추의 한을 풀어야겠어."

  "그럼 나는 한 컷에 끝내도록 해야지." 

  "오늘분 촬영 테이프 다 써야지이."

  "아서라, 그러다가 욕 바가지로 먹는다." 

  "입술이 닳고 닳을 정도로 키스하고 난 뒤에 혼나는 거라면…난 괜찮아~"

  태연이의 의지가 두려워졌다. 뒤에서 피식, 하고 내 스타일리스트가 지나갔다. 스트레스를 받는 느낌이었다. 

  "자, 다시 촬영 시작하자."

  "으으…준비 완료! 민식아, 가자.'

  아, 왜 이렇게 가기가 싫지.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이는 강제로 나를 끌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강우기는 다시 작동되기 시작했다. 우산을 팽개친 우리 머리 위로 빗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이슬처럼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은 물방울들은 곧 머리카락 곳곳에 숨어들어 스타일을 뭉개버리고 말 것이었다. 나는 금세 감정을 잡고 태연이를 대문 안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벽으로 밀었다. 태연이도 금세 감정이 잡힌 채로 나를 쳐다보며 연기했다.

  "말해요! 빨리 안 말해요? 말하라고, 장민석!"

  휘각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음산한 경찰의 발걸음도 점점 다가워지는 듯 했다. 방법은 없었다. 손에 더욱 힘을 줘 태연이를 벽에 완전히 밀어붙이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화가 난 상태였다.

  "이 새끼들 어디 간거야?"

  대문 바로 앞까지 들려왔다. 나는 입고 있던 가디건을 안 보일듯한 풀숲으로 던져버렸다. 태연이의 가디건 또한 벗겨서 풀숲으로 팽개쳤다. 태연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쳐다보았다. 경찰은 대문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빨리 말 ㅎ…읍!"

  

  혀 끝에서 미미하게 사과맛이 느껴졌다. 태연이는 놀란 눈으로 내 볼을 쳐다보았다.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았겠지만, 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리면서 입술을 맞닿았다. 내 가슴팍을 때리던 그녀의 야무진 주먹은 점점 힘이 풀려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놀란 눈이 저절로 감기는 태연이었다. 조심스럽게 내 가슴팍을 때리던 주먹을 허리라인을 타고 감아 깍지를 꼈다. 

  수 십번을 NG를 내고야 말겠다는 그녀의 포부는 농익은 나의 키스실력에 녹아 테이크 하나만에 촬영이 끝나버렸다. 실컷 키스할 수 없어서 뾰루퉁해진 것인지 립밤을 바를 때와는 다르게 입술을 쭉 내미는 태연이었다. 

  "오늘 촬영은 여기서 끝! 내일 촬영은 오후 7시입니다."

  "만세!"

  지금 시간은 오후 6시, 내일 촬영 시간은 오후 7시. 무엇 때문에 저렇게 촬영이 늦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머지 시간이 모두 자유시간이라는 생각에 우선 숙소로 향했다. 소속사의 망할 배려랍시고, 나와 태연이의 숙소를 투룸으로 잡아놓았다. 말이 숙소지, 이건 동거나 다름 없었다. 뭐, 태연이는 좋다고 난리지만 나는 후일이 두려웠다. 태연이는 나 혼자면 충분하지만, 나에게 딸려있는 아이들은…읽지 않은 카카오톡 메세지가 100개가 족히 넘는 것을 보면, 대충 내 미래가 보이는 듯 했다. 

  [서울로 언제 올라와앙 ㅠㅠ - 수연]

  100개 중 50개 이상을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정시레씨였다. 스캔들을 인정했을 때, 쿨하게 이번 건은 넘어가주겠다며 소주 두 병을 사온 수연이는 한 병 반을 병나발로 불어제끼더니, 본심을 토해냈다. 그것도 침대 위에서. 그 때 생각만 하면 정말 아찔했다. 퇴원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내가 어찌할 바도 없이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그녀를 내가 막을 방법은 없었달까. 그때, 다음 날 아침에 깨서 이불로 제 몸을 가리고 토끼처럼 웃어대던 수연이의 해맑은 얼굴만 보면 소름이 돋았었달까. 

  [다음 달 초에 올라갈 것 같은데]

  [그럼 나 스케쥴도 없는데 촬영장으로 놀러가면 안 돼? - 수연]

  

  음, 태연이한테 한 번 물어볼까.

  "태연아~"

  "응?"

  된장찌개 냄새가 솔솔 났다. 구수한 향기는 투룸인 오피스텔을 가득 채웠다. 나는 베란다를 열고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바깥으로 퍼지도록 환기를 시켰다.

  "수연이가 촬영장으로 놀러가면 안 되냐는데?"

  "놀러오라그래~ 나도 애들 보고 싶다. 너만 보니까 지겨워서…"

  "나도 애들 보고 싶네. 에프엑스 애들. 설리 부를까…"

  "이게!"

  된장찌개 국물을 담아냈던 흔적이 있는 숟가락이 내 옆구리로 스쳐지나갔다. 하마터면 새 옷에 된장찌개로 데코레이션을 할 뻔 했다. 여하튼 태연이가 소녀시대 멤버들을 보고 싶다고 했으니, 불러야지, 뭐. 

  나는 수연이에게 문자 대신 전화를 걸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받는 수연이었다.

  [자기!]

  "그래, 수연아."

  [웅?]

  애교가 철철 넘쳤다. 예전에는 시크함이 몸에 배어있었는데, 요즘은 완전 러블리라니까. 여하튼 태연이가 수연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통화 볼륨을 최대한 낮추고 통화를 이어나갔다.

  "태연이가 오라고 했으니까, 와."

  [자기, 태연이한테 잡혀 사는 고얌? 수연이가 가서 구해주까? 일본에서처럼?]

  "음, 그러면 좋고.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태연이가 스케쥴 되는 애들 더 왔으면 좋겠다는데?"

  [알았쏘, 그르도록 하께! 그럼 쪽!]

  

  당황스러웠다. 태연이가 내가 통화하는 모습을 국자 하나를 든 채로 노려보며 서있었으니까. 아마도 태연이가 통화로 수연이가 쪽,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태연이는 씨익, 웃더니 내 핸드폰을 뺏어들었다.

  "정수연, 나도 따랑해~ 쪽!"

  […어, 김탱ㄱ…]

  "내 앞에서 수연이와 애정행각? 나 안 보일 때 해라잉?"

  "제가 애정행각 한 게 아니라, 상대방의 일방적 애정표현인데요…"

  "샤랍!"

  이렇게 억울할 수가. 아무리 통화내용을 회상해봐도, 내가 한 말은 "그래, 수연아." , "태연이가 오라고 했으니까, 와.", "음, 그러면 좋고.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태연이가 스케쥴 되는 애들 더 왔으면 좋겠다는데?" 등 외엔 거의 다른 말을 하지 않은 걸로 기억되는데. 오히려 수연이와 애정행각을 벌인건 김태연, 저 여자가 아니던가. 

  "된장찌개 맛 볼래?"

  거두절미하고, 통화를 끊어버리고 나에게 된장찌개 국물이 담긴 국자를 내미는 태연이었다. 나는 국자를 잡으려다가 실수로 태연이의 손을 잡은 채로 국자에 담긴 국물을 마셨다. 짰다.

  "…짜다."

  "아, 물 좀 더 넣어야되나."

  "응. 아님, 된장찌개는 내비두고 물 좀 사던가 해야지."

  "물 더 넣으면 돼."

  "이번엔 싱거워지는 거 아냐?"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이는 다시 조리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생수를 조금 더 붓고는 다시 숟가락을 꺼내서 된장찌개가 담긴 뚝배기 안을 휘저었다. 앞치마를 두른 태연이의 모습은 흡사…

  '이 도시락 먹으니까 좀 졸리다…'

  '히히, 그러면 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 때도 아마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을 것이었다. 근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타난 태연이의 모습은 날 고문하는 망할 여자 같았지. 그리고 이어졌던 유리와의 정사를 생각하면 눈 앞이 아찔했다. 

  "내일 나 따라 어디 좀 가자."

  "어디?"

  "부모님이 궁금해 하시거든."

  "…?"

  음,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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