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삼백 네 번째 과외 - 강남 스타일 5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내 손엔 아직도 레이나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온기도 아니었지만. 난 침을 꼴깍삼켰다. 레이나가 나에게 호의적은 반응을 보이든 안 좋은 반응을 보이든 결말은 꽃같을게 분명하니까. 일단 오해부터 푸는게 중요했다.
"레이나, 아니 혜린아. 오해부터 풀자."
"무슨 오해? 니가 내 보지 만져놓고 아니라고 발뺌하는 오해?"
너무나 직설적인 레이나의 말에 나는 오해를 풀 말조차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의 두 손은 의지할 곳이라곤 자동차 핸들 밖에 없어서 자동차 핸들만 잡은 채 레이나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고 있었다.
"술 취해서 잠 좀 자고 있었다고 내가 만만했어?"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 예전에 부비부비댄스 좀 해서 즐겨줬다고 이런 짓해도 내가 넘어갈 줄 알았어? 날 걸레로 본 거야?"
직설적이여서 날 당황스럽게 만드는 건 좋은데 너무 앞서나간듯 싶었다. 난 단지 치맛깃을 내려주다가 이렇게 되버려서 미안하긴한데 자기 멋대로 상황을 왜곡하는 건 아닌듯 싶다.
"…그것 때문이 아니야!"
"그럼 뭔데. 말해보라고 왜 말 못해?"
"야, 인간적으로 네가 나한테 말할 기회도 안 주고 몰아붙이는데 어떻게 말해? 일단 사과할게. 내가 사소했든, 아니면 미친 짓을 했든 너한테 사과할 일이니까 니가 원하는 사과 방식으로 사과할게. 그리고 내가 고의로 만진 것도 아니고 네 치맛깃이 올라가있길래 그거 내려주다가 네가 몸을 돌리는 바람에 이렇게 되버린거야. 나도 충분히 당황스러웠다고."
씩씩거렸던 레이나의 모습은 나의 오해풀기에 약간 움츠러둔듯 보였다. 하지만 이제 만난 적도 별로 없는 나를 쉽게 믿지는 않았다.
"그럼 요 건물은 뭔데? 모텔이잖아. 왜 하필이면 모텔 앞에서 이런 오해 만들었는데? 나랑 하고 싶어?"
"아, 좀!"
나는 흥분한 나머지 감추고 살았던 사투리가 점점 튀어나오고 있었다. 지금 레이나는 스스로가 만든 착각에 갇혀서 전혀 이성적이지 못한 상태였다.
"마! 그럼 내가 우짜야하는데? 이 사단났는데 도로 한복판에서 민폐 끼칠기고? 니도 연예인이고 나도 연예인아이가? 아그들 많은 데서 지랄떨면 나도 힘들디만 니도 힘들기라. 내 그거 생각해서 인적 드문 데로 왔는데 그 앞이 하필이면 모텔인데 나보고 우짜는데? 그리고 마, 너 영화 너무 많이 봤다. 내가 아무리 섹스에 미쳤어도 파트너 허락 받고 하지, 미쳤다고 덮치나. 니는 니가 아니라카는데 내가 몰아붙이면 기분이 어떻겠노. 좆같겠제? 내도 매한가지다. 역지사지란 말 모르노! 어? 기래서 내가 니보고 미안하다 카고 어떤 방법을 쑤서라도 니 맘 풀어주겠다 카는데 니가 이렇게 지랄발광을 떨면 난 뭐라 할 말이 읍다. 니 꼴리는 대로 해라잉? 고소 처맥일기면 처맥이라."
레이나의 동공이 떨려왔다. 일렁이는 떨림은 나의 파도를 쳐냈다. 나의 입김은 뜨거워졌다. 한 여름 밤의 꿈만큼이나 뜨거웠다. 레이나의 머리카락이 가을바람에 사그작거리며 휘날렸다. 밟힌 과자 부스러기처럼 흩어진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레이나는 입 안에 모아두었던 말덩이를 내게 끄집어냈다.
"…미안해."
그리고 조수석 옆 차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나의 굴레에 속박되어 있었다. 내가 화내놓고 바보같이 내가 죄책감이 들어야하는건지. 왜 저렇게 그녀가 안쓰러워보이는건지. 가끔은 대책없이 착한 내 성격이 엿같을 때가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대로로 나가 개인택시 하나를 잡아 올라탔다.
"…씨발!"
나는 세워둔 차 안에서 클락션을 미친듯이 울려덌다. 주위의 이목이 내게 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한동안 클락션에게 화풀이하듯이 마구 눌러댔다. 클락션의 소음이 내 고막을 뚫고 나의 심장을 찌르도록.
"시끄러워, 개새끼야!"
+
마음의 살에 멍이 든 느낌이었다. 나는 그 상태로 YG를 향했다. 따지고 본다면,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이다. 시설은 편안했고 엄청났다.
"저희는 아티스트의 개인 수입은 개인이 최대한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해드립니다. 시설도 여타 기획사보다 최상급의 수준을 자랑하구요. 스케쥴도 아티스트의 컨디션에 맞춰서 해드리구요."
어딜 가나 기획사가 하는 말은 다 똑같았다. JYP는 박진영과 공동작업 외에는 관심 가는 것이 하나도 없고, YG는 시설이 좋다고 하지만 나는 사내에서 작곡 작사할 생각이 없었다. 편안하게 집에서 작곡, 작사하는 것 그게 제일 좋았다.
"계약에 대한 건 차후에 말씀 드릴게요."
YG까지와의 이야기가 끝난 후 나는 바로 차로 향했다. YG 관계자는 식사라도 같이 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나는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어서요. 라는 말과 함께 죄송함을 표했다. 그리고 나는 차를 돌리며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계약할게요. 계약서 싸인은 거기가서 할게요.]
그리고 나는 네비게이션으로 목적지를 손가락으로 틱틱, 눌러댔다. 엿같게도 어젯밤 레이나가 네비게이션을 틱틱, 눌러댔던게 생각났다. 레이나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여자일뿐인데 왜 이렇게 아른거리는거지. 내 특이성인가.
애매한 시간대라서 그런지 회사까지 가는데 딱히 막히는 것도 없었다.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곧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 봤던 직원을 또 보다니.
"제가 온 이유 아시겠죠?"
나름대로 직원의 센스를 믿고 엘레베이터로 향했다. 그리고 엘레베이터가 열리자 나의 몸을 좁은 기계칸에 실었다. 직원이 한 손에 수화기를 든 채 문이 닫히기 전 나를 말렸다.
"잠시만요! 출입증 가져가셔야죠! 아직 SM 직원 아니시잖아요!"
"아, 맞다."
직원이 건네주는 출입증을 손가락에 걸고서 다시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출입증을 손가락에 건 채 돌리는 게 맞았지만. 휘파람까진 불지 않았다. 또 다시 문이 열리고 비서실이 눈에 보였다. 비서실에 출입 확인 서명을 하고 사장실의 문을 열었다.
수만옹이 일을 보고 있었다. 내가 와도 보는 척을 안 했지만 테이블 위에서 홀로 도를 닦고 있는 펜을 보니 내심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고 생각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소파에 앉아 펜을 들었다. 수만옹이 눈으로 슬쩍 흘겨본다는 것을 눈치챘다.
수만옹의 도장은 이미 찍혀있고 나도 매한가지로 도장을 가져왔으니 안주머니에서 도장주머니를 꺼냈다. 근데 인주가 없다는 게 흠이었다.
"수만형, 인주좀요."
"비서실 가면 있어."
시크하긴. 나는 도장을 든 채 비서실로 향했다. 예쁘장한 미모의 비서가 커다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비서누나, 인주 좀 빌릴게요."
"네, 빌리세요."
누나라고 불러서 설렌건지, 아니면 나라서 설렌건지. 별 말 없이 내주는 인주에 도장의 홈이 있는 곳을 꾹 찍었다. 그리고 비서누나를 쳐다보며,
"고마워요."
라고 말한 뒤 다시 사장실의 문을 열었다. 수만옹은 자신이 앉는 소파에 앉아 계약서를 쳐다보았다.
"파주시? 집 서울 아니었어?"
"몇 일 뒤에 이사할거에요. 얘들한텐 비밀로 해줘요. 나중에 말하게."
"알았다."
"그럼 찍었으니 저 이제 SM 소속인가요?"
"그런 셈이지."
수만옹은 내 인감이 찍힌 계약서를 보더니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도 애초에 SM 갈 생각을 50% 이상 하고 있었다. 내가 힘들 때 돈을 지원해준 쪽도 SM이었고 인생 상담해준 것도 대부분 SM이었고, SM과의 추억이 다른 기획사 소녀들에 비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수만옹의 말대로 진짜 가족같다는 분위기도 한몫했다. 소녀시대도 다 알고 지내고, 에프엑스도 마찬가지고, 샤이니도 그러하고, 슈퍼주니어 형들도 그렇고, 동방신기 형들도 그러했으니까.
"매니저는?"
"내일 이야기하자. 라디오 가야지?"
"아, 맞다. 깜빡했네. 그럼 내일 봐요, 수만형."
생각해보니 코어하고 YG와의 미팅 약속을 6시와 8시에 잡아놨던터라 지금이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시동을 걸은 뒤 각 회사 사장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박진영 사장님 죄송해요, SM과 계약하게 됐어요. 그래도 나중에 기회되면 같이 공동작업 해봐요.]
[양현석 사장님 죄송합니다. SM과 계약하게 되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YG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해보고 싶어요.]
비록 SM으로 가게 되었지만 다른 사장님들과도 친목을 쌓을 필요성이 있었다. 여기에 소속된 아티스트들과도 함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하고, 나중에 도움을 줄지도 모르는 중요한 인맥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한강에 있는 대교 위에서 서울의 야경을 감상했다. 서울의 야경은 언제나 찬란하고 눈부셨고 또한 어지러웠다. 빛과 그림자를 다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개소리도 이쯤 해야지. 어휴.
별 생각을 다 하면서 핸들을 돌리고 엑셀레이터를 밟으며 도착한 곳은 MBC 방송국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나는 습관처럼 라디오 진행을 하기 위해 MBC 출입증을 제시하고 방송국 엘레베이터를 탔다. 이 짓도 벌써 7개월 째인데, 세월 참 격세지감인 것을 느꼈다.
"저 왔어요."
"오오, 이틀 연속 정장이네. 오늘은 보이는 라디오인데 좀 튀겠다?"
"내가 튀어봤자지. 오늘은 게스트 누구 와요? 검색 좀 해야겠네. 게스트한테 미안하지 않도록."
나는 스마트패드를 가방에서 꺼내며 검색할 준비를 했다. 아직 삼십 분 정도 남았으니 검색해서 게스트의 정보를 대강이라도 알아내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서서 검색하다보면 다리가 아프니까 소파에 앉아서 검색하기로 했다. 식탁 위엔 간식이 올려져있었다.
"올, 왠 간식?"
"그거? 오늘 게스트가 걸그룹이라서 조공 온거야. 그거 먹어봐, 진짜 맛있어."
게스트가 걸그룹이라니. 제발 아는 걸그룹이 나오지 않기를 빌었다. 아는 걸그룹마다 나에 대해서 폭로를 하니까 남아날 내공이 없다. 이건 죽기 전 상다리 휘어지는 24첩 반상 같은 것인가. 그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일단 먹자고 생각한 나는 샌드위치를 집어서 입 안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피디누나가 말하는 걸그룹을 검색하기 위해서 스마트기기 바탕화면 속 네이버 어플을 눌러 나의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며 몸을 풀고 있었다.
"걸그룹 누군데요? 서포트 온 걸로 봐선 인기 괜찮은 것 같은데?"
"소녀시대."
"…케헥, 뭐라구요?"
입 안에 있던 계란, 베이컨, 식빵, 양상추, 양파 등등의 재료들이 바깥으로 뿜어질 뻔 했다. 뿜어졌다면 난 주최할 수 없는 쪽팔림에 넝쿨째 굴러온 등신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행히 사레 정도로 나의 당황함은 마무리 되었다.
"또 말해줘. 소녀시대라니깐?"
"…스탑, 그만."
나는 내공이 더 상할까 염려되어 피디누나에게 그러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일단 사레를 하느라 흘려버린 속재료들을 휴지로 닦아내고 샌드위치를 마저 베어먹었다. 소녀시대라면 너무 잘 알아서 검색하지 않기로 했다.
그 때였다. 또각또각, 거리는 일정한 열 여덟개의 구두굽소리가 내 귀에 또각또각, 담겨왔다.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오고있죠. 태연이 보이죠, 순규가 보이죠, 수연이 보이죠, 유리가 보이죠, 효연이 보이죠, 수영이 보이죠, 서현이 보이죠, 미영이 보이죠, 윤아가 보이죠.
"안녕하세요, 소녀시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싸! 오늘 청취율 대박나겠네!"
이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환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