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8화 (309/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삼백 한 번째 과외 - 강남 스타일 2

처음 봤을 때에 비해 화장이 옅어지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길어졌다지만 오혜린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볼살이 빠진 정도. 평범치 않은 외모를 보고 연예인 쪽이라고 대충 짚어보긴 했지만 진짜일 줄은 몰랐다. 더구나 애프터스쿨이라니. 오혜린이 레이나일줄이야. 나나 당신이나 둘 다 찔리는 것이 있고, 그 날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잠시 멈칫했다. 그 정적을 깨준건 애프터스쿨의 다른 멤버였다.

"어서오세요! 여기로 모실게요!"

말끝마다 사투리 욕망을 참을 수 없어서 가슴을 졸이는 목소리였다. 애프터스쿨의 리지라고 했나. 본명에서 성만 빼면 소녀시대 최수영과 똑같아서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헷갈리게 될지도 모르니깐. 레이나와 나와의 은밀한 추억을 모르는 리지에겐 나는 그저 손님이었다. 레이나도 다시 원래의 일을 하러 나와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리지가 이끈대로 한 자리에 앉았고, 다행히도 정상적인 외모와 정상적인 스타일링의 헤어 디자이너가 내 긴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대충 모발의 상태를 체크하는 듯 싶었다.

"머리 관리 잘 하셨네요. 어떻게 해드릴까요?"

"머리 이 만큼만 커트 해주시고 리젠트펌도 같이 해주세요. 그리고 염색도 블랙으로 해주세요."

"손님 같으신 경우에는 평범한 블랙보단 약간 카키색으로 투톤 염색해서 그라데이션 처리하는 스타일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괜찮다고 말하고 있지만, 결국 이 소리도 돈을 더 벌기 위한 수작에 불과했다. 지금 나에겐 돈이 문제시되진 않았다. 문제가 되는 건 단언하건대 촉박하게 나의 심장을 두들기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몇 시간 걸려요?"

"한 네 시간 정도?"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아슬하긴 하지만 늦은 것도 아니었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디자이너는 커트용 가위를 챙겼다. 그리고 분무기로 내 머리를 적시고 난 뒤에 사각사각 내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하염없이 가운 위로 떨어지는 내 머리카락을 보다가 다시 거울을 쳐다보았다. 

"근데요. 오늘 애프터스쿨이 일일 직원으로 일하는 건 단순히 이벤트에요? 아님, 방송이에요?"

"둘 다요. 저기 카메라 보이시죠?"

"아, 그러네."

손님인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손님을 위장한 카메라맨이었다. 멤버가 많은 만큼, 세 명 정도의 카메라맨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 왜 이렇게 레이나에게 시선이 가는거지. 나의 눈동자가 거울 속 레이나의 동선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레이나는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고 있다.

"커트는 끝났으니 염색부터 해드릴게요."

뒷목을 덮었던 치렁치렁한 머릿결이 미용가위에 의해 싹둑 잘려 꽤나 깔끔한 모습을 만들어냈다. 금발 머리를 카키색과 검은색으로 다시 염색이라, 탈색을 해야되서 모발이 많이 상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디자이너는 고무장갑을 손에 끼더니 염색약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붕붕드링크같은 영약을 제조하는 강철의 연금술사 같은 것은 아닐 것이라 믿었다. 참 신기한게 염색약들의 색깔은 똑같은데 나오는 색은 각기 다르다. 

머리에 염색약을 바르자, 헤어 왁스를 바른 것처럼 머리가 뒤로 넘겨졌다. 이렇게 올백한 모습을 보니, 올백도 나름대로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내가 자뻑을 하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았다. 

+

"레이나씨, 이 손님 샴푸 해드리세요."

"네."

레이나가 이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샴푸를 하러 레이나의 뒤를 따랐다. 보기보다 레이나는 키가 작아서 아담했다. 거기다가 양갈래 포니테일 머리라니. 귀여움이 정도 이상으로 터져보였다. 

"레이나, 아니 오혜린씨 그때 이후로 처음 뵙네요."

"네, 그때 이후에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어색하네요."

레이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도 멋쩍긴 매한가지. 이것도 인연인데 어디 가서 커피 한 잔 마실까, 라는 노래 가사처럼 갈 수 있을 리는 없겠지만. 오늘따라 왜 이렇게 레이나가 끌리는 지 모르겠다.

"여기 앉으세요."

레이나는 무표정이었다. 예전의 부비부비는 그저 서로 호감만 가지고 했던 춤에 불과했는데 내 속에서 끓어오르는 아쉬움의 근원은 대체 어딘지 모르겠다. 나는 레이나의 말대로 미용실 샴푸 의자에 앉아 목을 세면대 쪽으로 뻗었다. 레이나의 얼굴이 거꾸로 보였다. 작은 얼굴 안에 오밀조밀하게 눈, 코, 입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영롱하게 빛나는 입술이 유독 눈에 튀었다. 

"물 들어가요. 눈 감아주세요."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빛이 거둬지고 어둠만이 자리 잡은 곳에 검은 실루엣의 여자가 천천히 구두소리를 내며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 위엔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 같은 청량감이 느껴졌다. 뿌리를 훑고 다니는 물길에 여름 바다를 떠올렸다. 레이나의 손이 젖은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으며 샴푸를 부드럽게 발라 거품을 냈다. 그 순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얼굴을 덮고 있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손님 안 갑갑하세요?"

"네, 괜찮은데…저 얼굴에…"

"서비스에요. 사실 카메라맨 눈치본거에요."

얼굴을 덮었던 순두부같은 물컹한 느낌은 레이나의 쿠션같은 슴가였다니. 차분히 말하면서 의외로 음란하고 장난기있는 여자라는 것을 이 행동으로 단번에 파악했다. 딱 내 스타일이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레이나의 손길은 섬세했다. 머리 감기를 하면서 동시에 머리 안마까지 하다니. 쌓인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다 됐어요. 이제 머리 드시고 일어나세요."

레이나는 수건을 들고서 내 머리의 물기를 닦아냈다.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은게 몇 번 해본 솜씨로 보였다. 나는 덜 마른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나의 머리를 커트해주고 염색해주던 디자이너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앉았다.

"오, 색 잘나왔네요."

"카키색도 나름대로 어울리는구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자리잡은 카키 컬러의 브릿지가 의외로 어울리자, 나 또한 깜짝 놀랐다. 그냥 리젠트펌은 리젠트컷했으니까 왁스로 세워버릴까. 시간도 다 되는 것 같고.

"디자이너님."

"네?"

"펌은 나중에 할게요. 시간이 없어서요."

"네, 그러세요. 그럼 레이나씨 계산 도와주세요."

이 헤어디자이너님은 나와 레이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의 끈을 알고 있기라도 하나. 왜 이렇게 툭하면 레이나를 찾는지. 물론 나야 고맙지만 말이다. 내가 면접을 보러 간다고 하자, 헤어디자이너는 내 머리를 왁스로 알흠답게 세워주었다. 어쨌든 잘 세워진 머리로 계산을 하러 레이나가 있는 카운터로 걸어갔다.

"얼마죠?"

"염색이랑 커트까지 합쳐서 9만원이요."

역시 서울권에 있는 좀 큰 미용실이다 싶으면 컷트 하나 하는데도 비싸기 마련이다. 물론 염색까지 포함된 가격이긴 하지만. 

"혹시 전화번호라도 알 수 있을까요?"

"네?"

레이나는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날 쳐다보는게 꼭 소연누나를 연상시키게 했다. 농담식으로 던진 말이긴 했지만 왠지 레이나의 표정을 보니 걸려들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핸드폰까지 내밀었으니, 다음의 상황 선택은 레이나에게 달려있었다.

"여기서 본 것도 우연이 아니라 인연인데, 나중에 밥이나 같이 먹으려구요."

"…잠시만요."

아직 카드도 안 돌려주고, 손에 쥔 채 고민을 하는 레이나를 보니 귀여워보였다. 그냥 미팅만 끝나고 밥 사줄까. 맛있는 걸로. 나는 레이나의 손에 쥐어져있는 카드를 뺐다. 그러자 나에게 시선을 돌리는 레이나. 정신줄을 다시 잡았나보다.

"밥 먹었어요?"

"아니요, 아직."

"그럼 나랑 먹는걸로."

"…네?"

"왜요, 싫어요? 어차피 한 시간 안에는 다시 오니까 그때 같이 저녁 먹어요."

레이나는 싫지는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조용히 얼굴에 미소를 그리더니 양갈래머리를 퍼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카드를 지갑에 넣으며 괜찮은 기분으로 차에 탔다. 

+

낯설지도, 그렇다고 익숙하지도 않은 건물이었다. 어떻게 매번 봐도 이런 느낌이 드는지. 날로 성장하는 SM의 규모처럼 건물도 천천히 바뀌고 있었다. 이제는 SM 직원들도 날 가족이라고 생각하는지 내가 회사 안으로 들어와도 아무런 제재없이 그냥 패스시켰다. 나는 프론트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이수만 사장님께 김민식이 왔다고 말해주세요."

"네, 잠시만요…네, 프론트에 김민식씨 오셨다고 하는데요…네…네, 알겠습니다. 엘레베이터를 통해서 올라가세요. 그리고 여기 출입증이요."

"네."

나는 프론트 직원이 준 출입증을 목에 두르고 정장의 깃을 가다듬고 엘레베이터에 올라탔다. 늘 그렇듯 사장실은 항상 최정상층에 있다.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비서실을 지나서 사장실 문을 열었다. 수만옹이 업무를 보고 있는지, 게임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바빠보였다. 그리고 한 소녀가 사장실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수만형 안녕하세요."

"…수만형?"

고개를 돌린 소녀는 태연이었다. 평소엔 보지 못했던 정갈한 정장의 차림새와 비대칭으로 웨이브를 준 앞머리, 그리고 포니테일 금발머리가 괜찮아보였다. 태연이가 무슨 용건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일단 수만옹과의 일을 해결하는게 더 급했다.

"태연이랑 나란히 앉아."

"네."

수만옹의 말을 거절하지 않고, 나는 태연이 옆에 앉아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바른 자세로 수만옹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태연이나 나나 이런 분위기가 어색해서 쭈삣거렸다. 수만옹은 전화기를 누르며 뭐라 말하더니 자리에 앉았다.

"태연이 개인적인 일은 이미 끝났으니, 일단 민식이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네, 하세요."

"일단 너에게 지원해줬던 월 4000만원은 더 이상 안 해줘도 되겠지. 충분하잖아."

아무 일을 안 해도 알아서 굴러왔던 돈이 더는 지급 안 된다는게 아쉽긴 했지만, 이미 연가시처럼 수만옹, 즉 SM의 돈을 빨아먹었기 때문에 더 달라고 하면 민폐일 것 같은 느낌에 이쯤에서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는데, 마침 수만옹이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헐, 너 월 4000만원이나 받았었어? 라디오까지 하면서?"

"니네들한테 쓰는 돈은 라디오로 번 거거든. 저 월 4000만원씩 받은 건 나 집 사는데 쓸 거고. 네, 이의 없습니다. 그동안 도움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수만형."

"그래.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난 개인적으로 사내연애를 존중해. 예를 들면, 지금 태연이와 민식이가 사귀고 있는 것처럼 자칫하다 방심하면 터질 스캔들을 사내에서 알아서 조절할 수 있으니까. 만약 네가 다른 소속사를 가거나 아니면 소속사 없이 혼자 활동한다면 우리가 커버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으니까 어쩔 도리가 없어. 여기까진 이해했지?"

"네."

역시나 일을 할 때는 진중한 모습을 보이는 수만옹이었다. 나는 김치볶음밥을 잘 만드는 남자보다 일 할때는 냉정하고 시니컬하고 진지하고 무거운 모습을 보이는 남자가 좋더라. 

"되도록 계약할 거면 우리 회사랑 계약하는게 좋아. 일단 웬만한 우리 회사의 직원들이나 아티스트들이 너를 알고 친하게 지내잖아.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나는 니가 원하는 음악을 하게 해줄 수 있어. 물론, 연기나 예능까지도 네가 원하는 선에서 커버한다. 개인활동 수입, 그러니까 광고같은 건 순전히 네 수입이야. 우리가 가져가는 건 오로지 행사나 앨범이나 음원으로 나온 수입에서 5~70% 정도다. 알겠니?"

"네, 수만형 말씀 잘 알아요. 다만 여기에 계약하게 된다면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 있어? 말해봐. 수렴할 수 있는 선에선 수렴할게."

"음악을 제외한 활동은 계속 할게요. 다만, 음악을 포함한 활동은 2년 뒤에 할게요."

"이유라도 있어?"

"네, 두 놈은 군대 가 있고, 한 놈은 면제긴 한데 시골에 있거든요. 다행히도 한 놈은 SM에 남아있더라구요."

"밴드를 하겠단 말이구나. 솔로로 활동할 줄 알았더니 의외다."

수만옹은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인 미소를 봐서는 대체로 내 부탁을 수용해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수만옹은 자신이 손에 쥐고 있던 서류봉투를 내가 있는 쪽으로 내밀었다. 딱히 두둑하지 않은 느낌으로 봐선 간단한 계약서 몇 장 정도인 것 같았다.

"그건 우리 회사의 계약서랑 주의사항 그리고 우리랑 계약시에 주어지는 혜택이야. 잘 읽어보고 계약하기로 마음 먹게되면 다시 찾아와. 물론 문자나 전화는 줘야겠지? 꼭 SM이랑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은 가질 필요 없으니까 편하게 고민해."

"네, 편하게 고민하라는 거. 은근히 반어적인 표현이네요. 여튼 잘 알겠습니다."

"아, 아직 할 말 있어. 계속 앉아있어. 이번엔 민식이 뿐만 아니라 태연이도 관련된 일이니까. 둘을 같이 부른거야, 의견을 들어보려고."

멍하니 나만 슬쩍 쳐다보고 있던 태연이가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고개를 수만옹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만옹이 잠시 닫았던 입을 다시 열었다.

"태연이하고 민식이 영화 주연으로 출연해보는 건 어때. 크랭크인이 내년 1월로 잡혔어. 할 의사가 있다면 시나리오와 스크립트를 지금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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