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2화 (303/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아흔 다섯 번째 과외 - TROUBLE MAKER 1

"오늘은 인피니트의 엘씨랑 함께 해서 즐거웠습니다. 언제 또 뵐 수 있을까요?"

"고정으로만 섭외해주신다면 다음주에도 볼 수 있죠."

3부가 끝났다. 오늘의 라디오는 최근 상승주가를 달리고 있는 인피니트의 엘과 함께 한 코너였다. 내일이면 보나마나 박초롱을 또 보게 되겠지. 도대체 박초롱은 언제쯤이면 눈물을 머금고 탈락을 하게 될지. 벌써 10연승 째였다. 이러다가 디제이 자리 걸고 한바탕 퀴즈배틀을 벌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10주째 보다보니, 이제는 농담 삼아서 디제이 자리 걸고 퀴즈배틀을 벌이자고 하는 눈길을 보내던데, 그 눈빛이 마치 초원의 왕을 호시탐탐노리는 얄팍한 여우를 보는 듯 했다.

"엘씨, 오늘 진짜 재밌었어요. 친해지고 싶은데, 번호 알 수 있어요?"

"네, 그럼요! 핸드폰 주세요."

여자 번호가 아닌, 남자 번호를 따내는 건 참으로 오랜만에 생긴 일이었다. 나는 엘의 말에 망설임 없이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엘은 금방 번호를 눌렀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다은 누나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어서요."

"다은 누나가 누군데요?"

"매니저 누나요."

"다음에 만날 땐 술 한 잔 꺾어요!"

"네!"

나는 핸드폰에 적힌 엘의 번호를 금세 저장했다. 제 번호에요, 라는 간단한 단문으로 엘에게 답신을 보냈다. 엘은 '^^ 네' 라고 다시 내게 답신을 했다. 참 전송속도 기가 막히게 빠르네,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곧 4부를 진행해야 할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한숨을 쉬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2011년 8월, 여름이 던지는 열대야의 무더위는 모두의 등판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

오랜만에 찾아간 슴카데미(SM 아카데미)는 몇 주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기야 바뀌면 그게 더 이상하지. 

"…오빠!"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가벼운 나들이 차림의 현아가 활짝 웃으면서 나를 반겼다. 오늘 수업시간은 말이 수업이지, 무엇을 더 배우거나 그런 건 없었다. 다만 진영슨상이 SM 아카데미 실기대회에서 듀엣으로 연습시킨다고 우리에게 과제를 주었다. 노래 실력은 이제 큐리누나를 넘어선지 오래고, 지연이 정도의 보컬力을 노리고 있었다. 이제 또르르도 문제없이 부를 정도가 되었다. 보고있나, 박지연?

"현아야, 안녕. 오랜만이다?"

"…히히, 일본 활동 하느라 한국 올 틈이 없었어."

현아의 말을 듣고 포미닛도 일본 활동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근래 들어 일본을 노리고 해외활동을 하기 시작하는 한류 아이돌이 부쩍 늘었다. 주위에도 그렇다. 소녀시대하고 카라는 이미 일본에서 입지를 다졌고, 시크릿하고 티아라는 한류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아, 티아라는 진출했나?

"그래? 어때, 잘했어?"

"나름대로? 우리 데일리차트 20위 했다아!"

"진짜? 잘됐네. 으이구, 수고 했어."

"…히히."

현아는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강아지처럼 무지하게 좋아했다. 이런 아이가 무대 위로 올라가면 섹시퀸이라거나 패왕색 색기의 1인자라니, 그 현장을 목격한 적이 없는 나로서는 터무니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현아때문이 아니라 집안에서 눈에 띄는 츄리닝 바지를 입으니 현아가 생일선물로 사준 그 바지였다. 나름대로 디자인도 괜찮아서 계속 입고 있긴 했다.

"…어? 내가 선물한 바지다!"

"아, 맞다. 이거 니가 선물한 바지였지. 이거 집에서 맨날 입고 있어, 편하기도 하고 누구 올 때도 곤란하지 않은 디자인이라서."

"내가 이런 건 잘 선물한다니깐, 나 좀 쩔지?"

현아의 콧대가 아랍에미리트(UAE)의 수도인 두바이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를 연상케 할 정도로 끊임없이 높아지고 있었다. 구름에 나무막대를 꽂으면 솜사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허구성이 짙은 표현이지만. 현아가 자신 스스로에게 뻑하는 모습도 귀여웠다. 

"음, 오빠."

"어?"

현아는 연습실 안에 있는 넓직한 의자에 다시 앉았다. 작년에 자신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목도리와 털모자로 얼굴을 꽁꽁 싸맸던 현아의 모습이 생각났다. 나는 그 생각에 현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었다. 보조개를 보이며 씰룩거리는 것을 그만 두었을 때 현아가 내 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연습 끝나고 뭐할거야?"

"할 거 없는데? 아, 밤에 라디오 있다."

현아의 수수한 옷차림, 그리고 연하게 분칠해서 풋풋함을 돋보이게 한 것까지. 대충 그녀의 꿍꿍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근데 우선 듀엣 퍼포먼스 연습부터 해야하는 거 아닌가. 

"배고파?"

"응. 오빠도 배고프지."

"아직은, 우선 듀엣 공연 연습부터 해야지. 곡이 뭐라고? 춤도 있다면서."

"응. 트러블메이커, 라고 호랭이오빠가 연말에 활동할 곡으로 하나 줬어."

트러블 메이커라니 제목부터 뭔가 휘파람을 불고 선정적인 안무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쎄한데 말이다. 현아는 자신의 옆을 비우고 손바닥으로 그곳을 팡팡 쳐댔다. 여기에 앉으라는 소리였다. 나는 현아의 옆에 앉아서 현아의 이어폰 한쪽을 빼앗아 내 귀에 꽂았다. 현아는 그게 뭐가 좋다고 또 웃는지, 그러더니 자신의 스마트패드로 신사동호랭이 작곡가가 준 곡을 들려줬다.

'…오옷?'

은 개뿔, 신기하게도 나의 예측이 어느정도 맞아떨어졌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전주부터 휘파람 소리가 귓구멍 속으로 바람을 불듯이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그래도 요즘에 신사동호랭이 작곡가가 자기 곡을 복제하는 곡을 많이 쓰던데, 그나마 이건 복제하는 곡보단 나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부터 안무 짜자."

"…?"

"안무 짜자고."

무슨 안무를 짜자는건지. 현아는 나의 의구심을 전혀 풀 생각을 않고 있었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 전 자세를 잡는 것을 보니, 안무를 즉석에서 짜자면서 전에 생각한 건 있긴 있나보다.

"오빠, 아직 가이드밖에 안 했거든? 이거 컨셉이 혼성 듀엣 댄스곡인데 섹시함을 어필하는 컨셉으로 간데."

"…또? 거울아거울아도 그 컨셉이었고, 버블팝도 마찬가지잖아."

"…히이, 모르겠다."

현아는 자신의 위치에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 저런 현아의 표정을 보니까 현아도 섹시컨셉을 그리 원하지는 않는듯 보였다.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현아의 소속사 사장에게 '이러면 안 됩니다'라는 마음을 적절하게 순화해서 표현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면서 나는 현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래, 안무 짜자. 어떻게 하면 돼?"

"대충 짜보긴 했어. 우선 맨 처음엔 이렇게 해보려고."

현아는 휘파람과 숨소리가 연이어 이어진 부분에서 엄지와 검지를 딱딱거리며 손목을 흔들었다. 나는 현아의 가느다란 손목을 응시하면서 따라해보려고 노력했다. 현아는 내 춤을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거 말고, 이렇게."

현아는 자신이 나의 안무가라도 되는 것처럼 잘못된 자세를 고쳐주었다. 현아가 내 손목을 움켜쥔 채 자신의 힘으로 내 손목을 돌렸다. 한결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또한 묘한 느낌도 들었다. 

"아하, 이렇게?"

"…응."

나는 현아의 가르침을 곧잘 따라했다. 현아는 서로 거리를 둔 상태에서 춤을 추면 안 된다고 했다. 적정선에서 거리를 벌리고 춤을 춰야한다고. 나는 현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근데 무엇 때문인지 춤을 추면 출수록 무엇인가 현아랑 어색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멋쩍은 마음에 연습실 내에 있는 정수기를 찾았다. 

"…아, 밖에 있었지."

"바보 오빠."

현아는 이상해진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농담을 던졌다. 나는 이게 감히! 라고 주먹을 쥐는 시늉을 하며 현아의 농담을 받아쳤다. 다행히 약간은 풀어진듯 했다. 나는 연습실을 나가서 바로 앞에 보이는 정수기에서 물 한 잔을 먹고 다시 연습실로 들어갔다. 

"어차피 나머지 부분은 우리 소속사 연습실에서 더 자세히 배울거니까 냅두고 하이라이트 부분 안무, 패드에 저장해뒀으니까 그거나 연습하자."

"오키, 어떤 춤인데 일단 영상부터 보여줘봐."

"그럴까? 근데 좀 야릇하다?"

"…?"

현아는 의자 위에 올려둔 스마트패드를 집어서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동영상 어플을 터치하더니 안무실 거울이 보이는 이미지를 클릭했다. 지금까지 오디오로 들었던 것과 유사한 멜로디가 스마트패드의 내장스피커를 통해서 울려퍼졌다. 

[니가 나를 잊지 못하게 자꾸 니 앞에 서도 니 맘 자꾸 내가 흔들어 벗어날 수 없도로옥]

떨어져서 춤을 추다가 하이라이트 부분에 다다르자 클럽에서 부비부비 춤을 추듯이 약간의 공간만 남겨두고 달라붙은 채 안무를 하고 있었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허벅지, 그리고 엉덩이, 그리고 가슴 부근을 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다행히 영상 속의 여자는 현아가 아니었다. 그리고 여자 파트에서는 남자가 뒤로 돌아 등을 보이고 여자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마치 고양이처럼 표정을 지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괜시리 얼굴이 빨개졌다.

"…이 춤, 고치면 안 될까. 너무 어려운 것 같은데…?"

사실 춤이 너무 선정적이어서 피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이 들었다. 거기다가 제대로 묘사는 못했지만 '네 입술을 또 훔치고' 라는 부분에서 남자가 여자 손목을 잡은 채 얼굴을 여자의 팔결을 타고 올라가서 여자와 입술이 닿을 듯 말듯하는 장면에선 순간 움찔했다. 현아는 그 부분이 나오자 좋아했다. 왜 좋아하는 지는 모르지만.

"보기에만 어렵지, 해보면 안 어려워. 자 일어나서 연습해보자!"

"…아아."

현아는 하이라이트 부분의 준비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아직 음악이 나오지 않았지만 나에게 박자감각을 익혀주기 위해서 스타카토식으로 춤을 한 박자에 끊어서 가르쳐줬다. 나름대로 따라하긴 하는데 서투른 느낌이 스스로 들었다. 어려워서 그런건지, 아니면 난감해서 그런건지. 

"니…맘…자꾸…내가 흔들어…벗어날 수 없도록."

나는 현아가 가르쳐준 대로 현아의 뒤에 서서 춤을 추다가 현아가 말해준 부분에 현아의 손에 내 손을 얹힌 채 현아의 허벅지를 간접적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저 부분이 끝나자마자 현아는 다음 파트로 넘어갔고, 다음 파트는 내가 우려했던 퍼포먼스인 키스를 연상케 하는 그 춤이었다. 현아는 그 부분이 되자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더니 반대쪽에서 팔을 쭈욱 뻗었다. 

"…네 입술을 또…훔치고…멀리 달아나버려…"

축구선수가 찬 축구공이 허공을 날다가 골망을 가르는 것처럼 나는 천천히 현아의 팔 위에서 잔잔히 흐르는 현아의 숨결을 가르고 현아의 입술에 근접했다. 조금 느리게 노래를 읊조리면서 박자를 맞춘 채 추는 춤인터라 더욱 끈적해보였다. 

그 순간 현아와 나의 눈빛이 예리하게 서로를 가로지르며 얽혔다. 그리고 서로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어색함, 그 전조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은 채로. 초조한 눈빛으로 숨을 쉬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현아의 눈은 청아했다. 현아의 콧날은 귀여운 매력을 어필하기에 충분했으며 입술의 두께나 볼륨감 또한 훌륭했다. 

"…오빠?"

"…어?"

현아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현아의 말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현아의 근처에서 서성거렸던 나의 얼굴을 뒤로 떼버렸다. 현아의 얼굴과 내 얼굴이 복숭아처럼 수줍게 달아올랐다. 현아는 부끄러운지 긴 생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며 손부채질을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밥 먹을까? 근처에 내가 아는 카페 있거든."

"카페에서 밥 먹게?"

"양식으로 밥 채우지 뭐. 가자!"

현아는 의외로 영리한 소녀였다. 어색한 분위기를 금세 타파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나는 현아와 함께 조성했던 그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괜히 너스레를 떨고, 장난을 치면서 카페로 걸어갔다. 

어제처럼, 여름이 엎질러버린 열기는 여전히 대지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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