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9화 (300/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아흔 두 번째 과외 - Mr.Taeny 8

나의 생존을 이어가게 해주는 라디오 방송 따위가 운전교재와의 생이별의 슬픔에 못이겨 밖으로 밀려나갔다.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도 싹 달아나버리게 했다. 오로지 소녀시대 숙소라는 거대한 감옥 안 서현의 독방에서 쓸쓸히 묵혀있을 교재를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렇다고 해도 그곳으로 다시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미 서현과 태연과 기타 무리들에 이해 더럽혀질 그 책을 상상했다. 전혀 부럽지 않았다. 그냥 머릿속에서 그동안 외어두었던것만 다시 기억하기로 다짐했다. 차가 아닌 것은? 다음 중 도로주행법규가 아닌 것은? 내 교재의 위치는? 아, 망할. 

한 숨을 자지 못할 것 같았지만, 신기하게도 잠깐은 잤다. 그리고 이제 일상에 가까운 하이톤의 알람에 선잠에서 깼다. 14시간 자나, 14분을 자나 느끼는 거지만 두 선택 모두 엔딩은 피곤하다는 것이다. 찌뿌둥한 몸을 기지개 피며 욕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보이는 라디오가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꾸밀 필요가 없었다. 알 없는 큰 안경 하나와 현아가 선물해준 츄리닝 팬츠, 그리고 무난한 회색 반팔티를 입고 바깥을 나갔다. 

오토바이를 타면 춥지 않을까, 라고 스스로 걱정했지만 오늘은 6월인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열대야가 시작된다고 한단다. 올레, 어쩐지 걷는 지금도 땀방울이 프리즌 브레이크를 찍는 듯이 조금씩 노출되더라니. 대화할 누군가가 없으니, 대화할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오토바이의 질주하는 굉음만 들으며 방송국으로 향할 작정이었다. 오늘은 에이핑크 박초롱양이 7연승을 찍겠다고 작정한 날이었다. 7연승을 찍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노하우와 안무 연습 대신 공부만 했다가 오늘 안무실수로 연예면을 살짝 달군 날이기도 했다. 

잠에서 깨고 일어나니, 수신자 박초롱으로 <민식오빠, 어떡해요? ㅠㅠ 저 안무 틀렸어영 ㅠㅅㅠ>을 보내기도 했다. 이건 SNS로 올려서 팬의 위로나 받을 것이지, 왜 나한테 문자메세지로 귀찮게 보내는지. 오늘의 게스트는 누구라고 했지? 나는 방송국에 도착하고 나서야 게스트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 퀴즈 게스트는 아이유. 어때, 국민여동생이랑 같이 방송하니까 기분 좋아지지?>

수신자, 피디누나? 는 아니였다. 작가누나도 아니었고, 수신자의 정체는 정확히 끝자리가 0330인 것으로 봐서는 이지은이었다. 티비에서 보이는 이미지랑은 완전 딴판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지은이는 어느덧 스무 살을 6개월 가량 남기고 있었다. 아, 이지은 팬은 이지은이 이기길 바라겠네. 박초롱이 불쌍해서 어쩌나, 아직까진 이지은이 박초롱보단 팬 수가 몇 십 곱절 이상은 될텐데.

오토바이를 주차장 구석탱이에 버젓이 세워두고 사내 청원경찰과 간단히 목례를 하고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딱딱한 화살표 마크가 아래로 직강했다. 한없이 낙하하는 붉은 화살표를 바라보며 아무 생각도 안하고 있는 와중에방송국 밖에서 급히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오늘 수고했어요! 집은 민식오빠 오토바이 타고 갈게요!"

멀리서도 또렷하게 들려오는 개드립에 나의 고개는 훽하고 이지은으로 추정되는 생물이 있는 곳으로 돌려졌다. 역시나 이지은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지은스러운게 이지은이었다. 이제는 삼촌팬의 로망이자, 만인의 연인 혹은 국민 여동생이 된 지은이였다. 내게는 경계인물 후보 중 하나지만.

때마침 엘레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망설일 것도 없이 나는 엘레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집요하게 '닫기' 버튼을 눌렀다. 

"잠시만요!!"

지은의 다급한 목소리와 탭댄스를 하는 듯한 급하게 뛰는 소리가 귓구멍을 움켜쥐었다. 서로의 눈만 보일 정도로, 닫히기 전까지 미세한 틈만 남은 엘레베이터는 아쉽게도 서로의 몸이 보일 정도로 열리기 시작했다. 젠장, 지은의 눈빛이 가만 안 두겠다는 눈빛이었다. 

"오빠, 내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단 말이지? 흥!"

"…음, 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지은이 정확히 내 의도를 꿰뚫어보고있었으니까. 핑계를 둘러대지 않은 채, 조용히 엘레베이터의 휘황찬란한 문짝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지은이는 나의 목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올려다 본 건 아니고, 그냥 자신의 키에 맞춘 정면의 눈높이였다. 

"아, 맞다. 너 이번에 일본 진출한다며?"

"응, 내가 워낙 인기가 많아서 일본 유수의 기획사에서 러브콜이 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진출?"

"얘가 인기에 개념이 빠졌구나."

"히힛, 농담. 운 좋아서 활동할 수 있게 된거지, 오빠 일본어 잘해? 잘하면 나 좀 가르쳐주라아…"

일본어 못하고, 영어는 좀 하는데. 전에 도쿄가서 일본어 못해서 맛있게 엿을 잡순 걸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진작에 영어를 쓰면 가오도 살았는데.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지은의 등을 툭 밀었다. 지은이 균형을 잃을 뻔 했다. 

"…이씨, 오빠 맞을래!"

"아니?"

"…어?"

미, 미안. 할 줄 알았니, 나도 그동안 많이 변했어. 라고 하고 싶지만 현실은 불변의 상태였다. 다만 세 번의 스섹으로 인한 피곤함이 생겨 본의 아니게 몸 속에 잠재되어있던 시크한 모습이 드러났달까. 지금은 민시그 모드가 아니라 민시크 모드다. 만사가 귀찮았다. 

"오빠 안녕하세여."

"초롱이는 벌써 왔네, 이지은. 초롱이 좀 본받아라, 신인 때에 파릇한 마인드는 어디 가고 톱스타 좀 됐다고 느긋하게 사네."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눈빛으로 지은이는 날 노려보았다. 초롱이는 라디오 부스가 열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바르게 90도로 허리를 굽혀서 인사를 했다. 지은이도 처음 봤을 땐 저렇게 인사를 잘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뭐, 과거의 추억팔이 수준이랄까. 

어차피 퀴즈대결은 2부부터 시작이니, 스태프들과 간단하게 목례를 하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시작 5분 전, 이제는 긴장같은 느낌은 없었다. 디제이 4개월 차, 어쩌다보니 청취율 1위, 기획사는 없어서 출연료는 고스란히 내 통장에, 기분 좋다.

+

"역시 초롱양이 안무실수까지 하면서 공부한 보람이 있나봐요. 벌써 7연승 찍겠는데요?"

"…푸하핫, 초롱씨 왜 이렇게 잘해요?"

아일랜드의 수도가 '더블린' 이란 것을 맞추다니. 그 와중에 지은은 더블린을 안 찍고 고블린을 찍었다. 상황은 3:1, 초롱양이 한 문제만 더 맞히면 7연승이 확실시 되는 상황이고, 여기서 지은이가 한 문제를 더 맞춘다면 퀴즈대결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양상이었다. 

"저는 인지도를 더 높여야되여! 아이유씨처럼!"

"…!?"

초롱의 불타오르는 의지에 여유롭게 웃던 지은이는 깜짝 놀란 기색이었다. 마치 인지도가 별로 없었던 시절에 곰플레이어에서 음악방송을 열심히 했던 조증지은이가 떠올랐다. 

"GMC하세요. 그럼 아이유양처럼 뜰 수 있을 거에요."

"GMC요? 그게 뭐에요?"

"오빠 그러면 안 돼요, 그 나의 흑역사를!"

지은이 짧은 팔고 다리로 몸부림을 쳤지만 이미 친 드립이여서 소용이 없었다. GMC라고 말할 것 같으면 '아이디 루루님이 질문해주셨는데요, 머리에 꽂은 핀 먹을 수 있는거에요? 라고 해주셨네요. 네, 이거 마시멜로우 먹을 수 있는 거에요, 주희언니가 끝나면 이거 먹어요…앜…푸하하…푸훕…나 어떠케 눈물 나와…푸후훕…' 이라는 조증이유를 탄생시킨 유명한 인터넷방송이었다. 내 어찌 그걸 잊을 수 있으리오, 지은을 그 방송으로 처음 알았는데. 그것도 싸지방에서 말이다.

"다음 문제는 제가 내는 거 맞죠? 아이유양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하지 마시라고 특별문제 내드립니다."

"…에이, 디제이 오빠 그게 뭐에여! 저한테 불리하잖아여!"

초롱의 눈물나는 항의가 이어졌지만, 지은은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똥줄타는 서스펜스 예능이지. 설마 이걸 초롱이 맞추겠어? 하면서 일단 문제를 내보았다.

"아이유의 활동곡 순서는?"

"정답!"

"!?"

지은이가 바로 정답을 외치겠거니, 했는데 손을 들면서 정답을 외친 패널은 다름 아닌 초롱이었다. 설마 이거까지 공부한건가. 게스트는 미리 알려줘서 설마했는데. 

"잠깐, 이거 아까 초롱씨가 저한테 와서 물어보길래 말해준건데?!"

"히힛. 말할게여. 미아! 부! 마시멜로! 잔소리! 좋은날! 나만 몰라써떤 이야기!"

"…어엇. 정답."

"올레!"

이로써 초롱의 완벽한 승리. 지은이는 초롱의 7연승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초롱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만세를 외쳤다. 그 모습이 꽤나 코믹했다. 지은이는 웃는 얼굴로 박수를 찰지게 치면서 초롱의 7연승을 축하해주었다. 

+

"지은씨, 그리고 민식오빠 조심해서 가세여! 빠바이~"

"잘 가."

나는 초롱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지은이가 옆에서 나랑 발걸음을 맞추면서 걸어왔다. 슬쩍 바닥을 내려보는데 지은이의 발 사이즈가 꽤나 아담했다.   

"숙소는 거기 그대로?"

"아니, 우리 집으로 가야지. 이제 집에서 회사로 통근하는데."

"한강 근처였지?"

"응."

나는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면서 지은이에게 헬멧을 건네주었다. 지은은 헬멧을 거부했다. 

"왜 거부해."

"헬멧 쓰면 오빠의 포근한 등짝을 내 볼로 느낄 수가 없잖아."

"헬멧 안 쓰면 딱지 떼고 벌금 내야 돼. 얼른 써."

"…칫."

나도 지은이의 맨얼굴이 등짝에 닿는 것을 원했지만, 벌금을 내는 건 지극히 현실이었다. 특히 새벽에 딱지를 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도, 지은이도 헬멧을 쓴 채로 오토바이를 타야했다. 지은은 그대신 나를 뒤에서 꼭 껴안았다. 

"천천히 달릴까?"

"그럼 언제 도착하는데?"

"1시간 쯤?"

"…그럴까?"

지은이는 헬멧을 쓴 채로 빵긋 웃었다. 기분 좋은 느낌이 내게 전달되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와서 달리다가 올림픽대로를 천천히 가고 있을 때 지은이가 내게 물었다.

"오빠, 자작곡 있으면 하나 주면 안 돼?"

"자작곡? 앨범 언제 내는데?"

"몰라, 근데 자작곡 하나만 줘."

심심해서 그냥 멜로디만 딴 곡은 있는데, 나름대로 괜찮아서 누구 줄까, 고민도 했는데 마침 잘 됐다. 그걸 지은이한테 줘야지.

"알았어, 마침 곡이 있으니까 그거 너 줄게. 나중에 내가 녹음실 갈게."

"아싸, 되도록이면 빨리 와야 돼? 나 좀 있으면 일본 가니까."

"…서두르긴."

오랜만에 즐기는 건전하고 정신이 맑아지는 지은이와의 올림픽 대로 위 오토바이 데이트는 꽤나 성공리에 마친 듯 했다. 아, 이제 문제는 면허시험이다. 

+

"…결국 이틀동안 기출문제 하나도 못 봤다. 씨바, 내가 왜 바보같이 두고 갔을까!"

주위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발의 청년이 운전면허학원에서 벽에다 머리를 박으며 신세한탄을 하니 그럴만도 했다, 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 웅성대는 소리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저 멀리서 꽤나 무장을 했지만 역시 여름이라서 한계치가 돋보이는 두 짜리몽땅 소녀들이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었다.

"시험 잘 봐!"

"시험 잘 보면 내가 상 줄게!"

두 짜리몽땅의 정체는 뻔했다. 검은 머리의 황미영과 갈색 머리의 김태연. 두 소녀의 손에는 엿과 초콜릿이 들려있었다. 향토적인 웃음소리를 스킬로 삼는 태연이는 우리나라의 찰진 엿을 준비했고, 아메리칸에서 온 미영이는 역시 미국의 정서에 맞게 초콜릿을 준비했다. 

"누가 보면 4수하고 수능 보는 줄 알겠네. 근데 왜 응원 왔어. 주위에서 막 뭐라고 하면서 웅성거릴텐데."

"상관없어, 그럴 줄 알고 이렇게 카메라 들고 왔지."

과연, 한 치의 실수도 없는 소녀시대 아해들이었다. 미영이의 손에는 조그만한 캠코더가 들려있었다. 여기 왜 왔냐고 물어본다면, 태연과 미영이가 셀프카메라 찍는 다고 둘러대면 될 터. 역시 데뷔 5년차의 위엄은 멋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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