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1화 (292/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여든 네 번째 과외하기 - THE BOYS 完

여배우는 텔레비전으로만 봤지, 실제로 보는 경험은 한 번도 없었다. 용화와 신혜양이 어떤 관계일 지 조심스레 추측하기 보단 용화의 필모그래피를 머릿 속으로 뒤적거려보았다. 영국드라마 '셜록' 식으로 생각하진 않더라도 용화가 찍은 드라마가 '미남이시네요' 였고, 그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박신혜라는 것을 깨달았다.

"용화랑 미남이시네요, 찍으셨죠?"

"네. 잘 아시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티비 잘 안 보긴 하는데, 친한 친구 애들 방송한 건 줄줄이 꿰고 있어요."

그녀는 그렇구나, 라고 말하며 자신의 머리카락의 일부를 귀 뒤로 넘겼다. 그녀는 알게 모르게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혹시나 안 좋게 생각하던 그런 장면이 연출될까 염려되었던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하필이면 많고 많은 기장 중에 무릎따윈 가볍게 노출하는 기장이란 말인가. 

"어, 신혜야, 여기 와서 앉아."

신혜양이 앉은 곳은 하필이면 용화의 옆, 그리고 내 옆이었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용화와 나 사이다. 미리 사전에 예약을 했는 지 테이블하고 의자의 구조가 빙 둘러앉는 커다란 원탁형 모양이었다. 

"용화하고 권이, 더 올 사람 있어?"

"더 오긴 오는데 연락이 없네. 가까워지면 연락한다고 했으니까 그 때 다시 말해줄게."

내 앞으로 권이, 왼쪽으로 45도 각도에 용화, 나와 용화 사이에 신혜양, 그리고 나. 분명히 세 명만 있을 때는 어색한 분위기 따위가 감도는 자체가 사치였는데, 지금은 사치가 아니었다. 편하게 맥주도 마시지 못하고 눈알만 굴리며 서로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막상 신혜 부르니까 어색한 분위기 뭐야? 신혜 서운해 하겠다."

"여배우를 사석에서 보는건 처음이라서."

멋쩍은 나는 맥주병을 집고 벌컥 들이마셨다. 부디 맥주가 어색한 분위기를 가라 앉혀주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띄어 올렸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용화와 권이는 어서 말을 걸라며 탁자 밑에서 내 발을 툭툭 치고 있었다. 

"여배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얘네들은 저 여배우라고 생각 안 하는데."

"에이, 신혜씨는 누가 봐도 여배우상인데 쟤네들이 여배우라고 왜 생각 안 하겠어요. 그냥 장난치는 거죠."

대화를 한 마디 더 나누고 다시 이야기가 끊겼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네 명이 동시에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타이밍 기막히네."

용화가 맥주가 묻은 입술을 자기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말했다. 나머지 세 명(나 포함)도 용화의 말에 공감을 하며 조금 더 웃었다. 그래, 이런 타이밍을 노리자.

"신혜씨."

"네, 민식씨."

"요즘 안 바빠요? 이렇게 새벽에 나오는 걸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한데요?"

일단 동갑이라거나 빠른 연년생인 경우는 깝치면서 친해지는 게 좋다. 근거없는 이야기고, 나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니까 다른 사람들은 따라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행동이다. 역시나 한 번 입으로 깝을 나불대기 시작하니까 신혜양의 눈빛이 찌릿찌릿, 심장은 비릿비릿한 것처럼 보였다. 정말 친한 사이였으면 용화와 권이에게 말로만 한 술병의 탄성력 실험의 포문을 내가 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민식씨는 외모는 별로 말 안 할 것 같이 생겼는데 은근히 말 많이 하시네요."

"네, 현직이 라디오 디제인데요. 말 안 하면 바로 방송사고에요. 그것도 디제이가. 아, 것보다 나중에 시간 되시면 홍보차라거나, 아니면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저희 라디오에 출연하실래요?"

혀에서 와이파이 두 칸 정도가 터진 듯 했다. 풀이었으면 정신없이 드립 쳤을 텐데, 그나마 와이파이 신호가 양호여서 다행이었다. 신혜양은 라디오스러운 나의 제안에 그저 입을 가린 채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라디오에 갈테니까 저희 소속사랑 계약 하실래요?"

"…예, 아니 예?"

하마터면 그녀의 계략에 말려 들 뻔 했다. 라디오 섭외를 하려다가 오히려 배우 기획사에 스카우트 당할 뻔 했달까. 물론 선의의 거짓말이긴 했지만 역시 배우라는 패시브 버프를 받고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제안이 꽤나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히히, 농담이에요. 근데 진짜 관심 있으면 말해요, 사장님한테 말해볼게요. 사장님이 요즘 신인 연기자 구하시거든요. 특히 남자 신인 배우요. 그래서 요즘 대학로 돌아다니시면서 많이 물색하시고 그래요."

더욱이 놀라웠던건 단지 관심을 유발하기 위한 일회성의 제안이 아닌, 지독하게 현실감 있었던 말이란 것이다. 그렇게 낯선 신혜양에게 신명나게 농간 따위나 당하고 있을 동안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권이를 목격했다. 바쁘게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을 봐선 곧 퍼브에 누군가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암시해주는 뻔한 복선이기도 했다. 

"권아, 뭐해?"

"아, 이 근처에 왔다고 해서."

역시나 내 예감이 맞았다. 요즘따라 예감이 하나같이 틀리는 일이 없다. 근래 들어 틀린 경험이라곤, 수연이의 '순서' 드립 정도랄까. 그건 진짜 예상 못한 드립이었다. 수연이는 파헤치면 파헤칠 수록 신기한 여자다. 연구할(?) 가치가 있겠어. 

"내가 내려갈까?"

"아니, 넌 여기 있어. 어차피 남자들 부른건데."

"그래?"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내심 아쉬운 면도 있었다. 남자의 본능인지는 모르겠는데, 남자 인맥이 늘어나는 것보다 여자 인맥이 늘어나는 게 더 기분 좋다. 허구한 날 할 때마다 남자인맥을 늘려야겠다고 후회하면서도 이러는 건 병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난 병에 안 걸렸으므로 패스.

"내려가서 데리고 올게."

"응, 잘 갔다와."

"그러고보니, 민식이 너는 기획사 안 들어가냐?"

권이는 친구를 데리고 오기 위해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갔다. 계단과 부딪히는 그의 굽소리가 내 귀에 담겼다. 권이가 내려가자마자 이윽고 용화가 내게 기획사와 계약을 안 하냐며 물어보았다. 용화의 말을 듣고보니, 신기하게도 내가 기획사 없이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스케쥴이 라디오 밖에 없어서 조율이 편하지만, 혹시라도 더 늘어난다면 내 선에선 도저히 감당할 수도 없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게. 아직 접촉한 기획사가 없어서."

"아직 갓 데뷔한 신인이라서 그래. 그리고 너 지금 라디오에만 있잖아. TV쪽으로 나오고 싶으면 웬만해선 기획사 필요해. 혼자서는 나오기 힘들거다. 뭐, 티비에서 연예인 인맥 부르고 초대하는 것도 미리 사전에 계획 하에 하는 거야."

용화의 말을 들으니까, 내 귀가 약간은 얇아서 그런지 기획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수만옹이랑 친한데, 내가 연예계 활동 잘 할 수 있게 나 좀 구속(?)해주세요. 라고 생각해보았지만, 여러모로 도움 받는다고 이것까지 도움받으면 조금 민폐일 것 같았다. 

"흠, 기획사가 필요하긴 하구나."

"그래. 너 기타 실력도 있고, 보컬은 연습하면 되고, 그러니까 우리 회사 올래? 우리 회사 진짜 좋아. 우리 얼굴 봐봐, 화색이 돌잖아."

아마도 이 곳은 생일파티를 빙자한 면접고사장이 아닐까 싶었다. 신혜양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스카우트 하려는 것으로도 모자라 용화까지 이러면 난 정말로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단 말이다. 어디보자, 용화가 F&C 뮤직이었나? 씨엔블루랑 FTISLAND가 있는 기획사였지. 흠, 그러고보니 홍기가 안 왔네.

"홍기 안 불렀네?"

"홍기는 알잖아. 이곳은 새로운 만남의 장이지, 알던 사람 또 만나는 화개장터가 아니다, 이 친구야. 그럼 신혜 돌려보내고 홍기 불러?"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짜식, 신혜 내심 돌려보내기엔 아쉬운가 보네?"

순간 용화를 보고 '넌 어떻게 생각이 그것밖에 안 되냐'라고 할 뻔 했지만, 턱끝에서 간신히 막았다. 이럴 때는 그냥 멋쩍은 웃음이 최고야. 내가 웃자, 다들 따라 웃었다. 억지로 화기애애한 무드를 겨우 만들고 있을 때, 여러 명의 구두굽소리가 들렸다. 

"민식아, 인사해."

"어? 어. 안녕하세요. 김민식이라고 합니다. 늦었는데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용화가 드라마로 친해진 사람을 불렀다면, 권이는 소속사 식구들을 불렀다. JYP를 대표하는 보이그룹인 2AM, 2PM의 창민과 택연이었다. 내심 잘 된 일이라고 판단했다. 용화가 술자리에서 워낙 씨엔블루 멤버들을 많이 불러서 씨엔블루 아이들과는 전체적으로 말을 텄는데, 권이 쪽은 그렇지 않았다. 권이네 소속사에서 친한 사람이라곤 권이가 전부다. 

"택연입니다. 제가 88년생이라서 그러는데, 말 놓아도 될까요? 저는 말 놓고 이야기 하는 게 편해서요. 부담 되시면 계속 존댓말 쓰구요."

"아니요, 제가 89년생인데 말 놓으셔도 되요. 택연형이 편하면 그걸로 됬죠. 창민형도 말 놓으세요."

"그럴까?"

"대한민국의 보기 드문 쿨한 청년이네."

"그만 띄워주고, 여기 앉으세요. 이제 올 사람 다 왔으니 달려야죠?"

술 마시러 온 사람들에게 서론은 의미없는 짓이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서 판가름을 내야지. 그러고보니, 신혜양과 택연형과 창민형은 서로 인사 안 한 것 같은데. 

"것보다, 택연형이랑 창민형이랑 말 놓으면서 왜 신혜랑은 말 안 놔?"

"신혜양이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섭섭하네, 난 안 불편한데. 그럼 놓아요. 저 빠른 90년생인데 딱히 오빠라고 안 불러도 되죠."

속으론 90년생이면 당연히 오빠라고 불러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수영이가 마찬가지로 빠른 90년생이면서 말과 정신줄까지 놓는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애교로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르지마, 근데 말 놓아도 되는데 정신줄은 놓지마?"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아는 빠른 90 애들 중에 정줄까지 놓은 애가 있거든. 언제 한 번 몽마르뜨 언덕 위의 하얀 집에 데려가야 하는 데."

는 최수영이라는 것은 죽어도 말 못한다. 만약의 일이라도 최수영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난 170cm의 키 큰 여자에게 각목을 부르는 애교를 듣는 게 아니라, 진짜 각목으로 맞을 지도 모르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소녀시대는 그럴 일 없다고? 소녀시대라서 그럴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그룹인만큼 모든 성향이 최고이니까 말이다. 심지어 폭력성조차도. 나중에 X-FILE 같은 거 하나 몰래 만들어서 소녀시대의 진실에 대해 확실히 퍼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폭로의 첫 타겟은 강심장이다. 근데, 출연 제의가 안 들어오잖아? 아마 안 될거야….

"것보다 생일이라고 들어서 케이크 준비했는데."

택연형이 생과일이 올려진 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서있었다. 도대체 언제 준비한거야. 이 형 은근히 빠르네. 촛불이 에어컨 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추고 있었다. 권이는 장난 좀 치려는 듯 어느샌가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거짓말을 치려는 조짐이었다. 

"형, 케이크 왜 준비했어. 뒷북 돋네. 민식이 생일 지났어. 생일이었으면 진작에 용화랑 내가 준비했지."

"응!? 엥!?"

외모에 맞지 않게 헐랭한 택연형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 겉으로 비춰진 건 다 이미지에 불과했어. 안티팬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이미지. 그 편견의 벽에 둘러쌓여 사람을 이상하게 보았는데, 역시 사람은 직접 봐야 제 맛이었다. 이제 새롭게 정의 내려야지. 옥택연, 헐랭하고 빙구같은 모습 보이는 재밌는 형. 창민형은 뭐, 예전부터 착하다고 들었으니까 딱히 개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푸훕, 괜찮아요, 형. 생일 지난 지 딱 4시간 되었으니까 불어도 그리 뒷북은 아닐거에요."

"그래, 그럼 우리가 노래 부를 테니까 불어?"

퍼브 안에서는 그윽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들이 오그라들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노래가 끝나자 경기장을 방불케하는 환호소리와 함께 춤을 추던 촛불이 내 입김에 꺼졌다. 

"뒷북이지만 생일 축하한다!"

"생일 축하해, 민식아. 여기 선물!"

"오늘 처음 봐서 준비는 못 했지만 축하해, 민식아~"

"아, 오늘 좋은 동생 하나 생긴 것 같아서 기분 좋다, 그치 창민형."

"응, 나도."

아, 행복하다. 난 진짜 행복한 사람이다. 밤에 고생하는 것만 빼면 나처럼 행복한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싶다. 

- THE BOYS 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