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여든 세 번째 과외 - The boys 3
"진짜요? 진짜 믿어도 되는 거에요?"
"네, 못 믿겠으면 밴 왔을 때 확인해보세요."
이게 바로 갑자기 찾아온 행운인가 보다. 내 지갑에서 빠져나갈 택시비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상상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악어의 눈물 따윈 흘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도 아직 김칫국물을 시원하게 마시고 있다는 생각은 쉽게 접을 수가 없었다.
"어? 우리 밴 온다."
초롱양의 말대로 삐!까!번!쩍!한 검정색 밴이 이쪽으로 시원하게 오고 있었다. 그 밴은 내게 검은 날개를 단 대천사처럼 보였다. 속으로는 양념 반 후라이드 반 대신 기대 순도 100%의 마인드로 초롱양의 이름보다 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밴을 열렬히 쳐다보았다.
'태워주겠지. 태워줄거야. 태워줄테지.'
"이 분이야?"
"네, 오빠. 새벽 두 시라서 차 끊겼을텐데 우리가 도와줘요."
"…에휴, 알았다. 민식씨도 타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 같아선 무릎을 꿇고 구원자의 모습에 가까운 에이핑크 매니저에게 큰절을 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구과학적으로 따지고 들어간다면 이 주차장은 기온 역전 현상의 구조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손과 무릎에 동상을 얻기 싫은 나는 하는 수 없이 나의 기쁜 마음을 양껏 감춘 채 에이핑크의 밴에 올라탔다.
"오, 2012년형 차량인가. 착석한 느낌이 새끈하네."
"네?"
이건 뭐지. 생각으로 말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말하고 있었다니.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그것도 이제 두 번째 보는 초롱양 앞에서나, 이제 초면인 에이핑크 매니저에게 이런 새끈하고 불타오르는 개드립이라니. 정말 화끈한 새벽이야.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런 말 하니까 더 오해되는데…"
"것보다 민식씨는 목적지가 어디에요?"
"정글피쉬 퍼브요."
화끈한 드립에 이어서 목적지가 행당동에 있는 마이 스위트 홈도 아니고, 이상한 감이 드는 선술집이었기에 초롱양의 눈빛과 매니저의 눈초리는 더욱 더 매서워졌다. 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어? 정글피쉬 퍼브? 홍대 쪽에 있는 거요? 우리 숙소 근처다!"
"에이, 초롱아. 근처는 아니다. 행정구역이 같을 뿐이지."
"…히히, 그런가?"
이 여자 연예인도 약간 허당기가 있는 듯 보였다. 아니면, 4차원기라던가. 조만간 그 4차원스러움으로 누군가를 엿먹일 것 같다는 아주 좋은 조짐이 보인다. 물론 그 대상이 나는 아닐테니, 참 다행이었다.
이런 묘사 매번 하기도 미안하지만, 새벽의 도로는 내 답답한 마음과는 정반대의 상태였다. 눈부신 조명을 달고 도로를 내달리는 차는 에이핑크의 밴 이외에 몇 대 빼고는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가끔 오토바이를 타고 새벽의 질주를 하긴 하는데, 그 때마다 경찰이 의심스럽게 쳐다봐서 애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젠장, 시원한 도로를 보다가 소싯적 안 좋은 기억을 꺼내버리다니. 이런 몹쓸 기억의 파편 부셔버려야지.
"어? 또 얼굴 빨개지셨어요."
"네?"
"전에는 몰랐는데, 민식씨 얼굴 자주 빨개지시는 성격이신가봐요. 귀엽다."
오해는 오해를 낳는다. 이것이 바로 그 관용어의 실용성을 확인시켜주는 모습이었다. 과거의 경찰이 날 폭주족이라고 생각한 오해가 지금 그것 때문에 얼굴 빨개지는 게 성격 탓으로 돌려지는 오해를 낳게 되었으니까. 아, 이것 참 신나네. 오늘도 운지를 외쳐볼까? 초롱양 앞에서 운지 참 많이 속으로 외친다. 운!지!
"어? 민식씨 밖에 봐요."
"네? 뭐가 보이는데요."
"한강 건너고 있잖아요. 이렇게 검은 한강은 오랜만에 본다."
뭔 소리고, 서울은 야경도시(정부의 간섭이 소극적인 국가, 라는 뜻은 아님)로 유명한 세계도시중 하나인데. 꺼지지 않는 도시 앞에서 한강이 그렇게 어두울 리가…있다? 초롱양의 말대로 바깥을 뚫어져라 쳐다보니, 어둠을 잡아먹은 한강의 웅장한 모습이 펼쳐졌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강인 나일강이라거나 아마존 강의 스케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남한에서 제일 폭도 넓직하고 길이도 최고로 긴 강이니까 새삼스럽게 떨리는 맘도 들었다.
"아, 한강 지나가네."
"마포대교 건넜으니까요. 처음엔 퍼브 어떻게 갈까, 라고 막막하긴 했는데 정말 이렇게 도움을 줘서 감사합니다. 이걸 어떻게 보답해야할 지."
"하하, 그건 우리 초롱이 방송할 때 잘 돌보고 도와주면 그걸로 쌤쌤 칠게요."
"…네? 아, 예. 그래야죠."
라고 말하긴 했지만, 초롱양이 데뷔한 달이랑 내가 라디오 시작한 달이랑 누누이 말하지만 겨우 한 달 남짓 차이가 나는데 누굴 누가 돌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뭐, 다음주에도 라디오에 초롱양이 나오니까 잘해달라는 것 같은데, 이렇게 도와줬으니 물심양면에서 '심'쪽으로 열심히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셈에서 민식씨하고 저 자주 볼 것 같은데 말 놓아요. 전 91년생이에요. 민식씨는요?"
"저요? 89년생이요."
"헐, 근데 왤케 동안이에여?"
또 나왔다. 흥분하면 발음이 벅학박사스러워지는 발붕(발음붕괴) 초롱양의 모습이, 내심 나보다 어리면 덜 멘탈붕괴도 되고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나보다 두 살 어린 처자였다. 근데 거의 플러스마이너스 5살 차이의 연상 연하랑은 말 놓으면 살짝 불안한 감이 있는 건 왜일까. 마이너스 5살 차이는 94년생 때문에 그러했고, 플러스 5살 차이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참값의 범위를 고려해서 그렇게 설정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유식해보이나?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람들은 디씨 전 사장 김유식만 생각하겠지. 이것이 현실이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어, 이야기 별로 안 했는데 벌써 도착했네."
"벌써라니? 오래 걸린 것 같았는데."
나와 매니저의 시각차는 약간 다르게 보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난 초롱(이제 말 깠으니 양은 안 붙인다)이와 지겹게 입에서 단내나도록 말을 했고, 매니저는 손에 땀내 나도록 운전만 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라고 생각했다. 오토바이 외에는 다른 것을 운전하는 건 레이시티처럼 스릴 넘치지 않으면 정말 재미없고 지겨우니까 말이다. 근데 그것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이 거의 모든 국민들이 소지하다시피 하고, 나도 내 투아렉을 운전하긴 위해선 따야하고 말이다.
"진짜 감사했어요. 초롱이도 집에 잘 들어가고, 매니저님도 건강 조심하세요."
"오빠 잘 가여. 바이~"
"조심해요. 술 적당히 마시고."
"네, 그럴게요. 그럼."
계속 감사한 두 사람에게 연신 인사를 하고는 밴이 떠나고 나서야 그토록 가고자 했던 '정글피쉬 퍼브'에 들어갈 수있었다. 역시 퍼브라는 게 영국식 카페라는 뜻이라서 그런지, 영국풍 분위기가 많이 났다. 아, 언제 시간 되면 런던 한 번 가서 견문 좀 쌓아야 할 텐데. 내년에 올림픽 시즌에 맞춰서 경기 구경도 할 겸, 한 번 가볼까. 벽돌에 둘러쌓인 계단을 올라가자 익숙한 두 실루엣이 보였다.
"이 새끼들. 오늘 죽었어!"
"야, 우리 둘만 있는 거 아냐. 곧 몇 명 더 오니까 흥분하지말고 마시기나 해."
나는 두 실루엣을 보자마자 바스커빌가의 개새끼처럼 빨간 눈(상상)으로 권이와 용화를 두들겨패줘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돌진했으나 용화는 나를 말리고는 술잔을 내밀었다. 누리끼리한 색깔과 거품 올라오는 것을 봐선 맥주인 것 확실한데, 이 녀석들이 맥주만 마시게 할 작자는 아닐테고 푸른 병이 보이는 것을 보니 일단 준비주(酒)로 소맥을 먹이려는 속셈이었다.
"시작부터 소맥이라니."
"왜? 소맥이 두려워? 어머, 민식이가 이렇게 술에 약했나."
"아, 권이야. 넌 깝치는 건 일주일이나 지금이나 변함없구나. 나도 변함없이 술에 센 모습을 보여주지."
라고 말하면서, 각 잔에 따르고 남은 맥주에 소주를 어느정도 붓고 맥주병을 들이켰다. 용화와 권이는 놀란 모습으로 날 말렸지만, 난 원샷에 그것들을 다 마셔버렸다.
"크으, 안주. 안주."
"야, 시작부터 그러면 어떡해? 우리 둘만 니 생일 파티 축하하는 게 아니라니까."
"걱정마. 나 이 정도 가지고 안 취해."
"마, 꼭 그러는 새끼들이 드라마 보면 아주 잘 취하더라."
"마, 그건 금마들이 연기하는 거고, 이건 현실이잖아?"
이 정도 가지고 술에 져버린다면 '김민식'이라는 주당의 이름을 걸고 먹칠을 하는 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네들도 여러 번 내가 술을 이기는 모습을 지켜보고 박수까지 쳤으면서 뭔 걱정이야. 나란 남자, 소시 술에 다 뻗을 때 혼자 안 취해서 소녀시대 아해들을 '소심한 나'에 나오는 현수처럼 일일히 제 자리로 돌려놓는 사필귀정 스킬을 시전했고, 사필귀정 스킬을 시전한 건 소녀시대 애들 뿐만 아니라 티아라 아해들한테도, 카라 아해들한테도 두루 사용했는데. 심지어는 권이, 용화에게도 사필귀정 스킬을 시전한 기억이 났다.
그 때 살짝 취했었지만, 애들 옮기느라 술이 깨버린 경험도 더러 있었다. 덕분에 술 때문에 난 흥도 깬 적도 많았다.
"근데 그 온다는 사람들이 누구야?"
"아, 우리가 다방면으로 부르긴 했는데 좀 많아. 너 연예인 인맥, 여자 말고도 남자도 많아지는 게 많이 도움 될 거야. 진짜로. 그래야 나중에 덜 힘들어져."
"올. 나를 위해서 도와주는 거야?"
"그런 셈도 있고, 특히 연예인 인맥 없어서 불쌍하다는 연민이 더 크게 작용했지."
아, 이 녀석은 내가 아는 인맥이 지네 둘 그룹하고, 설리하고, 티아라 몇 명하고, 아이유가 다라고 생각하나보다. 사실, 수만옹도 내 소울 프렌드고, 소녀시대를 비롯하여 네임드 걸그룹이 다 내 인맥인 걸 잘 모르나보지. 근데 생각해보니, 그것만으로 충분히 많지 않나? 라고 생각했지만, '배우' 인맥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배우 인맥 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내심 하긴 했다.
"거의 왔다고? 알았어."
"왜, 네 여친이야?"
"아니거든?"
용화는 여자에 빙의한 마냥 나를 매섭게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난 순간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 멋쩍어졌지만, 그런 실수를 했을 리가 없었다. 아, 내가 소녀들한테 저런 눈빛으로 너무 시달려서 그런가. 저 눈빛으로만 쳐다보면 나란 남자가 그냥 연약한 똥강아지로 전락해버리네.
"니가 데리고 와."
"왜?"
"네 생일이잖아. 지금 오는 연예인들 한 명 한 명이 너의 미래의 선물(인맥)이야."
나는 하는 수 없이 소맥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구취제를 입 안에다 분사시키고 나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남자인가 싶었지만 첫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은 의외로 여자였다.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본듯한 얼굴. 딱 목 중간까지 내려오는 머리에 귀엽고도 청초한 마스크.
"박신혜씨?"
"네, 안녕하세요. 그 쪽은 민식씨 맞으시죠? 용화가 이야기해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