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여든 한 번째 과외 - The Boys 1
시계침이 12라는 숫자를 콕콕 찌르려고 안달이었다. 수연이가 너무 심하게 안전운전 하는 바람에 나는 안전하게 방송에 임하기는 힘들 것처럼 보였다. 벌써 카톡으로 태산만큼 언제 오냐는 피디누나의 독촉이 쏟아졌다. 생일이라서 기분 좋았는데 뒷맛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엘레베이터를 누르고, 엘레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촉박하긴 했지만 괜히 빨리 간답시고 계단을 오르다가 오히려 역관광만 당하는 게 대다수다.
"시간 늦었다! 신인인데 자칫하다가 찍힐 수도 있으니까 빨리 뛰어가!"
"네! 매니저오빠. 끝날 때 쯤에 와줘요!"
다급한 구두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들려왔다. 옆을 돌아보니 한쪽 머리는 어깨 앞으로 내놓고, 한 쪽 머리는 귀 뒤로 넘겨놓은 헤어스타일의 소녀가 뛰어오고 있었다. 저 헤어스타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억울하게 이쁜 얼굴을 며칠 전에 확실히 본 적이 있었다.
"민식씨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그녀의 인사를 받기는 하고 있었지만, 이미 머릿 속으로는 그녀가 누군지에 대해 열심히 추측 중이었다. 기억을 되살려보자. 엘레베이터는 6층에서 1층으로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청원군 부광리에서 태어난 따뜻한 시골 여자, 따시녀 박초롱입니다."
"오, 청원군이요?"
"청원에서 태어나셨어요?"
"아니요, 부산이요. 라디오를 하다보니 거의 자동으로 리액션을 하다시피 해서…초롱양에겐 죄송하게 됬네요."
아, 생각났다.
+
"박초롱?"
"…네?"
"아, 아니에요."
순간 부끄러워졌었다. 하지만 이 뻘줌함도 시간이 지나가면 약이 될 것이다. 는 개소리고, 때마침 도착한 고마운 엘레베이터 때문에 부끄러움은 금세 나를 떠나갔다. 다만 둘이서만 있다보니 어색해진 분위기를 숨길 수 없는 건 기본중에 기본이었다.
"근데, 민식씨는 라디오 밖에 안 해요?"
"다른 건 불러줘야 하죠. 딱히 게스트로 나와달라고 연락 온 게 없어서."
우리 사이에 이어지는 대화 따윈 사치였다. 초롱도 할 말이 없으니까 '그렇구나..'라고 말하면서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나는 엘레베이터 위나 쳐다보면서 라디오국이 있는 층수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6층입니다.]
"내려요, 다 온 것 같으니까."
"네. 초롱씨는 2,3부 게스트? 오늘 무슨 프로그램 하는 지 잘 알고 계세요?"
"흠…대충은요?"
난 오늘 작가누나가 만든 프로그램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아니,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디제이가 새로 만든 프로그램이 뭔지 모르면 이건 어쩌자는건가. 라디오 프로그램이 진정 삼천포로 빠지기를 원하는 것인지. 작가누님들의 속마음을 알 턱이 없었다.
"프로그램 내용이 뭐라는데요? 피디누나하고 작가누나가 통 이야기를 안 해줘서."
"매주마다 게스트 두 명 불러서 여러가지 주제 가지고 대결 한데요. 이긴 사람은 다음 주도 출연 확보라나, 뭐라나."
"크으…완전 서바이벌이네요. 초롱씨 힘내세요?"
"네, 에이핑크 아직 인기 없는데 열심히 해서 날아야죠!"
다부진 그녀의 다짐이 귀엽고 믿음직스러웠다. 저런 마인드라면 금세 인기 많아질 듯한 느낌이 든다. 소녀시대처럼 확 뜨기 전에 미리 투자 좀 해야 되나. 그래야, 나중에 1위나 앨범 나오면 내 이름도 들어가고…막,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럼 에이핑크에 끼워팔기로 나도 팔아서 방송도 탈 수 있고, 낄낄. 진짜 그래볼까?
"하이요."
"안녕하세요-."
"둘이 무슨 사이야? 같이 오고?"
"무슨 오해를…방송국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거에요."
나는 라디오 부스의 문을 손으로 밀어서 열었다. 늘 그렇듯이 피디누나와 작가누나는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또, 늘 그렇듯이 작가누나에게 진행지를 받았다. <스타 서바이벌!>이라는 새로운 코너명이 보였다. 초롱이 말한 내용이 진짜였나보다. 난 반은 페이크 칠 줄 알았는데.
"그럼 스텔라씨는요?"
"아까 왔는데, 아마도 화장실 갔겠지."
"흠, 나는 오프닝 멘트나 미리 봐둬야겠다. 먼저 라디오 부스에 들어가 있을게요."
"어차피 여기서 할 것도 없는데 미리 들어가있어도 되져, 피디님?"
초롱의 발음이 정확하다가 막판에 왜 저렇게 흐려지는 지 모르겠다. 나는 여유있는 척을 하면서 라디오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도중에 문고리를 잘못 잡아서 정전기 때문에,
"아…따가워!"
라고 아주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여자들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림과 동시에 나는 운지를 맛있게 먹었다. 맛있는 운지이긴 하지만 또 먹고 싶지는 않다. 치토스 정신따위도 들지 않았고, 어쨌든 운지 꺼졍, 두 번 꺼졍.
"와, 멘트 많다. 이거 다 외워서 하는 거에여?"
"아니요, 보면서 하는 거죠. 보이는 라디오 할 때는 저 모니터 보면서 하는 거고. 라디오 방송 처음 하세요? 전에 라디오 하셨잖아요?"
라디오 방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까지는 약 10분이 남아 있었다. 라디오 대본도 훑어 읽어 봤겠다. 시작되기 10분 전인 이 시간에는 주로 그 날에 출연하는 게스트들과 노가리를 까면서 친목을 어느 정도 다진 뒤에 방송에 들어가기가 대다수였다. 지금도 그런 패턴 중에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맨 처음에 한 라디오가 민식씨가 한 심심타파 공개방송이고, 저는 그 다음으로 하는 라디오가 또 심심타파 이거라서…맨날 듣기만 하다가 이제 한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새로운 것 같아여!"
"저도 처음에 규리누나 때문에 반강제로 시작하게 됬는데 내심 초롱씨랑 같은 느낌 들었어요. 지금은 뭐, 어느정도 익숙하죠."
고작 초롱양보다 한 달 먼저 더 방송계에 발을 들인 주제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방송을 시작한지 3~4년이 넘었을 소녀시대가 보기에는 웃기는 꼴이긴 하지만, 내심 방송인들이 경력이 늘어나는 것을 좋아라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군대에서 후임 생긴 것보다 더 기분 좋네.
"어, 저기 누구 들어오는데요?"
"스텔라씨겠죠. 오늘 나오는 게스트가 초롱양하고 스텔라양말고는 없는데."
가창력도 출중한데다가, 비쥬얼 또한 현역 정상급 아이돌을 위협할 정도여서 급인기상승 중인 아티스트 중에 하나였다. 데뷔곡이 'heaven'이라니. 몇 번 지나가다가 얼핏 들어보기는 했는데, 괜찮게 들렸다. 잠깐 들어도 괜찮을 정도면 풀버젼으로 들으면 바지를 몇 번이나 갈아입어야 할지 상상조차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스텔라양은 라디오 부스 안으로 웃으며 들어왔다. 한 손에 앨범같은 것을 쥐고서 말이다.
"이게 뭐에요?"
"제 데뷔앨범이요. 한 번 들어보시라구요."
"싸인도 있네요, 우와, 감사합니다. 잘 들어볼게요."
초롱양은 아차, 한 표정을 지었다. 스텔라양은 싸인앨범을 챙겨왔는데 자기는 미처 챙기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 때문인 것일까.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콩 때리고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어어…저는 준비 못 했는데…어쩌죠?"
"음…초롱씨는 제 기억 속에는 분명 앨범 주신 걸로 알고 있는데…그것도 공개방송에서요. 카메라 켜졌을 때 토크 나누면서 주지 않았나?"
"…아, 맞다!"
내가 보았을 때, 초롱양은 토종 한국인이긴 하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미영이를 떠오르게 하고, 티파니를 떠오르게 하고, 스테파니를 떠오르게 했다. 아 참, 소녀시대에서 한국말 제일 못하는 멤버도 떠오르게 하네. 여튼 비유말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좀 띨띨하다. 남자를 잘 사귀어야 할 듯 싶었다. 자칫 잘못 사귀었다간 된통 크게 당할 성격이랄까.
"…으으, 또 속이 안 좋다. 긴장해서 그런가."
"얼른 갔다오세요. 늦어도 12시 20분까지는 오세요."
"반드시 그래야죠. 으으."
두루마리 휴지를 작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쥔 채, 스텔라양은 또 다시 먼 곳을 향한 여정을 떠났다. 언제 돌아올 지 약속을 할 순 없었지만, 스텔라양은 늦어도 12시 20분까지는 오겠다고 했으니, 부디 라디오 데뷔부터 방송 사고를 내지 않았으면 무척이나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초롱씨는?"
"…네?"
"안 마려워요?"
"어머, 숙녀한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욧!"
띨띨함에다가 조증까지 추가해야하나. 와, 제발 얽히지 않았으면 좋겠을 캐릭터 중 하나다. 물론 친구로 지내면 재밌어서 같이 다니고 싶겠지만 친구 이상이라면 피하고 싶은 존재 중 하나였다.
"것보다."
"네?"
"초롱씨는 원래 그렇게 발음 잘 뭉개져요?"
초롱양의 얼굴이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게 그렇게 얼굴 화끈해지는 질문이었나. 아니면, 자신을 숙녀라고 말하는 초롱양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버리는 말이었나. 그러면 정식으로 미안하다, 라고 사과라도 할텐데. 아직 별다른 말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은 점점 라디오가 시작 될 즈음으로 다가왔고, 스피커로 들려오는 윤하씨의 달달하고 조신한 목소리는 어느새 마무리 멘트를 하고 있었다.
"이제 준비해야겠네."
"저…발음, 뭐라고 해야되나. 약간 기분 좋아지면 뭉개지곤 해요."
"그래요? 그럼 지금 기분 좋은 건가?"
"…히히, 약간요?"
엄연히 이것도 방송 장르 중 하나였다. 주변의 공기마저도 얼음가루로 만들어버릴 것 같은 쌀쌀한 분위기보다는 손난로보다 더 따뜻하고 훈훈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방송하는 게 백 배, 아니 천 배 더 편했다. 초롱양은 싱긋, 웃으면서 부스 밖으로 나갔다.
[윤하의 별이 빛나는 밤에, 내일 다시 만나요.]
윤하씨의 마무리 멘트마저도 끝나고, 스피커엔 라디오 광고가 울려퍼졌다. 그 놈의 앞뒤가 똑같은 대리운전 광고 더 럽게 많이 한다고 느꼈다. 그 앞뒤가 똑같은 대리운전은 아무래도 장사가 잘 되나 싶었다.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생각해보니, 오프닝 멘트 훑어보기만 했지. 입으로 소리내서 읽어본 기억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빨리 읽어서 대충 숙지해야 할 듯 싶었다.
"5월 11일 수요일, 심심타파 패밀리 여러분, 오늘도 심심타파 들으면서 어제의 힘들었던 일들은 잊어버리고 새로운 하루를 기분 좋게 맞이해요. 노래 한 곡 듣고 갈까요? 며칠 전에 심심타파 공개방송에 나온 풋풋한 아이돌그룹이기도 하죠? 에이핑크가 부릅니다, 몰라요."
최대한 천천히 읽으면 한 1분 정도 나올 것 같고, 당연히 나는 보통 속도로 읽으니까 한 20~30초면 충분할 것 같았다. 라디오 방송이 나오는 스피커에선 앞 뒤가 똑같은 대리운전 광고랑 다른 보험회사는 깎아내리면서 자기 보험회사는 짱이라며 치켜세우는 자뻑류의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나는 혀를 끌끌 차며, 그런 광고를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ON AIR]를 알려주는 램프에 빨간 불이 켜졌다. 익숙한 심심타파의 오프닝 송이 들려왔고, 나는 피디누나의 손짓을 보고 속으로 숫자를 세며 입을 열었다.
"5월 11일 수요일, 심심타파 패밀리 여러분. 오늘도 심심타파 들으면서…(중간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