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여든 번째 과외 - 꽃보다 시카 完
"살 거 다 샀지."
"응, 다시마 이거 맞지?"
"응, 맞아."
평소 같으면, 심지어 마트에서도 맘에 드는 게 있을 때 사달라고 조를텐데, 현 상황에 두 소녀는 애써 조신한 내숭을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원래 성격이 이런 여자면 상관이 없을텐데, 완전 극과 극을 달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극의 끝을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니까 소름이 삐죽삐죽 돋았다.
셋이서 산 재료들은 간단했다. 내 생일을 자축할 겸으로 먹을 쇠고기 미역국 재료들과 순규가 갈비를 구워주겠다며 당당하게 집은 갈비, 수연이가 계란말이를 해주겠다며 사온 계란 한 판이 마트에서 얻은 전리품들이었다.
"무엇으로 계산하시겠어요?"
"일시불로요."
청취율 2위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남자라면 5만원의 식재료 정도는 야박하게 3개월 할부 말고, 일시불로 계산하는 센스를 보여야 한다.
"이것도 계산해주세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뒤돌아 볼 새도 없이 캐셔는 씨익 웃으며 순규가 내민 물건의 바코드를 이미 리더기로 찍은 상태였다. 방심하는 순간 당해버렸다. 순규가 겁없이 집은 건 퍼먹는 아이스크림이였다. 예전에 고모가 저 퍼먹는 아이스크림을 누룽지 위에 얹혀놓고 한 번 먹어보라고 했는데, 맛이 달달하면서도 쌀맛이 나는 게 일품이었지.
그렇다. 나란 남자는 조그만 퍼먹는 아이스크림에도 옛 추억들을 팔아보곤 하는 그런 남자였다. 감수성이 풍부한 내가 추억에 흠뻑 젖어있을 때, 수연이와 순규는 쇼핑카트를 끌고서 먼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잠깐, 쟤네들이 먼저 짐 옮기고 차 타면 떠날 수도 있잖아?
'빠른 수비 복귀!'
프리스타일 풋볼을 해본 사람은 알 거다. 수비수 포지션으로 레벨 5 정도 찍으면 배울 수 있는 스킬이 저것이라는 것을. 나는 많은 인파들을 헤치고 지나가 키 작으면서도 비율 좋은 금발녀랑 키 작으면서도 패기 넘치는 갈색머리를 찾고 있었다. 두 소녀들을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주차장 안이었다. 이미 트렁크에 재료들을 넣고 몰래 내빼려는 그녀들을 잡았다.
"잡았다, 이 놈!"
"네? 누구세요?"
"아, 죄송합니다."
나는 연신 허리를 굽혀 사과를 했다. 젠장, 비율과 외모를 안 보고 머리색깔만 보고 착각을 해버리다니. 수연이와 순규가 이 일을 알게 되면 자기들도 제대로 구별 못하냐고 구박하겠지. 라며 건너편으로 걸어가자, 순규와 수연이가 팔짱을 끼고 도끼눈을 한 채로 날 쳐다봤다.
"너!"
"어떻게 우릴 헷갈릴 수 있어!?"
오, 갓 뎀.
+
"다녀왔습니다."
"그래, 근데 민식이는 왜 마트로 갔을 때 안색이랑, 다시 올 때 안색이랑 왜 이렇게 차이 나니? 혹시 둘이서 때렸니?"
"…히히, 아니요."
"저희 안 때렸어요. 그냥 민식이 피곤해서 그런 거에요."
두 소녀는 내 주치의를 자처하고 나섰다. 누구 맘대로 내 몸 상태를 그런 식으로 단정 지으라고 시켰는 지. 니네들이 의예과라도 나왔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내 이야기는 묵살되므로 패스. 더 웃긴 건 엄마가 두 소녀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는 것이였다.
"엄마 기다려. 요리 하고 올게."
나는 순규와 수연이랑 함께 마트에서 사온 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엄마가 재료들을 쳐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수석 셰프에 빙의라도 한 듯이 꺼낸 재료가지고 내가 뭘 요리하는지 생각을 하나했다. 모든 재료를 다 꺼내고 소매를 걷어붙히고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하려던 그 순간, 엄마가 나의 앞치마를 뺏었다.
"…!?"
"생일인데 요리 해서야 되겠니. 마트 갔다오라고 한 건, 니가 뭘 먹고 싶어하는 지 보기 위해서야. 대충 쇠고기 미역국에다가 계란 요리, 그리고 고기를 먹으려고 하는 구나. 알았어, 민식이는 오랜만에 아빠랑 이야기나 하고 순규하고 수연이는 내 보조좀 해줘?"
"네, 어머니."
"여부가 있겠어요?"
엄마의 깊은 마음씨에 나는 진하게 감동을 했다. 수연이와 순규의 요리 실력이 젬병이라고 생각될 지는 몰라도 우리 엄마의 요리 실력은 5성급 호텔에서 만들어주는 디너세트보다도 더 맛이 훌륭했다. 이미 내 표정에는 엄마의 요리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다. 엄마가 팔을 풀면서 주방으로 걸어갔다. 난 자연스레 아빠의 옆에 앉아있었다.
"아빠, 오랜만이야."
"보아하니 잘 생활하고 있는 걸로 보여. 아직 미국 갈 생각은 없지?"
"아직은 없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와 아빠는 조용해졌다. 아니, 어색한 걸까. 근데 웃긴건 아빠가 나한테 잘못한 것도 없고, 내가 아빠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러지.
"짜식."
"…왜?"
"여자애들의 로망이 되는 건 아빠를 닮았구나."
"풋, 무슨 소리야, 아빠. 난 엄마 닮았어."
아빠가 '그래?'라고 말하면서 뻘줌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아빠의 모습만 보면 아빠가 국제변호사라고 누가 믿을 것이고, 국제 로펌의 CEO라는 것을 누가 믿을 것인가. 아까도 미국 갈 생각이 없냐고 물은 건 로펌에서 사무직을 하며 일 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은 것이었다.
"아빠."
"응?"
"아빠는 요즘도 미국 빈민층에게 무료 변호 해주고 있어?"
"배운 만큼 돌려주는 거야. 요즘 그런 말도 있지 않냐, 재능 기부."
아빠는 내가 어릴 때부터 미국 빈민계층에게 무료로 변호를 해주고 있었다. 예전에 내가 잠깐 미국에 있었을 때,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한 것을 가난한 브루클린의 빈민이 제 몸을 희생해 나를 구해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그 때쯤에 주주총회의 긴급회의를 통해 CEO로 추대되었고, 곧바로 국제로펌의 회사 기본 마인드를 '죄 없는 사람은 가장 따뜻한 보호를, 죄 있는 사람은 법의 엄중한 심판을'이라는 것으로 바꾸었다.
"민식아. 지금 이렇게 사는 게 마음에 드냐?"
"뭐, 힘들긴하지만 그럭저럭? 이런 것도 지루한 인생을 활기차게 만들어 줄 수있는 중요한 부분 아니겠어요?"
"그럼 수연이하고 순규한테 더 잘 해줘. 순규도 잘 해주고, 수연이도 잘 해줘. 잘 해. 너도 겪어봐서 알 겠지만 첫 사랑을 깨뜨리면 그것만큼 잔인한 것도 없다."
"명심할게."
나는 아빠의 말을 들은 즉시, 주방에 있는 수연이와 순규를 보고 있었다. 엄마가 재밌는 농담을 던지는 지 아주 꺄르르 웃어댔다. 둘의 엔돌핀이 솟구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도 내심 둘이 맘에 든가보다.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
"자, 먹어."
"우와. 한 숟갈 떠 먹어볼까…후르릅, 으으. 맛이 일품이네."
"니 엄마가 만든 건데, 당연하지, 마."
남해에서 넘실되는 파도를 맞으며 자란 미역이 내 입 안에서 생동감있게 맛이 느껴지고 있었다. 미역국이 이렇게 맛있을까, 싶다. 예정에 없던 두부조림도 있었다. 아마도 냉장고에서 남은 두부를 찾은 모양이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하나를 떠서 먹었다. 맛있었다. 양념이 두부에 잘 밴 것 같았다.
"두부조림 맛있네, 누가 만들었어?"
순규가 조신하게 손을 들었다. 아, 순규가 요리 실력이 평타였나? 수연이의 요리 실력에 가려져서 요리는 조금 할 줄 아는 순규를 잠시 잊은 듯 했다. 그냥, 수연이 요리 실력이 불안해서. 계란말이를 하나 집어먹었다.
'…시바, 이건 사해의 영혼이 담겨있는 계란말이다.'
"이거 누가 만들었어?…히히, 그럼 내가 다 먹을래."
당연히 수연이가 손을 들었다. 수연이가 수줍은 표정을 지을 동안, 내가 왜 이걸 다 먹어야하는 지 대충 아빠와 엄마 그리고 순규에게 말을 했다. 이건 도저히 혀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수연이가 지가 만든 요리 안 먹으면 삐진다고, 라고 말하자 그들은 수긍을 하며 다른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아, 일단 계란말이부터 해치우고 보자. 으으, 계란말이는 염전에다가 담그고 말렸나. 하루 나트륨 권장량 몇 십 배 이상은 먹는 것 같다.
'미역국. 미역국!!'
내 혀가 소금간이 된 듯 싶었다. 나는 급히 미역국을 떠먹었다. 살 것 같았다. 는 개뿔, 이미 내 혀가 소금에 쩔어있는 터라 짠맛은 쉽게 나를 떠나지 않았다. 젠장, 조선시대 유교정신에 입각한 여자 같은 계란말이라니.
"것보다 수연이는 미국에서 살다 왔다고 했지?"
"네, 12살까지 살다 왔어요."
수연이는 생긋 웃으면서 엄마의 질문에 답했다. 그리고는 깨작깨작 밥을 먹었다. 저건 내숭이 아니었다. 수연이는 원래부터 밥 먹을 땐 깨작깨작 조금씩 먹었으니까. 많이 퍼먹기는 내가 많이 퍼먹지. 그리고 설리도. 우리 소녀시대가 다른 팬픽처럼 거지처럼 마구 쳐먹어대는 건 아니었다.
+
"엄마, 아빠. 나 라디오 갔다올게."
"그래."
"수연아, 순규야, 가자."
수연이하고 순규는 라디오 스케쥴을 가려는 나를 따라 급하게 쫒아왔다. 이럴 때 보면, 순규와 수연이가 내 펫이라도 된 느낌이였다. 하지만 내가 그녀들의 펫이 되었으면 되었지. 그녀들이 내 펫이 될 리가 없었다.
"시캬아옹~"
"훈냥!"
"!?"
타이밍 한 번 죽이네. 엘레베이터에 급하게 내면서 저런 소리를 내다니.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운 강아지하고 고양이 납셨네. 수연이는 자신의 하얀 블라우스의 매무새를 만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옷 매무새를 정리할 수 있도록 조금 도와주었다. 순규는 그것을 보고 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난 그 머리를 다시 헝클어뜨렸다.
"…이씨!"
"뭐?"
"아, 아니야!"
주차장에 도착하자 수연이와 순규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각각 나에게 팔짱을 끼었다. 순규의 포근함과 수연이의 푹신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자정이 다 되어가서 피곤하긴 했지만 둘의 애교에 금세 노곤함이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수연이가 하품을 하며 방송국을 향해 자신의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원래 내가 운전했어야 했는데, 내가 면허증이 없는 바람에 바로 새벽에 스케쥴을 뛰어야하는 수연이가 운전을 하고 있는 모습에 내심 미안해졌다.
"수연아, 미안해."
"…응? 뭐가?"
"내가 면허증 따서 운전해야하는건데."
"히히, 괜찮아. 좀 이따가 너한테 선물받을 생각이거든."
순규는 이미 곤히 잠들어있었다. 수연이의 의미심장한 말을 가슴에 품은 채 나는 방송국에서 내렸다. 수연이가 창문을 열며 떠나가는 나를 붙잡았다.
"민식아."
"왜?"
"일루 와봐!"
나는 다시 수연이의 차로 걸어갔다. 수연이는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뭘 상상하는 거지.
"내일 스케쥴 잘 뛸 수 있게 네 입술로 에너지 충전해줘!"
"…그게 무슨 소리ㅇ…, 츄릅."
"…츄릅, 츕. 히히, 됐다. 그럼 바바이!"
내 입술엔 수연이의 입술의 촉감이 남아있었다. 수연이는 도로의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뜬금없는 소리긴 하겠지만, 보면 볼수록 수연이는 꽃보다 아름다웠다. 물론 순규도, 순규는 꽃보단 강아지보다 귀엽다고 해야되나.
-꽃보다 시카 (부제, 개보다 써니[?])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