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6화 (287/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일흔 아홉 번째 과외 - 꽃보다 시카 5

나를 포함해 순규와 수연이, 그리고 나를 낳아준 두 부모님까지 합해서 합 다섯 명이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당연히 상석은 부모님의 차지였다. 파릇파릇한 스물 세 살의 우리들은 카페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부모님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서 있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 옆에 앉아 있고 싶었달까. 하지만 엄마가 소파에 앉으면서 나한테 했던 말이,

"민식이, 너도 순규하고 수연이처럼 앉아 있어."

"…엄마? 진짜로?"

그래, 진짜다. 라며 매섭게 쳐다보는 엄마의 패기에 나는 무릎에 힘이 빠진 채로 풀썩 주저앉았다. 아빠는 날이 더워지기 시작해서 그런지, 입고 있었던 마이를 어딘가에 걸쳐놓고는 나온 듯한 옷 모양새였다. 

"내가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들어갈게. 구구절절 서두부터 말 안 해도 되지?"

"네, 어머니."

"그러세요, 어머니."

수연이하고 순규는 나에겐 보여준 적도 없는 조신한 모습을 엄마에게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내 양쪽에 앉은 두 소녀는 무릎이 저리지도 않나보다. 나는 군대를 가서야 해봤던 자세를 오랜만에 하려니 죽을 맛인데. 엄마도 내심 이렇게 정갈한 자세로 앉으면 무릎이 작은 하마에게 칼빵 맞은 것처럼 꽃되는 것을 알긴 아나본지, 바로 본론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민식이 좋아하니? 아니다. 사랑하니?"

아, 엄마. 이건 너무 직설적인데? 이렇게 말하면 순규와 수연이가 쉽게 대답할 리가 없잖아. 아니, 엄마가 그걸 노린건가. 생각해보니, 두 소녀가 나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용감한 지 볼 수 있을 대목이었다.

"네, 사랑해요."

"놓치지 않을 거에요, 제 첫사랑이니까요."

첫사랑이라니, 수연이의 말에 순규와 내 부모님 모두 신선한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순규가 수연이의 연애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아이였나? 아니면, 서로 자신의 연애사에 대해서 잘 언급을 안 하는 편인가. 소녀들의 속마음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나로서는 궁금하긴 했다. 그렇다고 직접 민폐까지 끼쳐가면서, 그녀들의 감정을 잡치게 만들면서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근데, 아깐 정말 죄송했어요. 아버지하고 어머님이 진짜 민식이 부모님 되실 줄은…"

"괜찮아, 이해한다. 낯선 사람이 뜬금없이 민식이에 대해서 물어보면 의심할 만도 하겠지. 근데 순규는 나하고 남편이 민식이 부모인 건 어떻게 알았니?"

"딱 나왔는데 아버님하고 어머님께서 저한테 물어보시는 것 보고 눈치 챘긴 했는데, 진짜일 줄은 몰랐어요. 진작에 알았더라면 그렇게 추한 겉모습을 보이지 않는 건데…죄송해요, 준비 안 된 모습으로 아버님하고 어머님 뵌 것 같아요."

수연이와 순규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이렇게 조신스러운 모습은, 이미 유리를 넘어섰다. 특히 순규가 조신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 다가왔던 순규의 이미지는 여태까지 어떠했나. 조신하기는 커녕, 사랑스럽고 귀여운 이미지였다. 가끔씩은 본연의 모습인 순규버스로 찾아와서는 종종 날 괴롭혔다. 순규의 조신스러운 연기에 수연이는 순간 박하선으로 빙의해서 엄마, 아빠 몰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윽고 평범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부모님의 말을 경청했다.

"수연아, 진짜 첫사랑이야?"

"네, 첫사랑이에요. 어릴 때는 사랑이 뭔지도 몰라서 안 했구요. 자라면서는 6년을 연습생으로 있느라 이성과 사귈 시간도 없었구요. 데뷔하고 나선 스케쥴에 치여 사느라 연애 한 번 못하고 살았는데, 민식이가 사랑을 알게 해줬어요."

"…음…그래?"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 좀 여자 다룰 줄 아는데? 라는 표정이었다. 이렇다고 나의 아빠도 나랑 같은 전과가 있느냐? 그건 아니다. 내가 알기론, 아빠 보단 엄마가 연애의 역사가 길었던 걸로 안다. 아빠는 엄마가 세 번째 사랑이었고, 엄마는 아빠가 N번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달까. 아빠가 어떻게 엄마랑 결혼했는 지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 셈으로 치면, 나는 현재 모습으로는 아빠 보단 엄마의 뒤를 밟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차피 나는 내 자식 연애 하는 건 별로 터치 하지 않아. 자기 인생 지가 만들어 가는 데, 또래들은 뭣하러 터치 하는 지 모르겠다. 보니까 우리 아들이 순규랑 수연이 둘 다 사귀고 있는 것 같은데. 맞지, 아들?"

"…뭔 소리야, 날 뭘로 보고…"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치려고 했으나, 엄마를 비롯해 수연이와 순규의 매서운 눈초리를 느낀 바람에 고개가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빠는 너무 쿨해서 이 일에 관심도 없나 보다. 여튼 아빠도 안 도와주고 있으니, 난 살얼음판 위에 무릎을 꿇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하, 정답입니다."

말하면서도 씁쓸한 느낌이다. 역시 엄마는 나에 대해 너무 잘 알아.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지만, 우리 엄마는 날 그냥 가지고 노는 것 같아. 그러하다.

"아들은 대답 잘 안 할 것 같으니, 순규하고 수연이한테 물을게."

"네, 질문하세요. 저희가 성심껏 대답해드릴게요."

이미 순규와 수연이는 우리 엄마가 내뿜는 고유의 포스에 빠져서 현혹된 듯 했다. 우리 엄마와 대화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러했다. 마치 그녀의 말 하나하나가 마약이라도 된 것처럼. 어릴 때, 엄마랑 이야기 할 때 나 또한 그랬다. 우리 아빠도 마찬가지로 그런 꼴을 당했기에 엄마랑 대화를 나누는 걸 여태껏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거의 부부간의 대화가 단답형으로 이루어진달까. 

"우리 아들, 수연이하고 순규랑만 애인 사이 아니지? 또 있지?"

"…네?"

저 아줌마가 관심법이라도 익혔나. 아니면, 우리 엄마의 정체가 글로벌 로펌을 운영하는 아빠를 보조하는 비서가 아니라, 비서를 가장한 무당이었던가! 법을품은달?! 은 너무 개소리인 것 같다. 엄마가 이것까지 간파하는 건 아닌 지 모르겠다. 그럼 엄마는 나를 보면서도 혀를 끌끌차며 한심하게 쳐다보겠지. 

"말 못하는 것 보니까 있나보네."

"…저…그…"

"됐다. 엄마 많이 배고프다. 아들아, 자취 2년 가량의 요리솜씨를 엄마한테 보여줘봐. 아, 참. 물론 아빠한테도."

엄마가 너무 비중있게 말하는 바람에, 말이 별로 없는 아빠는 하마터면 찬밥신세가 될 뻔 했다. 나는 엄마의 말을 듣자마자 카페트 위에서 취하고 있었던 정갈하게 무릎을 구부린 자세에서 허리를 쭉 피고 일어났다. 무릎이 저려와서 하마터면 다리가 풀릴 뻔 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주방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여기 있으면 불편할 거야. 그냥 나랑 같이 요리나 만들러 가자."

"응."

"응…."

"엄마, 수연이하고 순규도 데리고 갈게. 오랜만에 엄마하고 아빠 왔으니까 맛있는 것 해야겠다."

갈색 가디건만 걸치고 현관 밖을 나갔다. 순규하고 수연이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했으니, 두 소녀들도 급하게 나를 뒤따라 걸어왔다. 오토바이에 세 명이 타기엔 무리가 있을 뿐더러, 거기다가 짐까지 들고 오자면 꽤나 고생도 할 법 했다. 고로, 수만옹이 선물해준 저 차를 타긴 하야할텐데. 

"오토바이 탈 거야?"

"아니, 그걸로는 무리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럼?"

"투아렉 타야지, 별 수 있어?"

순규는 수연이한테 투아렉이 뭐야, 라고 물었다. 수연이는 입을 삐죽 내밀며 선물받은 차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순규는 투아렉의 훌륭한 자태를 보고 놀라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우와, 저게 뭐야! 민식이 차야? 때깔 쥑인다, 히히."

"민식아, 저거 누가 운전하는 데?"

수연이는 내게 물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한 여자의 이름은 정수연, 아마도 셋 중에서 유일하게 1종 보통 면허를 소지한 여자일 터였다. 수연이는 에휴, 하면서 투아렉을 타러 가려다가 자기가 끌고 온 차인 BMW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BMW의 시동을 켰다.

"…엥?"

"왜? 이걸로도 충분히 마트 갈 수 있잖아. 그리고 한 번도 시운전 안 해본 차보단, 계속 타고 다닌 이 차가 더 나아."

"오케이."

의아한 감정이 들긴 했지만, 이어지는 수연이의 말을 듣자니 그녀의 말도 옳았다. 투아렉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가 다시 잠구고 수연이의 자가용 뒷좌석에 탑승했다. 그러자, 순규도 따라서 뒷좌석에 앉았다. 수연이는 운전석에 앉고는 무슨 문제가 있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왜?"

"…히잉, 수연이 운전하면 심심해애. 내 옆자리에…응?"

수연이의 애교를 보고나니 수연이의 옆자리에 앉지 않으면 경복궁 근정전에 찾아가서 석고대죄라도 해야할 것 같은 의무의식이나 책임감 따위가 아주 쉽게 느껴졌다. 순규는 '요망한 년'이라고 혼잣말하며 눈 앞에서 나를 꼬신 수연이를 욕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순규를 뒤로 하고 조수석에 앉았다. 수연이가 해맑은 표정으로 안전벨트를 맸다. 나는 또 수연이가 애교를 부리며 '내가 메줄게~' 라고 하기 전에 재빨리 안전벨트를 맸다.

"…쩝, 아쉽네."

수연이는 입맛을 다셨다. 나는 내심 다행이라고 느꼈다. 편안한 승차감을 주는 수연이의 자가용을 타고 근처에 있는 마트를 향해 움직였다. 수연이는 초보운전 티를 내는 듯, 불안한 표정으로 핸들을 쥐고 있었다. 나도 여느 드라마에 나오는 엄친아 남자주인공들처럼 '하하, 이건 이렇게 하는거야.' 라면서 여유 있는 웃음을 보이며 수연이의 긴장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나도 할 줄 아는 운전이라곤 바이크 운전이 다였다. 고로 순규와 나는 수연이의 운전실력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유일하게 손톱을 입으로 뜯는 것 외에는 없었다.

"나, 아까 어머니 말씀 들으면서 궁금한 게 있는데? 이런 말 해도 될련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 무속인이셔?"

"맞아, 나도 궁금했어. 설마 민식이가 털리려고 작정한 게 아니면 어머니한테 말할 일은 없을텐데."

수연이하고 순규도 엄마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 할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진짜 물어볼 줄은 몰랐네. 나는 기지개를 피고서 바로 대답해주기로 했다. 

"무속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범한 주부도 아니야. 아빠가 국제 변호사를 임용해서 뉴욕에서 로펌을 경영하시기는 하는데, 엄마는 아빠가 하는 일을 보조하는 것만 하거든. 일종의 비서? 그래서 바로 직급 아래인 부사장도 비서 두는 데, 아빠는 안 둬. 엄마가 있으니까. 아마도 그런 잡일하고 웬만해선 많은 의뢰인들과 같이 접촉하게 되니까 나름대로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거지."

"아, 그렇구나."

순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말을 들었다는 표시를 했다. 이윽고 수연이를 쳐다보고 있지만 불안한 미소를 지으면서 운전에 열심히 집중하고 있는 그녀였다. 나는 그녀의 운전을 방해할 이유는 없다고 느껴서인지, 그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메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오늘 새 코너 한다, 새 코너 게스트는 에이핑크 초롱 하고 스텔라]

나는 문자를 확인하고 인터넷을 켰다. '신인 여자 솔로가수 스텔라, Heaven으로 음원 차트 고공 행진' 등, 많은 기사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스크롤을 올려서 검색창에 '시그'를 검색했다. 뭐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그러하다, 내 팬카페의 이름이었다. 아직 400명 밖에 없지만 활동점수는 이미 연예/친목 카페 관련 급상승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걸 보면서 느끼는 한 가지. 이제 스케쥴을 뛸 때마다 대포팬(확인한 바로는 카페 안에 2~3명이 있다)들이 쫓아와서 사진을 찍을 게 분명했기 때문에 웬만해가지고는 소녀들과 놀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로 스캔들이 뜨기 더 쉬워졌다는 의미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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