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일흔 여덟 번째 과외 - 꽃보다 시카 4
유리가 선물한 CD들은 일단 침대 밑으로 숨기자고 생각했다. 때마침 수연이가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금단의 CD 케이스를 침대 밑으로 던져버렸다. 수연이는 날 보며 해맑게 웃었다. 내 몸에 농약향이라도 맡아지나, 아주 나만 보면 못 웃어서 안달이구만. 수연이는 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와서 무릎을 옆으로 뉘고는 내 팔에 얼굴을 기대면서 내가 선물을 뜯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수영이는 역시 먹을 거네."
"어, 이거 며칠 전에 팬들이 서포트해준건데. 안 먹고 쟁여놓더니, 이런 데 써먹으려고."
"그래? 먹보가 선물로 줄려고 쟁여놓은 걸 생각하면 기특하긴 하네."
수영이가 비축해놓은 음식물들을 냉장고 안에 투척했다. 건강식품이나 무등산 수박과는 달리 수영이가 선물로 준 이것들은 베란다같이 찬 곳에 놓았다가는 맛도 제대로 못 느끼고 입만 버릴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수연이는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아까 음식물들을 냉장고 안에 던져버린 사람도 내가 아니라 수연이었으니까. 이번에는 윤아의 선물이었다. 소녀시대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쪽에 속하는 윤아는 무슨 선물을 샀을까, 라고 생각하며 궁금증을 띄웠다. 다른 소녀들의 선물보단 몸집이 좀 있었다.
"…우와, 인형이다. 윤아 인형이네."
"어? 민식아 안에 또 선물 있어."
잘 때 껴안고 자라는 건가. 참 사랑스러운 선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녀를 생각해서 혼자 자거나 할 때 윤아가 선물한 이 인형을 품에다 두고 자야할 듯 싶었다. 어린 아이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연령대처럼 감성대가 풍부하다고, 라고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윤아의 선물은 그것이 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연이의 말에 나는 인형을 마저 꺼내고 그 안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어? 시계다. 와, 윤아 봐라. 도쿄 갔을 때 시계 판매점에서 비싼 시계를 유심히 고르더니, 민식이 선물로 주려고…부럽다?"
"…어…음, 부럽지? 시계 차고 염장 더 질러줄까?"
수연이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바보, 라고 말하면서 나를 주먹으로 살짝 친답시고 쳤다. 귀여운 수연이, 당장이라도 볼살을 꼬집고 싶다는 생각이 오래된 고목나무의 가지처럼 잔생각이 나면서 뻗어나갔다. 수연이가 앞에 있으니 대놓고 차기엔 좀 그렇고, 걸쳐서 느낌이 어떤 지는 파악해야될 것 같아서 팔목에 한 번 걸쳐보았다. 잘 감기는 게 괜찮게 사용할 수 있을 듯 싶었다. 윤아의 선물을 옆으로 두고서 드디어 대망의 소녀시대 막냉이인 서현이의 선물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오빠는 책 좀 읽어야할 것 같아요.' 라는 전문으로 시작된 서현이의 장문의 편지.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떠도, 빼곡히 적혀있는 서현이의 정성 어린 문장들을 하나 둘 씩 읊조려댔다. 그래서, 소녀시대에서 막내이긴 했어도 소녀시대 자체가 돈을 많이 벌어서 마찬가지로 돈이 많았을 서현이가 준 생일 선물은 무엇일 지 기대했다.
"짠!"
가볍다고 할 수도, 그렇다고 무겁다고 할 수도 없는 애매한 무게의 선물이라니. 포장지를 열어보니, 아니 이럴수가. 자기계발서를 비롯하여 각종 책들이 끈에 묶여져 있었다. 맨 꼭대기에 있는 책 위엔 작은 편지가 하나 있었다. 이건 나중에 읽기로 하고, 서현이의 생일 선물은 대충 책이라는 것이 감이 왔다. 아이돌 선물 조공 받는 것 보면 꼭 책이 한 권 이상은 있던데, 책이 왜 안 나오나 했다.
"…흐암, 지루하겠다."
수연이는 책과 거리가 먼 여자인가보다. 책을 봐도 잡지같은 것만 보겠지, 글보다 사진이 더 많은 책 말이다. 나는 대학 전공교재 자체가 이미 한국어가 아닌 책이라서 차라리 한국어로 써져 있는 이 책들이 더 읽기 편할 듯 싶었다. 머리 아플 일도 없고, 대신 졸리기야 하겠지. 다음 선물을 뜯어 보았다. 생년월일 순이니까 그 다음은 엠버의 선물인가.
"이거 뭐야?"
"보면 몰라? 에프엑스 여태까지 나온 앨범 뿌렸네."
읽어 보니 그러하다. 츄도 있고, 누에삐오도 있고, 요즘 에프엑스 애들이 부르고 있는 노래인 피노키오가 수록되어있는 정규 1집도 있다. 라차타는 디지털 싱글이라서 앨범 자체가 없나. 와우, 판타스틱 베이비. 붐 샤카라ㅋ…잠수.
거두절미하고 루나가 준 선물을 뜯어봐야겠다.
"와우, 판타스틱 베이ㅂ…가 아니라 정장이다."
마음 같아선 올+키읔을 시전하고 싶지만 참았다. 이것도 실용적인 선물 중 하나라고 칠 수 있었다. 제일 비실용적인 것을 꼽으라면 역시 태연이가 가져온 대관령 목장 우유가 해당되었다. 올 블랙에 블랙 넥타이지만 유일하게 와이셔츠만 백회색이었다. 그것까지 모조리 검은색이었다면, 하아. 검은 쫄쫄이 느낌과 비슷한가? 한 번 입어봐야 되겠지만 이 정도 선물 리뷰를 하면 독자들이 슬슬 지루해야할 것 같으니까, 빨리빨리 수정이와 설리의 선물을 뜯고나서 본 이야기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설리 선물 뜯을 테니까, 니가 수정이 선물 뜯을래?"
"그럴까? 내 동생은 민식이한테 뭘 선물 했으려나?"
왜, 비교라도 해보게. 라고 말할 뻔 했지만 입 싸물고 설리가 산 선물을 뜯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라는 느낌이 딱 드는 모자였다. 공룡 모자? 생긴 건 뉴에라 모자처럼 생겼다. 한 번 써볼까, 근데 나중에 설리랑 놀러갈 때, 설리도 이런 모자 쓰는 건 아니겠지…설마. 대충 커플룩 같이 옷이나 악세서리 같은 걸 사는 애들은 나중에 데이트 할 때 자기들도 착용하고 오는 것 아냐? 그런 속셈으로 샀나.
"수정이 선물은 뭐야?"
"핸드폰 고리, 리락쿠마네. 이쁘다."
리락쿠마라니, 요즘 확실히 일본에서 날라온 이 곰 캐릭터가 내 주변에서 아주 난리부르스다. 리락쿠마 덕후에 가까운 얘들은 직접 매장까지 찾아가서 이걸 사고 인증샷까지 찍어온다나 뭐래나. 그럼 수정이도 리락쿠마 캐릭터를 선호하는 소녀들 중 한 명인가? 얘도 만날 때, 리락쿠마 핸드폰고리 달고 왔는 지 확인해보는 거 아냐?
"히히, 다행이다."
"…뭐가?"
"나랑 선물 겹치는 얘들 없어서."
수연이의 말에 공감이 되었다. 받은 것들을 떠올려보니, 겹치는 스타일은 거의 없었다고 칠 수 있었다. 아, 겹치는 거 있긴 있네. 음식은 겹칠 수도 있다 치고. 그래도 정성과 쏟아부은 돈들을 생각하면 참 고마워서 눈물이 날 정도랄까. 말투가 아니꼬와보이긴 하지만, 난 진짜 감동한거야. 소녀들은 내게 감동이었어.
"넌 뭔데?"
"나? 내가 선물이지."
"…!"
그런 선물이라면 안 받아도 된다, 수연아. 네가 그것을 시전한다면 난 벌써 세 번째로 겹치는 선물을 받게 된거야. 니콜이도 그랬고, 효민이도 그랬는 데. 정제시카 너마저!(브로콜리 너마저 따라한거 아님다), 제발 아니라고 믿고 싶다.
"…이러지마!"
"응, 뭐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정중하게 두 손으로 거부했으나, 수연이는 뭐가 어쨌냐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내 착각이었나. 갑자기 쪽팔려져서 얼굴에 빨간 물감을 뿌린 마냥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수연이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손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서 내게 건네주었다.
"뭔데?"
"열어보면 알 거야."
별 모양 귀걸이였다. 난 귀 안 뚫었는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소싯적에 질풍노도의 시기 때문에, 친구들 분위기에 휘말려 어쩔 수 없이 한 번 뚫은 적은 있었다. 물론 한 쪽만, 그 때는 그게 유행이라서. 수연이도 내가 귀를 뚫은 흔적을 보긴 했는 지 이런 선물도 주네.
"귀걸이네?"
"응, 귀걸이. 내가 특별주문했어. 여기 검은 바탕에 흰 글자 있잖아, 그거 잘 보면 네 이름이다?"
수연이의 귀여운 말투에 녹아든 채로 나는 귀걸이를 확인했다. 정말 조그맣게 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수연이의 귀걸이에는 라고 쓰여져 있는 건가.
"네 귀걸이에는 제시카?"
"응! 올, 우리 자기. 하나를 가르쳐주면 최소 두 개는 아네?"
맞아, 하나를 가르쳐주면 최소 두 개는 응용해서 알아낼 수도 있어. 근데, 누가 나보고 하나를 가르쳐주면 하나도 모른다고 하는 데, 그런 오해하면 아니 아니 아니 되요! 는 개그콘서트 보면서 입이 간지러워서 어쩔 수 없이 여기다 치게 된 드립이었다. 보통 커플이면 귀걸이에 여자면 남자친구 이름, 남자면 여자친구 이름을 쓰질 않나. 요즘은 그런 건 오그라들어서 못 하는 건가? 아니면, 그저 스캔들 유포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수연이가 그 정도까지 머리를 썼더라면 정말 천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으니 패스해야지.
"근데 어째서 민식이가 받은 선물이 다 여자 애들이 준 것 같다?"
"응? 그건 오해야. 아까 주차장에서 봤잖아, 이수만 사장님이 폭스바겐 투아렉 선물해준거, 그거 말고도 용화랑 권이랑 좀 있다가 만나서 달릴 거야. 뭐, 그 전에 라디오 가야하긴 하지만."
어째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게, 내 귀에서도 둘러대는 것처럼 들리는 걸까. 참 슬픈 현실이다. 수연이의 의심 어린 눈빛은 풀릴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이걸 뭐 어떻게 풀어줘야 되나. 뽀뽀해서 풀어줘야 되는 건가. 아니면 볼을 양 쪽으로 잡아당겨서? 슬프게도 수연이는 너무 말라서 잡아당길 볼살도 없는게 2011년 5월 정수연의 현모습이다. 살 좀 찌우라니까, 몸매 망가진다면서 내 말은 듣는 체도 안 하고 있었다.
"귀걸이 함 해봐!"
"알았어.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아니, 그렇게 하면 귀 다쳐. 내가 다시 해줄게, 가까이 와봐."
수연이는 그렇게 말해놓고선 자기가 내 가까이 다가왔다. 흘깃 수연이가 귀걸이의 위치를 바꿔주는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반짝반짝 빛나는 하얀 피부에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으며 끊임없이 두근거렸다. 뽀뽀하고 싶은 강렬한 유혹의 복숭아빛 볼이랄까. 입술은 어쩜 그리 귀여운 지,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려보고 싶다.
"…힛, 됐다."
"수연이 너는 언제 꼈어?"
"나? 아까 꼈지, 이제 우린 하나야! 히히."
그런 이론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커플 귀걸이를 꼈다고 남자와 여자가 합일이 됬다는 설은 어떤 고서와 사료들을 샅샅이 뒤져봐도 나오지 않는 가설이다. 하지만 항상 해맑은 수연이의 모습에 더럽게 잘 지는 나였다. 빙구 캐릭터는 강한 퀸쏘같은 캐릭터보다 더 임팩트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탱구, 정시레, 묭묭이. 삼종세트에 꼼짝 못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언제는 아니였어?"
"그런가…여튼! 그런 의미에서 하나가 되러 가보자!"
수연이는 선물 정리 하고 있는 나의 손목을 잡아서는 침대로 나를 던졌다. 그렇지만 내가 수연이의 손아귀에 잡힌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던져질 리가 없었다. 오히려 수연이가 내 힘에 들려서 침대 위로 엎어지는 꼴이 났다.
"…히힛, 적극적이네?"
"착각하긴, 침대서 쉬고 있어. 이것 좀 정리할게."
"…히잉, 안 돼. 내 선물은 귀걸이도 있지만 더 큰 선물은 나란 말이야아…!"
수연이는 침대에서 팔짝 뛰어서는 내 몸에 찰싹 달라붙어서 안겨있었다. 목 아프니까 떨어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매미처럼 수연이는 잘도 붙어있었다. 정말 수연이가 애교가 너무 많아져서 미치겠구만, 이라고 속마음을 감추면서 수연이의 등과 다리를 잡고는 다시 침대 위에 던졌다. 그렇게 수연이와 아웅다웅하면서 재미있게 장난을 치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히히, 어? 누구지."
"갔다 와 볼게. 여기 있어."
인터폰으로 바깥 화면을 확인해보았지만, 손바닥으로 가리기라도 했는 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그냥 문을 열어줄 수 밖에 없잖아. 나는 투덜대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누구세요?"
"민식아, 나야! 순규!"
이순규? 순규도 오늘 스케쥴 아니였나.
"에이, 순규야 뭐야. 말도 없이 오고…연락 좀 하지."
"그래, 너는 연락 왜 안 했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ㅇ…엄마?"
이순규가 함정 카드를 발동했다. 필드는 순식간에 이순규의 홈필드로 바뀌었고, 이순규가 소환한 카드는 다름 아닌 그녀의 부모님…이 아니라, 참 오랜만에 보는 나의 부모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