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1화 (282/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일흔 네 번째 과외 - 위험한 상견례? 完

"민식이는 밥 먹었어?"

"아니요, 약속 하나 있었는 데 이 일이 더 중요한 것 같아서 깨트리고 오느라 못 챙겨먹었어요."

오, 감동인데? 라는 느낌으로 쳐다보는 효민이의 어머니였다. '잠시만 기다려, 좀 있다가 같이 먹어.'라고 말하신 어머니는 금세 주방으로 달려가셔서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데우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올 줄 알고 미리 만들어 둔 음식같았다.

"아버님, 효민이 방 좀 보고올게요."

"그래."

"효민아, 네 방 구경 좀 해도 되지?"

"응! 가자."

효민이와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거실에서 나오면 바로 앞에 효민이의 방이 있었다. 워낙 여성스러운 효민이니만큼, 방 안도 역시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겨졌다. 효민이가 쉼 없이 별 헤는 밤을 지샜던 침대에 앉았다. 효민이도 조심스럽게 내 옆에 앉아서 나의 어깨에 기댔다.

"다행이다."

"…뭐가?"

"우리 엄마도, 아빠도 너 좋아하는 눈치셔서."

효민이는 싱긋 웃었다. 나는 효민이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효민이를 내 안쪽으로 더 파고들게 했다. 

"민식아."

"…응?"

"내가 멋대로 네가 내 사촌이라고 하고, 멋대로 너를 우리 부모님한테 데리고온거 싫지?"

효민이는 조심스럽게 내게 물어보았다. 나는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면서 아니라고 도리질을 했다. 효민이는 또 다시 '다행이다.'라고 말한 뒤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의 어깨가 왠일인 지 힘이 빠진 채 축 처져있었다.

"효민이답지않게 왜 그래, 어깨 축 처져있는 여자 나는 싫어하는 데."

"…그래? 그럼 어깨 펴야지."

효민이는 어깨에 힘을 주며 들썩거렸다. 귀여운 녀석, 나는 효민이를 더 끌어안았다. 효민이는 내 가슴팍에 자신의 얼굴을 댄 채로 하얀 벽을 쳐다보며 혼잣말했다. 아니면, 나한테 한 소리겠지만.

"민식아."

"…응?"

"미안해, 내 멋대로 널 사랑해서."

"왜 미안해하는거야, 오히려 너 하나만 봐줄 수 없는 내가 더 미안한데."

효민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내 가슴팍에서도 얼굴을 뗀 채,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어느 앨범을 꺼내더니 그 곳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서 내게 주었다. 뭐지, 하면서 보았다. 예전에 사라진 소녀시대의 사진과 편지였다.

"…너한테 왜 이게?"

"미안, 호기심으로 가져갔는데…까먹어버려서 돌려주지 못했어."

나는 '응, 괜찮아.'라고 효민이에게 말하고 오랜만에 편지를 열어보았다. 편지는 태연이의 자필로 써진 내용이었다.

[To. 민식이에게

민식아, 안녕. 편지로는 처음으로 내 맘을 전해보는 것 같아. 아닌가? 처음 봤을 때, 한 번 썼으니깐 두 번째인가? 뭐 그렇다고 치자. 새벽에 네 사정 듣고 눈물 나오는 줄 알았어, 아. 나왔었지 참. 우리를 위해서 그랬던건데, 우리는 그런건 지도 모르고 네 욕을 하기도 하고, 너한테 짜증도 났었어. 넌 내게 사랑을 가르쳐준 나의 유일한 남자친구이자, 선생님이야. 너 때문에 질투도 느껴보고 남자친구를 지켜준다는 게 어떤 느낌인 지도 프랑스에서 본 네 모습에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눈물도 났었어. 너무 보고싶었거든. 프랑스에서 장난친 건 미안, 너무 보고싶어서 그런 장난까지 쳤나봐. 하루에도 속으로 너한테 사랑해,를 몇 번이나 되뇌이는 지 모르겠다.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너무 보고싶어. 이제, 너는 우리 옆에서 잠시 떨어질 생각에 바보같이 눈물이 나오려고 그래. 민식아, 다른 곳으로 이사가도 밥 잘 챙겨먹고, 다른 여자 만나지말고, 그 곳에서도 날 계속 생각해줘. 사랑해. From. 태연이가]

가슴 한 켠이 시큰둥해졌다. 그 때 내심 얼마나 소녀시대와 에프엑스 멤버들에게 미안했는 지 모른다. 특히, 태연이한테는 오랫동안 씻을 수 없을 상처를 주었다. 나를 첫번째로 사랑해준 그녀가 너무 감사했다. 헌신적이었다. 편지를 읽고 나서 태연이가 보고싶지만, 효민이가 옆에 있었다. 그녀들에게 약속을 하나씩 하지 않았는가. 그녀와 단 둘이 있을 때는 오직 그녀만을 사랑하겠다고. 

"이거 보고, 민식이 네가 태연이랑 사귀고 있다는 걸 알게 됬어. 근데 아무 말 안 했어. 은정언니랑 그렇고 그런 사이 되는 걸 보고 내심 질투도 느꼈다? 바보같이 그 편지를 읽고 나서 남의 남자를 사랑하게 됬지. 나 너무 이기적인 사람 같다, 그렇지?"

나는 효민이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리고 효민이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는 사근사근 그녀에게 말했다.

"고마워, 바람둥이같은 날 사랑해줘서. 미안해, 바람둥이같은 날 사랑하게 만들어서."

효민이의 눈가에는 고운 눈물방울이 주르륵 결을 타고 흘러내렸다. 효민이는 곱디 고운 자신의 손가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

"많이들 먹어, 오늘 내가 힘 좀 썼다."

이렇게 호화스럽게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효민이 어머니가 준비해놓으신 음식들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상다리가 휘어져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스케일이랄까. 새빨갛게 잘 익은 꽃게의 다리를 뜯어서 야들한 게살을 먹었다. 아,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느낌이 정말 황홀하다. 

"민식아, 이것도 먹어."

"여보, 선영이 봐. 우리는 반찬 챙겨주지도 않으면서 아주 지 남자 챙기는 것 봐."

효민이의 부모님을 신경쓰고 먹어야 하느라, 밥을 한 숟갈 떠먹을 때도 눈치 보면서 먹는 건 필수스킬이다. 효민이는 '내가 뭐.'라는 눈빛으로 부모님을 쳐다보다가도 내 밥숟가락에 고기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올려놓는다. 나는 그것을 아무 대꾸없이 먹어줘야 효민이의 부모님도, 효민이와 사이가 좋구나. 라고 생각하고, 효민이도 기분이 안 나쁠테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는 셈이였다.

"풀때기만 먹다가 오랜만에 고기 먹으니까 원기회복하는 것 같네."

"…여보! 그게 무슨 소리에요?"

방금 효민이의 아버지가 '진작 이렇게 해주지'라는 식으로 말해서 어머니가 발끈하신 듯 했다. 효민이의 부모님은 정말 재밌게 사시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제 3자가 눈치를 많이 봐야하는 게 문제지만. 웃을 수도 없고, 굳은 표정으로 볼 수도 없고, 고로 나만 곤욕을 치른다.

"…아악! 이 여편네가 진짜!"

효민이의 어머니의 눈빛이 겨울의 칼바람보다도 매서웠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그 포스는 효민이 아버지의 옆구리를 따갑게 꼬집은 듯 했다. 식탁에 가려져 있긴 했지만, 분명 효민이와 내 시야에서 차단된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게 분명했다. 효민이 아버지가 수저를 식탁에 화내면서 놓고 식사하는 자리를 안 박차고 나온 게 다행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눈치는 봐야했다.

"…으으, 여튼 민식이는 무슨 일을 하고 있어?"

"저요, 학업이랑 라디오 디제이 일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미국에 계세요, 미국 일이 워낙 바쁘셔서…한국에 올 짬이 없으세요."

"형제는?"

"…하하, 외동이요."

식사가 끝난 후에도, 효민이 아버지의 기사 정신은 죽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꼬치꼬치 캐묻는게 남자친구를 보러 온 게 아니라, 효민이와 결혼할 신랑감을 보러 온 듯한 감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효민이 아버지도 질문거리가 떨어지고, 이제 여기에 머무를 필요가 없다고 느끼던 찰나에 효민이가 자리에 일어나면서 말했다.

"…나, 스케쥴 가볼게. 민식아, 가자."

"…어? 응. 어머니,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 진짜 맛있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말씀하시는 거 재밌었어요. 다음에 또 뵜으면 좋겠어요. 저 가볼게요."

늘 그렇듯, 효민이네도 별 다를 바가 없었다. 효민이의 아버지는 '그래.'라고 말하고는 안방으로 들어갔고, 효민이의 어머니는 기어코 엘레베이터가 있는 곳까지 배웅을 해주겠다고 하셨다. 

"엄마, 나 가볼게."

"응, 민식이도 잘 가렴."

"네, 어머니. 다음에 기회 있으면 또 뵐게요."

나는 엘레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엔 여러 의미가 담겨져있었다. 혼나러 가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점수를 따서 다행이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른 소녀들에겐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등으로 여러 잡생각들  

나의 머릿속을 신나게 들쑤시고 다녔다.

"효민이, 너네 부모님 티격태격 싸우긴 하셔도 금슬이 좋으신가봐."

"응, 니 앞이라서 어색하셔서 그렇지. 완전 닭살이야."

"…으음, 그렇구나."

티격태격 싸우는 모습을 본 터라, 그래도 어느정도 재밌게 사신다고 생각했는데 진면목은 시간을 70년대로 돌려놓은 듯한 오글거림의 연속이라니. 그 모습을 생각하는 효민이의 표정을 보니 대충 어떤 느낌인 지 감이 올 것 같다. 토 쏠릴 정도라는 건가. 

"근데 우리 아빠 누구랑 닮은 것 같지 않아?"

"…어?"

"니가 잘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긴 했었나, 나랑 잘 아는 사람이라면 용화하고 권이가 전부인데, 용화나 권이같은 분위기의 외모라곤 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누군데?"

"너 말이야 너."

"…아."

아, 나였구나. 그래, 성격은 어느정도 비슷한 감이 있었어. 은근히 외모로 흘러나오는 고품격 이미지를 깎아버리는 허당기가 얼추 닮은 듯 했다.

"왜 그런 말 있잖아, 아들은 엄마 닮은 여자를 좋아하고…"

효민이는 닫힌 엘레베이터 문을 보면서 말하다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 쪽으로 예쁘장한 얼굴을 보였다.

"딸은 아빠 닮은 남자를 좋아한다고…히힛."

"…하하."

효민이는 내 손에 깍지를 꼈다. 그리고, 1층에 도착해서 열린 엘레베이터 문 밖으로 같이 한 걸음씩 내딛었다. 효민이의 미소는 사라질 줄을 몰랐다. 나도 효민이가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기분 좋긴 했지만. 아파트 밖을 빠져나와 택시가 많이 지나다니는 대로를 향하기 전에 작은 거리 가운데에 분수 하나가 있었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분수'랄까. 분수줄기가 뿜어져나오는 그 안에 백 원짜리 동전이 군데군데 있었다. 효민이는 그것을 보더니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분수대래, 동전 놓고 소원 빌자."

"그건 미신인데?"

"…우우, 아니거든? 빨리 던지기나 해."

효민이의 애교 어린 재촉에 난 마지못해 효민이와 같이 백 원짜리 동전을 분수대 안으로 던져서 빠트렸다. 그리고 효민이를 따라서 눈을 감은 채 소원을 빌었다.

'제발 저랑 관계 맺는 여자가 그만 좀 늘어났으면 합니다.'

나의 유일하고 간절한 소원이었다. 김구 선생이 조국 광복을 염원했던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여튼 소원을 빈 나는 감은 눈을 다시 떴고, 효민이는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

"무슨 소원 빌었어?"

"…비밀."

소원같은 건 원래 말하면 안 이루어진다는 소리가 있었기에 나는 내가 빈 소원을 효민이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원이 애들한테 말하기엔 조금 껄끄러운 것도 이유 중 하나에 포함되어 있었다.

"…칫, 나는 너랑 행복하게 사는 소원 빌었는데…."

효민이가 볼에 바람을 넣으며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소원을 빈 효민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순간 효민이에게 장난을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거 알아?"

나는 내 얼굴을 효민이에게 가까이 갖다대었다. 효민이는 키스라도 하는 줄 알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야아…사람 많은데서…뭔데?"

효민이는 온갖 기대를 하면서 이미 키스를 할 것이라고 예상을 했다는 듯이 입술을 수줍게 내밀며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효민이의 어깨를 잡고 효민이의 입술에 뽀뽀를 하는 척을 하면서 옆으로 슬쩍 얼굴을 움직여 효민이의 귀에다가 속삭였다.

"…소원 내용을 말하면 안 이루어져. 고로 네 소원은 FAIL."

"…김민식, 너 가만 안 둬!"

응큼한 생각을 한 효민이의 입술에 내 입술 대신 손가락으로 툭 밀고 도망갔다. 효민이는 자기가 나한테 당한 게 분했는 지 가방을 손에 든 채로 무섭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도 날 잡지는 못하겠지만.

- 위험한 상견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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