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일흔 세 번째 과외 - 위험한 상견례? 2
[지금 당장 데려오래, 아주 난리가 아니야!]
"너 어딘데?"
[…어디긴! 니 집에서 기다리고 있지! 얼른 와!]
여기는 일산이고, 집은 서울인데 어느 세월에 간다고 한단말인가. 그래도 대중교통 안 타고 오토바이 가지고 온 게 다행인 듯 싶었다. 전화를 끊고 오토바이가 있는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눈에 바람 맞으면 안 되니까 헬멧은 필수.
가는 길에 에이핑크 소녀들이랑 또 마주쳤다.
"어디 가세요?"
"급한 일이 생겨서요, 수고하세요."
초롱양이 내게 물었다. 난 형식적으로 웃으며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그녀들은 검은 밴 안에 차례차례 타고 있었다. 나는 초롱양의 끝인사를 대충 받고 선물 받은 지 이제 반년이 지난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키를 꺼내서 시동을 걸고 주차장 밖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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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왔어."
"야, 이제야 오면 어떡해?"
"이것도 빨리 온 거야, 하마터면 집에 오다가 경찰한테 걸려서 딱지 끊을 뻔 했어."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서울 한복판을 달려서 내 집까지 온 자체가 거의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운데, 오히려 칭찬을 못할 망정 나무라기만 하다니. 심장이 두근거리고 후장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아도 엄연히 효민이의 부모님과 정식으로 대면하는 것이니 예의를 갖춰야 할 듯 싶었다.
"효민아, 나 옷 좀 갈아입고올게."
"응, 얼른 갈아입어."
나는 옷을 갈아입으러 옷방으로 들어갔다. 옷장의 문을 남자답게 두 손으로 잡아서 활짝 열고 정장을 찾았다. 하얀 셔츠에 진청색 타이, 검은 마이와 바지 정도면 충분한 듯 싶었다. 양말은 무난하게 회색 계통으로 신었으니 패션으로 욕 먹을 일은 없었다.
"가자, 오토바이 타고 갈까?"
"머리 다 망가지는데…"
게으르게 굴 시간이 없었다. 효민이가 내 정장의 어깨 매무새와 넥타이를 다시 한 번 정리해주었다. 효민이는 화이트 칼라에 비비드 컬러 무늬를 매치한 복고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스타일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아무리 편한 부모님이라고 해도, 엄연히 나를 데리고 정식으로 대면하는 일이라서 그런가 했다.
"너 스타일 은근히 귀효미네?"
"…헤헷."
"아, 이럴 때가 아니지."
광을 낸 구두를 신고 집 밖으로 효민이와 같이 나왔다. 각자의 구두 소리를 내면서 아파트 밖으로 빠져나갔다. 오토바이를 타고 갈 수는 없는 듯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돈이 들기는 하지만 택시를 탔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서 효민이 부모님이 계시는 집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갔다.
"수고하세요."
택시기사에게 택시비를 내고서 차문을 열었다. 효민이의 부모님 집도 아파트였다. 심장이 쿵쾅뛰는 것을 보니, 나 자신도 꽤나 긴장한 듯 했다. 이건 거의 상견례보단 취조 수준에 가깝게 따지고 물어볼 것 같았으니까.
"옷 매무새 정리해줬는데 또 흐트러졌네, 멈춰봐."
"은근히 내 옷 매무새 신경 쓴다?"
"이건 상견례하는 거니까, 히힛."
"…우리 부모님 미국에서 안 오셨는데?"
효민이는 싱긋 웃었다. 흐트러진 나의 옷 매무새를 다시 한 번 정리해주곤 손바닥으로 어깨 부분을 툭툭 털어줬다. 아주 섬세하게 내 옷 매무새를 관리하는 효민이의 모습을 보고는 얼핏 신혼부부 냄새가 났지만, 아직 그 정도 까진 갈 생각은 아니였다.
"긴장 하지마, 아빠가 그렇게 뭐라고는 하지 않을거야. 처음엔 노발대발하셨는데,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줬거든."
"…그래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효민이가 문을 두드렸다. 꼭 요동치는 내 심장박동같았다. 문 안에서 '누구세요~' 라는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추측을 해보아도, 효민이의 어머니 목소리였다.
"엄마! 나야, 선영이!"
"벌써 왔네?"
"…헉."
효민이의 어머니는 효민이가 온 것이 반가웠는 지 버선발로 문을 여셨다. 그녀의 손엔 칼이 쥐어져있었다. 그렇다, 그녀의 손에 칼이 쥐어져있었던 게 문제였다. 하마터면 칼끝이 내 튀어나온 목젖을 건드릴 뻔 했다. 아찔했다.
"…꺄악, 엄마! 민식이 다칠 뻔 했잖아."
"어머, 미안해서 어쩌지?"
"…하하, 괜찮습니다."
지은이를 지켜주다가 칼에 베인 적도 있으니, 안 찔린 것에 감사를 해야했다. 하마터면 갈아입을 바지도 없는데 오줌을 지릴 뻔했다. 효민이는 자신의 어머니가 내가 위험한 꼴을 당할 뻔하자 비명을 지르며 깜짝 놀라했다. 어머니도 자신이 쥐고 있었던 칼이 내 목 밑에 가있는 것을 보곤 칼을 뒤로 뺐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침이라도 삼켰으면 닿을 뻔 했네.'
내 생애 이렇게 염통이 쫄깃해지는 경험은 지은이 때 이후로 진짜 처음이다.
"여보, 선영이하고 선영이 남자친구 왔어."
"…어, 그래?"
효민이의 아버지는 효민이 어머님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체격은 정자매 아버지보단 크신 편이었다. 대충, 우리 아버지랑 비슷한 체격이랄까.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효민이 어머니의 칼놀림 덕분에 한 번 지릴 뻔한 상태라서 오금이 저려왔다.
"왜 고개를 못 들고 있어? 고개 들어, 긴장 하지 말고."
"…아, 예."
체격이 큰 만큼 성격도 다부진 듯한 효민이의 아버지였다. 웬만해선 나를 향해 낮추어 말하긴 해도 은근히 존대하는 소녀들의 부모님들도 많은데, 효민이네 부모님은 시작부터 끝까지 그냥 반말을 하고 있었다.
"…흐음, 사촌이라니."
"아, 그게 말이죠."
"…아빠, 그게 말이지."
효민이가 나 대신 말하려고 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주는 눈치에 금세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는 효민이었다. 아무래도 변명을 해도, 효민이가 하는 변명보단 내가 하는 변명을 듣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가슴을 진정시키고 입을 열어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그게…방송에서 나가야하는 데 마땅히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하고 나가면…그게 저…스캔들이 날까봐."
가슴을 진정시켰는데도 긴장은 끝내 달아나지 않았다. 변명을 하는 동안에도 수없이 더듬어댔다. 사람에게 신뢰를 줄면 결단력있고 정직한 모습으로 자신있게 말을 해야 다른 사람이 믿어줄 수 있는 데 말이다.
"…흐음, 사촌이라고 하고 나갔다는 거구만."
"네."
"과일 좀 먹으면서 말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이라는 배경음악을 깔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매우 어색한 분위기에 다행히도 어머니가 다과를 챙겨오시는 바람에 어색함은 잠깐이라도 떨쳐낼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사과에 찍혀진 포크를 집어 사과를 베어먹었다.
"사과 맛이 어때요?"
"맛있어요, 역시 우리나라 사과는 최고인 것 같아요."
"미국산이에요."
"…아."
어색함의 신이 나를 어디선가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효민이도 '엄마도 참…'이라고 말하면서 어머니의 어깨를 툭 쳤다. 효민이의 어머니는 '내가 뭘? 사실을 말한 거 잖아.' 라며 모녀간의 참 아름다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에헴, 우리 선영이랑은 언제부터 만났어?"
"…네, 네?"
"아빠…무슨 말을 하는 거야…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야."
효민이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효민이의 아버지는 효민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듯 보였다. 효민이도 포기했다는 듯이 양 손을 자기 어깨 위치만큼 올렸다가 고개를 절레 흔들며 내렸다.
"아이 참, 당신도 너무 민식이한테 장난치는 거 아니야?"
"…내가 언제 장난을 쳤다고."
이 분위기는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춰야할 지 모르겠다. 효민이와 눈이 마주칠 때, 효민이는 나도 뭐 어떻게 할 줄 모르겠다, 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23년동안 같이 지낸 효민이도 아직 적응을 못 했는데, 효민이의 부모님과 마주한 지 23분이 막 지난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너…눈빛 보면…악!"
"아빠 왜 그래?"
"…아으…혀 씹었다."
초성으로 'ㅋ'을 날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허당의 모습을 보인 게 나와 비슷한 또래도 아니고, 동생도 아니고, 나보다 훨씬 더 연배가 많으신 효민이의 아버지가 보이셨기 때문에 나는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했다. 효민이의 어머니가 휴지를 급히 챙겨오고, 효민이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챙겨온 그 휴지를 받아서 피가 난 곳을 닦고 있었다. 대충, 출혈을 막고 효민이의 아버지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효민이에게 말했다.
"니 눈빛 보면 알아, 민식이를 쳐다볼 때 네 눈빛, 네 엄마가 처녀 시절에 나 쳐다볼 때 비추던 눈빛이랑 판박이야."
"…당신도 참, 당신이 나 좋다고 졸졸 따라다녔잖아요."
"뭔 소릴 하는거야!?"
효민이네 부모님은 참 거짓말을 칠 때도 손발이 안 맞으시는 것 같았다. 나와 효민이는 이 상황에 웃지도 못하고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사과라도 하나 더 먹어야 웃음을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뭐 웃겨서 위험한 상견례야? 효민이는 그런 부모님이 부끄러웠는 지 얼굴이 나랑 처음 할 때보다 더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흐흠, 어쨌든 말해봐. 언제부터 사귀게 됬는지."
"작년 여름 때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고래!? 여름 때라, 꽤 됬네."
"하하하하, 아버지 유머가 꽤 감각 있으시네요."
회심의 개그인 것 같으니, 뻘줌해시지 않으시게 예의바르게 웃는 방법 밖엔 별 도리가 없을 듯 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효민이도, 효민이 어머니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고맙네."
"…네?"
"고마워, 내 개그에 가족들은 별로 웃어주지도 않았거든, 그리고 또 고마워. 우리 못난 선영이를 사랑해줘서."
실컷 속으로 웃다가도 또 다시 진지해지는 효민이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가슴이 숙연해졌다. 고개를 효민이의 아버지를 향해 고정시킨 채, 아버지의 말씀을 귀담아들었다. 오히려 효민이를 만날 수 있게 낳아주신 효민이의 부모님이 내겐 더 고마운 존재였다.
"…아, 아닙니다. 이렇게 예쁜 효민이를 낳아주신 아버지하고 어머니한테 더 감사드립니다."
"난…또 연예계랍시고 막 이상한 제비같은 놈들 만날 줄 알았더니, 꽤나 생각이 건실한 청년을 만나고 다니다니…선영이, 너 니 엄마 꼭 빼닮았다?"
효민이는 '그렇지?' 라고 말하면서 이제야 진짜 환한 미소를 보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나서 '…풋.' 이라고 안 들리고 안 보이게 비웃음을 날렸지만 나는 목격했다. 어머니도 자신이 남편을 비웃은 것을 내가 봤다는 것을 눈치채자 조용히 '쉿'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시니 효민이의 예능감은 더할나위없이 부모님을 쏙 빼닮은 것 같았다.
"…그럼 아버님…"
"뭐, 잘 부탁할게. 우리 선영이."
"…아빠도 참."
"너 딴 놈 보지 말고 민식이 반드시 잡아야한다!"
효민이는 아무 말을 못하고 자신의 아버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고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효민이의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있었다. 이렇게 나를 띄워주시면 콧대 높아져서 안 되는데, 라면서 괜스레 기분 좋아지고 있을 찰나에 효민이의 아버지가 내 몸과 하체를 쳐다보고 다시 효민이를 보며 말하셨다.
"…눈빛 보면 알아…큰 그릇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