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일흔 두 번째 과외 - 위험한 상견례? 1
"이렇게 관객들과는 마주하는 방송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심심타파 대타 디제이였다가 정식 디제이 자리를 꿰차게 된 김민식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나의 말이 끝나자, 의자에 앉아있던 관객들은 일제히 플랜카드를 들고서 환호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 팬이 흔드는 플랜카드는 아니고, 오늘 라디오에 출연하는 게스트의 팬들이 흔드는 플랜카드였다. 예전에 권이랑 용화와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실 때, 싸인 받은 것 때문에 내심 기대하기는 했지만 팬이 없어서 씁쓸했다.
"사랑해요, 김민식!"
"아? 고맙습니다. 여자분이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죠."
관객석은 용기있는 남자 관객의 외침에 웃음의 도가니탕에 빠져들었다. 교복을 입은 것으로 봐선 학생인 듯 했다.
"용기가 가상하시네요, 이름이 뭐죠?"
"김현준이요!"
"좀 있다가 무대로 올라오세요, 싸인하고 사진 찍어드릴게요."
"우와아아아-! 보고있나 이진호?"
용자의 드립은 멈출 줄 몰랐다. '이진호'라는 정체 모를 이름을 언급하는 것으로 봐선, 그 이름을 가진 남자와 친구관계인 듯 했다. 어쨌든 그 용자 덕분에 공개방송의 분위기는 더욱 더 화기애애하고 유쾌해졌다.
"개인적으로 텔레비젼 프로그램 고정도 꿰찼으면 좋겠습니다. 보고 계십니까, MBC 예능국장님?"
장난스레 말하긴 했지만, 내심 예능 고정패널이라도 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긴 했다. 라디오 수입이랑 겸해서 벌면 꽤나 짭짤할 듯 했다. 가수도 아니니 쪼잔하게는 받지 않을테니까.
"네, 알겠어요. 진행할게요. 워우, 시작부터 아주 행복하네요. 저랑 방송 데뷔일은 얼추 비슷한 것 같습니다. 신인인데도 불구하고, 동생 삼고 싶은 여자 아이돌이에요. 에이핑크입니다!"
예쁘장하게 생긴 일곱명의 소녀들이 쪼르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손으로 나비를 만들며 시작하는 안무를 추고 있었다. 요즘은 예전처럼 가수들 이름을 모르는 일이 없었다. 하는 일이 라디오 디제이라서 연예인 보는 게 일상이니. 그 때처럼 현아를 몰라보거나, 벚꽃축제에서 보았던 효성이를 몰라보거나 그런 일은 없다. 다만, 너무 연예인들을 많이 봐서 놀라진 않을 테지만.
"어, 민트색 리본이 손나은이고… 옆에서 생긋 웃는 애가 정은지고…아까 무대 밖에서 벅학박사라고 어눌하게 말한 애가…박초롱…고릴라 흉내낼 수 있다면서 좀 있다가 시켜요라고 말한게 윤보미…"
그렇지만 이름을 다 외운다는 보장은 없다. 에이핑크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동안, 난 열심히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서 라디오 진행을 하는 데 막힘이 없게 하기 위해서랄까. 인터넷 서핑을 하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에이핑크 멤버만 검색했을 뿐인데, 벌써 한 곡이 끝나간다.
"잘 봤습니다, 조만간 흥하시겠는데요? 이 쪽으로 앉으세요."
스태프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순식간에 8개의 의자를 무대 위로 옮기고 재빠르게 나갔다. 재빠른 그들의 움직임에 나는 진행하면서도 깜짝 놀랐다. 7명의 소녀들은 내 말에 따라 의자에 걸터앉았다.
"…어, 어."
"왜 그러세요?"
속성으로 암기하는 것을 기억하자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뭘 찾는 이 소녀는 박초롱이었다. 아직 무대를 정리하는 타임이라서 짤막한 쉬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나는 마이크의 전원을 끄고는 내 옆에 앉아있는 초롱양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치마가 짧은데 가릴 게 없어서."
"아…."
"다시 시작할게요!"
진행 스태프가 와서 슬레이트를 치고 지나갔다. 방송이 시작되자 초롱양은 어쩔 줄 모르는 듯 했다. 내가 보기에도 다른 멤버들에 비해 참 짧은 치마다. 스태프들이 담요를 챙겨줬으면 좋으련만, 울상인 초롱양을 보고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서 초롱양에게 건네주었다.
"치마 위에 덮으세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나는 초롱양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초롱양은 감사하다고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거렸다. 그런 소리 들으려고 준 건 아닌데, 그래도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마이크의 전원을 켰다.
"제가 라디오 시작한 날짜랑 비슷한 것 같은데, 에이핑크 분들은 언제 데뷔하셨어요?"
"4월 22일이요."
"아, 제가 한 달 정도 더 빠르네요."
"…히히, 선배님이라고 불러드려요?"
"아니요. 어차피 데뷔시기는 비슷하니까 그냥 동료라고 생각할게요. 친하게 지냅시다?"
데뷔한 지 이주일도 되지 않은 생신인이라니. 이 정도로 신인인 게스트는 처음 마주하는 것 같았다. 너무 신인이라서 그런 지, 관객들의 반응도 별 다를 게 없었다. 은근히 동병상련의 처지다.
"초롱양부터 자기소개 해주시겠어요?"
"어, 제 이름 아시네요, 모르는 줄 알았는데."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암기력 하나는 타고났다. 초롱양은 내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깜짝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렇게 놀랠 것 가지야, 그래도 리액션 하나는 죽이네.
"안녕하세요, 청원군 부광리에서 태어난 따뜻한 시골 여자, 따시녀 박초롱입니다."
"오, 청원군이요?"
"청원에서 태어나셨어요?"
"아니요, 부산이요. 라디오를 하다보니 거의 자동으로 리액션을 하다시피 해서…초롱양에겐 죄송하게 됬네요."
초롱양이 급 뻘줌해진 표정을 지었다. 초롱양의 옆에 옆에서 '부산? 부산?'하면서 한 소녀가 난리를 친다. 왜 저렇게 난리인지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자, 다음 소녀, 보미양인가?"
"네, 맞아요! 안녕하세요, 저는 에이핑크에서 춤과 분위기를 담당하고 있는 윤보미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오오오오…춤이요? 여기서 나온 소감을 춤으로 표현할 수 있나요?"
"라디오 아니에요?"
"보이는 라디오에요."
대충 얼버무렸다. 보이는 라디오 일 리가 없지. 내가 박수를 치며 호응을 유도하자 보미양은 마지 못해 의자에서 일어나서 맛깔나게 춤을 추고 다시 조신하게 의자에 앉았다.
"잘 추시네요. 그리고 분위기는 흠…은지양 옆에 나은양이 더 나은 것 같은데?"
"노노, 나은이는 재미 없어요. 전 분위기를 만들죠. 분위기메이커랄까."
"아아, 이해갔다. 다음 소녀?"
보미양이 나한테 해골 한 방을 제대로 먹었다. 우씨, 하는 눈빛이 꼭 나에게 언젠가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는 모습이었다. 복수 한다는 소녀들이 한두 명이 아닌터라 난 무서울 게 없었지만 말이다.
"안녕하세요, 전 부산에서 온 에이핑크 메인보컬 정은지입니다."
"아, 부산출신이세요?"
"네, 사투리로 애교 해드릴까요. 오빠야-."
"어, 음. 저도 오빠야, 라는 말은 거의 20년 동안 들어와서 별 감흥 없네요."
은지양이 금세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툭 떨궜다. 저게 더 귀엽네, 나는 마이크를 꽉 쥐고는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을 한 장 넘겼다. 은근히 조명이 뜨거워서 손에 땀이 찬다. 거기다가 날씨는 여름을 향해서 줄기차게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래도 은지양은 얼굴이 귀여워서 많은 남성분들이 좋아해주실거에요, 저기 봐요. 벌써 몇 분 멍때리고 있잖아요?"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다. 특히 개리같이 생긴 남학생 한 명이 발작을 하듯이 좋아하고 있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그 학생을 가리키자, 그 모습을 본 일곱 소녀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다음 소녀?"
"안녕하세요, 에이핑크의 중심 손나은입니다."
"왜 중심이에요? 비쥬얼?"
"…비쥬얼이요? 그것도 중심이긴 한데, 딱 제가 나이순으로 하면 딱 중간이라서요."
아아, 그렇구나. 라면서 대본 한 장을 또 넘겼다. 오늘따라 대본이 왜 이렇게 두꺼운 지.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좋은 대본이었다. 나은양을 쳐다보았다. 나은양이 당황했다. 나는 당황한 나은양의 표정을 보면서 생긋 웃었다.
"디제이오빠가 장난기가 있으시네요."
"저 원래 장난기 좀 심해요. 그리고 따분한 건 무지 싫어해요."
초롱양이 마이크를 들고 내게 멘트를 날렸다. 나는 멘트 하나를 놓치는 법이 없었기에,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고개를 들고 마이크로 초롱양의 말에 답했다. 초롱양이 내 말에 리액션을 하듯 눈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닉네임을 빨리 만들고 싶은 열여덟살 홍유경입니다."
"별명 만들고 싶으세요? 저 별명 잘 만드는데."
"그럼 저 별명 하나 지어주세요!"
이봐, 별명을 잘 지어주긴 해도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별명을 기발하게 지어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에이, 모르겠다.
"음, 피부가 하야시니까. 홍우유 어때요? 밀크홍이라던가…?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죄송해지네요, 관객들분한테도 죄송하고, 유경양한테도 죄송하고, 에이핑크 멤버들한테도 죄송하고, 피디누나랑 작가누나한테도 죄송합니다."
낙엽만 굴러가도 꺄르르 웃는 풋풋한 나이라더니, 에이핑크 소녀들은 참 내 멘트에 끊임없이 웃어주었다. 뭐랄까, 내가 개드립치면 웃음 보다 죽빵부터 날리는 소녀시대 애들이나 티아라 애들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썰렁한 상황을 어서 수습해야겠네요, 다음 소녀 자기 소개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에이핑크에서 힘과 체력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 김남주입니다."
"어, 꽤나 어린 외모인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나이가?"
"95년생이요, 올해 열 일곱살이에요."
설리하고 수정이보다 어린 아이돌이 있었다니, 이제 스물 세 살이 되어가는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94년생 아이돌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는데, 95년생 아이돌도 있을 줄이야.
"우와, 저랑 몇 살 차이나지? 6살이나 차이나네요. 다음 소녀 소개해주세요."
"안녕하세요, 먹을 때 마다 키가 크는 에이핑크 막내 오하영입니다."
"…!?"
생긴 건 더할나위 없이 에이핑크 리더 포스인데, 가뜩이나 어린 에이핑크 아이들 중에서 가장 막내라니. 은근히 충격적이긴 했다. 그래도, 저렇게 어릴 때부터 노안이면 커서는 예쁘게 큰다고 어른들이 말하지 않는가. 아마도, 방금 자기소개한 남주양보다 어린 것 같으니 대충 96년생으로 추정된다. 더 충격적이다.
"열 여섯살?"
"네, 96년생이에요."
확인사살을 하니,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관객들도 놀라는 사람들이 더러 보이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나 싶기도 하고, 하영양의 나이 때문에 별에 별 생각이 다 떠오르고 있다. 그렇게 에이핑크 일곱 소녀의 상큼한 자기 소개가 끝나고, 토크를 몇 마디 더 하다가 'it girl'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나서 무대에서 퇴장하는 일곱 소녀였다.
+
에이핑크 말고도, 달샤벳이라거나 틴탑이라거나, 여러 아이돌이 나오기도 했고 개그맨 분들도 게스트로 나와서 재밌게 진행한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첫 라디오 공개방송은 막을 내렸고, 한숨을 쉴 틈도 없이 바빴다. 그 때, 내 바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해보니 발신자는 효민이었다. 뛰라는 스케쥴은 안 뛰고, 왜 나한테 전화질이야.
"여보세요?"
[민식아, 민식아, 민식아!]
휴대폰 스피커로 들려오는 효민이의 목소리는 꽤나 다급했다. 발정이라도 났나 싶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왜?"
[우리 큰일났어!]
"무슨 큰일?"
효민이와 나 사이에 스캔들 기사라도 떴나, 싶었지만 기자들이 내 퇴근길에 오오삼삼 모여서 인터뷰를 하지 않은 것을 보니, 그건 절대로 아니었다.
[우리 아빠가…케이블에서 청춘불패 재방하는 거 보다가 너 나온 거 봤나봐, 그 때 내가 너 사촌오빠라고 소개했잖아.]
"…응, 그랬지."
효민이의 아버님이라니, 왠지 효민이가 다음으로 무슨 말을 할 지 대충 상상이 갔다. 잠잠하게 흘러가서 불안하다 싶었는데, 마침 그 설마가 적중한 것처럼 느껴졌다. 벌써부터 똥줄이 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첫사랑을 다시 만난 것보다 더 엿같았다.
[너 누구냐고 계속 물어봐, 방금도 저 놈 집으로 한 번 데리고 오라고 화내셨어.]
"…응?"
권유하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셨다니. 나에겐 더 이상 남아있는 똥줄이라곤 존재하지 않을 듯 했다. 이건, 태연 오빠를 만난 것보다 더 긴장이 되고, 수연이랑 키스하다가 수연이 부모님이랑 마주한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두 세달 사이에 이렇게 소녀들의 가족들을 마주하다니. 생일이 딱 5일 남았는데, 어린이날에 참 상콤한 선물을 받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