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3화 (274/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예순 여섯 번째 과외 - 정자매, 그 청순함에 대하여 6

"대파 썰줄 알아?"

"대파?…그 정도야, 시…식은 죽 먹기 아니겠어! 칼 이리 줘."

수정이가 지레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지만, 난 수정이의 반응에 굴하지 않고 그녀에게 식칼을 쥐어줬다. 수정이는 식칼을 오른손으로 집고, 식탁 위에 올려져있는 여러가지 야채 중 대파를 집어 조리대에 있는 도마 위에 올려놓고 어슷썰기를 시작했다. 서투르긴 했지만, 써는 솜씨가 경험 없는 것치곤 제법이다.

"오…좀 써는데?"

"히히, 내가 요리 못할 것처럼 보여도 하는 여자야, 왜 이러셔?"

하여간 한 번 띄워줬다하면 기분이 대기권 돌파하는 것은 기본이고, 성층권과 중간권을 지나 열권까지 솟구쳐 오르는 수정이였다. 그녀가 써는 리듬이 마치 우리나라 고유의 리듬인 신박한 자진모리장단을 연상케했다.

"오빠 왜 그래?"

"…뭐가?"

"다리 리듬 타는 것 봐, 오빠도 좀 탈 줄 아는데?"

수정이의 말을 듣자마자, 방정맞은 내 다리를 멈췄다. 다리운동으로 인해 생긴 열은 그대로 턱까지 차고 올라와 내 얼굴을 발갛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쉽게 말해서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수정이의 썩은 미소를 보니, 너무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오빠."

"…아오! 응?"

"다 썰었어."

쪽팔림은 집에 가지 않고 멘붕으로 나를 다시 찾아왔다. 수정이의 목소리가 들려서야 원상태로 복귀할 수 있었다. 수정이는 서툴지만 잘 썰은 파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아래로 흐르는 수돗물에 자신의 손을 씻고서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또 도울건?"

"있으니까 식탁에 앉아있어."

수정이는 거실로 가려던 걸음을 급히 멈추고 식탁 의자를 꺼내 그 위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나는 수정이에게 노는 시간 따위를 주려고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붉은 고추를 도마 위에 올려서 수정이에게 건네주었다. 물론 고추를 썰 식칼도 같이 주었다.

"…이것도 썰어?"

"파 잘 썰던데? 그것도 썰어."

"오빤 계란 깨트리면서 난 고추 썰어? 손가락 베이면 어떡해?"

부산 떨지 마라, 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었지만 수정이가 온갖 방정은 다 떨면서도 고추를 썰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준비한 계란이나 젓가락으로 툭툭 쳐서 흰노른자 가리지 않고 껍질 밖으로 토해내게 하고 있었다.

"아, 뭔가 아쉬운데."

계란의 토사물을 투명그룻 안에 넣고 숟가락으로 휙휙 휘저으면서 음식재료 하나가 빠져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잔망스러운 정수정은 예사롭지 않은 썰기로 붉은 고추까지 금방 썰어서 조리대 위로 다시 올려보냈다. 나는 거품을 내며 노랗게 뱅뱅 도는 달걀을 푼 물에 소금과 참기름을 넣고, 달걀 푼 물에 숟가락을 빼며 고뇌했다.

"…씨바, 뭐가 빠졌을까."

"오빠, 계란 푼 물이 도대체 뭐길래 똥폼 잡아?"

"아무 일도, 근데 너 요즘 말투가 많이 터프해졌다? 예전에는 청순해서 참 좋았는데…계속 지 언니 닮아가네."

"호호, 오라버니 제가 언제 그런 폭력적인 언행을…"

태어날 때부터 청순한 여자인 척 하고 있네. 진드기가 개미 똥꼬 빨아먹는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수정이를 보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하여튼, 계란 푼 물에 간을 맞췄지만 뭔가 아쉬운 맛이 맴돌았는데, 더 생각한 후에 그 원인은 다시마 우린 물을 섞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젠장, 다시마 아예 꺼내지도 않았는데.

+

"…히히, 준비는 다 됬어, 오빠."

"응, 나도 드디어 다시마 다 우렸다."

"…배고파아! 밥 언제 나와?"

"드라마 하나 더 보고 있어, 언니!"

수연이가 배가 고픈 지 배를 만지작거리며 표정을 찡그린 채로 징징거리는 소리를 냈다. 수정이는 보채는 수연이에게 간단명료하게 드라마 하나 더 보라는 손짓을 했고, 수연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수정이의 말대로 다른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마를 빼고 그것을 우린 물만 계란에 푼 물에 섞어서 몇 번 휘젓고 뚝배기에 담았다. 그리고 가스레인지의 레버를 돌려 화르륵 일어나는 불을 보면서 다 된 밥을 주걱으로 이리저리 저어 밥 사이에 적당히 공기가 들어가게 했다. 그래야 밥의 맛이 보존되니까.

"…아, 준비 다 했어? 수연이는?"

"아직 눈치 못 챘어. 근데 오빠 연기 좀 한다?"

시트콤으로나마 연기를 해보긴 한 수정이에게 이 소리를 들으니 입가에 미소가 조금 나버렸다. 현 연기자(?)에게 이런 인정을 받다니, 내심 기분이 좋긴 했지만 이런 연기도 다 수정이와 수연이를 비롯한 많은 여자애들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하느라 생겨버린 새로운 행동패턴 중 하나라서 씁쓸하기도 했다. 

"너도 연기 잘 하잖아."

"난 시트콤 계속 찍잖아~"

수정이의 콧대가 갑자기 높아진 건 아닌가 하고, 수정이의 콧대를 그녀가 부끄럽게 느껴질만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다시 원래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흠, 콧대가 높아진 건 아닌데. 진짜 요즘따라 수정이의 성격이 왜 이렇게 변했다고 느껴지는지. 이제서야 질풍노도의 시기가 다가오나!?

"오빠는 어떻게하다 연기가 늘었어?"

"…하하하."

인생이 연기인데, 안 늘고 배기겠냐, 수정아. 라고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내 진모습도 연기라고 의심받을까봐 일부러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여튼 수연언니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두근두근거리며 기대하고 있어."

"…한 두시간정도 더 기다려야할텐데?"

"밥 먹다보면 금방 가겠지 뭐."

수정이는 의외로 쿨했다. 수정이의 말에 수연이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티비에 나오는 드라마에 집중하느라 주방 상황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있었다.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그리고 나도 준비 됬어…"

수정이는 내게 끈적한 말투로 말하면서 귀에다가 귓바람을 천천히 불어넣고는 입고 있던 상의를 배꼽까지 올리다가 다시 내렸다. 이 흥할 고양이가 물에다가 농약 타서 먹었나, 오늘따라 왜 저렇게 멘탈이 붕괴된 모습만 골라서 보여주는거야?

"집에 가지마~ 베이베~"

수정이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툭 치면서 주방에서 빠져나왔다. 팔을 뻗으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릴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지만 실천으로 옮기진 않았다. 어느새 수정이는 자신의 언니인 수연이 옆에 앉아서는 같이 드라마를 감상했다. 결국 저녁상을 세팅하는 것은 나의 몫이였다. 밥공기 세 개를 꺼내 주걱으로 퍼낸 밥들을 차곡차곡 담았다. 하얗게 피어오르며 사라지는 뜨거운 김과 반질반질한 밥알의 윤기를 보니, 오늘은 밥이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과 냉장고 안에 있던 밑반찬들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마지막으로 냄비받침을 식탁의 가운데에 놓았다. 뚝배기의 뚜껑을 열어보니, 계란찜이 맛있어보이는 샛노란 빛깔을 반질하게 내고 있었다. 나는 주방용 장갑을 손에 끼고 조심스럽게 뚝배기를 받침 위에 올려놓고는 다시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한창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는 두 소녀를 향하며 외쳤다.

"정자매, 밥 먹어!"

역시 밥을 기다린 것이 완벽한 사실이었다. 내가 소리를 치자마자, 수연이의 몸이 본능적으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

"…히힛, 맛있다."

"그렇게 맛있어? 얼굴에 웃음꽃이 폈네."

수연이는 밥을 먹으면서도 얼굴에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처음엔 약이라도 했나, 의심될정도로 너무 히죽거리고 있는 그녀였지만 차츰 미소를 줄이는 듯 했다. 그래도 웃음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수정이는 많이 배고팠는지, 식탁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손목을 빠르게 움직여댔다.

"생일 때…이렇게 편안하고 가족같은 분위기는 오랜만이라서. 어릴 때도 엄마랑 아빠 둘 다 맞벌이 하시느라 바빠서 수정이랑 둘이서 집에서 조촐하게 초코파이 하나에다가 초 한 개 꽂은 게 생일파티였거든. 우리가 소녀시대로 데뷔했을 때도 생일마다 꼭 우울한 일이 생기고 그래서 내 생일을 챙겨줄 시간이 많이 없었나봐. 오늘만 봐도 그렇잖아, 태연이 하마터면 납치될 뻔하고…그래도 민식이가 있으니까, 생일도 챙기고…히힛, 기분 좋다."

수연이가 지은 그 날의 미소는 봄길 위의 벚나무에 찬란히 떨어지는 꽃잎보다, 시원하게 다가오는 여름바다의 조잘대는 파도소리보다, 가을하늘의 끝없는 푸르름보다, 겨울산의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달린 눈부신 눈꽃이 맺힌 모습보다 아름다웠다. 

"…케, 켁. 언니, 오빠, 난 잠깐 화장실좀!"

오랜만에 진지하면서도 밝은 분위기로 빠지나했는데, 수정이가 그 분위기를 깨버렸다. 사레가 들린건 지, 연신 기침을 멈출 줄을 몰랐다. 나는 분위기를 깨버린 수정이에게 한 소리를 하려고 했지만, 화장실을 가려고 하기 전 내게 한 윙크에 난 수정이의 뜬금없는 행동의 원인이 무엇인지 눈치채고 갔다오라고 손짓했다.

"…너는 무슨 밥 먹다 말고…"

"히히, 미안미안!"

수정이는 자연스럽게 수연이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내 대신 수연이가 수정이에게 한 소리를 했고, 수연이도 내심 좋은 분위기를 깨버린 수정이가 얄밉긴 했나보다. 나는 푼수스러운 수정이의 모습에 웃음소리를 짤막하게 냈다. 이윽고 위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제서야 수연이는 수정이에게 시선을 뗀 채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수정이와 같이 밥을 먹을 때와는 다른 느낌의 눈빛이었다.

"…왜?"

"민식아…나 솔직히…너 조금 불안해."

"…어?"

수연이의 얼굴에는 금새 걱정하는 모습이 어렸다. 부모님이 죽어도 자기 여자는 걱정시키지 말라고 했는데, 수연이의 얼굴을 보니 벌써 두 번째다. 한 번은 태연이, 이번에는 수연이인가. 아니면 나 몰래 내 걱정을 하는 여자애들이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너랑 수정이."

"…아."

"동생이니깐…그래서 더 걱정이야…그리고 나도 너 좋아하고…그 때 보니까 수정이도 너 좋아하는 듯 싶고…지금 이 모습이 괜찮긴하지만…난 네 진짜 속마음을 알고 싶어. 넌 내가 좋은거야…아님 수정이가 좋은거야?…아니면 우리 둘 다야?"

"수연아, 미안한 이야기인 것도 알고, 내가 뻔뻔한 것도 아는데,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수정이가 그렇게 나온 뒤로 나도 혼란스럽고…진짜 수연이하고 수정이한테 내가 미안한 게 많다."

"…아, 아니야. 혼란스러워 할 필요없어…헤헤, 미안해…괜히 이상한 소리를 해서…"

잠시 진지한 대화가 오고가자, 수연이와 나 사이에서 흐르는 기류는 꽤나 어색했다. 그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서로를 힐끔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분위기의 변화가 필요했다. 화장실을 가는 수정이는 어디 갔나, 지금 이럴 때 와야지. 라고 속으로 궁시렁거리는 동안 갑작스레 집 안의 전등이 모두 꺼졌다. 일시적인 암전현상인가 했지만, 어두운 공간에 점점 아스라이 촛불빛을 퍼뜨리는 수정이를 볼 수 있었다.

"…꺄아, 이게 뭐야?"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수연이(수연언니)~ 생일 축하합니다~ 불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생일용 폭죽을 그녀들을 피해 위로 세게 당겼다. 폭죽의 파열음과 함께 형형색색의 종이띠가 허공에서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 수연이는 놀란 모습을 감추지 못한 채, 우리들의 재촉에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빌고는 활짝 웃으면서 촛불 다섯 개를 입김을 불어 꺼트렸다. 수정이가 든 케이크를 수연이가 끄자, 나는 열렬히 박수를 쳤고 수정이도 기뻐하면서 다시 거실의 불을 켰다. 수연이는 이미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 울먹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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