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예순 다섯 번째 과외 - 정자매, 그 청순함에 대하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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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같이 씻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고 하더니, 딱 지금 상황과 맞아 떨어졌다. 예능프로그램의 시작을 보고 끝을 봐도 정자매는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자매의 집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막 노을이 지기 시작했던 하늘은 어느새 검은 물감을 하늘색 도화지에 조심스레 퍼트려 놓은 듯 고운 검은 빛깔을 보여주고 있었다.
"…흐으, 언니!"
"…히히, 왜?"
반갑게 들려오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위를 쳐다보았다. 꿈 속에서 막 나온듯한 환상적인 미모는 이미 지워진 지 오래였고, 이쁘장하고 풋풋한 얼굴로 자매의 애정을 더할나위 없이 보여주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수정이는 수연이에게 화장실에서 당한 일이라도 있었는 지 짜증을 내고 있었다.
"…샤워하면서 거길 만지면 어떡해!, 부끄럽게."
"히히, 자매사이에 부끄러운 게 뭐가 있다고, 어쨌든 수정이 많이 컸네? 궁디 팡팡 해보자, 팡팡!"
수연이의 아기자기한 손바닥이 수정이의 튼실한 엉덩이에 찰지게 붙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수정이는 당황했는 지 순간적으로 미국 욕을 하며 깜짝 놀랐지만, 용의자인 정수연은 여전히 태연한 웃음을 지었다.
"…으으, 변태 언니."
수정이는 자신의 엉덩이에 궁디팡팡을 시전한 수연이를 매섭게 노려봤다가도 금새 눈웃음을 지었다. 원래는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맞는 표현이지만, 이번 경우에만 특별히 자매사 새옹지마도 잘 적용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저런 모습을 보는 나는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갑자기 마네킹처럼 느껴지네.
"뭐야, 그 표정은?"
"응? 뭐가?"
수정이는 넓직한 거실로 걸어오면서 내 표정을 슬쩍 쳐다보았나보다. 실망한 표정은 짓지 않았지만, 오해할만한 표정은 충분히 지었다는 느낌은 들었다. 지금은 그 표정이 아니긴 하지만.
"실망했나?"
"…아니, 너무 친근해서. 가끔씩 그 쌩얼 보잖아?"
이게 둘러대는 말이랍시고 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수정이의 묘하게 차갑게 느껴지는 표정 대신 해빙된 웃음을 짓는 것으로 봐선 지금은 아까같은 분위기가 아닌 듯 했다. 수정이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오더니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하필이면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아버렸다. 내가 앉는 순간 다리가 서로 맞닿는 거리를 두는 수정이였다.
"…헤헷, 오빠 앉아. 뭘 그러고 서 있어?"
"…그럴까?"
수정이가 눈치를 채지 못하게 게걸음으로 옆으로 몇 보 떨어진 뒤 소파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래도 그녀의 다리와 찰싹 달라붙은 채 앉는 꼴이 되버렸다. 아무래도 내가 벽을 보며 앉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도 몰래 옆으로 몇 보 더 갔다는 것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윽고 수정이가 팔짱을 끼며 내 팔에 기댔다.
"…이 여우 같은 기집애, 벌써 팔짱 꼈네."
"언니도 얼른 와서 끼면 되잖아."
도대체 누구 언니이고, 누가 동생인 지. 성격으로 봐선 수정이가 언니고, 수연이가 동생같은 느낌이 풍겼다. 수연이는 수정이가 내리는 간단한 해결책에 빵긋 웃으면서 나의 오른팔을 차지했다.
"근데 부모님은 어디 계셔?"
"왜, 우리랑 사귀는 거 말씀드리게?"
"아니, 그 전에 나가보게. 가족끼리 있어야되는데 내가 있으면 방해되잖아."
정자매는 대답 대신 팔짱만 더 깊이 껴안았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수정이의 얼굴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수연이의 얼굴이 보였다. 전에 극장에서 있을 때랑 위치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건 없었다.
"저녁 늦게 와. 아직 멀었으니까 걱정하지마."
그나마 수연이가 입을 열며 내 질문이 뻘줌하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수연이 나이 정도되면 부모님이 40대 후반이시거나, 50대 초 중반이실텐데 정말 바쁘게 일하신다고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은 딱 하루에 8시간만 일하고 퇴근하는데.
"…아, 바쁘셔?"
"뭐, 그렇지."
수정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자매가 번갈아면서 말하다보니 누구한테 고개를 돌리며 들어야할지 헷갈려 미치겠다.
왼쪽 어깨 위로 수정이의 턱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보다 오빠, 오늘 왔으니깐…"
"…왔으니깐?"
영화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같은 표정을 짓는 수정이였다. 이런 눈빛으로는 절대로 이상한 말 따윈 할 리가 없으니, 우선 정자매와 나 밖에 없는 이 집에서 조금의 가능성을 두고 있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안심했다.
"밥 해줘."
"밥 해줘…오빠…응?"
아, 이럴려고 밑밥을 깔아두었구나. 어쩜 정자매의 생각이 이렇게 똑같을 수 있는 지. 아무래도 둘이서 목욕할 때 미리 짜놓은 생각 중 하나일 것라고 추측했다. 그렇다고 하지만, 나도 출출했던터라 바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싸!"
내가 소파에서 일어나는 게 그리 신나는 일인가. 수정이는 만세를 하면서 거실을 요란하게 돌아다녔다. 수연이는 수정이와 다르게 차분하게 소파에 앉은 채 여성잡지를 읽고 있었다.
"재료 있어? 마트 가야되는 건 아니지?"
"응, 충분히 있으니까 그걸로 만들어줘, 아…참!"
수연이는 잡지에 눈이 간 채로 입을 떼며 말하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 지 시선마저 이 쪽으로 향했다. 설마, 소금같은 조미료가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정자매의 집으로 걸어올 때, 주위를 대충 둘러보았지만 이렇다할 구멍가게도 없던데. 그 고생하기는 짜증나서 싫다.
"나 좋아하는 그것도 해줘!"
"…딸기 아이스크림?"
"역시 딱 아네~"
수연이는 사랑의 권총 제스처를 하며 윙크를 날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수연이가 오늘 약을 안 먹었거나, 잘못 먹었다고 생각했다. 수정이는 동생이 되가지고 언니를 챙겨줄 생각을 해야지. 저렇게 방방 뛰고 있으니, 아무래도 자매 모두 언덕 위에 하얀 집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료는?"
"다 있을걸?"
재료를 확실히 확인하려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우유도 있고, 딸기도 있고, 생크림도 있고, 시럽도 있다. 심지어는 레몬즙도 있었다. 선반을 열어보았다. 설탕이 있었다. 슬프게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가 전부 다 있었다. 수연이가 딸기 아이스크림 레시피는 어떻게 알았는 지는 미지수지만.
"그럼 일단 딸기 아이스크림부터 만들어볼까…"
요리하는 데 기름이나 여러가지 음식물들이 소매에 안 묻게, 소매를 팔꿈치 위로 걷어붙였다. 그리고 옷 위로 튀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앞치마를 둘렀다. 물론 뒤로 끈을 묶는 도와주는 정자매는 없었다. 그 정자매는 티비에서 나오는 할리우드 미남 배우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냄비가, 아 여깄다."
스테인리스 냄비를 꺼내서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약한 불을 켰다. 다행히도 딸기가 냉동실에 있던터라 남은 것을 모조리 냄비에 쏟아붓고 설탕과 레몬즙으로 간(?)을 맞추며 으깨기 시작했다.
'…아놔, 이것도 노동이야, 노동.'
'냉동딸기'인터라, 숟가락으로 으깨어봤자 내 손목만 나갈 것 같은 고통만 선사할뿐이었다.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절구방망이로 으깨었다간 냄비가 부서질테고, 믹서기에 갈았다간 날이 휠 지도 모르는데. 아, 근데 냉장고가 화력이 왜 이렇게 좋은지. 꽁꽁 얼어붙어서 진짜로 손목이 눈물나게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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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으깼네.'
으깨진 딸기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앞치마는 이 집 사람들의 것이니, 유일하게 내 것인 내 손으로 닦는 수 밖에. 냄비 안에서 달궈지고 있는 으깨진 딸기가 보글보글 거품을 내며 끓을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그 동안 다른 요리를 준비하면 된다. 내일은 수연이 생일이니 미역국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수정아, 미역 있어?"
"미역? 언니, 미역 있나?"
"나, 미역국 먹기 싫은데…"
그냥 주는 대로 쳐먹어! 라고 어필하고 싶었지만, 수연이의 야무진 주먹맛을 경험한 나로써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수연이의 손에 집히는 모든 것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이런 게 불가능하다고 믿는가, 직접 경험해보면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어찌됬든, 내일의 주인공인 정수연양께서 친히 미역국을 잡수시지 않겠다고 말하니 다른 요리를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냥, 정자매 몰래 반찬가게에서 반찬 시켜서 내가 만든 것처럼 낚아볼까…'
괜찮은 방법이긴 했지만, 내 지갑에서 빠져나가는 한국의 세 위인님들의 영혼이 빠져나가는 리스크와 곧 닥칠 미래의 공포감을 맛볼 수는 없었다. 내 별명 중에는 김장금(사실의 진위여부는 가릴 수 없다)이라는 것도 있는데, 내가 요리를 하면 했지, 남이 만든 요리를 내가 만든 마냥 시늉을 할 순 없었다. 아, 그냥 딸기 아이스크림 먼저 조공하고 만드는 요리는 그 이후에 생각해야겠다. 나는 다시 냄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거품이 보글보글 일어나고 있었다. 끓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나는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밸브를 잠궜다.
'…앗, 뜨거!'
뒤에 육두문자를 집어넣어야 정상적인 반응이지만, 이런 상황을 보고 있을 정자매라거나 자라나는 대한민국의 묘목들을 위해서라도 일종의 캠페인 겸 육두문자를 생략해서 상황을 더 재미없게 만들어보기로 했다. 거품이 가라앉을 때까지 딸기퓨레를 식힌 뒤, 냉장실에 있었던 남은 우유와 시럽을 퓨레로 쏟아부었다. 그리고는 고운 색깔이 나올 때까지 골고루 섞었다. 이것도 아까 딸기를 으깰 때처럼 일종의 노동이었다. 손목의 고통은 심하면 심했지, 아까보다 이하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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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아, 냉동실에 얼리면 끝이다."
"…민식아, 아직 멀었어?"
"오빠, 메인 디쉬는?"
나의 고통의 시간은 이제 끝이 났고, 남은 것은 딸기 퓨레가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려야하는 인내의 시간 뿐이었다. 칭얼거리는 수연이를 진정시키며 소파에 앉아있다가 물컵을 거실로 가지고 오는 수정이의 말에 나는 다시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만들기 귀찮아 죽겠네. 확 야매요리를 해버릴까…"
"…뭐라고, 오빠?"
요 놈의 기집애는 참 귀도 밝아요. 중얼거린 걸 어떻게 다 듣고 있냐. 낮말은 수정이가 듣고, 밤말은 크리스탈이 듣는 다는 속담(?)이 거짓말은 아닌 듯 했다. 순간적으로 어느 블로그에 나오던 야매요리포토툰을 따라서 나도 그렇게 만들어볼까, 라고도 생각은 해보았지만 내일이 생일인 수연이의 저녁상에 예의상 그렇게 대접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요리를 하는 사람의 자부심이랄까, 후훗. 자부심은 개뿔, 아마도 '맞을까봐 두려워서' 라는 이유가 내 행동을 이끌어내는 원천 중 반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야, 정수정."
"…오빠, 왜?"
"너 할 일 없지. 할 일 있다고 하지마, 니 놀고 있는 거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혼자서 주방에 있기는 너무 심심했고, 나는 일종의 요리 보조겸 말상대가 필요했다. 수연이는 텔레비젼에 나오는 프로그램이나 핸드폰으로 시간을 때우면 되는 일이었고, 그리고 수연이는 내일이 생일이기도 하니까 딱히 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생일까지 여섯 달 남았고, 계속 '오빠, 오빠' 거리면서 신경 거슬리게 하고, 수연이보다 말은 많은 수정이를 내 요리 보조 겸 말동무로 임명하기로 했다.
"…치, 요리 도와달라고?"
역시 말이 좀 많긴 해도, 눈치 하나는 제대로네. 아주 타고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