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0화 (271/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예순 세 번째 과외 - 정자매, 그 청순함에 대하여 3 

"…바빠요."

"푸훕…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거야? 댁이 연예인이야? 지금 댁은 누가 봐도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데…김태연, 이 사람 알아?"

"…아, 아니."

특별히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라서 무작정 주먹을 휘두르기도 좀 그랬다. 그렇다고 태연이 자신을 납치하려고 하는 남자에게 계속 손이 잡혀있어도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바쁘다니까!"

"…어억?"

"등신아, 그러지 말고 태연이 손목 잡아!"

누구의 목소리인가 했더니, 순규의 목소리였다. 밀쳐지긴 했어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완전히 밀려나는 것도 아니었다. 어깨가 살짝 뒤로 갔을 뿐. 순간 그가 밀치는 바람에 당황하긴 했어도, 순규의 말을 듣고 나서 곧바로 태연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나와 그 놈의 팔 말고 갸녀린 손 하나가 태연의 손목을 잡았다. 순규의 손이였다.

"…놔, 놔!"

"뭘 놔…으읍…하, 드디어 뺐네. 써니, 태연이 손 잡고 무대 위로 올라가."

"…씨발,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계획한건데!…으악!"

순규는 태연이의 손을 잡고 다시 무대 위로 올랐고, 관객들의 환호성은 점차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태연은 정신이 많이 혼란스러웠을텐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죄송합니다, 공연 중에 부득이하게 사고가 생겨버렸네요. 런데빌런 다시 하고 갈게요.'라고 말했다. 이윽고, 런데빌런의 음악이 공연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태연을 납치하려고 시도를 했던 그 놈은 내가 잡은 손목을 빼려고 하다가, 몸의 무게중심이 기울어져 계단 아래로 추락했다. 

"…응?"

그냥 자기 혼자 떨어지면 모르겠다. 내 바짓깃은 왜 잡고 떨어지는건데. 벨트로 바지를 제대로 봉인한터라, 바지가 내려가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같이 떨어지는 불상사는 벌어져버렸다. 놈 위에 엎어지듯 넘어졌지만, 놈이 완충작용을 해주는 덕분에 내가 다친 건 전혀 없었지만, 이 놈은 불행히도 머리부터 떨어진 것 같았다.

"…오빠!"

"기절했나?"

수정이와 설리가 내가 있는 쪽으로 급하게 달려왔다. 아마도 내가 넘어졌으니, 걱정 반에다가 철면피로 태연이를 납치한 범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궁금함 반으로 왔겠지. 설리는 어디서 구했는 지 모를 긴 막대를 든 채로 오고 있었다.

"…그거 뭐야?"

"아, 이거. 우리 공연할 때 쓴 지팡이."

"그걸 왜 가져와."

"이거 해보려고."

설리는 자신이 가지고 온 검은 지팡이로 쓰러진 범인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그러더니 꺄르르 웃어댔다. 수정이와 나는 그런 설리의 이상한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빠, 진리 이상해."

"응, 내가 생각해도 그래."

"히히."

무대 뒤라서 관객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단 대서특필로 '태연, 납치 당할 뻔 하다'로 스포츠신문의 헤드라인을 크게 장식할테고, 부수적인 면으로 설리의 이런 모습이 뉴스에 떴다간…쌓아둔 청순 이미지가 날아갈 수도 있을 듯 했다. 

"야, 그만해."

"…진리야, 그만해."

"그냥 기절한 거 확인해봤는데, 기절했네."

설리는 계속 지팡이로 범인을 찔러보다가 아무 반응도 안 보이자 재미없어하면서 뜬금없이 지팡이를 내게 주었다. 책임을 전가하는건가? 지팡이를 내게 넘긴 설리는 자신의 옷소매를 팔꿈치 위로 걷어부쳤다. 이번엔 또 뭔 짓을 하려고.

"…지금 뭐 해?"

"수정아."

"…응?"

"우리가 태연언니 대신 이 사람 때릴까?"

뭔 짓이 이번엔 대리폭행이라니. 설리의 본성이 이런 거였나?! 나한테 그 동안 부렸던 것은 다 내숭이었단말인가. 수정이도 설리의 지금 모습을 보고 낯설어하는 것을 보니, 수정이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나보다. 그렇다면 아까 먹은 도시락에 누가 헛소리하는 약 좀 탔나보다. 아니면 물병에다 탔거나.

"설리야, 정신 차려!"

"응? 왜, 나쁜 사람이잖아. 대신 때려주자."

"우리가 소모하는 칼로리가 안타까워!"

"…!?"

친구의 폭행을 말리는 드립이 생물1 같은 드립이라니. 문과생으로는 참으로 꺼려지는 드립이였다. 수정이와 설리가 저러고 노는 것을 보며 난 네 걸음쯤 그녀들에게서 물러섰다. 것보다, 경호원들은 언제 오는거야.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공연장 순찰하고 있다가 태연씨가 사고당한 현장을 멀리서 목격하고 뛰어왔습니다."

"…아, 네. 설리하고 수정아. 경호원 분이 처리하신다니까 거기서 비켜드려."

기절한 사람을 쳐다보면서 서로 신명나게 대화를 하고 있었던 두 소녀는 경호원이 다가오자 모세의 기적처럼 양 옆으로 비켰다. 경호원이 쓰러진 사람을 일으켰고, 잠시 후에 경호원 두 세 명이 더 와서 쓰러진 사람을 데리고 관객들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비상구로 걸어갔다.

"지금은 소녀시대!"

"…어? 끝났나보다."

수정이의 말에 설리와 나는 일제히 몸을 돌려 소녀시대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수정이는 소녀시대 애들이 내려오자마자 수연이에게 달려가 포옹을 했고 수연이도 활짝 웃으면서 다가오는 수정이를 껴안았다. 나는 사이좋은 정자매를 흐뭇하게 쳐다보며 웃다가 맨 끝으로 내려오는 태연이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정자매를 보면서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점차 사라졌다.

"…태연아, 괜찮아?"

"뭔 일 있었어?"

"짜식, 그래도 프로답더라?"

"…히히, 볼 꼬집어주라."

"으이구…장하다, 김태연!"

나같았으면 멘탈이 붕괴되서 공연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텐데, 그에 비하면 태연이의 멘탈은 상상할 수도 없이 알맹이가 꽉차보였다. 아이돌이 프로정신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지만, 적어도 소녀시대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태연의 볼살을 양쪽으로 잡아당기며, 의연하게 대처한 태연이에게 진심으로 다독여주었다.

"…진짜 괜찮지?"

"응, 괜찮다니까."

나는 태연이의 등을 툭툭 쳐주며 태연이를 대기실로 먼저 보내고 수정이와 설리랑 같이 대기실로 뒤따라갔다. 앞으로 남은 공연은 슈퍼주니어와 동방신기, 그리고 대망의 소속사 단체 엔딩밖엔 남아있지 않았다. 

+

"…으아, 말도 안 돼! 사장님 불러야겠다!"

수영이는 콘서트를 끝내자마자 생긴 각종 개인 스케쥴에 미쳐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저 스케쥴에 수연이도 있어야했지만 나의 입김(?)이 들어간 덕분에 오늘의 스케쥴엔 수연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숙소에 가서 편히 쉬면 되니 혼자서 라디오 스케쥴을 더 뛰어야하는 수영이를 위로하는 데 바빴다. 뭣하러 입김을 불었냐고 묻는다면, 내일은 수연이의 스물 세 번째 생일이라는 이유 때문이였다.

"수연이 오늘 외박한다며? 내일 저녁에 또 케이크로 테러해줄테니까 집에서 잘 쉬고 와."

"응, 근데 테러시키려다가 니가 테러당한다, 김초딩."

"낄낄, 그게 쉽게 될까?"

효연의 장난기어린 말투에 모두가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소녀시대 멤버들은 참 자기들끼리 재밌게 사는 것 같았다.  수연이는 효연이를 향해 주먹을 움켜쥐며 귀여운 협박을 해보았지만 효연이는 오히려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민식이하고, 수연아, 잘 갔다와!"

미영이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마스터한 눈웃음을 싱그럽게 날리며 손을 흔들었다. 수연이도 조그맣게 손을 흔들며 나왔다. 

"언니들, 민식오빠 표정이 어째 '계획대로다' 라는 표정인데요?"

"에이, 설마. 민식이가 사장님이랑 비밀회동을 열어서 수연이만 빼내게 만들겠어?"

"…가, 갈게!"

윤아가 가끔, '오빠, 그거 알아? 미영언니 똑똑하다?' 라는 말을 할 때마다 빵 터지곤 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윤아가 하는 말이 전부 거짓말이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미영이의 생각은 은근히 유아틱하다. 그래서, 다른 멤버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상상을 미영이가 가끔씩 해서 나를 한 방 먹일 때가 종종 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미영이는 내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고, 치고 들어오는 미영이의 말에 찔린 나는 대기실을 얼른 빠져나가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둘이서 어디가! 나도 같이 가야지, 언니 나는 자매 아냐…!?"

"아, 맞다. 수정이도 있었지…히히, 미안."

수정이는 수연이가 자신을 챙기지 않고, 신이나서 나랑 같이 걸어가는 것에 대해 서운해하는 듯 보였다. 그녀의 눈빛이 수연이 말고도 나한테 향한 것을 봐선 나한테도 마찬가지로 서운하게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빠하고 언니하고 쌍으로 실망시키는구만?"

"…헤헤, 미안."

"미안해. 수연이가 갑자기 끌고 가는 바람에."

"뭐야? 왜 나한테 책임을 돌려? 흥."

나의 대처가 오히려 화를 불렀다. 정자매가 한 쪽만 삐지는 것도 아니고 쌍으로 삐지면 나보고 대체 어쩌라는 건가. 둘이 뿜어내는 차가운 아우라 때문에 그 사이에 끼어있는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아, 둘 다 미안."

"그럼 됐어."

"그럼 됐어, 오빠."

으아니? 쉽게 쏜 화살을 쉽게 빼버리게 만든 그녀들이였다. 그래서 더욱 허탈했고 내가 그녀들이 토라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긴 했지만, 오히려 더 피해자 같았다. 

"…풀린거지? 그럼 이제 수연이 생일 기념으로 여러 군데 돌아다니자."

"그래!"

내일은 4월 18일. 수연이가 세상의 빛을 처음으로 본 날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일 전에 이브가 있는 것처럼 싴탄절의 이브 겸으로 4월 17일인 오늘, 나는 정자매와 함께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놀기로 했다. 허나, 맡아지는 정체 모를 스멜이 예전에 겪었던 정자매와의 데이트가 악몽처럼 끔찍하게 느껴졌다. 제발 그런 일을 답습하는 일은 없었어야 할텐데 말이다. 근데, 이건 정자매 목소리도 아니고 내 목소리도 아닌 것이, 무슨 목소리지? 난 낯설지 않은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곳엔 설리가 있었다.

"…설리가 여기는 왜?"

"씨이, 오빠. 생일 지난 지 3주 다 되가는데 언제 사 줄꺼야! 사준다면서!"

설리의 이야기가 순간 무슨 소리인가 했다. 그러나 이윽고, 설리의 생일 때 그녀가 스케쥴 때문에 시간을 못 내서 선물을 주거나 살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해결해주겠다고 말한 것 같기는 했다. 근데, 하필이면 설리의 생일선물로 돈 써야하는 날이 정자매한테 돈 써야하는 날과 겹치다니, 출혈은 배가 되겠구나.

"…그, 그랬니?"

최대한 내가 당황한 것을 티를 안 내려고는 노력했지만, 난 매사에 감정이 솔직한(?) 사람이었기에 당황한 역력을 얼굴에 그대로 보였다. 설리는 당연히 나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있었으니 나보다는 훨씬 더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응, 오빠 지갑 열게 만드려고 왔지. 우리 숙소로 가는 길에 멋진 옷집이 하나 있더라구, 히히."

"…아, 그래?"

분명히 입은 웃고 있는 데, 눈가가 시큰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웃고 있는데, 이게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정도로 감정이 울컥해지는 것은 왜일까. 설리 생일선물을 사주는 데, 정자매는 왜 내게 초롱초롱하고 영롱한 눈빛을 보내는 건 왜일까. 지갑이 있는 주머니를 매만지는 내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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