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9화 (270/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육십 두 번째 과외 - 정자매, 그 청순함에 대하여 2 

수정이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갔다. 보이지 않는 그녀의 시선이 내 시선과 맞닿은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한 발자국씩 그녀가 나에게 다가왔다. 정수정, 그녀도 머리가 꽤나 빠르게 돌아가는 여자였다. 관계자 측에서 내 도시락까지 준비할 여유가 있었을 리 없었을테니까.

"오빠."

"…으응?"

똥줄이 타는 냄새가 가슴 속으로 깊이 전해진다. 수정이가 입을 열어서 나를 향해 한 짧은 한 마디가 날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일까. 바닥으로 쏟아진 물처럼 시간도 돌릴 수 없었다. 양심이 없다면 치엔누나와 설리의 반찬으로 어떻게든 빈 구석을 채워내기야 하겠지만, 뚜껑을 열기 전의 모습으로는 절대로 되돌릴 수 없었다. 그녀의 팔이 들렸다. 난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눈 감아? 오빠."

"…아, 먼지가 눈에 들어가서."

씽크빅 돋는 창의력을 발휘하는 기지로 첫 번째 위기는 벗어났다. 그렇다고해서 도시락 본질의 모습을 구현해내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많은 신들이시여. 수정이로부터 저를 보호해주소서.

"아, 맞다. 오빠."

"응?"

"도시락 있잖아…"

때가 왔다. 정수정이 내가 자신의 도시락을 까먹은 죄를 엄중히 처벌하는 저지먼트데이가 왔다. 언제 챙겼는 지, 그녀가 손에 쥔 일회용 젓가락은 이내 내 몸 어딘가를 반드시 건드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 자리엔 새싹 대신 피멍이 생기는 것 당연지사한 일. 눈치없이 도시락 까먹은 내 잘못이지.

"…같이 먹으면 안 돼?"

벌을 받을 각오가 충분히 되어있었는데, 수정이의 저런 말로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아니면, 내가 너무 수정이를 과대해서 망상했는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예전에 설리의 상반신 노출사진으로 날 낚아서 데이트를 할 정도면, 그 정도 눈치는 챌 줄 알았는 데 말이다.

"그, 그래…의자 가져와서 설리 옆에 앉아."

"…히히. 의자는 이미 준비했지!"

에프엑스 비쥬얼 세자매와 나란히 앉아서 먹는 점심식사가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르겠다. 설리는 내 옆자리에서 밀려났다는 것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수정이에게 자리를 양보해줬다. 설리가 비켜준 자리에 앉은 수정이는 자신의 젓가락으로 곧장 자신의 도시락에 있는 반찬들을 집어서 입 안에 넣으며 눈웃음을 지으며 먹어댔다.

"…하아, 다행이다."

"응? 뭐가?"

"아니야. 근데 소녀시대 애들은 공연 아직 안 끝났어?"

이 놈의 입이 방정이다. 겨우 벗어난 위기 다시 되돌릴 뻔 했네. 그러고보니, 소녀시대가 대기실에서 나간 지 시간이 조금 된 것 같은데 아직도 안 나오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있나 싶기도 했다.

"응. 언니들이 인기가 좀 많아야지, 한 6~7곡 부르다가 내려올 걸?"

"그래?"

"오빠, 우리 이거 다 먹고 같이 언니들 공연 보러 가자."

설리가 밥을 먹다말고 내게 말을 걸었다. 그 전에 내 물음에 대답을 해준 건 수정이였다. 어차피 수정이랑 같이 도시락을 먹고 있느라 다른 애들보다 밥 먹는 속도가 더 빨라질 수 밖에 없었고, 대기실에 갇혀있는 것도 너무나 지루한 일이니 현장과 연결된 모니터로 보는 것보단 직접 공연장에서 소녀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는 게 더 마음에 와닿을 듯 했다.

"그래, 그럴까? 누나는?"

"난 됐어, 나이가 들었는 지 몸이 피곤해서 수정이가 잤던 자리에서 자야지."

나이가 들어봤자 얼마나 들었다고, 87년생이니까 겨우 스물 다섯살이면서. 미국의 마돈나는 나이가 40대를 훌쩍 넘겼는 데 콘서트 활동은 잘만 하더만. 그래도, 체력 조절을 하는 미국의 가수들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아이돌들은 기획사의 횡포에 놀아나 갖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자칫하다 스캔들이라도 나면 고생을 하면서 쌓아놓은 이미지가 바닥으로 내쳐지기가 빈번해, 동정을 해줄 수 밖에 없는 처지인데다가 그 갖은 고생 때문에 쉴 틈이 없어서 체력이 남아나지 않는 것을 보면 눈시울이 가끔씩 젖곤 했다.

"알았어, 루나하고 엠버는?"

"오빠, 나는 안 물어봐?"

"그래, 지은이 너는?"

"나? 스녕이랑 대화할건데. 메롱."

"오빠, 나도 지은이랑 여기서 그냥 떠들래."

"오빠, 저도 치엔언니처럼 자고 싶어서."

지은이한테 또 낚여버렸다. 요즘따라 지은이가 방송활동을 많이 한 만큼 센스가 많이 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서 배운 센스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사람 허탈하게 만드는 데는 기막힌 센스다. 잠깐 정리를 하자면, 설리와 수정이를 빼고 나머지 세 멤버하고 지은이는 대기실에 있겠다는 이야기였다.

"흐으…다 먹었다."

"설리, 너는?"

"나, 조금 남았긴 한데 배불러서."

"그럼 일어나자."

내가 말한 것을 그대로 이행해야하는 사람은 두 명, 허나 일어난 사람은 세 명이었다. 물론 필요조건에 들어있지 않은 치엔누나는 느린 걸음으로 수정이가 누웠던 소파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치엔누나가 소파에 앉고 난 것을 보고나서 대기실의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유치원 아이들이 선생님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가듯, 내가 앞장을 서며 걷자 , 수정이와 설리가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내 뒤를 따랐다.

"근데 이런 자유로운 복장으로 걸어가도 되나?"

"으이구, 오빠. 오빠 목에 건 STAFF라는 종이는 괜히 있나?"

"아, 미안."

수정이의 말에 멋쩍어하면서 가던 길을 걸어갔다. 오로지 공연 물품만이 가득한 창고를 지나서 복도가 곧 눈 앞에 보였다. 웅장한 무대음악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무대와 우리 셋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한 번 무대에서 직접 노래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 때는 지방 행사라서 무대의 크기가 꽤나 협소했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음향 지원도 안 되고 그래서 별로였었는데, 이건 그냥 행사가 아닌 콘서트 규모다. 무대 스테이지가 넓고, 음향을 뿜어내는 스피커 또한 최고급인 대형 콘서트. 그런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하고 있는 소녀시대는 무대 밖에서 보는 모습과는 꽤나 다른 모습이었다.

"수정아, 설리야."

"응?"

"왜?"

나는 말하면서도 현란하게 몰아치는 조명의 선명한 빛줄기 사이에서 춤을 추는 소녀시대를 보고있었다.

"쟤, 태연이 맞냐? 수연이 맞아? 미영이 맞고? 순규는? 유리는? 윤아는? 수영이는? 서현이는? 효연이는 맞아?"

"…오빠, 왜 그래 약 먹었어?"

공연에 넋이 나간 눈빛을 짓고 있는 나를 보고 수정이가 손을 내 눈 앞에서 흔들어댔다. 난 수정이의 손짓을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소녀시대 애들의 공연을 옆에서 쳐다보았다. 

"…저런 것 쯤은 우리도 할 수 있거든?"

"수정아, 것보다 오빠 정신줄 좀 잡게 해줘. 완전 넋 나간 사람 같아."

"니가 해. 난 힘 약해서…너도 알잖아."

"…말도 안 돼…어찌됬든, 오빠, 정신차려!"

설리가 내 귓전에 자신의 목소리를 가득 채워넣었다. 소녀시대의 음악을 귀에 담고 있었던 나는 갑작스럽게 설리의 목소리가 내 귀를 채우자 몸을 움찔하며 소리를 낸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

"푸훕…오빠 봐봐, 진짜 넋놓고 있었나봐."

넋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내 모습이 두 소녀에겐 꽤나 우스운 꼴이 되었었나보다. 안 그래도,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배를 까뒤집고 미친듯이 웃을 나이인데, 이 정도 가지고 웃는건 당연지사인가. 

"에프엑스는 콘서트 계획 없어?"

"우리? 아직 정식 팬클럽도 안 나왔는데, 콘서트는 무슨. 콘서트 나와도 정식 팬클럽 나오고, 정규 2집 내야 회사에서 해줄걸? 동방신기 오빠들도, 슈주 오빠들도, 샤이니 오빠들도, 소녀시대 언니들도 다 정규 2집 내고 회사에서 자연스레 해줬어. 우리는 이제 정규 1집 내는 짬인데 뭐, 아직 멀었지."

"정규 1집 내는 데 2년 걸렸는데, 정규 2집 낼 때까지는 2년 더 있어야하나?"

"몰라, 천상지희 언니들 이번 여름 때 컴백한다는 소리 있고, 내년 초에 남자 신인그룹 나온다는데 걔네들 때문에 더 늦게 나올 수도 있구."

에프엑스 두 막내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미약하게나마 끄덕거렸다. SM에서도 콘서트를 여는 데 나름대로의 고수하고 있는 패턴이 있다는 것을 수정이와 설리가 지금 하는 말을 듣고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마음같아선 에프엑스도 단독콘서트 하는 것을 도와주고 싶긴 한데, 내 뒷배경이나, 내 재력이나 다 그럴만한 스펙이 안 되서 안타까울 뿐이었다. 기사 보니까, 소녀시대 애들도 데뷔한 지 2년 좀 되고 나서 첫 콘서트 하던데.

[여러분이 호응해주시니까 저희들도 막 기분이 업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곡을 끝으로 노래를 마무리 지어야할 것 같아요. 정규 2집 리패키지 타이틀곡이에요, 다들 아시죠?]

"뭔데?"

"으이구, 오빠. 런데빌런이잖아."

"런데빌런?"

태연이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향해 다음 곡에 대해 설명을 하고는 시작 포즈를 잡고 있었다. 난 그녀들이 그러고 있을 찰나에, 수정이와 설리에게 태연이 말한 곡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고 그녀들은 혀를 끌끌차며 'Run Devil Run' 이라고 내게 대답해주었다. 런데빌런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노래 제목 같기도 하고.

'오늘 런데빌런 1위해서 고기파티 좀 열었는데, 너무 많이 사갖고 다 못먹겠는데, 같이 드실래요?'

그래. 소녀시대라는 아이들과 친해진 계기를 만들어 준 노래였다. 그녀들에게 있어서 런데빌런이라는 곡이 어떤 의미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천국과 지옥의 초문이 되어준 고맙고도 얄미운 곡이었다. 이윽고, 런데빌런이 시작함을 알리는 듯 짤막한 인트로와 함께 수연이가 가운데에서 치고 나오며 독무를 조그맣게 했다.

[똑바로 해, 넌 정말 Bad Boy. 사랑보다 호기심 뿐]

"…잠깐만요."

셋이서 나란히 무대 옆에 서서 소녀시대가 런데빌런을 부르는 것을 환하게 웃으면서 보고있는 찰나에, 나처럼 STAFF 증을 목에 건 한 청년이 청소용 카트를 운전하면서 무대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뒤에서 카트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비켜주기는 했는데, 순간 그를 향해 뒤돌아보았을 때에 그의 눈빛이 뭔가 다짐을 한 것처럼 보였다.

"…뭐야?"

"그냥 콘서트 스태프 알바하는 사람이겠지 뭐."

"오빠, 이제 줄지어서 언니들이 춤춘다?"

비켜주기는 했지만,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유가 무슨 일을 저지를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낀 나와는 달리 에프엑스의 두 막내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무대 위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환호하고 있었다. 그는 나처럼 스태프증을 달고 있던 터라, 무대 가까이 다가와도 경호원들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때, 무대 가까이에 접근한 그는 카트에서 내렸다. 그리고 무대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넨 잠깐 여기 있어, 매니저 형!"

"…어?"

"저기 무대 위로 올라가는 사람 있잖아요?"

"어, 근데?"

"저 사람, 아니 저 새끼 아무리 봐도 낌새가 수상하거든? 가서 붙잡아야 할 것 같은 데?"

그가 타고 온 카트 안에는 멀리에서도 희미하게나마 눈이 띄는 한 가지 물건이 있었다. 그건 바로 뭔가에 젖어 색이 진해진듯한 흰 손수건이었다. 멀쩡한 손수건을 저렇게 바구니같은 데에 팽개쳐 놓을 리가 없었다. 분명히 뭔가 속셈이 있을 터. 나는 최대한 빨리 매니저형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매니저형보다 더 빨리 무대를 향해 달려갔다.  

"꺄아아아악…!!"

그렇지만 이미 사건은 터져버렸다. 수상했던 그 놈이 태연이의 손목을 강제로 잡고 억지로 힘으로 끌고오듯 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근데, 이걸 어쩌지. 내가 그 놈이 유일하게 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막고 있는데. 

"야, 너한테 반말 하기는 글렀다. 근데 아무리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되겠나, 그래도 나가고 싶기는 하겠지? 그러면 말이지…나갈 수 있으면 함 시도해봐, 이 개새끼야. 아무래도 태연의 손목에 힘 풀고 잘못했다고 비는 게 네 죄값을 덜 치루는 것에 더 이로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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