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예순 한 번째 과외 - 정자매, 그 청순함에 대하여 1
"…싫어!"
"수연아, 이제 가라니까?"
"싫어!"
"싫어? 그래도 소용없어. 넌 죽기 싫어하잖아. 뒤를 봐봐."
내 말에 뒤돌아 본 그녀는 열 여섯개의 매서운 눈빛과 마주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열 여섯개의 눈과 아이컨택을 한 직후 그녀의 몸은 눈에 띌 만큼 움찔거렸다. 스스로도 생명의 위협을 느낀거지.
"…헤헤, 가서 애들이랑 열심히 노래부르고 춤추고 올게."
"그래."
천하의 정수연도 다구리에 장사없다. 만약 행사를 뛰지 않고 반항하겠다면 나머지 멤버들에게 두드려 맞겠지. 매일 운동을 꾸준히 하는 유리도 장난 아닐테고, 성량이 견과류같은 태연과 티파니, 폭풍잔소리술의 달인 서현, 춤으로 다져진 박자감 있는 펀치를 보여줄 효연, 백그라운드가 장난 아닌 써니하며, 체격 자체가 상대가 안 되는 수영이, po윤아wer 라면 아무리 강한 그녀도 그녀들의 샌드백이 되는 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울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 아침부터 나와서 소녀시대에게 기운을 돋게 하는 치어리더 역할이나 하고 있다니."
어디 그 뿐이랴, 소녀시대만 있으면 멘탈이 붕괴될 정도로 정신이 이렇지 않은데, 덤으로 에프엑스까지 같은 곳에서 행사해서 덤벼드니 진짜 다굴에 장사없다. 멘탈이 가루가 안 된게 정말 다행이지. 이제 소녀시대가 노래와 춤을 하러 갔으니, 바로 앞에 끝난 에프엑스가 대기실로 들어오기 시작하겠지.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소파에 퍼질러 누워있는 나의 귀에 또렷이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치엔누나와 설리의 목소리였다. 이윽고 닫힌 문이 스르륵 열렸고, 에프엑스 다섯 명이 넓은 대기실을 채우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수정이는 피곤한 표정으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뭐야, 왜?"
"오빠, 나 피곤해. 잠깐 소파 양보 좀 해줘."
"진짜 졸려보이는데. 그래, 비켜줄게."
그녀의 흐리멍텅한 눈은 언제라도 잘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도 졸리긴 매한가지였지만, 나보다 더 피곤해보이는 그녀를 위해서 제일 상석을 양보해주고, 난 그 옆에 있는 조그만 등받이의자에 앉았다. 소녀시대 애들이 하도 닦달하는 바람에 새벽부터 소녀시대 숙소를 갔더니, 멘탈이 조루가 되버렸다.
"오빠!"
"…하암…응?"
"피곤하면 내가 안마해줄까?"
안마해달라고 부탁도 안 하는데, 자기가 알아서 내 뒤로 의자를 옮기더니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런 설리를 뒤돌아보려다가 하얀 손이 내 어깨를 쪼물딱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진짜 안마해주네. 근데 안마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나보다. 안마가 시원찮네.
"설리야, 더 세게 해주면 안 될까?"
"히히, 그럴까?"
어깨를 짓누르는 힘이 달라졌다. 조금 더 세지는 느낌, 그리고 바로 찾아오는 어깨가 풀리는 시원한 느낌. 그래, 바로 이거야. 너무 시원해서 몸이 유체이탈해서 하늘을 훨훨 날아버릴 것 같은 느낌. 시골에 졸졸졸 흐르는 시냇가에 찾아온 도시소녀같은 설리는 해맑게 웃으며 내 어깨를 야무지게 주무르고 있었다. 이런 안마를 또 언제 받을까 싶다.
"오빠, 주먹으로 두드려줘?"
"두드리게? 그럼 어깨 위쪽 두드리지 말고, 등 쪽으로 두드려줘."
"옛썰, 인간안마기 설리의 두드리기 쇼쇼쇼!"
별로 힘이 들어가지 않은 가벼운 설리의 주먹이 내 어깨죽지 쪽을 빠르게 두드리고 있었다. 드디어 설리한테 할애한 시간만큼의 효과를 얻어내는건가. 이건 완전 다 자란 딸한테 효도 받는 느낌인데?
"근데, 왜 오빠는 공연 안 봐?"
"어차피 나중에 한 번 더 한다며. 그 때 보면 되지."
"그 때는 파리에서 하거든요?"
"뭐? 파리!?"
"아, 맞다. 오빠는 파리에 관해 안 좋은 추억이 있었지. 푸흡…"
설리가 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 중 하나를 기어코 꺼내는구나. 정말 그 때의 촉감이란, 손에 집히는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열이 받는 촉감이었지. 아오, 알렉스 왓슨 상노무 새끼. 다시 보는 날엔 반드시 족치리라.
"어? 오빠 팔이 부들부들 떨어."
"아. 그냥 설리 덕분에 그 기억이 떠올라서."
"오빠랑 나 파리에서 진짜 많이 친해진 것 같았는데."
"그래, 니 혼자 손 들어서 나 좋아한다고 거서 말했다가 내가 더 털렸지."
이번에도 설리 덕분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두 번째 추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머리가 기억 안 해도, 몸이 기억하는 공포스러웠던 그 때. 소녀시대의 진정한 힘을 알게 되었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너나 할 것없이 나를 갈궜던 그 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아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것 같다.
"어? 오빠 몸이 떨어."
"너 때문이야."
"…잉?"
"…됐어, 어찌됬든 설리가 안마해주니까 시원하기는 하네. 오빠도 안마해줄까?"
"응!"
설리가 열심히 안마해준 덕분에 어깨에 결렸던 게 풀렸다. 이번에는 설리와 내가 앉은 자리를 바꿔서 내가 설리의 어깨를 안마해주기로 했다. 나의 체구에 비해 딱히 뒤쳐지지 않는(?) 설리의 어깨에 힘을 쏟으며 안마를 했다.
"…아악! 오빠, 아파잉…"
"아프라고 주무른건데?"
"…좀 더 살살하면 안 되요오?"
"응, 안 돼. 지도 오늘 어깨 아파서 주먹으로 두드렸으면서, 오빠가 확실히 풀어줄게. 오빠만 믿어."
애교를 부려봤자다. 설리의 애교는 시도때도 없이 보고 들은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더 이상 내게 먹혀들지 않았다. 아픈건 아픈거고, 풀어줄 건 확실히 풀어줘야하는 것이였기 때문에 설리의 어깨를 힘껏 주물렀다. 그 때마다 찡그리는 설리의 표정이 내 눈엔 귀엽기만 했다. 설리도 내 말을 듣고서 애써 참는 것을 보니 기특했다.
"너는 피노키오, 너 밖에 모르는 내가 됐어. 아슬아슬 위태위태 시작되는 쇼쇼쇼~"
"엠버야, 그 노래 뭐야?"
"아, 이거 우리 신곡이에요. 아마도 오늘 티저 떴을텐데. 오빠 앨범 미리 받을래요?"
"응, 오! 앨범아트 괜찮은데?"
'f(x)'만의 느낌이 확 살아있는 앨범아트였다. 푸른 깃털이 달린 왕관같은 것을 쓰고 포즈를 잡는 수정이를 중앙에 두고, 양 옆으로 느낌있는 표정을 짓는 루나와 치엔누나 그리고 설리와 엠버까지.
"오빠, 이제 어깨 풀린 것 같아. 보답으로 내가 앨범에 싸인해줄게."
"아싸, 설리 싸인 받았다고 너 팬한테 갖다 팔아야지."
"뭐!?"
"…하하, 농담이야, 농담."
"이씨, 나만 알고 있는 오빠 비밀 여기다가 다 적을거야. 갖다 팔려면 갖다 팔아봐, 메롱."
역시 최진리, 너란 여자는 내게 한 마디도 지지 않는…쿨럭, 여튼 진짜 적으려는 듯 쉴 틈 없는 그녀의 펜놀림이 두렵기만 했다. 설리만 알고 있는 비밀이라, 강의실 이야기도 있고 우리 집 옷방 이야기도 있고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긴한데, 이런 이야기 죄다 지도 리스크 감수해야하잖아. 어차피 설리가 갖고 있는 비밀이라 해봤자, 나 죽고 너 죽고 하는 이야기들 뿐이고. 막상 설리가 그런 이야기를 폭로하면? 아, 더 심하게 까이는 건 나구나.
"으아니, 설리야. 오빠가 잘못했어, 니 싸인 있으니까 유리관 안에 소중히 모셔놔야지."
"흥, 이미 다 썼거든요? 자, 여기."
"오, 갓 뎀."
외국인 친구에게서 배운 미국식 오버하는 제스처를 잠깐 취했다가 설리가 내민 앨범을 받아들었다. 그 페이지에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To. 민식오빠, 넌 내꺼 중에 최고 ♡ 난 오빠의 베스트 귀요미 여자친구 ♥' 라고 적혀있었다.
"내꺼 중에 최고? 내가 설리의 소유물이냐?"
"당연한 거 아냐?"
"응, 당연한 거 아니야. 난 나의 것이야."
"그럼 내가 오빠가 가지고 있는 것중의 최고가 되지 뭐, 히히."
으아니, 이런 능글스러운 말을 아무런 부담없이 할 수 있다니. 설리 몰래, 설리에게 엄지를 조용히 치켜들었다. 도대체 누구한테 배운 화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잘 배웠네.
"오빠, 밥은 먹었능가요?"
"아니. 안 먹었지."
"그럼…빅엄마! 여기 도시락 두 개 줘!"
"직접 가면 되지, 뭣하러 치엔 누나 귀찮게."
설리의 부름에, 치엔누나가 소파에 앉으면서 도시락을 까먹다가 도시락 두 개를 챙긴 채 이 쪽으로 걸어오려는 발걸음을 말리곤 내가 도시락 두 개를 손에 쥔 채 다시 설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민식이도, 진리도 잘 먹어."
"응, 언니도!"
"땡큐, 누나도 잘 먹어. 루나, 엠버도. 설리야 먹자."
치엔누나의 옆자리에 앉아서 먹고 싶긴 했지만, 자리가 좁아서 그러질 못했으니, 하는 수 없이 설리와 나는 그들과는 조금 동떨어진 화장대에 도시락을 놓고 먹기로 했다.
"우와, 이거 누가 한 거야?"
"누가 했긴 내가 했지…가 아니라, 도시락업체에서 주문한거야. 우리가 가서 사 먹을 시간이 없잖아."
"하긴 그렇다. 그래도 맛있어 보이네."
"당연하지, 안 그러면 어떻게 장사를 하겠어."
설리의 핀잔에 조용히 도시락 뚜껑을 열어 나무젓가락으로 한 개씩 집어먹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탐스러워 보이는 반찬들의 비쥬얼에 몸둘 바를 모른 채 맛을 음미했다. 아무래도 보기도 좋고, 냄새도 좋고, 맛도 좋은 것으로 봐서는 도시락 메뉴들 중에서도 비싼 편에 속하는 듯 했다.
"들어오세요!"
"…응? 누구지?"
"실례합니다, 여기서 도시락 같이 먹어도 되나요오?"
정중하게 우리가 있던 대기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온 아해는 상큼하게도 지은이었다. 그녀가 순간 여기 왜 있지, 싶었지만 곧 지은이가 SM 소속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대수롭지 않게 먹던 도시락이나 계속 까먹었다.
"찌으나!"
"스녕아!"
저게 쌍으로 뭣하는 시츄레이션이야.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했나, 아주 오랫동안 못 본 사이처럼 부둥켜 안는구만.
"어, 민식 오빠도 있었네? 저기 가서 먹어야겠다. 스녕이 옆자리에 먹으려고 했는데, 스녕이 옆에 자리 난 곳이 없네."
"지은아, 그러지마. 언니가 비켜줄게, 언니가 저기가서 먹을게."
"어? 언니,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래, 치엔누나 일루 와서 먹어."
"빅엄마, 얼른 와요. 한 자리 밖에 안 남았어, 히히."
지은이의 매서운 눈초리와 분명히 마주친 것 같았지만, 애써 피했다. 만약 지은이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면 설리와 쌍으로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나의 멘탈을 붕괴시키는 멘트를 두루두루 던졌을 게 뻔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덜 피곤한 멘트 치고 오히려 남을 위해 행동하는 치엔누나랑 같이 밥을 먹는 게 훨씬 더 나은 선택이었으니까. 치엔누나도 자리를 비켜준 게 내심 뿌듯한 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남은 화장대 자리를 꿰찼다.
"하이~"
"하이."
"민식아, 이거 먹어. 너 이거 좋아하잖아."
치엔누나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두부부침 한 개를 젓가락으로 집어 내가 먹는 밥 위에다 올려놓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 포풍무한감동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어론 땡큐, 중국어는 셰셰, 일본어로는 아리가또라고 하지요."
"…푸흡, 그게 뭐야, 오빠?"
"아, 이거 요즘 개그콘서트 새로 나온 코너에서 하는 말인데, 입에 착착 달라붙어서."
설리와 치엔누나는 순발력있게 센스(?)를 발휘한 나의 말에 웃음꽃이 피었다. 나는 그렇게 그녀들을 웃겨놓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무표정을 지으며 젓가락으로 밥과 반찬을 집어 입 안에 넣으며 맛보았다.
흐음, 이츠 베리 딜리셔스. 스멜도 베리 굳쟙.
"…흐아아암, 뭐야 이 맛있는 냄새는?"
화목한 분위기 속에 수정이가 소파에서 폭풍취침을 했다가 기지개를 피며 잠에서 깼다. 그리고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맛있는 도시락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 때, 난 본능적으로 남은 도시락의 재고를 확인했고, 불행하게도 남은 도시락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뭐야, 내 도시락 없네?"
생각해보니, 내가 공연하는 것도 아닌데 SM 관계자가 내 도시락까지 준비할 센스는 당연히 없었다. 혹시 그렇다면 지금 내가 먹고 있는 것이 수정이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