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6화 (267/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쉰 아홉 번째 과외 - 낚시왕 2

손으로 눈을 비비적거리고 그 장면을 봐도, 총알이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순간이 되더라도 규리누나와 은정누나가 서로 입술을 맞대는 저 장면은 죽어서도 주마등에 스칠 신의 후보에 들정도로 내게 있어서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은정누나라니. 은정누나는 동성친구끼리 커플놀이를 하긴 해도 저 정도 진도까지는 안 나가는 데 말이다. 

"어, 민식이도 있었네?"

여자와 뽀뽀를 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말끔히 지워버린 그녀는 생긋 웃으면서 내게 손인사를 했다. 나도 그만 벙쪄있어야지. 더 이상 멍 때리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괜히 스태프들이 오해하기 쉽상이니까. 그래도 충격적이긴 했다. 

"응? 은정이랑도 알아…? 아, 맞다. 민식이, 효민이 사촌이었지."

참, 이렇게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만들어낸 가족관계가 온갖 곤란한 상황들을 다 모면할 수 있게 해주는구나. 효민이네  가족이 알기 전까지는 괜찮은 방법이긴 한데, 효민이네 가족 분들이 알게 되면 뒤탈을 어떻게 할지 은근히 똥줄 타는 기분이었다.

"요즘은 왜 효민이 보러 안 와?"

"나? 대학 생활하고 라디오 하면 놀 시간이 없는데?"

"에이, 거짓말."

선의의 거짓말을 치면, 좋게 눈치까고 넘어가주지. 은정누나는 전혀 가볍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뭘 어쩌겠는가. 노래는 끝났고, 광고를 하고 있으니 우리 셋은 어서 진행 테이블에 앉아 헤드셋을 쓴 채로 마이크에 입을 대고 말을 해야하는데.

+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다치지말고 다음 스케쥴 가."

늘 그랬듯이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스태프들에게 꼬박꼬박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라디오 부스를 빠져나갔다. 엘레베이터 앞, 오늘은 집에 들어가서 발 씻고 디비 잘까. 잠도 조금밖에 못 자서 눈꺼풀이 어느때보다도 묵직하게 느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로 엘레베이터의 버튼을 눌러 승강기가 내가 서 있는 층으로 올라오기를 어느 때보다 간절히 바랬다. 오토바이 키를 쥐고 있는 오른손은 벌써부터 시동을 거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은정아-."

"…응?"

조용히 엘레베이터 층을 표시해주는 숫자판을 보고 있는 나와 다르게 오순도순 사이좋게 이야기를 하며 걸어오고 있는 규리누나와 은정누나는 어느새 내 뒤에 서 있었다. 닫힌 문을 통해 희미하게 두 누나가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비춰졌다. 

"우리 데이트할 때 민식이도 데려갈까?"

"콜!"

나랑 규리누나가 아니라, 규리누나와 은정누나가 데이트(?) 하는 틈에 내가 끼어뜬다니. 학창시절에 그런 기분 느껴봤는데, 나름 소외되는 느낌? 근데, 은정누나는 엄연히 누구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인데, 언제 규리누나가 어떤 방법으로 은정누나를 꼬셔서 나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만들고 있는건지. 거기다가 저기에 끼어드는 것에 대한 내 생각은 일절 반영이 안 되있었다. 

"민식아, 바이크 가져왔어?"

"응. 근데 누나들 다 타면 위험할텐데."

"그럼, 이 근처에서 놀다 가자."

예전같았으면 은정누나가 내 등을 밀거나, 팔짱을 끼고 엘레베이터에 탔을 텐데, 오늘은 규리누나가 하는 팔짱을 같이 낀 채로 날 완전히 소외시키고 둘이서만 끼리끼리 잘 놀고 있었다. 그렇게 두 여자들을 따라간 곳은 방송국 근처에 있는 돼지고기집이었다. 고기가 익는 소리가, 고기가 타는 냄새가 내 몸에 자연스레 배어갔다. 규리누나와 은정누나는 나란히 일렬로 같이 앉고, 나만 건너편에서 동떨어져 앉아있었다.

"여기, 자기 수저!"

"고마워, 자기!"

둘이서 '우리 결혼했어요'를 찍으면 참 좋겠다고 헛생각을 하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은정누나의 매너는 규리누나에게서 끝이났다. 설마 했더니 진짜 그러다니. 여러모로 이상한 감정이 든 채로 내 수저를 스스로 챙겨 꺼냈다.

"자기는 뭐 먹을래?"

"나는 자기 먹는 거 같이 먹을래!"

"그럼…이모, 여기 삼겹살 5인분 정도 주세요!"

은정누나한테 있어서 이제 내 위치는 별 상관없는 위치가 되버린걸까. 아주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구나. 안 친하게 굴려고 해도 나한테는 적어도 짧게라도 '뭐 먹을래?' 정도는 물어봐야 기분이 덜 상할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규리누나와 은정누나는 날 완전히 신경쓰지않고 둘이서 서로의 핸드폰을 보고 떠들면서 희희낙낙 잘만 웃고 있었다. 저쪽은 환하고 해맑은 컬러티비를 보는 느낌이고, 내 쪽은 너무 칙칙한 흑백티비의 모습을 보는 느낌이었다. 

"어이구, 연예인들이 여기는 무슨 일이래."

"히히, 배고파서 점심 먹으러 왔죠."

"내가 서비스로 사이다 한 병이라도 줄까?"

"어머, 어머니가 그래주시면 저희는 감사하죠."

여태까지 그리 많이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물밀듯이 쏟아지려 한다. 이게 무슨 감정이지. 두 누나의 오순도순한 모습을 보고서 느껴지는 지금의 이질적인 기분은 뭐라고 형용해야 할까. 대놓고 '싫다' 라는 극단적인 감정은 절대로 아닌 듯 했다. 은정누나를 보고 이렇게 가슴이 콩닥거리는 것을 보면, 머릿속에서 개미떼들이 줄지어 나를 괴롭히는 듯한 엿같은 느낌이었다. 저쪽은 너무 화목해보이고, 나는 너무 외로워보여서 느껴지는 짜증인가?

"여기 서비스 좋다. 규리야, 나중에 둘이서 또 오자."

"히히, 그러자."

죽어도 나랑도 같이 와보자는 소리는 안 하는 구만. 마음같아선 소주 한 병 시켜서 입 안에 천천히 털어놓고 마시고 싶었지만, 바이크를 끌고 온 지라, 운전 자체가 위험한 것을 더 위험한 요소까지 더해서 탈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규리야, 이거 봐봐…푸흡…"

"뭐가…푸하핫!"

나랑은 동떨어진 두 누나의 모습을 보면서, 고기가 나올 때 까지 물잔에 물을 따라서 그것만 벌써 세 잔째 마시고 있었다. 완벽하게 쩌리가 될 바엔 혼자 집에서 라면을 먹는 게 나을 뻔 했다. 그냥 따라가지 말걸. 이라는 감정이 먼저 들어 지독하게 후회가 느껴졌다.

"주문하신 삼겹살 나왔으니까 맛있게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어머니."

"여기 서비스로 주기로 한 사이다 한 병."

"감사합니다-."

두 여자는 해맑게 웃으면서 식당 아줌마가 건네준 사이다와 삼겹살이 담긴 접시를 받아들었다. 삼겹살을 불판에 올려놓자 맛있는 소리가 내 청각을 자극했다. 사이다가 컵에 담겨지는 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내 컵에 담겨지는 사이다는 없었다. 다만 식탁에 덩그러니 올려진 남은 사이다병이 있었을 뿐. 혼자 따라먹으라는건가, 그러지 뭐. 

"크으…"

소주였으면 더 좋으련만. 꿩 대신 닭이라고, 소주 대신 사이다로 내 배고픈 위장을 달랬다. 나의 감정을 알기라도 한 듯 사이다의 따끔한 감촉이 식도를 타고 그대로 흘러 내려갔다. 남은 사이다가 있나, 사이다병을 흔들어보았지만 있을리 만무했다. 그래서 삼겹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들어 집어 먹으려고 하니, 짜증나게 삼겹살도 아직 익어있지 않았다. 갑자기 짜증이 났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새빨간 김치나 한 젓가락 입에 집어넣었다. 매콤한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국을 한 두 숟가락 떠마셔서 입 안에 맴도는 매콤한 맛을 없앴다. 그러기를 한 두어 번쯤 반복했을까, 불판에는 삼겹살이 노릇노릇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밥이 먹고 싶어졌다.

"누나, 나 밥 시켜도 되지?"

"…히히, 이거 봐봐. 진짜 웃겨!"

"……아. 아줌마!"

"네?"

"밥 한 공기만 주세요."

왕따들의 느낌이 이런걸까. 여태까지 왕따에 대해 전혀 공감을 하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아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진짜 그들이 느끼는 것만큼 공감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외롭게 시킨 밥공기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노릇노릇하게 익은 삼겹살을 밥 위에 올리고 젓가락으로 그 밥을 퍼먹었다. 기분 나쁘게 따뜻한 맛이 느껴졌다.

"쌈 싸줄까?"

"……?"

"응!"

아, 나한테 한 소리가 아니었구나. 나란 놈이 뭐라고, 괜히 기대가졌네. 혼자서 쌈 만들어서 그냥 내 입 안에다가 우걱우걱 집어넣었다. 은정누나가 만들어 준 쌈은 그대로 규리누나의 입으로 들어가고, 규리누나가 만든 쌈은 은정누나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왜 저렇게 저런게 부럽게 느껴지지. 그러는 동안 난 밥 한 공기를 다 비워내고 있었다. 맨날 맛있게만 잘 먹었던 삼겹살인데 오늘은 진짜 맛없다.

"나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나 이거 새로 산 핸드폰 고리인데 괜찮지?"

"응, 괜찮다."

씨발, 진짜 대놓고 무시하네.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불편한 자리 있어봤자 뭐하냐. 그냥 이렇게 혼자 먹는 느낌 들바에는 때려치고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먹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이지. 

"저 먹은 거 따로 계산할게요. 밥 한 공기랑 삼겹살 2인분 정도 먹었으니까 그것만 계산해주세요."

"…아, 네."

씁쓸한 표정으로 종업원이 다시 내게 건네주는 체크카드를 받아들고 오토바이가 주차되어있는 방송국으로 다시 걸어갔다. 쌀쌀한 봄바람은 어디 가고, 이제 슬슬 늦봄 냄새나는 바람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입고 있던 옷을 더 얇게 걸쳐도 괜찮을 듯한 날씨가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런 잡생각을 하면서 갑작스레 발걸음을 멈춘 곳은 소담스러운 포장마차 앞이었다.

"꼬치어묵 하나 주세요."

포장마차 아줌마에게 건네받은 꼬치어묵에 간장을 발라 조금씩 한 입을 먹었다. 아까 고깃집에서는 정말 불편하게 먹었던터라, 포만감도 그리 느껴지지 않았나보다. 간장의 조금 짠 맛이 어묵과 섞여 먹을만한 맛을 내고 있었다. 그래, 불편한 감정이 풀리니까 이제 맛이 조금은 느껴지네. 그렇게 꼬치어묵 하나를 다 먹고, 한 개를 더 집어서 아까처럼 똑같이 간장을 발라 한 입씩 베어먹었다.

"떡볶이도 한 접시 주세요. 어묵 좀 많이 넣어주세요."

"네."

이윽고, 맛있게 빨간 떡볶이 한 접시가 내 앞으로 놓여졌다. 나는 이쑤시개를 꺼내 떡을 한 입에 먹고 아그작아그작 맛있게 씹었다. 적당히 매콤했다. 미리 퍼놓은 종이컵에 담긴 오뎅국물로 매콤한 맛을 없애고, 이번에는 어묵을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음, 맛있어. 

"어머니이~ 떡볶이 한 접시하고, 튀김 이거하고 저거 주세요."

"네, 근데 연예인 분들이 여긴 웬일이래?"

떡볶이를 먹다가 이게 뭔 소린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은정누나와 규리누나가 내 옆에 서있었다. 이 누나들은 언제 또 온거야. 규리누나는 뻔뻔하게 나한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하, 무시해서 미안해. 라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구만? 떡볶이도 어차피 다 먹어가니, 이것만 먹고 가야겠다.

"쩝쩝, 잘 먹었습니다."

"네, 안녕히가세요-."

마지막 떡 하나까지 다 입에 집어넣고 우적우적 씹은 뒤 아래로 넘겼다. 그리고 시원한 오뎅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아주머니한테 음식값을 계산하고 재빨리 포장마차에서 벗어났다. 왠지 내 걸음이 그녀들에게서 빨리 벗어나려고 서두르는 발걸음 같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고깃집에서 느꼈던 엿같은 감정이 다시 한 번 생각났다. 진짜 짜증나네. 

"…야, 어딜 그렇게 서둘러서 가!"

"집에 갈 거야."

대꾸하기가 무섭게 양 팔에 묵직한 촉감이 느껴졌다. 힘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나름대로 이런 엿같은 감정을 느끼면서도 끌려가고 싶은 스스로의 본능인걸까. 그녀들에게 이끌려 난 어디론가 또 끌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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