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쉰 여덟 번째 과외 - 낚시왕 1
오늘은 2011년 4월 13일 수요일, 신동형이 해외활동과 앨범 준비 때문에 일정이 맞을 수가 없다고 해서, 라디오 디제이에서 하차한 지 어언 3일 째다. 사실, 시크릿타임의 마지막 날이 정확히 신동형이 심심타파를 그만둔다고 한 날과 정확했다. 규리누나도 슬슬 라디오를 그만 둬야할 정도로 스케쥴이 빠듯하다고 하니, 규리누나가 하차한다는 이야기가 심심타파 내부에서 솔솔 돌고 있었다. 그 덕분에, 처음에는 단순히 신동의 대타 김민식, 에서 심심타파를 구원해줄 구원투수로 슬슬 프로그램 내에서의 입지가 다져지는 것에 대해 내심 뿌듯했다.
"오, 구원투수 민식이 왔네. 오늘 게스트 봤지?"
"네, 은정누나. 티아라 멤버 또 오네. 슬프게."
"오늘도 멱살 잡히는 거 아냐?"
"에이, 그럴리가요. 소연누나면 저랑 자주 으르릉해서 그럴 진 몰라도, 은정누나는 워낙 사람이 착해서…"
작가누나에게 건네받은 대본을 한 장씩 넘기면서 피디누나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여태까지의 코너를 생각해보면, 오늘은 수요일이니 그 코너를 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고정 패널이 슈프림팀이었지, 아마. 여자 게스트는 매주 바뀌니, 오늘 은정누나라는 것을 보면 대충 무슨 코너에 참여할 지 답이 나왔다.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슬쩍 보았다. 오전 10시, 어제와 썼던 부스와는 다른 라디오 부스, 방송국에서 나간 지 여덟 시간만에 다시 방송국으로 출근도장을 찍게 되다니.
"근데,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아침에 녹음하는 걸 보면 분명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아, 규리가 오늘 밤에 회사에서 단체로 준비하는 게 있다고 미리 하자네. 열 두시에 못 올 것 같다고."
"…아?"
데습피가 오늘 밤에 뭘 준비하다고? 내 믿을만한 소식통은 그런 이야기는 일제히 없었는 데, 항상 '우리 오늘 뭐 한다~' 라는 식으로 스케쥴을 말해주던 하라도 딱히 단체 스케쥴은 없다고 오늘 아침에 우리 집에 놀러와서 아침을 얻어먹으며 말해줬다.
"왜?"
"아니에요. 응?"
보통 작가누나가 건네주는 대본에는 진행용 대사와 기타 등등과 그리고 간단한 코너소개가 있었다. 근데, 이럴수가. 내가 알던 코너랑 오늘 하는 코너가 다르다? '디제이들의 인맥발산용 코너, 친한친구!' 라는 약간 오글거리는 타이틀을 가지는 코너라니. 전에는 코너가 연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내용이었는데, 오늘은 디제이들의 인맥들과 함께 하는 근황 이야기로 꾸민다니. 규리누나의 풍성한 연예계 인맥과 비루한 나의 연예계 인맥을 비교하려는 기획의도가 드러나보였다. 뭐, 그 기획의도도 내 관점으로 보는 것이지만.
"오늘 은정누나 오는 게 규리누나의 인맥으로?"
"응, 다음주 수요일은 민식이 네 차례야. 어떤 꽃미남 인맥이 올지 내심 기대가 되네, 호호."
저 웃음에는 분명 '기대하겠다.' 라는 식의 부담가는 뜻이 담겨있는 것처럼 보였다. 용화나 권이나 요즘 걔네들 스케쥴도 바빠서 같이 놀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소녀시대와 에프엑스…아니지, 걔네들 덕분에 알게된 샤이니 애들을 불러야겠다. 괜히 여자 인맥을 불렀다가 기자들의 표적이 되라고? 그러기는 죽어도 싫다.
"안녕-."
항상 잡생각을 하고 있으면, 누가 왔는 지 바로 눈치를 채지 못할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였다. 규리누나의 인사가 끝나서야 그녀의 인기척이 느껴져서 그제서야 뒤돌아보게 되는 식이 반복되었다.
"어, 왔어?"
"응, 왔다."
"오늘은 일찍 오네, 맨날 아슬아슬하게 컷하더니."
"어? 민식이, 너 많이 컸다? 누나한테 깝칠 줄 알고, 조만간 큰 기념으로 상 하나 줘야겠다."
오늘따라 그녀에게서 뿜어져나오는 고유의 아우라에서 여왕의 기운이 느껴졌다. 퀸쏘 정도는 아니지만, 그에 조금은 대항할 수 있는 정도랄까. 어쨌든 위험하다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
"뭔 상?"
"흠, 무슨 상일까…?"
"뭔데."
"아, 생각났다."
"뭔데?"
"타박상."
규리누나는 '타박상' 이라는 단어를 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팔을 휘둘러 주먹으로 내 팔을 때렸고, 다리를 움직여 다리를 때렸다. 방금 뼈에 금이 가는 소리가 얼핏 들렸는데, 왜 이렇게 다리가 멀쩡하지. 얼른 기린 새끼처럼 다리에 힘이 없어져서 바닥으로 나자빠져야 규리누나가 미안하다며 나한테 눈물을 흘리며 사과할텐데 말이다. 이런다고 해서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것을 좋아하는 미친 놈은 아니다.
"아, 그럴거면 차라리 상 주지마."
"응. 그럴려고."
방금 나 규리누나한테 조련당한건가. 여자로 산전수전 겪은 게 이번에 몇 번째인데, 아직도 조련이나 당하고 있다니. 나란 남자는 아무래도 평생 조련이나 당할 불쌍한 처지인가보다.
"그 대신 너 라디오 끝나고 스케쥴 없지?"
"어, 나야 없지. 근데 누난 있잖아, 회사에서 단체로 스케쥴 있다며."
"아니, 사실 없어."
"자정에도?"
"응. 자정에도 없어."
도대체 회사 스케쥴도 아니고, 라디오를 하는 시간을 통째로 바꾸어놓을 중요한 일이 뭐가 있길래, 이리 아침 일찍부터 나오라고 하는건지.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쪽잠을 잤는데. 아침에 핫식스를 아가리에 털어놓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차디찬 라디오 부스 바닥에 누워서 입 돌아갈 걱정만 했겠지.
"…그럼 뭐하길래, 이렇게 아침에 나오라고 한 건데."
"…히히, 그건 여기서 말하기 좀 그렇고, 1부 음악 틀어놓을 때 이야기 해줄게."
"별 얘기 아닐텐데, 괜히 궁금하게 만들어서 똥줄 타게 만드네."
"…별 이야기는 아닐걸?"
별 이야기가 아니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야. 규리누나가 아니더라도, 많은 아해들이 이런 페이크를 많이 쳐서 그런 방식에 당하는 것(?)도 이제 능숙하다고.
+
"10cm의 죽겠네, 듣고 올게요-."
규리누나가 걸어놓은 궁금증의 덫에 사로잡혀서 매 방송마다 1부가 되면 한 번은 터트리던 드립을 오늘은 성공을 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실시간으로 올라온 반응도 '왜 오늘은 못 웃겨요, 무슨 일 있나?' 라는 식이 많았다. 젠장, 그런 글 올리지 말란 말이야. 그러면 더 자신감 떨어져서 개드립 나올 수도 있다고.
"아, 누나 도대체 그게 뭔데?"
"그게 뭐냐고?"
"응, 그만 뜸 들이고 이제 말해봐."
"너랑 데이트."
아마도 헤드셋을 목에 걸지 않고, 손으로 움켜잡고 있었다면 열의 아홉은 헤드셋을 테이블로 떨어트리며 멍을 때렸을 게 분명했다. 규리누나도 무섭긴 무서워, 어떻게 저런 말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에 비하면 난 참 감정이 솔직한 사람인가봐. 라며 내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으음?"
"다른 애도 있는데 상관 없지?"
"어…음…난 데이트 하겠다고 말한 적 없는데…"
괜히 뜸들이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피디누나와 작가누나나, 옆에 있는 규리누나나, 익숙하지 않은 것은 몇 번 와본 임시 부스가 전부인데, 내가 맡고 있는 공기의 냄새는 왜 이렇게 낯설게만 느껴지는 걸까. 흐물흐물 대응하다가 결국 이 꼴이 나버렸다. 거기다가, 데이트 하자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더 부르겠다니, 이게 무슨 데이트야. 이 누나, 혹시 데이트의 기본도 모르는 그런 순진무구녀인걸까.
"히히, 상관없어."
"…!?"
애초에 내가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이 공사장 한복판의 불도저처럼 밀어버릴 계획이었다니, 전혀 치밀한 것 같지 않으면서도 내 허점을 명확히 파고드는 한 마디에 늘 그렇듯 규리누나를 쳐다보며 벙쪄버렸다.
"네, 10cm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좋은 것 같아요. 막간을 이용해 민식씨가 사연 하나 읽어주세요-."
"네."
지금은 녹음 중이긴 하지만, 엄연히 방송에 나갈 프로그램이었으므로 금새 정신을 잡고, 모니터에 뜬 사연을 읽어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제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는 박준부 학생입니다. 한 달 전에 있었던 저희 학교 영어선생님에 관한 재밌는 일화를 말하려고 합니다. 저희 영어선생님의 수업은 굉장히 열정적이고 재밌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에겐 치명적 오점이 하나 있었죠. 그건 바로 'ㄹ' 발음이 안 되는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저희를 불러주실 때도 '애들아~' 라고 부르시지 않고 '애드다~'라고 부르십니다. 간혹 'ㄹ'자가 들어간 학생의 이름을 부를 때도, '최예슬'이란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으면 '최예슬'이라 못 부르시고, '최예슷'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래서 가끔씩 학생들의 놀림거리가 되곤 하시죠. 그런데 이 선생님의 발음이 전교생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가 한 달 전에 일어났습니다. 요즘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몇 반, 몇 반 따로따로 맡고 계셔서 그 선생님의 담당 학급이 아니면 'ㄹ'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웃음도 그 몇 반만 할 수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이었습니다. 영어 본문을 같이 읽어나가고 있었는데 문제의 단어 'Product'가 나타났습니다. 그 단어는 발음하면 '프로덕트'였기 때문에 'ㄹ' 발음을 못하는 선생님을 아는 저희들은 벌써부터 웃음기를 띄고 있었죠. 그 때 선생님의 입에서 발음이 터져나왔는데, 그 순간 저희들은 웃음의 도가니탕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애드다~ 이 단어 중요하니까 자 되워두뎜~ 자 따다해봐~ 푸더덕!!…다시 한 번? 푸더덕!!' 이 사건을 계기로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지면서 영어선생님의 발음의 비밀을 전교생을 비롯하여 동료 선생님 분들도 알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별명도 생겨났답니다, 이름하여 '푸더덕' 선생님. 비록 'ㄹ' 발음은 새시지만, 수업은 굉장히 열정적이고 재미있고 점수 올려주시기로 유명한 선생님이랍니다~ 사랑해요 선생님~"
나의 뛰어난 연기력에 모두들 배꼽을 잡고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약 1년간 소녀들에게 당하고 살면서,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연기력이 빛을 발하는 좋은 예.
"박준부 학생, 재밌는 사연 보여주셔서 고맙구요. 좋은 대학 가길 바랄게요, 노래 하나 띄워드리고 2부에서 게스트랑 같이 만나요. 걸스데이의 반짝반짝."
"아, 진짜, 민식이 너 연기력 괜찮다. 우리카라 카메오로 나올래?"
"됐어. 어? 은정누나 왔다.""은정이? 진짜? 어, 은정아, 안녕!!"
나의 말에 규리누나는 테이블에서 허리를 일으키더니 바깥에 있는 은정누나에게 손을 요란스럽게 흔들며 격한 환영을 보였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라디오부스 안으로 들어오는 은정누나를 향해 뛰어갔다. 은정누나도 규리누나를 보더니 서로 얼싸안으며 격하게 반기고 있었다.
"둘이 뭔 일 났나."
규리누나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나는 '사단이라도 난거야!?' 라는 심정을 애써 감추며 멍하게 둘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라디오부스의 문 앞에서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참인지, 마치 그 곳은 카메라의 시야가 닿지 않은 사각지대처럼
고개를 내밀어서 볼 수 없는 유리창 밖에서는 그런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자기 너무 보고 싶었쪄엉, 쪽쪽."
"귤마누라, 나도 보고 싶었져어~ 쪽쪽."
방금, 두 누나의 입술이 서로 맞닿은 거 맞지? 그렇지? 그냥 소리만 낸게 아니라, 진짜 입술 부비댄 거 맞지? 뽀뽀한 거 맞지? 내 앞에서 펼쳐지는 두 뇨자의 알흠다운 입맞춤에 나는 순간 패닉 상태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