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쉰 다섯 번째 과외 - 너, 한 눈 팔지마 上
[삑.]
단조로운 기계음, 나직하게 900이라는 숫자가 뜬다. 남은 잔액은 350원. 방송국 앞 매점에서 교통카드를 충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역시 시내버스는 마을버스보다 비싸. 남은 자리에 걸터앉아서 늘 그랬듯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손때 묻은 스마트폰, 이게 나온 지 얼마나 되었더라. 같은 잡생각을 하다가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음악이나 들을까."
무릎 위에 뉘였던 가방에서 주섬주섬 하얀 이어폰을 꺼냈다. 남들이 닥터 드레라거나 브랜드제품의 이어폰이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들지만, 난 그들을 뒤로 하고 기본적으로 지원해주는 익숙한 흰색 줄의 이어폰을 꺼내 귀에 꼽았다. 그리고 이어폰 바로 밑에 있는 조그만 버튼을 눌러 아무렇게나 나오는 노래를 들었다. 잔잔한 경음악이었다. 눈을 감으며 물 흐르듯 지나가는 선율을 듣고 있을 때, 조그맣게 진동이 울렸다. 나는 눈을 뜨면서 내게 온 메세지를 확인했다.
[민식아, 오늘 나 일본 일정 때매 라디오 못 해, 대신 일일 디제이 올 테니깐 잘 대해줘 알았지? 갔다와서 맛난거 줄게 쪽♥ -규리누나]
일일 디제이따위는 안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뽀뽀를 표현하는 의성어따위도 중요하지 않았다. '갔다와서 맛난 거 줄게' 라는 이 말이 중요했다. 하수같이 일본의 유명한 음식인 타코야끼라거나 일본식 라멘이나 스시 혹은 사시미 등의 생각은 안 했다. 여태껏 규리누나가 내게 한 행동의 성격들을 종합해봤을 때, 저 맛난 거는…으아, 시발. 생각을 말자. 생각 안 하면 편해!
'잔잔한 음악, 잔잔한 음악, 잔잔한 음악.'
거센 파도처럼 요동치는 불안감을 안정시킬 수 있는 건 아까처럼 잔잔한 음악을 듣는 다거나, 서정적인 발라드를 듣는 것 빼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어보였다. 창가로 보이는 현란한 간판들은 내가 아는 동네의 모습들이 아니었기에, 그리 익숙하지는 않은 모습들이었다.
"에이, 씨발년아!"
'…뭐야?'
잔잔한 노래를 들으면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아드레날린을 증폭시키는 듯한 개소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어폰을 뺀 채로 소리가 나는 근원지로 고개를 돌리니, 웬 아저씨가 아가씨 앞에 서서 면전에 대고 개념없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야, 이 시발년아. 경로우대 몰라? 경로우대?"
버스 안에서 시끄럽게 욕설을 토하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아하니, 술도 안 취한 것 같은데 왜 저러는 지 모르겠다. 는 생각으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경로우대 안 보이고, 노약자석인거 안 보여? 내가 집에 너만한 딸이 있어, 시발년아, 알아? 이 썩을 년아."
넷상에서만 보던 막말의 현장이 바로 내게 닥치다니, 군중심리라기보다는 아직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쉽사리 나섰다가는 본전도 못 치고 저 아저씨한테 밀려 욕이나 먹을 판이였다. 사람들은 뭐하고 있나, 말리기는 커녕 핸드폰으로 그 상황을 녹화하기 바쁘다니.
"어디서 배워먹지도 못한 년이, 어른이 딱 하고 서 있는데 안 비키고 그냥 앉아있어? 너네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든? 자리 안 비켜? 이 씨발년이, 계속 자리 안 비키네? 안 비켜? 안 비켜? 확, 이 씨발년을 조져버릴까."
이제는 욕설로도 모자라 폭행을 할 심상인가, 욕을 가만히 먹고 있는 저 아가씨는 꽤나 연약해보이는 모습이었다. 덩치 큰 아저씨가 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막말하는 무개념 아저씨도 욕할 생각을 못하고 서서 갔을텐데. 만만해서 덤볐구나.
"너네들은 뭘 찍어, 시발새끼들이."
본드라도 빨았나. 가만히 있는 시민들에겐 왜 개념없이 욕을 해대는 지.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승객들이 저 아저씨보다 약해보이는 20대 초중반의 여자가 대다수거나, 할머니라거나, 여중고생이 주를 이루었기에 아저씨한테 덤비는 승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대신 카메라로 현장을 녹취하는 고발정신 하나는 투철하다. 곧, SNS를 통해서 쭉쭉 퍼지겠네.
"저기요…노약자석이잖아요…제가 몸이 좀 불편해서 서서 갈 수 없어요…그러니까 이해 좀 해주세요…"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당당하지 못하면, 저런 개념없는 아저씨들이 더 만만하게 보고 온갖 쌍욕을 다 할텐데. 그녀의 약해보이는 모습에 동정심을 느끼며 그녀의 다리를 보았다. 신발의 높낮이가 달랐다.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다리가 불편한 듯 보였다. 그런 아가씨에게 경우없이 막말을 하는 아저씨라니. 정말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시발놈이네.
"야 이 시발년아, 보자보자하니까."
"…흐흑, 진짜에요…."
아저씨의 얼굴에 검게 피는 미소를 보니, 막말이 끝나지 않으려는 게 짐작이 되었다. 거기다가 아가씨는 아저씨의 막말에 어쩔 줄을 모르고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먹거렸다. 말을 하긴 해도, 눈 앞에 똥이 있는 지, 폭탄이 있는 지, 사람이 있는 지, 뵈는 게 없을 저 아저씨한테는 그저 가소롭고 힘없는 저항에 불과했을 것이다.
"몸이 불편한 건 니 사정이고, 내 알 바 아니야, 시발년아. 경로우대? 경로우대라고 몇 번 말해 후레잡년아. 이 년아, 내가 너보다 밥을 몇 그릇이나 더 많이 먹었는데, 그거는 알기나 해? 이 개년이, 너보단 만 그릇, 그 이상은 더 먹었어, 시발년아. 알겠으면 어른이 일어나라고 할 때 일어나는거야, 개년아, 일어나, 시발, 개년아! 어른 공경 못하는 너같은 못된 년들은 놀부 심보를 가지고 있어, 시발. 퉤, 개년아. 니 년은 아기씨도 다 말려 죽여야 돼, 시발년아."
옆에서 듣고 있는 제 3자도 화가 끝까지 치밀어오를 저런 막말을 아가씨는 어찌할 바 모른 채, 아저씨한테는 별 볼일 없을 반응만 보이고 있었다. 시민들은 하나같이 저 아가씨를 구해주려고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고발정신만 불같이 타오르는 데에만 치중하고 있었다. 얼핏, 머릿 속에서 과거에 봤던 한 게시글이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미국 어느 주 아파트 앞에서 젊은 여성이 괴한에 의해 살해를 당하고 있을 때, 그 여성은 'HELP ME!' 를 하며 도움을 호소했지만, 군중심리에 얽혀 시민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나 아니어도, 누구 하나 쯤은…도와주겠지.' 같은 생각으로 통일되는 바람에 그 여자는 결국 괴한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이 모습도, 내가 보았던 상황보다는 더 약하지만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나설 생각을 않고, 오로지 자신이 피를 보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고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나도 처음엔 그런 군중심리에 얽혔었지만, 몸은 어느새 그 상황이 벌어지는 곳으로 가까이 가고 있었고, 사람들의 시선도 내게 모아졌다. 버스가 정차할 때 쯤에 나는 욕을 먹고 있는 아가씨에게 걸어갔다.
"저기, 아가씨?"
"…흐흑, 네?"
"괜히 더러운 꼴 보지 마시고, 제가 자리 비켜드릴테니까 저 자리에 앉으세요, 얼른."
나는 다리가 불편한 아가씨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면서 내가 앉았던 그 자리로 천천히 옮겨주었다. 그리고 버스는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새로운 국면에 조용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이런 시선. 춘내나게 부담스럽네.
"뭐야?"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요, 더러워서 피하지. 그래서 자리 옮겨드린건데, 뭐 하실 말 있습니까?"
"너 뭐하는 새끼야?"
불씨는 아가씨에서 나로 옮긴 듯 했다. 덤빌테면, 덤벼보라지. 나도 온갖 역경은 다 겪으면서 자란 사람이니까. 특히, 군대에서 겪은 역경은 이루 말할 수 없지.
"댁보다 어른."
"…뭐?"
어차피 기본 예의도 지키지 않는 아저씨에게 내가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 할 정당한 이유는 없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하지만 난 부드럽고 날카로운 말로 아저씨의 걸레같이 너저분한 양심을 헤집어 놓을 생각이다.
"뭐? 새파랗게 젊어보이는 놈이, 나보다 어른?"
"당연히 댁보다 개념으로 옹골찬 어른이지. 나이 실컷 먹고 밥그릇 몇 만 개 더 많이 먹었다고 어른이야? 어른의 정의가 뭔데, 성숙한 사람 아닌가? 근데 아저씨가 하는 짓 봐. 도덕 의식? 시민 의식? 어른 공경? 경로 우대? 당신이 그럴 자격을 갖춰야 베풀어주든 말든 하지. 안 그래? 딱 봐도 다리 불편한 아가씨한테 자리 비키라면서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해대는데, 자신이 어른임을 따져? 아저씨가 생각해도 웃기지 않아? 안 쪽팔리냐고, 어른이 어른 대접 받으려면 그만한 행동을 보여. 내가 보기에는 있잖아? 아저씨가 하는 행동, 5살짜리 꼬마가 다리 아프다고 엄마한테 징징대는 꼴보다 더 못해보여. 왜, 내 말이 틀려? 아니면 아저씨 말대로 새파랗게 젊은 놈이 아저씨한테 옳은 말 해서?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서 더 화나지?"
아저씨는 내 말을 듣고 주먹에 힘을 준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딱히 할 말은 없고, 또 다시 욕이나 하겠지.
"이 씨발 놈이!"
"때리면 경찰서 가자, 가중처벌, 말도 있어보이고 좋잖아?"
아저씨의 주먹이 내 얼굴 가까이 갔다가, 나의 말을 듣고 힘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젊은 놈한테 반박을 하지 못한 채로 그대로 당한 게 더 화가 난 건 지, 애꿏은 의자를 발로 힘껏 차대며 이번엔 버스 기사 아저씨를 향해 소리치듯 말했다.
"에이, 씨발! 기사는 뭐해? 씨발…더러워서…얼른 문 안 열어!?"
사람들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이런 아저씨는 감방 가서 콩밥 좀 먹고 와야되는데. 아저씨 가족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참 불쌍하디 불쌍하다.
"닥치고 정류장에 설 때 내려라."
버스기사의 패기.avi 로 조만간 버스에서 막말하는 아저씨.avi랑 같이 포털 인기검색어와 뉴스 사회면을 휘황찬란하게 장식할 듯 싶었다. 그 아저씨는 버스기사 아저씨의 말에 할 말이 없는 듯 입맛만 다시며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다음 정류장에 멈춰섰을 때, 그 아저씨는 쥐구멍에 숨듯이 재빠르게 사라졌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학생 아니었으면 저 울고 있었을거에요."
"아니에요, 제가 자발적으로 도와준거니까 그러실 필요없어요. 앞으로 그런 일 닥치면 주변 사람들한테 도움을 요청하세요. 다음에도 저런 사람들이 시비를 안 걸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아가씨는 진심으로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순간 마음이 짠해졌다. 도대체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되었길래, 마땅히 보호받아야할 사회적 약자를 오히려 나락으로 나뒹구게 만드는 것인지. 아무래도 방금 버스 정류장을 떠난 아저씨는 다시 삼청교육대 같은 게 부활했으면 바로 직행해서 몸이 좀 고생해야, 정신을 조금이라도 차릴텐데. 그렇게 속으로 우리나라인 대한민국에 대해 잠깐 생각하다가, 진동에 다시 한 번 그 고뇌를 깨버렸다.
[오랜만에 보겠다 우리 자깅~♥ - 소연누나]
도지사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면서 소방서 직원에게 관등성명 대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지는 이 의미심장한 메세지는 뭐야. 지금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후에 탈이 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가득 들었다. 아, 아까 아저씨를 입으로 털 때보다 더 많은 아드레날린이 생성되서 혈류를 따라 신명나게 흐르는 느낌이다.
[뭔 소리야?]
[좀 있으면 알게 될꼬얌 >ㅅ< - 소연누나]
오, 가련한 소년이여. 조금 있으면 다가올 궁극의 존재의 강림을 조심하길 바란다. 중간보스 깨니까 조용히 무서운 끝판왕이 기다리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