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8화 (259/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오십 한 번째 과외 - 너의 웃음 고마워 完

효성이라니. 동명의 이름을 가진 대기업 하나가 떠오르긴 하지만, 그 기업을 꾸리는 회장의 딸이 내 앞에 있는 효성양 때문에 기업명을 지었다면 이건 확실히 개드립. 더군다나, 효성그룹의 회장 딸이 전효성이란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흠, 본격적으로 코너로 가기 전에 색다르게 시크릿 분들께 질문 해볼게요. 제 옆에 있는 민식씨한테 궁금한 거 있는 분?"

"저요!"

규리누나의 방송경력이 돋보이는 센스있는 진행이었다. 보통의 진행방식이라면 진행자가 게스트한테 질문하는 게 일례적이었다. 하지만 규리누나는 역발상을 하는 기특한 진행을 선보였고, 본의 아니게 다음 진행멘트를 준비 중이었던 나는 규리누나의 선방에 말문이 막혔다. 더군다나, 질문할 사람없이 겸연쩍은 웃음만 잠시 유발될 줄 알았지만 궁금한 게 참 많은 선화의 리액션 때문에 이야기가 내 쪽으로 흘러갈 것처럼 보였다.

"사실, 민식 오빠와는 저랑 K본부 청춘불패에서 잠깐 방송 같이 한 적이 있어서 그 때부터 친분을 쌓았거든요. 그래서 저희 멤버들 중에 오빠 아는 사람이 저 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효성 언니랑 오빠랑 오늘 라디오부스에서 처음 봤는데 서로 아는 눈치였거든요. 저는 이 상황이 어떻게 됬는 지가 무지 궁금해요."

"아, 그거라면 민식 디제이가 논리정연하게 설명해줄거에요.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말해주시죠, 민식 디제이."

네 여자(전효성 제외)의 고개가 일제히 내 쪽으로 돌아갔다. 효성양은 나보고 편하게 그 상황에 대해 말하라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나는 나를 향한 시선집중에 약간은 긴장이 되었다. 아, 차라리 효성양이 말하면 말 안 더듬고 잘 말할텐데.

"오늘이 벚꽃축제하는 마지막 주라고 하길래 한 번 가봤는데, 우연히 앞에 계시는 효성양이랑 만나게 됬네요."

"아, 그렇구나. 효성씨는 누구랑 가셨어요?"

내가 효성양을 만나려고 간 게 아니라, 유리 때문에 갔던 것이였기 때문에 규리누나의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감탄하며 효성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기다렸다. 분명히 아직 밝히지 않은 남자친구라거나, 그런 류의 사람들과 갔겠지.

"아, 저요? 저는 사촌 오빠랑 갔어요. 사촌 오빠가 어제 말년휴가 나오는 날이여서…군대를 좀 늦게 갔거든요, 사촌 오빠가."

"이유가 확실한데요?"

"근데, 왜 저를 보세요?"

규리누나는 효성양의 이유를 듣고는 진심이 느껴진다는 식으로 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난 순간 당황하며,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규리누나에게 말하긴 했지만, 그 다음으로 규리누나가 할 말이 무엇일 지는 대충 간파하고 있었다. 규리누나가 물어보기 전에 어서 회피책을 생각해야하는데.

"효성씨만 물어보면 쓰나, 민식씨는 누구랑 갔어요?"

"네?"

젠장, 실수했다. 이런 질문에 다시 물어볼 것을 요하다니. 이러면 내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이 한 눈에 드러나게 되는 일이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어진 물. 눈치 빠른 사람만 눈치 챘으면 좋겠다는 게 내 바람이었다.

"…왜 이렇게 당황해요? 누구랑 갔냐고 물어봤는데."

"아, 잘 못 들었어요. 저는 대학교…"

"설마, 뻔히 하는 거짓말인 친구들이랑 같이 갔어요 하는 건 아니겠죠?"

오 마이 갓, 빠져나올 핑계가 규리누나의 리드미컬한 공격에 세상에 내보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막혔다. 하는 수 없이 멋쩍은 웃음만 지으며 다른 회피할 방도를 재빨리 잔머리를 굴리며 찾아내는 것 뿐.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오늘따라 잔머리가 더럽게 안 돌아간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웃음은 이 정도로 끊어주고, 자꾸 핑계를 대려고 하니까 뭔가 '…음…엄…' 같은 추임새가 자꾸만 입에서 나왔다. 여전히 여자들의 시선집중에 몸둘 바를 모르고 있을 무렵, 효성양에게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효성양은 나를 도와주려는 건 지 안 들리게 입을 뻥긋거렸고, 그것을 캐치한 나는 재빠르게 규리누나를 향해서 말했다.

"에이, 규리씨 왜 이러세요."

"…예? 뭘요?"

"안 말하려고 했는데, 규리씨 왜 그러세요. 같이 갔으면서 혼자 발뺌하시네."

상황은 전세역전. 규리누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은 어디로 숨겼는 지, 아까 지었던 내 표정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다. 

"…으엥?"

"어머어머, 둘이?"

거기다가 예능을 좀 아는 시크릿 멤버들은 일제히 내 드립에 호응을 해주고 있었고, 특히 내가 전세역전을 하는 데 어시스트를 해준 효성양은 더 크게 내 드립에 리액션을 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효성양이 점점 호감으로 느껴졌다.

"하하, 장난은 여기까지구요. 사실은 규리씨랑 간 게 아니고 동아리 친구들이랑 간 게 맞아요. 그럼 노래 한 곡 듣고 갈게요 . 때 씨스타19가 부르네요, Ma boy."

헤드셋을 잠깐 벗고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옆에서 장난을 쳤던 규리누나에게 '왜 그랬냐'는 둥 잡담을 하다가 우연하게 효성양과 눈이 마주쳤다. 정말 드립의 은인인 효성양에게 나는 진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마워요'라고 입을 뻥긋거렸다. 그러자 효성양은 붕어처럼 입모양을 내는 대신 선홍빛 잇몸이 드러나는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어? 라디오 대본 어디갔지?"

"아, 3부 대본 여기 있어요. 자요."

"아, 감사합니다."

노래가 1분 남짓 남았을 무렵, 나는 3부 라디오 대본을 찾았지만 내 테이블엔 없었다. 사연을 좀 읽어줘야 하는 3부인데 말이다. 다행히도 효성양에게 여분이 있었는 지, 효성양은 흔쾌히 자신의 대본을 내게 빌려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효성양에게 대본을 받으려고 손을 뻗다가 우연찮게 효성양의 몸매를 무의식적으로 쳐다보았다. 으아아아아, 저게 아이돌의 몸매라니. 다 지어진 탁상 위에 가슴 두 덩이가 얹혀져 있다니. 라며 정신줄을 놓았을 뻔 했을 때 팔에서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

규리누나가 따가운 눈빛을 내게 째리며 팔따갑게 꼬집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내 손으로 직접 머리를 탁 치고는 자리에 앉았다. 괜히 혼자서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규리누나는 자리에 앉은 내게 다가오더니 귓속말로 몇 마디를 했다.

"…보이는 라디오잖아, 청취자한테 어떻게 보일려고. 그리고, 한 눈 팔지마. 그러다 다친다?"

"…라져."

한 번만 더 음흉한 곁눈질 했다간, 규리누나에게 맞아서 뼈마저 남아있지 않을 수 있겠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그리고 규리누나가 오늘 공연행사를 뛰고 온 터라, 아직 신고온 신발은 운동화가 아닌 뾰족한 굽이 박혀있는 구두였다. 자칫 잘못해서 저 굽에 찍혔다간 최소 타박상에 최고 골절상까지 갈 수 있겠다는 소름 끼치는 생각이 들었다.

+

"아쉽게도 3부가 끝나가네요. 오늘 어떠셨어요."

"오랜만에 규리씨랑 방송할 수 있어서 좋았구요, 오늘 대타? 맞나? 쨌든, 대타로 오신 민식 디제이가 재밌는 멘트를 많이 날리셔서 유쾌했던 것 같아요."

"없는 말은 안 해주셔도 되요…히히,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선화양은 어땠어요."

"정말 오빠 드립은 죽지 않은 것 같아요, 다음에 또 같이 방송했으면 좋겠고, 규리언니는 정말 진행 잘 하시는 것 같아요, 짱!"

"시크릿 여러분의 소감, 잘 들어보았구요. 내일도 또 만나서 재밌는 이야기해요. 민식 디제이도?"

"응?"

"…응?"

"몰랐어요? 시크릿 분들은 이번주동안 2,3부 고정게스트고 민식 디제이는 일주일 동안 대타로 디제이하시잖아요?"

나는 알고 있었기에, 그냥 짧게 리액션 한 것이였지만 시크릿은 처음 듣는 소리, 라는 게 확연히 드러나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시크릿 몰래 스케쥴을 짜둔 시크릿 매니저와 정말 계획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쩌는 피디 누나의 잔망스러운 계략이라고 볼 수 있겠다. 태연하게 연기하며 말하는 규리누나도 정말 소름 끼치고.

"그럼 3부는 여기서 마치구요, 4부는 다시 귤 디제이와 싴 디제이만 남아서 오늘 심심타파 마무리 할게요. 노래가 끝나고 광고한 뒤에 다시 만나요. 노래 듣고 갈게요, 9930님이 신청해주셨네요. 에픽하이의 따라해."

보았나, 이런 것이 진행이다. (는 똥 싸는 소리.)

+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오늘도 수고했어."

4부도 모두 마무리 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라디오 부스 밖을 빠져나왔다. 근데, 시크릿이 아직 안 가고 그대로 부스 밖에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까지 안 가시고 왜?"

"아, 아직 매니저 오빠가 방송국에 못 도착했대요. 오늘 인파들이 너무 많아서 오는 데 시간 걸린다나, 그래서 어차피 듣는 것도 재밌으니까 여기서 멤버들이랑 같이 듣고 있었어요. 진짜 센스 넘치시던데요?"

얼굴은 보름달같이 환한 외모를 갖고 있는 효성양이 말은 참 조곤조곤하고 조리있게 잘 하는 듯 보였다. 이렇게 사람 기분 좋게 하는 칭찬을 정말 입 안에 와이파이 터진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다니. 경복할 따름이다.

"감사합니다."

"…아, 괜찮아요. 어차피 아까 경우없이 그런 거 죄송했는데…."

효성양이 경우없이 한 행동이 무엇일까, 잠시 생각하다가 벚꽃놀이 갔을 때의 입구에서 생겼던 그 일이 떠올랐다. 그걸 두고 하는 소리인 듯 했다. 

"아니에요, 그보다 아까 위기 모면하게 해준 거 고마웠어요."

"…헤헤, 그랬다니 참 다행이네요. 아 참! 한 가지 물어볼 거 있어요."

이번엔 내가 그녀에게 칭찬을 해주니, 기분이 좋은 듯 방실방실 웃음을 지었다. 아, 효성양은 칭찬에 약한 여자라는 것을 한 번에 알아차렸다. 

"네?"

"아까 누구랑 간 거였어요? 옷차림 봐선 친구들이랑 간 거 같진 않은데…여자랑 갔죠?"

핵심을 찔렸다. 하지만 남의 사생활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에 대해선 예의가 아닌 듯 싶었지만, 아까 위끼를 모면해준 게 있던 터라 뭐라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의 미소로 일관했다. 그 때, 에디슨의 번뜩이는 전구처럼 생각 하나가 나의 뇌리를 기분좋게 스치고 지나갔다.

"효성씨야말로, 가족이 맞아요?"

"네, 맞아요. 민식씨는요?"

그녀의 얼굴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고로, 나의 공격은 완벽하게 실패했다.

"…아…음…저…그게…음…"

"여자랑 가셨구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히힛, 그럼 내일 봐요-."

눈 뜬 채로 그녀에게 당해버렸다. 정말 방송을 하면 할 수록 재치가 늘어난다는 데 효성양을 보니 그 루머가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직 라디오 2주 대타한 것 가지고는 드립 게이지가 부족한건가. 하, 열심히 수련해야지.

+

"오늘은 봐줄게."

"응? 뭐가?"

"몰랐으니깐…"

"…??"

"근데 다음에는 안 된다?"

효성양의 재치에 당해버려, 엘레베이터를 타기 전까지도 계속 벙쪄있었던 나는 규리누나의 말이 무엇인 지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채 그대로 터덜터덜 힘없이 문을 열고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 너의 웃음 고마워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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