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6화 (257/333)

* 소녀시대와 9 대 1 과외하기 이백 마흔 아홉 번째 과외 - 너의 웃음 고마워 2

"……."

"……."

그녀와 나는 영화처럼 멍해져있었다. 다행히도 이미지를 깨트리는 시도의 입 벌리는 행동은 없었다. 그녀나, 나나 서로에게 한 행동이 부끄러운 감정으로 연결되게 만들었다. 그녀의 새하얀 얼굴 위로 봉숭아 한 송이가 피었다. 봉숭아꽃이 예쁘게 핀 얼굴 위로 신 맛이 날 것 같은 오렌지색의 머릿결이 속삭이듯 불어오는 바람에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눈은 작았지만 웃으면 저 작은 눈이 양쪽으로 아름답게 휘어져 초승달처럼 보일 것 같았다. 

"…죄송해요. 지인인 줄 알고…"

"저두요…"

나와 그녀는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오랜만에 이런 머쓱한 감정을 느껴보았다. '취미가 뭐에요?' 라는 일상적인 질문을 하기에도, 처음 보는 사람이고 그다지 분위기가 맞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더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람이 머쓱하면 조금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짓기 마련이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미소를 지었다. 산골마을 시골소녀같은 예쁘장하고 친근한 미소를 말이다. 그녀의 건강한 잇몸이 드러나 하얗게 빛났다.

"근데요…"

"네?"

"저 누군지 모르세요?"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알 턱이 있나. 당연히 '모른다'라고 대답하기 위해서 말 대신 고개를 양 옆으로 저었다. 그녀는 내 행동을 보고 '그렇구나…'라고 조그맣게 혼잣말을 했다. 살갑게 웃긴 했지만 소심한 성격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짤막한 대화가 또 끝나고, 우리는 멋쩍은 모습을 다시 보였다. 

"…누구신데요?"

"하, 아니에요!"

그녀는 벌써 저만치 안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키가 작아서 그런 지, 도망치는 것도 앙증맞았다. 다시 볼 일은 없겠지, 하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유리가 벌써 공원 안에 있다던데 어째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일까. 분명히 입구 근처에 있다고 말한 것 같았는 데 말이다. 입구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유리를 찾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어, 유리다."

조금 안 쪽으로 걸었더니, 참으로 익숙한 뒷통수가 눈에 띄었다. 저 뒷통수는 유리라는 것에 내 전 재산을 걸지. 물론 혼자서 내기 거는 것이니까 잃는 건 없지만. 유리의 근처에 다다르니까 낯이 익숙치 않은 남정네들이 무리를 이루고 유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멀리서는 방송 촬영 겸 공원에 오자고 했냐고 생각했지만, 둘러싼 남정네들이 모두 교복을 줄이고 있었고, 유리의 표정도 곤란한 것으로 봐서는 치근덕대는 남자의 무리라고 생각했다. 백마를 탄 왕자님처럼 유리에게 가서, 그녀를 빼오는 것도 남정네들에게 한 방 먹일 좋은 방법인 듯 싶었다. 가까이를 가니까 기분 나쁘게 치근덕거리는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저기 같이 벚꽃 놀이 갑시다?"

"…아, 자꾸 왜 이러세요? 저 기다리는 사람 있다니깐요!"

그녀는 약간 짜증이 섞인 듯한 말투로 무리들을 대하고 있었다. 남정네들은 유리가 계속 반항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데리고 가겠다는 듯이 음흉한 눈빛을 짓고 있었다.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었다. 어서 유리를 끌고 나오는 수 밖에.

"아,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니깐…"

"진짜, 이 손 안 치워요!?"

유리의 언성이 높아지면 높아질 수록 나의 걸음은 더 빨라졌다. 팔을 뻗으면 유리에게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다다랐을 때, 나는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남정네들을 일제히 당황하게 만들었다.

"야, 깝. 어디 있었어?"

"…어깨에 손 안 치ㅇ…어, 자기!"

유리는 내 손길이 남정네들의 음흉한 손길인 지 알고, 밀어내며 뿌리치려고 했으나 내가 뿌리는 특유의 향수향이 있었고 더군다나 그녀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확인했었기에, 밀치려던 팔을 다시 굽혀 나를 껴안았다. 나와의 애정을 표시하는 행동이자, 유리 곁에서 치근덕댔던 남정네들에게 '저리 가'라는 비언어적 행동이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누구야?"

"몰라, 나 자기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는데, 계속 치근덕거렸어."

"…그래?"

나는 고등학교 때 나대던 놈을 오라지게 팼을 때의 눈빛을 잠시 남학생들에게 쏘아붙였다. 남학생들도 최소한의 양심이 있어서 임자있는 사람에게 치근덕거렸다는 것에 대해 움찔한 듯,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다가 빠른 걸음으로 우리와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눈에 힘 주고 있는 것을 풀며, 다시 유리와 대화를 했다.

"…풉."

"왜 웃어?"

이제 유리는 어엿한 숙녀의 미모를 갖고 있는데, 아직도 고등학생이 치근덕거리다니. 신기한 마음에서 헛웃음이 새어져 나왔다. 그것을 들은 유리는 궁금함을 못 참고 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냥, 네가 고삐리한테도 통하나 싶어서…으어억…"

깝율한테 괜히 깝치다가 뼈와 뼈의 결절인 관절을 상큼하게 맞았다. 다리가 아려오는 게, 저절로 허리가 숙여졌다. 다행히 고꾸라지진 않았지만, 정말 잊을 수 없는 고통이다. 역시 소녀시대는 재밌는 말솜씨와 화려한 춤, 노래. 그리고 가공할만한 데미지의 무술을 갖고 있는 예술종합기능인이 확실했다. 유리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역시나 약간은 발끈한 듯 싶었다. 유리가 제대로 성질 부리면 나같은 놈은 그냥 나가 떨어지겠는데? 

"우씨, 나 유리거든? 소녀시대 권유리?"

"누가 뭐래…너 잘났다."

그래, 성장판이 있는 관절만 골라서 족족 발로 차는 성장판킬러 권유리. 라고 툴툴거리며 유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한 눈에 보였다. 하늘하늘한 화이트 가디건에 스카이 플라워 쉬폰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단정한 푸른색 단화에 옅은 청색 계통의 밀짚모자를 썼다. 나름대로 소녀시대 패셔니스타라고 깔맞춤한 게 정말 잘 어울렸다. 누가 보면, 서현이보다 더 청순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손에는 뭘 바리바리 싸들고 왔는 지, 진짜 영화같은 소풍에서나 볼 법한 도시락바구니가 들려있었다. 머리는 처음 봤을 때 처럼 변함없이 긴 생머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평소였으면 무턱대고 섹시미만 강조했을 그녀였는데, 의외였다. 

"우와…권율, 좀 청순한데?"

"…왜…이…이상해?"

유리는 자신이 이렇게 꾸민 것에 대해 조금 부끄러웠는 지 모르겠다. 무척이나 수줍어하며 자신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새침하게 넘기는 유리의 모습은 얼핏 처음 봤을 때의 그녀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첫사랑같은 두근거림이 멈추지를 않았다.

"아니, 너무 이뻐서…이뻐서 토할 것 같아…"

"그게 뭐야!"

"…아악!"

깝치다가 안 맞을 매를 한 대 더 맞는 나의 센스. 굳이 이모티콘으로 표현한다면 ' -_-v ' 정도?

"어쨌든 이쁘다니 다행이다. 신경쓰느라 좀 늦게 나오자고 했는데."

"그런거였어? 넌 안 꾸며도 이쁘잖아."

"…하여간 말로는 여자들 잘 구슬려요. 이런 식으로 다른 그룹도 구슬렸지?"

아, 그거 기피해야할 질문 같은데. 애정남에선 이런 거 안 정해주나? 하긴, 정해주면 미친 놈이지. 유리가 저렇게 다른 여자애들을 질투하긴 해도 자기랑 있어주면 고마워하는 참 착한 여자애였다. 특히, 저번 엠티갔을 때 서연지가 유리를 밀쳐서 유리를 곤경에 빠뜨렸을 때, 그 때 한 번 구해줬는데 그 날 이후로 참 내게 잘해준 유리였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내 몸을 능욕시키는 데 힘 썼는데, 요즘은 몸보단 마음으로 열심히 사랑하고 있는 애들 중 하나랄까. 우리는 서로 웃으면서 아름다운 벚꽃이 흩날리는 곳으로 걸어갔다.

"와, 벚꽃 날리는 것 봐. 눈 내리는 것 같아…"

"진짜 이쁘다."

유리의 말대로 바람에 흔들리는 벚꽃은 마른 하늘에 눈이 우수수 내리는 것처럼 하늘을 아름답게 꾸며냈다. 갑자기 불어오는 센 바람에 사람들은 옷깃을 올렸다가, 눈 앞에 펼쳐진 꽃잎의 만발에 모두들 입을 벌린 채 감탄하기 바빴다. 유리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그렇지만 내가 한 말은 벚꽃을 보고 한 말이 아니라, 벚꽃을 보고 있던 유리를 보면서 한 말이었다. 우리는 사람이 드물지만 꽃이 지는 것을 볼 수 있는 푸른 잔디밭 위에 돗자리를 깔았다. 입구까지 거리가 있긴 있었지만, 우리 둘의 데이트 취향은 사람 없는 곳에서 둘만의 대화를 하는 것이 좋았기에 나와 그녀는 여기에 자리를 깔고 앉은게 만족스러웠다. 유리가 자신이 바리바리 가지고 온 도시락 바구니를 꺼냈다. 

"우와…삼단 도시락?"

"힛, 내가 했지롱. 맨 아래는 맛있는 볶음밥. 중간은 김밥이랑, 주먹밥이랑, 계란말이. 맨 윗층은 후식이야. 차가워야하는 후식이 밥 때문에 따뜻해지면 좀 그렇잖아?"

"감동인데?"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온 수저통에서 수저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아니, 이 수저세트는 내가 그녀들의 소환 때문에 계속 놀러오니깐 그녀들이 센스있게 사다놓은 내 수저가 아니던가. 수저가 여성스러운게 흠이긴 하지만. 그녀가 자신있게 펼쳐보이는 삼단도시락은 먹음직스러워보였다. 그렇지만, 유리의 요리실력이 소녀시대에서 눈물을 담당할 정도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살짝은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도, 한 눈에 봐도 정성이 가득 들어있는 도시락. 밥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다 먹을거다.

"먹어봐, 아니다. 내가 먹여줄까?"

"…아니, 내가 집어 먹을게…웁…"

내가 집은 김밥이 입술에 닿기 전에, 그녀가 집은 계란말이가 내 입술 안으로 들어갔다. 계란말이의 비쥬얼은 그럭저럭 볼 만 했지만, 속내용이 궁금했다. 소금간을 까먹고 싱겁게 했으려나? 아님 소금간을 했는데 너무 많이 해서 짜려나? 온갖 걱정을 다 했지만 입 안으로 들어간 계란말이는 먹을만했다. 그녀의 기준에서 먹을만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 기준에서 먹을만 한 것이었다. 고로 맛있다는 뜻이었다. 

"…어때?"

"맛있다."

"뭐라고?"

"맛있다고, 이 이쁜 기집애야. 일루 와봐."

"…히힛."

유리는 자신의 요리실력을 스스로 어느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는 지 내가 먹는 내내 불안한 표정을 보였다. 유리가 아니더라도, 요리실력이 형편없는 다른 소녀들도 내가 먹었을 때 얼핏 이렇게 심사받는 듯한 긴장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였다. 감히 유리 주제에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내게 먹이다니. 너무 고마워서 안아주고 싶었다. 정성의 맛이 가미되어있어서일까, 해맑게 미소짓는 유리를 팔을 길게 뻗어 안아주다가 그녀의 손가락을 보았다. 반창고가 그녀의 예쁜 손가락에 감겨져있었다. 아마도 요리를 하기 위해 칼질을 하다가 베인 것 같았다. 진짜, 감동의 감동이다, 권유리.

"다쳤어?"

"…아, 아니. 손톱이 들려서…힛, 괜찮아…걱정 하지마, 자…먹어어…아…"

나는 일부러 놀란 척을 하며 유리의 다친 손가락을 쳐다보며 말했다. 유리는 잠시 내가 손을 잡자, 잡은 그 두 손을 보며 말을 잇지 못하더니 잡고 있던 손을 뒤로 빼며 괜찮다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진짜 행동 하나하나가 맘에 안 드는 구석이 없이 참 좋네. 그렇다고 나도 유리만 주는 걸 받아먹을 순 없었기에, 나도 젓가락으로 하나하나 집어주며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유리야."

"응?"

"이번엔 이렇게 먹어볼래?"

"어떻게?"

"이렇게…즈(자) 므그바(먹어봐)."

계란말이 하나를 내 입에 물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유리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유리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내가 입술이 닿은 반대 부분을 한 입 물었다. 어차피 서슴없는 사이라서 입술이 닿든 말든 그저 좋았다. 유리와 나의 알콩달콩한 장난은 끝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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